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조금의 소음도 없이 솟아오른 주호는 사뿐한 발걸음으로 전각의 지붕을 밟으며 괴한의 뒤를 따랐다.
“…….”
괴한은 수련동과 강의동이 있는 외원을 넘어 내원으로 이어지는 벽에 당도했다.
이곳은 학관이라곤 하지만, 엄연한 무림 단체였기에 몇 명의 인원이 돌아다니며 순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괴한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이는 없었다.
휘릭.
오직 주호만이 그 뒤를 은밀히 쫓을 뿐.
주호는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한 괴한의 동선을 가늠해 목적지를 유추해나갔고, 이내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저곳은…….’
이대로 얼마간 더 나아가다 보면 관주의 거처가 나왔다.
관주인 설우진 역시 현재 연회에 참석한 상태일 터니 그곳은 비어있을 터.
‘알리는 것이 좋겠지.’
일단 학관에 몸을 담은 입장이지만, 이 이상 귀찮은 일에 관계될 생각은 없었다.
순찰하는 이에게 누군가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간 것을 봤다고 하면 알아서 조치해줄 것이다.
그렇기에 몸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갈 찰나, 지척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살기에 헛바람을 내뱉었다.
쐐애애액-!
황급히 움직임을 멈추고 허리를 뒤로 눕혔다.
실 날 하나의 차이로 한 자루의 도가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
주호는 그대로 몸을 뒤로 뉘였다. 그러곤 두 팔을 뻗어 땅을 짚고 그 반동을 이용해 몇 보 뒤로 물러섰다.
스륵.
도에 베인 머리카락 몇 가닥이 허공을 노닐다 떨어졌다. 동시에 주호의 두 눈 역시 차갑게 가라앉았다.
‘고수.’
상대는 그조차 방심할 수 없는 실력자였다. 방금도 조금만 움직임이 늦었더라면 분명 피를 봤을 터.
“쯧.”
주호가 곡예와도 같은 움직임으로 자신의 공격을 피해낸 것을 본 괴한은 혀를 찼다.
“…여인?”
괴한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그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피풍의로 전신을 감쌌지만, 드러나는 몸의 굴곡이나 조금 전의 목소리는 분명 괴한이 여인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
그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괴한의 살기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선명할 정도로 보이는 그 적의에 주호는 가라앉은 눈으로 상대를 가늠했다.
‘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단숨에 제압하는 것도 힘들겠군.’
주호는 곧바로 상태창을 호출했다.
혹시나 마인일 가능성도 있었기에 정체 먼저 파악할 생각이었다.
“……!”
하지만 상태창에 나타난 내용에 그의 두 눈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상태창]
-새로운 인물의 정보를 불러옵니다.
이름: 천우희
별호: ???
직업: ???
나이: ???
소속: 사신문
경지: 절정(二/十)
무공: ???
잠재력: -
호감도: 中下
항목 대부분이 이상한 문자로 채워져 있었다.
혹시나 다른 것이 있을까 유심히 그 위를 살폈지만, 현재로선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학관에 당신 같은 젊은 고수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날 서린 괴한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찔렀다. 주호가 고개를 들자 그녀는 손목을 한 바퀴 돌리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검을 거둔다면 동이 틀 때까지 아혈과 마혈만 봉한 채로 목숨은 살려주지. 하지만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면.”
괴한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지만, 이어질 말을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하…….”
주호는 헛웃음이 나왔다.
마치 이쪽을 제압할 자신이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여기서 소란이 일어나면 곤란한 것은 네 쪽일 텐데.”
“그렇기에 선택지를 주는 것인데, 표정을 보니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암기를 경계한 주호는 검을 치켜세우며 그것을 경계했으나, 그 손에 들린 것은 네 개의 작은 묘안석이었다.
툭.
그녀는 사방위를 향해 그것들을 던졌다.
분명 네 개를 던졌지만, 바닥에 닿는 소리는 한 번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 알 수 없는 행동에 주호가 눈살을 찌푸릴 찰나, 순식간에 변화가 일어나 그 주위를 뒤덮었다.
“무슨……!”
