#29화
[새로운 정보가 갱신되었습니다.]
한쪽 시야에 떠오른 글귀에 주호가 흘깃 시선을 보내자 천우희의 상태창에 변화가 생겼다.
[상태창]
이름: 천우희
별호: 주작
직업: 사신문 주작단주
나이: 스물여덟
소속: 사신문
무공: 주작신공
경지: 절정(四/十)
잠재력: -
호감도: 中上
‘스물여덟이라고?’
여러 가지 정보가 새로이 갱신되었지만, 가장 놀라운 점은 그것이었다.
외모만 본다면 자신과 동년배, 아니 더 젊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짧게 한숨을 뱉은 주호는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사신문이니 주작이니 하는 것들은 분명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야심한 밤에 복면까지 쓴 채로 월담하고 있는지였다.
“나는 이곳의 교관으로 일하고 있다. 그런 만큼 네 행동을 묵인하기는 어렵군.”
“무슨 목적으로 침입한 것이냐고?”
“그래.”
어떤 대답이냐에 따라 처우가 달라질 것이라 시선으로 경고하니 천우희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사신문은 강호의 수호를 업으로 하는 조직이다. 내가 움직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 당신이 아무리 청룡의 진전을 이었다곤 하나 이 이상 말해주는 건 무리야.”
그러면서 손을 들어 천천히 검을 밀어내려 했지만, 주호는 다시금 검을 치켜세웠다.
그 단호한 태도에 그녀는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선택을 할 처지가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꽉 막힌 남자네.”
“뚝심 있다는 소리는 자주 듣지.”
한 치의 밀림 없는 공방에 천우희의 눈동자에 망설임이 서렸다.
지금껏 이야기한 것들만으로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비사였지만, 아무리 청룡신공을 익혔다 할지라도 이 이상 정보를 누설하는 것은 곤란했다.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면 참 좋았겠으나, 아쉽게도 목에 닿은 검에서 느껴지는 기세엔 주저함이 없었다.
‘여차하면.’
상대 역시 그러하겠지만, 천우희는 아직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주작의 불꽃은 두 번 타오른다. 적염(赤炎)이 아니라 백염(白炎)을 피워 올린다면 아무리 청룡의 진전을 이었다고 할지라도 감당할 수 없을 터.
꽈아악.
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간 고민하는 듯했으나, 그녀는 이내 기세를 거두었다.
“…….”
주호 역시 천우희의 기색을 가늠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헛짓을 할 모습이 보인다면 목은 아니더라도 급소를 베어 무력화시킬 작정이었다.
“…좋아, 말해줄게. 그전에 이것부터 치워주지 않겠어?”
“알고 있겠지만, 허튼짓했다간 재미가 없을 것이다.”
“재미없는 건 당신 성격이네. 알았으니까 그만해.”
그녀의 눈동자에 깃든 기색에 주호는 천천히 검을 내렸다.
적어도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했고, 설사 말을 바꾸어 이쪽을 덮쳐오더라도 재차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전승은 진짠가 보네.’
천우희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청룡의 진전을 잇는 자는 그 심(心) 가운데에 올바름이 깃든다는 전승이 있었다.
만약 그가 허튼 마음을 먹었다면 방금 그 상황의 유리함으로 자신에게 불합리한 일을 강요했을 터.
더욱이, 몇백 년 동안 공석이었던 청룡의 계승자가 드디어 나타났다.
불완전한 형태로 삐걱거리던 사신문이 다시 하나로 규합될 기회가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당대의 청룡과 척을 지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
주호가 검을 내리자 천우희는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담력이 강한 무인이라곤 하나 목에 검이 닿아 있던 것은 그리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으니.
“혹시 사흉수라고 알아?”
“이름 정도는.”
그녀의 질문에 주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흉수란 사방신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재액과 불행을 몰고 다니는 네 마리의 흉물스러운 괴수를 뜻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냐는 그의 시선에 천우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세히는 모르나 보네. 우리가 중원에 자리 잡아 물밑에서 이곳을 수호하는 것처럼 세외에 자리 잡아 군림하는 이들이 있지.”
“…그들이 사흉수라?”
주호로서는 상당히 의아한 이야기였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긴 하지만, 세외의 소식 역시 간간이 전해 듣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그 안에서 사흉수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 역시 우리처럼 물밑에서 세외를 움직이고 있어. 본 문에서 내려온 기록에 따르면 몇 번이나 중원 침공을 계획했다지. 하지만 단 한 번도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앞으로 나선 적이 없었다.”
어떨 때는 혈교의 분신으로, 또 어떨 때는 포달랍 궁의 이름으로.
수많은 군세가 일어나 중원을 침략해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래서 그들의 조사를 하고 있었다는 소린가?”
“그래. 근래 중원 곳곳에서 사흉수의 흔적이 발견되었어. 나도 이쪽에서 정보를 수집하던 중에 그 끄나풀을 잡았고, 그중에 빙백검 설우진의 이름이 거론되었지.”
“…관주님이 그 사흉수라 불리는 것들과 관련이 있다고?”
“당연한 반응이야. 그의 명성은 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것이니.”
확실하지 않은 정보이기에 직접 나서서 확인하려 했다는 것이라며 그녀는 설명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주호는 가라앉은 눈으로 천우희를 바라보았다.
일단 사신문을 비롯한 여타 이야기들은 상태창에 표시된 이상 대부분 사실일 것이리라.
그가 보았던 설우진의 상태창엔 그러한 이야기는 분명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강호의 일은 직접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다.
