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6화 (26/300)

#26화

‘어떻게.’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곤 하나, 작정하고 검을 뽑아들기 직전이었다.

감각은 예리했고, 이성은 차디찬 냉정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검을 쥔 손을 허용했다는 것은 경악할만한 일이었다.

“…….”

보통이라면 그 즉시 손을 뿌리치고 거리를 벌렸겠지만, 상대의 목소리가 익숙했다.

남궁연은 기세를 거둔 채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사내는 그 앞으로 발을 내디뎠고, 다투던 이들을 향해 쇄도했다.

쐐애애애애애액-!

세찬 강풍이 장내를 휩쓸었다.

느닷없는 현상에 선우연과 위천강의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헛바람을 내뱉으며 몇 발자국 물러났다.

“…무슨.”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를 향해 달려들기 직전이었던 둘은 누구랄 것 없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연회를 위해 준비된 고급스러운 무복은 흙먼지투성이가 되었고, 수려한 얼굴 역시 그 빛이 퇴색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둘이 동수를 이루었나 싶었지만, 검은 뽑혀 나오지도 않았을뿐더러 그 자리에서 움직인 기미조차 없었다.

“…큭.”

겨우 몸을 일으킨 선우연은 기침을 토해냈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 대체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는 그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세찬 광풍이 닥침과 동시에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는 사실만 남아 있었다.

다행이라면 상대 역시 똑같은 꼴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선우연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지만,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 멀쩡히 자리하던 검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

설마 넘어지면서 떨어뜨렸나 싶어 바닥으로 시선을 보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걸 찾나.”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선우연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낯선 사내가 두 자루의 검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 대체.”

대체 자신의 검이 왜 저자의 손에 들려있단 말인가.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장내에 있던 이들 모두 놀란 시선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검을 빼앗겼다.

곧 냉정한 현실이 그의 뇌리에 들이닥쳤다.

검을 빼앗긴 것은 검객에게 있어서 더 없는 수치. 그렇기에 선우연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짓이오!”

“장내에서 싸움은 금지다. 칼부림할 것이라면 밖으로 나가도록.”

주호는 더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검 자루를 돌려 밖을 가리켰다.

소매 안쪽에 새겨진 매화 무늬를 보아하니 화산의 제자일 터.

하지만 이들 모두가 약관에 이른 성인으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녀야 했다.

설사 사문이 구파일방이든, 세가 연합이든 주호에게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흠.”

의외였던 점은 위천강이 순순히 물러났다는 것이었다.

“숙지하겠습니다. 그러니 검을 돌려주시겠습니까.”

짐짓 공손하게까지 말해오는 그 태도에 주호는 피식 웃으며 순순히 검을 돌려주었다.

“…….”

제 검을 돌려받은 위천강은 잠시 그에게 시선을 보내더니 이내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래서 자네는?”

주호는 아직 어정쩡하게 서 있던 선우연을 향해 말했다.

“…….”

그로선 별 의미 없이 물은 것이었지만, 선우연은 그것이 자신을 욕보이려는 물음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화산의 선우연이오. 당신은 누구기에 이런 음습한 짓을 벌인 것이오!”

‘이것 봐라?’

그 당돌한 말에 주호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쪽이 학관의 교관이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문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적반하장인 모습을 보인다는 건 내가 교관인 것을 알고도 한 번 떠보자 이것이지.’

소매 안쪽에 새겨진 매화의 표시는 선명하다. 하지만 주호는 고작 화산의 이름에 굽힐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화산은 연회장에서 칼부림하라고 가르치나?”

짐짓 엄한 태도로 그렇게 답하자 분노에 차올랐던 선우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감히.”

조금 전까지의 기운이 타오르는 불과 같았다면, 이제는 숫제 바닥을 뚫고 솟아오르는 용암처럼 뜨겁기 그지없다.

“화산을 모욕한 자,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오! 그대에게 비무를 신청하겠소!”

그 말에 주위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정천학관의 교관이 화산을 모욕한 것이나, 화산의 후기지수라 하나 관생이 교관에게 비무를 신청한 것이나 모두 무시할 수 없는 큰일이었다.