조금 전까지 사방을 뒤덮었던 어둠이 가시고 찬란한 햇빛이 쏟아졌다.
바뀐 것은 밤낮뿐이 아니었다.
분명 자신들은 학관의 어느 이름 모를 전각 앞에서 대치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칙칙한 안개가 뒤덮은 산봉우리만 눈에 들어왔다.
“진법?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나…….”
주호는 한껏 기감을 끌어올렸다.
오감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이 모든 것이 실제라고 말하고 있었다.
농밀한 자연의 냄새, 딛고 있는 토지의 단단함과 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나무의 잎사귀까지.
그 모든 것이 생생한 현실이었다.
“푸, 이제야 좀 살겠네.”
주호가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천우희는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던 복면을 벗었다.
“…….”
무심코 그것에 시선을 보낸 주호는 일순간 그녀의 외모에 시선을 빼앗겼다.
살짝 붉은 기운이 감도는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촉촉한 윤기를 머금었다.
피부는 갓 내린 눈처럼 새하얗고, 이목구비는 이름난 화가가 심혈을 기울여 그려낸 듯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복면 안쪽에 있던 것은 남궁연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다만, 왼쪽 뺨을 가로지르는 한줄기 자상은 그녀가 깊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것마저 어울리는구나.’
주호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외모로 보자면 천하칠미에 비견될 법했지만, 풍기는 기세는 절정 고수의 그것이었기에.
“당신의 그 무공을 탓해. 본래라면 적당히 쓰러뜨리고 가겠지만, 어중간한 힘으로는 떨쳐내지 못할 것 같이 보이니까.”
천우희의 도가 거센 울음을 토해냈다.
그와 동시에 쏟아지는 무지막지한 기세에 주호 역시 검을 바로 세웠다.
피부를 쿡쿡 찌르는 선명한 살의가 도의 예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기세만 보자면 지금껏 자신이 상대한 이들 중 손에 꼽히는 수준이었다.
주르륵.
“……?”
뺨을 타고 한줄기의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검을 들고 그녀의 기세에 맞서던 주호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땀을 흘릴 정도로 궁지에 몰리거나 긴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땀이 난 것일까.
“이건.”
곧 그는 주변의 온도가 심상치 않게 치솟고 있음을 깨달았다.
허공이 일렁거리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로 공기가 달아올랐다.
“버티기 힘들 거야.”
그 가운데, 천우희의 목소리만이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화르륵!
마치 그녀의 말에 반응하듯 도를 뒤덮은 도기가 마치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사신문, 그리고 주작신공.
그 이름에서 오는 관계성에 대한 묘한 간질임이 주호의 가슴 속에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을 더 생각할 틈도 없이 휘둘러지는 도에 주호 역시 강하게 발을 내디뎠다.
파아아앗-!
시뻘건 겁화에 휩싸인 도가 허공을 세차게 베어 갈라온다. 그것에 주호는 발경의 묘리를 담아 세차게 그것을 쳐냈다.
쿵-!
불꽃의 편린이 허공에 흩날렸다.
검을 쥔 손이 저릿한 것을 보니 서로의 힘이 동수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더 없이 패도적인 도법이다.’
확실히 금방이라도 자신의 몸을 두 쪽 낼 기세였다. 하지만 저것이 전부라면 목을 내주기엔 부족할 따름이었다.
웅웅-.
천우희의 불꽃에 화답하듯 주호 역시 자신의 진신 절기를 꺼내 들었다.
시릴 듯한 청명한 기운이 그의 검에 솟구친다. 동시에 공기를 달궜던 열기가 식기 시작했고, 주위를 뒤덮은 불꽃을 몰아냈다.
“……!”
자신의 기운이 밀리자 천우희의 두 눈이 커다래졌지만, 이내 도를 다잡고는 그것으로 기묘한 원을 그어 내렸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일륜(一輪)이 허공에서 쇄도해 다시금 그의 전신을 아우른다. 그것에 주호는 깊게 호흡을 내뱉으며 몸을 낮췄다.
‘청룡검식.’
주호의 손등 위로 핏줄이 불쑥 솟아올랐다. 청룡신공의 정수를 담은 검이 무겁게 휘둘러졌고, 곧 한 마리의 용을 그 위에 그려냈다.
