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커헉……!”
선우연은 몸을 웅크린 채 몇 번이나 격한 기침을 토해내었다.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단 한 수였다.
상대는 검을 뽑지도 않은 채 그저 산책하는 것처럼 자리를 거닐며 매화 검법의 초식을 피해낸 뒤, 자신을 무력화시켰다.
서로 간의 격차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주위에서 비무를 구경하던 이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선우연이 누군가.
화산의 절세 기재라 알려진 화산 신룡의 뒤를 이어 소신룡(小神龍)이라 불리며 차세대를 이끌어갈 후기지수라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런 그가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바닥에 엎어져 고통에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툭툭.
주호는 별것 아니라는 듯 그 위에서 가볍게 손을 털 뿐이었다.
“끄르륵…….”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선우연은 결국 거품을 내뿜으며 의식을 잃었다.
“이런.”
설마 그가 실신까지는 할 줄 몰랐기에 주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내상을 입은 것은 아니군. 심적인 충격이 커서 공황에 빠진 건가.’
우습기 짝이 없는 결말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 그렇기에 그는 방금 전 선우연에게 검을 빼앗겼던 이를 불렀다.
“자네.”
“예, 예?”
“보아하니 이 아이와 가까운 사이 같은데, 뒤처리를 부탁하지.”
도복을 입고 있는 것이 같은 구파일방의 출신인 듯해 보였다.
주호에 말에 그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쓰러진 선우연을 들쳐 매곤 자리를 떠났다.
짝.
상황은 대충 정리되었다.
그렇기에 주호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끝내고자 가볍게 손뼉을 침으로 자신에게 이목을 끌어모았다.
“소란은 이제 끝이다. 남은 시간은 연회를 즐기도록.”
아무렴, 그것에 말대답할 만큼 간 큰 이는 이제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연회장은 천 명에 달하는 인원을 수용할 만큼 큰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한쪽에서 소란이 일어났어도 그것은 작은 일일 뿐, 나머지 곳들은 문제없이 연회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다.
조금 전에 교관과 관생 사이에 벌어진 비무는 순식간에 화제가 되었고, 관생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시작했다.
“교관과 관생이 한 여인을 두고 싸웠다지.”
“듣기로는 그 여인이 이번 수석 입관생인 남궁연 소저라는 이야기가 있네.”
“그러면 교관과 관생은 누군가.”
“교관에 대해선 아직 모르지만, 관생 쪽은 화산의 선우연 소협이라 들었네.”
“선우현 소협이면 화산의 소신룡이 아닌가!”
다만,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만큼 이야기는 와전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교관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우연과의 비무를 끝낸 주호는 내친김에 연회장을 더 둘러보며 앞서와 같은 소란이 없는지 순찰하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
그러자 자리를 지키고 있던 동료 교관들이 묘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봐오는 것을 느끼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일은 자네가 있었지 않은가.”
담우양은 조금 전 관생 사이로 돌았던 이야기를 슬쩍 입에 담았다.
다른 교관들 역시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지만, 귀를 쫑긋 세우며 그에 집중했고, 그 전말을 모두 전해 들은 주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반 시진도 되지 않았는데, 그 이야기가 여기까지 퍼진답니까?”
“어허, 천 명이 넘는 사람이 떠들고 있네. 저쪽 끝에서 이쪽 끝까지 이야기가 도는 것도 한순간이야. 그나저나 그 반응을 보니…….”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일부 곡해가 섞여 있습니다.”
한숨을 내쉰 주호는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남궁연을 두고 일어난 선우연과 위지천의 다툼. 자신은 그것을 정리하려 개입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선우연의 이름을 거론한 단계에서 교관들은 미미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교관으로서는 잘 대처했다고 말해주고 싶으나, 이번엔 좀 골치 아프게 되었군.”
“무엇 때문입니까?”
“이보게, 잘 생각해보게나. 화산파의 기재라 소문난 소신룡이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네. 보통 후기지수도 아니고 소신룡이야. 윗선에서 걸고넘어질 것이 뻔하네.”
담우양 옆에 있던 곽철진 역시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그쪽은 교관을 경시하는 모양새가 있어서 말이야. 더군다나 자네는 사급교관이니 소란이 없을 수는 없겠군.”
다른 교관들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물론 주호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책잡힐 만한 일은 저지르지 않았고, 부당하게 압박을 가해온다고 하여도 가볍게 흘려 넘기면 그만이니.
‘비무라도 걸어오려나.’
본문의 명예를 바로 세우겠다면서 자신에게 비무를 걸어오는 모습에 눈에 훤했다.
당연히 주호는 어지간한 이가 나서지 않는 이상 승부를 양보할 생각 따윈 없었다.
‘학관에 있는 인사 중 제일 윗선이라 함은 매화선풍검 정도겠군.’
그는 잠시 매화선풍검 남사일과 싸우는 모습을 어림짐작해보았다.
분명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지만, 지는 결과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만만치 않은 상대였으나, 자신 역시 설우진과의 비무를 통해 몇 단계 성장하지 않았는가.
“자네, 잠시 나 좀 볼 수 있겠는가?”
등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여유롭게 앉아 있던 교관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주호는 이미 그 기척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천천히 예의를 갖췄고, 이내 다른 이들 역시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매화선풍검을 뵙습니다.”
“다들 수고가 많군.”
남사일은 그들의 포권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주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작은 소란이 있었다 들었네.”
“말 그대로 작은 소란입니다.”
주호는 무례하지 않을 정도의 단호함을 담아 대답했다.
화산파의 후기지수가 엮인 일이지만, 매화선풍검이란 이름이 나서기엔 그렇지않느냐며 돌려 말하는 것이었으나 남사일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직까진 그렇지.”