“…….”

모두의 시선이 주호를 향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린다. 그것에 주호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거절하지. 내 소임은 훈계지 비무가 아니다.”

주호는 선배 교관의 조언을 떠올렸다.

유력 세가나 소위 명문이라는 곳의 출신인 후기지수들은 은근히 교관들을 은근히 괄시하는 눈치가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아예 무시한 태도로 일관할 것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그 기강을 확실히 잡으라 했다.

물론 주호는 그런 이들을 결코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확실히 손봐주마.’

이쪽에서 건 싸움이 아닌, 상대 쪽에서 걸어온 비무다. 교관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기 위했다는 좋은 명분도 생기는 것이니 위쪽에서도 무어라 못할 터.

사실 무어라 할지라도 그렇게 신경 쓸 생각은 없었다.

“명예를 위한 정당한 비무를 피하다니! 무인으로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말만 앞서는 관생이로군. 수업은 아직 이르지만, 강호의 선배 된 도리로 한가지 가르쳐 주도록 하지.”

서늘한 미소를 지은 주호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정녕 사문의 명예를 위했더라면 벌써 검을 뽑고도 남아야 했다. 언제까지 입으로만 떠들 거지? 강호가 우스워 보이는가?”

“…자네, 진정하게나. 주위의 이목이 너무 많네.”

선우연의 옆에 있던 친우 중 한 명은 그를 말릴 생각이었다.

막 입관식이 끝난 시점에서 교관과의 불화가 생긴다면 전후 관계가 어찌 되었든 평판에 좋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하지만 손쓸 틈도 없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흘러만 갔다.

챙-!

주호의 말에 눈이 돌아간 선우연은 친우의 허리춤에 있던 검을 빼앗아 들었다.

손뼉을 쳐주고 싶을 정도로 시원한 발검이었지만, 그것이 시사하는 바를 깨닫고는 헛바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선우연은 이를 악물었다.

검을 뽑지 말았어야 했음을 자신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문과 더불어 강호를 운운하는 그 말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연회 중이라 술에 취했고, 남궁연과 위천강의 일로 머리가 들끓었던 탓도 있었다.

평소라면 이렇게 무식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이미 상황은 기호지세였고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선우연은 순식간에 머릿속을 정리했다.

지켜보는 이목이 수백은 넘는다. 소란이 일어날 것은 당연지사. 그렇다면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면 되었다.

수석 입관생의 자리는 물 건너갔지만, 관생이 교관을 꺾는다면?

“…정식으로 귀하에게 비무를 청하는 바이요.”

판단을 끝마친 선우연은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태도로 말했다.

물론 주호의 눈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훤히 보였다.

자기 딴에는 제법 머리를 쓴 것일 터이지만, 애초에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것이었다.

그것이 못내 재밌어진 주호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나온다면 응하지 않을 수가 없군. 나는 정천학관의 사급 교관 주호다. 자신의 발언을 책임질 수 있다면 비무에 응해주지.”

“책임져야 할 것은 당신의 그 무지한 발언이오. 화산을 깎아내린 것은 결코 그 대가가 작지 않을 테니.”

주호가 자신을 교관이라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우연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무게까지 잡으며 화산의 이름을 들먹이기까지 했으니.

[상태창]

-새로운 인물의 정보를 불러옵니다.

이름: 선우연

별호: 소신룡

직업: -

나이: 스물

소속: 화산파

경지: 일류(五/十)

무공: 이십사수 매화검법

잠재력: 上下

호감도: 下中

주호는 시야 한 편에 떠오른 상태창을 흘깃 바라보았다.

보이는 지표는 입관 수석인 남궁연보다 몇 수 위의 경지이긴 했지만, 딱 예상대로의 실력이었다.

‘이십사수 매화검법이라, 사문의 무공을 믿는 것인가.’

이 정도 소란이 일어났으니 당연히 외부의 개입이 있을 터.

그때까지는 충분히 버텨내리라 믿는 건가 싶었지만, 저 자신만만한 눈빛을 보니 여차하면 이쪽을 꺾어버릴 생각인 것 같았다.