청룡검식
회귀의 검, 청룡(靑龍)
그의 검기는 마치 청룡이 승천하는 것처럼 솟구쳤고, 천우희가 쏘아 보낸 일륜을 집어삼키며 흔적도 없이 부숴버렸다.
쿠구구구구구구궁-!
그러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그대로 그녀를 향해 거칠게 이빨을 들이밀며 물이 뜯었다.
“큭!”
천우희는 호신강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뒤, 널찍한 도신의 뒤로 몸을 숨겼다.
초식이 깨어진 이상 재차 공격할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움직이게 되면 진법의 축이 흔들려 공간이 무너져 버리게 될 터.
“산(散).”
그렇기에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버티리라 다짐한 그녀의 각오는 짤막하게 내뱉어진 주호의 말에 무색해져 버렸다.
주위를 휩쓸며 거칠게 앞으로 쇄도하던 청룡의 기운이 주위로 흩어진다. 그러곤 진을 구성하고 있던 묘안석을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산산조각내었다.
파스스-.
안개가 휩싸인 산 중턱의 풍경이 무너져 내렸다.
천우희는 그 현상에 이를 악물며 도를 다잡았지만, 곧 등 뒤에서 느껴지는 스산한 기척에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척.
시퍼런 광택을 내뿜는 한 자루의 검날이 자신의 목에 닿아 있었다.
둘 중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참사가 일어날 터.
‘…이런.’
천우희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자신의 뒤를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가 있을 줄 몰랐고, 생각지도 못한 무공의 등장에 주의가 흐트러졌다.
하지만 고수 간의 싸움에서 한순간의 틈은 치명적인바.
이미 승부의 결과는 정해졌다.
“…당신은.”
목에 닿은 차가운 검날의 예리함을 의식하며 천우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익힌 무공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지금 질문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닐 텐데.”
그녀의 말은 주호의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차가운 눈으로 검을 치켜세웠다.
“질문이 아니야. 중요한 사실을 묻고 있는 것이지. 당신의 대답에 따라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가 갈리니까.”
천우희는 목에 닿아 있는 칼날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은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모습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 대담함은 오히려 주호 쪽에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담력이 좋군.”
“칭찬으로 들을게. 적어도 이곳은 내 묫자리가 아니거든.”
“그것이야말로 네 대답에 따라 어떻게 될지 갈리겠군. 넌 정체가 무엇이지?”
주호가 그녀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자 천우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익힌 무공의 기원도 모르는 자가 남의 정체를 묻다니. 당신의 스승은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나 보네.”
“…….”
헛바퀴를 도는 대화 양상에 주호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상태창엔 그러한 이야기는 나와 있지 않았다.
그저 청룡신공의 구결, 그리고 수련 방법만 적혀 있었을 뿐.
그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천우희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정말로 전승을 이어받지 못했나 보네. 솔직히 놀라울 따름이야. 혼자만의 힘으로 그 정도 경지에 올라서다니.”
알만하다는 그녀의 표정에 주호는 입을 닫았다. 그러곤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사신문. 사신이라는 것은 분명 사방신을 뜻하는 것일 터.’
청룡, 주작, 백호, 현무.
자신이 익힌 청룡신공과 그녀의 무공인 주작신공은 관련이 있는 것인가.
애초에 주작신공이라는 무공 역시 처음 듣는 것이었지만, 잠시 검을 나눈 결과 느낀 것은 절대 청룡신공에 뒤떨어지는 무공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당대의 주작은 허술하기 짝이 없군. 내가 청룡의 진전을 잇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그리 함부로 입을 놀리지?”
사신문, 사방신.
청룡, 그리고 주작.
몇 년이나 강호에서 활동하던 자신이 모르는 조직이었으니, 물밑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이들일 터.
그렇기에 대충 아귀를 맞춰 적당히 답을 던진 것이 정답이었는지 천우희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야 이야기가 통하겠네. 반가워, 청룡.”
물론, 주호는 대충 어림짐작한 것이 들어맞자 속으로 헛웃음을 내뱉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