세상 득도할 것 같이 덕이 깊던 고승이 사실은 젊은 처녀의 정혈을 빨아먹는 마두이거나, 도둑으로 지목당해 돌을 맞아 죽은 청년이 실은 산속에서 노모를 모시고 단둘이 살아가던 효심 깊은 아들일 수도 있었다.
‘어리진 않네.’
입을 닫은 채 잠시 생각에 잠긴 주호의 모습을 본 천우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학관의 소속인 이상 자신의 상사가 의심을 받는다면 보통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기 마련이다.
하지만 주호는 섣부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그 어떤 것도 판단을 내릴 순 없군. 사신문에 대한 것도, 관주님에 대한 것도 모두.”
“물론이야. 만약 당신이 내 이야기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속으로 머저리라 비웃을 생각이었어.”
“…….”
직설적인 화법에 주호는 일순간 헛웃음이 나왔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작정이지?”
“당신이 더 막아서지 않는다면 나는 조사를 계속하고 싶은데.”
그는 잠시 대답을 고민했다.
이대로 천우희를 보내기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적지 않다. 사실 속에 숨어있는 거짓을 파악하기가 제일 어려운 법.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말을 지어낸 것이라면, 낭패를 보는 것은 이쪽일 수도 있었다.
“나도 동행하지.”
그렇기에 주호는 그녀와 함께 가는 것을 택했다.
“나쁘지 않네. 그러면 길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
천우희 역시 썩 괜찮은 제안이었다.
그렇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할 찰나, 깜빡했다는 듯 고개를 들며 말했다.
“참, 통성명은 해야지. 천우희다. 사신문에서 주작을 맡고 있어.”
“주호.”
그 짤막한 대답으로 그들 사이의 대화는 끝났다.
그것이 청룡과 주작의 첫 만남이었다.
***
다음날 새벽.
담우양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상에서 일어났다.
입관생들을 환영하는 연회가 끝나고 교관들끼리 술을 얼마나 퍼마셨는지 온몸에 찌든 주향에 토악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후우…….”
이대론 움직이지도 못할 것 같았기에 그는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가볍게 내공을 운기 했다.
두어 번쯤 속기로 일주천을 반복했을까, 어느 정도 주기를 배출해낸 담우양은 새벽 수련을 위해 자리를 털고 밖으로 나왔다.
“자네, 일어났는가?”
그러곤 바로 옆방으로 다가가 주호를 부르며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안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없는 것을 보니 벌써 일어나 수련을 하러 간 듯싶었다.
“바쁜 친구군.”
연회에서 있었던 소란이 끝난 직후, 남사일에게 불려간 주호는 끝끝내 연회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싶어 남사일에게 찾아가 물었지만, 벌써 오래전에 이야기를 끝내고 헤어졌다는 답만 돌아오지 않았는가.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행적은 묘연하기 짝이 없었다.
‘피곤해서 돌아간 것이라면 귀띔이라도 해주었을 텐데. 그리 정이 없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았으니.’
필시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리라.
“흡!”
그가 연무장에 도착하니 벌써 몇 명의 인원이 힘찬 기합을 토해내며 수련을 하고 있었다.
“자네!”
담우양은 그 한쪽에서 천천히 검을 휘두르고 있던 주호를 발견하곤 발걸음을 옮겼다.
“아, 담형.”
“이 친구야. 대체 어젯밤에 어딜 갔다 온 겐가.”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그래도 말인가. 말 한마디라도 언질을 줬으면 어디가 덧나는가.”
담우양은 사뭇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주호는 뺨을 긁으며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것이, 괴한을 봐서 말입니다.”
“…괴한?”
그는 적당히 각색한 이야기를 담우양에게 들려주었다.
남사일과의 이야기를 끝마치고 돌아올 경에 월담하는 중인 괴한을 발견했다.
번을 서는 무인에게 알리려 했으나 심상치 않은 몸놀림에 뒤를 쫓았고, 아쉽게 놓치고 말았다.
그 후에 다른 이들과 협력해 학관 내부를 수색했지만, 아무런 흔적을 발견할 수 없어 경계 수준을 높이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됐다.
일부 거짓이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들이었다.
주호는 그 이후 천우희를 따라 관주의 관사를 조사했고, 별다른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해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시간대의 행적을 입증하기 위해 경계를 서는 무인에게 괴한의 존재를 알렸다.
그 뒤부터는 앞서 둘러댄 것과 얼추 같았다.
“…허허, 그건 어쩔 수 없겠군.”
담우양은 괴한이 침입했다는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정천학관은 어지간한 대문파에 비견될 만한 규모를 자랑하는 곳.
목숨이 아깝다면 감히 월담할 시도조차 하지 못할 터였다.
“자네만 욕봤군, 수고했네. 참, 남 교관님과의 일은 잘 해결되었는가?”
담우양은 우려 섞인 시선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훈계의 목적을 가졌다곤 하나 화산의 후기지수를 건드린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더욱이, 남사일은 화산 출신의 무인이 아닌가.
비록 지금은 사문과 겉도는 관계라곤 하나 구파일방 같은 곳은 특히나 명성과 명예를 중요시했기에 걱정되는 마음이 컸다.
“혹여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는다면…….”
미약하나마 자신도 한껏 힘을 보태겠다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쨌든, 심려 끼쳐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자네가 미안해할 게 뭐 있나. 세상일이 그런 것을.”
자신을 대신하면서까지 불평을 해주는 모습에 주호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전날 있었던 소란에 후회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걸려온 시비에 확실히 대응했고, 걸맞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다시 한번 그 자리에 서게 되더라도 같은 행동을 했을 터.
소위 명문의 출신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주었겠지만, 딱히 상관 하지 않았다. 시비가 걸려오면 똑같이 갚아주면 될 뿐이니.
그에겐 이제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