“…….”
문제를 키우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뜻을 지닌 대답에 주위에 있던 교관들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니 잠시 따라와 주겠나?”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기세는 절대 그러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호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자네…….”
담우양을 비롯한 교관들은 그런 주호를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한솥밥을 먹게 된 사이에 요 며칠간의 일로 적지 않은 친분을 쌓게 된바.
이대로 보내주기엔 마음이 그리 가볍지 않았다.
“괜찮네, 단지 몇 마디 말을 나누기만 할 터이니.”
남사일 역시 그런 분위기를 읽은 듯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더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주호는 먼저 남사일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들의 발걸음은 연회장을 나선 뒤, 인적이 드문 곳을 넘어서까지 이어졌다.
마침내 도달한 곳은 실전의 이해 과목이 이루어지는 연무장의 한 곳. 그 중심에 선 남사일은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우선 강압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미안하다고 하고 싶네. 그럴 필요가 있는 일이니 말일세.”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이해기는 어렵지 않았다.
“시선을 의식하신 겁니까.”
“이래 봬도 화산의 장로 중 한 명일세. 그러니 체면 좀 세워야지.”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발끝을 바닥에 비비며 말을 이었다.
“대충 전후 사정은 전해 들었네. 우리 쪽 애가 말썽을 피웠고, 그걸 훈계하다 그랬다지.”
“…제가 강호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쪽에 살짝 무지한 바가 있었습니다.”
남사일이 자신을 불러낸 목적이 훈계나 질책하려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주호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사실 자네가 잘못한 건 없지 않나, 하하.”
그는 오히려 주호가 무안해질 만큼 담백하게 대답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선우연. 나도 알고 있는 아이지. 어릴 적부터 제 사형을 따라 소신룡이니 뭐니 떠받들어 준 탓에 허파에 바람이 잔뜩 깃들었어. 언젠가 사단이 일어나리라 생각했는데, 절정 고수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치고는 값싸게 먹힌 것이 아니겠는가, 하하.”
“…….”
남사일은 너털웃음을 터트렸지만, 주호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그를 읽었듯, 그도 자신을 읽었던 것이리라.
“관주님께 들었네. 정말로 대단하군, 그 나이에 나와 같은 곳에 서 있다니.”
“천운이 따랐을 뿐입니다.”
“하늘은 바라는 자를 세우지. 그 역시 운명이 아닌가.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빠졌군. 하여튼, 나는 화산의 어른으로 이번 소란에 무언가 행동을 취했을 필요가 있었네. 이해하는가?”
“저야말로 이해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번엔 남사일의 말에 주호 역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학관 내부에 화산의 인사는 많다. 그런 만큼 다른 곳에서 잡음이 생기기 전에 자신을 위해서 나서준 것이리라.
‘좋은 분이군.’
사문이니 명예니 얽매이지 않는 그 담백한 모습에 주호는 남사일에게서 호감을 느꼈다.
“그래도 나를 번거롭게 한 대가는 받아야겠지?”
“…예?”
하지만 남사일은 그가 생각한 것처럼 절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을 따름이었다.
***
“…끄응.”
주호는 지친 몸을 이끌며 연회장으로 향했다.
남사일과의 만남 이후 고작 이 각이 흘렀을 뿐이지만, 그의 얼굴은 피로한 기색이 가득했다.
“설마 거기서 또 비무를 하자고 할 줄은.”
십 초식에, 그것도 내공을 제한한 형식이었지만, 같은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고수와 하는 것이었다.
선우연 때와는 달리 진심으로 임해야 했고, 결과적으로 십 초식을 훨씬 뛰어넘는 공방으로 이어져 상당한 심력을 사용해야 했다.
“어쩐지 너무 멀리 돌아간다고 했다.”
남사일은 처음부터 자신과 한 판 붙었을 생각일 것이었으리라.
그렇기에 그렇게 외진 곳까지 발걸음을 골린 것이겠지.
주호와 남사일의 비무는 일체의 물러남 없는 공방이었다.
십 초식은 오십 초식이 되고, 곧 백 초식까지 다다랐다.
그 결과 서로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비등비등한 실력을 지닌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남사일은 주호보다 더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주호는 일전의 깨달음으로 상승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어 서로가 모자람 없이 균형을 이루었다.
비무의 끝에서 남사일은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룡이니 화산 제일 기재니 하지만, 인중룡은 따로 있었군.”
자신이 불혹에 걸쳐 이룬 경지를 그 반절도 되지 않은 세월에 도달한 주호를 일컫는 것이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주호는 그때엔 겸손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자신과 상대 둘 다를 깎아내리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 뒤로는 적당히 이야기를 주고받고는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를 떴을 뿐이었다.
“음?”
연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교관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자 다시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길 찰나, 그는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이질적인 기척을 깨달았다.
얼마나 그 움직임이 은밀하던지, 남사일과의 비무를 복기하며 내공을 운용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결코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것이었다.
“…….”
주호는 그 즉시 자신의 기척을 숨기고 조심스레 그 뒤를 밟았다.
정체 모를 누군가가 벽을 넘어 전각 사이로 파고든다. 외원을 넘어 내원까지 침입하려는 그 상황을 눈앞에 둔 주호는 고민에 잠겼다.
‘어찌해야 하는가.’
저렇게 기척을 숨기고 은밀히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필시 좋은 목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닐 터.
입관식이라는 큰 행사 때문에 곳곳의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내부를 침입한 것이라면, 외부의 세작일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 쫓아보자.’
괴한의 뒤를 쫓기로 한 주호는 땅을 박차 허공으로 신형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