“검은 제 주인에게 돌려주어야겠지.”

뼈가 담긴 말에 선우연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구겨졌다.

다른 사람의 검을 빼 든 자신을 질책하는 말이었다. 친우에게서 빼앗은 검을 되돌려 준 선우연은 주호에게 자신의 검을 건네받았다.

그러곤 이내 냉정한 표정으로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챙-!

시원하게 뽑혀 나온 검이 화려하게 허공을 수놓는다. 그 멋들어진 모습에 주위의 모두가 환호했지만, 주호만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검을 뽑으시오.”

“안 뽑아도 충분하다.”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에 선우연의 얼굴이 다시금 구겨졌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으며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좋다, 방심해준다면 말릴 것 없지. 단숨에 결착을 낸다.’

이 이상 소란을 끌면 좋을 것도 없기에 속전속결로 승리를 쟁취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면 되었다.

‘똑똑히 보아주시오! 당신을 위해 휘두르는 이 검을!’

검을 든 이유는 사문을 욕보인 주호를 단죄하기 위해서였지만, 선우연은 뜨거운 눈으로 관중 속에 있던 남궁연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눈치챈 주호는 비릿한 조소를 흘렸고, 이내 둘은 서로를 향해 마주 섰다.

웅웅-

잔뜩 내공을 머금은 선우연의 검이 울음을 토해냈다.

관중 대부분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비무를 바라보았지만, 선우연의 친우들은 아무래도 걱정이 드는지 염려가 섞인 시선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말려야 하지 않겠는가.”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저 친구도 생각이 있겠지.”

“하긴, 이미 화산까지 거론된 상황일세. 친우라곤 하나 외부인인 우리가 끼어들기엔 모양새가 그렇지.”

강호의 은원은 스스로 풀어야 했다.

거기에 사문까지 거론됐다면 아무리 친우라 하나 개입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은 일. 물론 그들은 선우연이 이 비무에서 승리를 거두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합-!”

비무의 시작은 선우연의 일격으로 선언되었다.

그는 주호를 단죄하겠다는 말을 지키려는 듯 첫 초식부터 이십사수 매화검법의 절초를 떨쳤다.

그 맹렬한 기세에 매화 잎이 흩뿌려지며 청아한 향이 사방으로 피어올랐다.

일부 몇몇은 선우연이 펼친 초식이 화산의 손꼽는 무공인 이십사수 매화검법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매화의 향기마저 풍겨오는 그 고절한 경지에 헛바람을 삼켰다.

“…위, 위험한 것 아닌가?”

“어서 다른 교관님을 불러오게!”

잠깐의 여흥을 돋구는 비무라기에 너무 살벌한 그 기세에 냉정함을 되찾은 이들이 서둘러 사태를 진정시키려 나섰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주호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탁.

그는 자신에게 휘둘러지는 검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디면서 검세 안으로 파고들었다.

“엇?!”

그것은 스스로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모양새였다.

지켜보던 이들은 물론이고 검을 휘두른 선우연조차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아둔하기 그지없구나!’

그는 검을 멈추지 않았다.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화산을 모욕한 대가는 피로서 받을 작정이었다.

쉬시시시식-!

“……!”

하지만 선우연의 검이 주호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선우연의 검이 목표한 바를 이루는 일은 없었다.

주호는 마치 매화 검법의 초식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몇 발자국 움직이는 것으로 그것들을 모두 피해냈다.

일말의 긴장감도 없는 여유로운 걸음걸이였기에 주위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전부 감탄을 토해냈다.

“무슨…….”

보고도 믿기지 않은 상황에 선우연은 잠시간 멍한 표정을 지었고, 그것은 치명적인 틈을 만들어냈다.

덥석.

“…컥?!”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주호의 손이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아차 하고 정신을 차린 그가 황급히 그것을 떨쳐내려 몸을 뒤집었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휘릭.

선우연의 시야에 비친 땅과 하늘의 경계가 뒤바뀐다. 그러곤 등에서 느껴지는 강한 충격과 함께 일순간 숨이 멎을 듯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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