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연회가 길어졌고 밤이 깊어졌다.
강호 명숙이라 할 수 있는 고수들은 대련이 끝난 시점에서 전부 자취를 감추었기에 남아 있던 이들은 두 학관의 교관뿐이었다.
학관의 개관식은 이틀 뒤였고 그 전날은 휴일이었기에 모두가 마음 놓고 연회를 즐기는 와중이었다.
“자네, 들어가는가?”
“한바탕 비무를 해서 그런지 눈이 무거워져서 말입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내일 아침에 보지.”
“잘 들어가도록 하세나!”
주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 수련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이었다.
다른 이들도 좀 전에 있었던 비무 때문에 피곤한가 보다 하면서 그를 배웅했고, 주호는 무리 없이 연회장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후우.”
열기에 들뜬 한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오래간만의 일이었으니까.
“자네.”
“……?”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주호의 발걸음을 멈춰 섰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낯선 이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단지 가는 길이 같았겠지 하며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불러 세운 것을 보니 단순한 용무가 아닌 듯싶었다.
‘천문학관 측 수석교관인가.’
몸을 돌려 상대를 바라보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팽대환과 더불어 같은 오대 세가의 출신으로 천무학관의 수석교관인 악진명이 작은 미소와 함께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내 소개를 하지 않아도 되겠군. 잠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나?”
“…….”
그의 물음에 주호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조금 전 천무학관의 교관 한 명을 압도적으로 쓰러뜨린 후였지 않은가.
더군다나 정천학관의 소속인 그가 다른 학관의 중진과 밀담을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퍼진다면 골치가 아파질 터.
“무슨 걱정이 드는지는 알고 있네. 내 나중에 도호 그 친구에게 언질을 줘두지.”
둘은 잠시 으슥한 곳으로 이동했다.
악진명을 눈앞에 둔 주호는 그가 무슨 용무에서 자신을 불러 세웠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설마 압박하기 위해선가.’
대련이라 할지라도 자신은 천무학관의 명성에 영향을 끼친 것은 틀림없다.
악진명은 산동악가의 출신으로 강호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
하지만 주호는 그가 자신을 겁박한다고 할지라도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나는 정천학관의 소속이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무력으로 압박을 가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도호는 물론 악진명 그 자체도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나쁜 소리를 하려 부른 것은 아니니 긴장 푸시게.”
짐짓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지만, 주호의 눈 속에 서린 경계심에 악진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상대는 강호 초졸,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자신을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정천학관에서 받은 돈의 다섯 배를 주겠네. 천무학관으로 오게나.”
“죄송합니다.”
“사실 정천학관이 우리 천무학관보다 뛰어난 것은 이름값……뭐?”
자신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거절의 의사를 피력하는 주호의 모습에 악진명은 말문이 막혔다.
최소한 자신이 제안하면 고민하는 모습은 보여야 정상이 아닌가.
“참고로 월봉이 어떻게 되나?”
“육십 냥 정도입니다.”
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고작 육십 냥에 자신의 제안이 거절되다니.
“…정말로 그게 전부인가?”
“예. 초봉은 그것이고 차차 늘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확고한 주호의 모습에 악진명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호 초졸이라 그러더니 정말로 세상 물정을 모르는 듯싶었다.
제 딴에는 의리를 지키느니 하고 싶었겠지만, 강호는 결국 돈으로 돌아갔다.
‘나는 아직 이 흔들림에 굴하지 않은 사람은 보지 못했다.’
“육백 냥.”
“예?”
“자네가 지금 받는 월봉의 열 배를 달마다 지급하세. 일 년이면 육천 냥이 넘는 금액이군.”
악진명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주호에게 말했다.
주호의 실력을 생각하자면 월봉 육십 냥은 턱없이 적은 금액이었다.
그렇기에 말은 하지 않고 있으나 어느 정도 불만은 있으리라 짐작했다.
“나는 자네가 필요하네. 천무학관이 정천학관에 부족한 것은 단지 명성뿐일세. 그것 말고는 교관, 학생, 인재 모든 부분에서 앞서 있다고 자부할 수 있지. 어떤가, 나와 함께 중원제일학관을 만들어보지 않겠나?”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싸우지.’
그는 주호가 자신의 제안에 넘어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떤 바보가 육십 냥을 위해 육백 냥을 걷어차겠는가.
‘이 청년이 우리 쪽으로 합류한다면 명성을 올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신진고수의 등장.
이립도 되지 않은 청년이 풍운검 강무석을 꺾었다.
강호는 항상 새로운 영웅에 굶주려 있지 않은가.
천무학관과 세가의 힘을 이용한다면 주호가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얼마 걸리지 않을 터.
그런 그를 품는다면 어떤 이익이 떨어질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탐나는 자로군. 사문이 없다고 들은 것 같은데, 세가에 적당한 여식이 있었던가.’
“마음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의 제 자리가 좋습니다.”
“…뭐라?”
일순간 미래 계획까지 구상해놓았던 악진명의 정신이 멍해졌다.
아니, 도대체 왜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것인가.
“혹시 사람들의 눈이 걸리는 것인가? 학관에서 교관이 이적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라네. 오히려 자네가 우리 쪽으로 온다면 자네에 대한 화제성이 더 커질 수도 있어!”
답답한 마음에 소리까지 쳐보았지만, 주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악진명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젊은 나이, 수려한 외모에 무공도 뛰어난 것도 대단한데 심지까지 굳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주호와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념이 확고한 눈동자.
악진명은 과거에 그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네. 오늘만 날이 아니지 않나.”
그렇기에 악진명은 후일을 기약했다.
“나는 천무학관의 수석 교관이자 산동세가의 악진명일세. 부디 다음엔 좋은 대답을 기대하고 싶군.”
“…….”
그의 말에 주호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악진명이 떠나고 난 뒤, 주호는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왜 저리 귀찮게 하는지.”
돈을 많이 주는 것은 좋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딱히 많은 재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정 급하면 집안에 도움을 요청하면 되니.
거기에 자신은 무림 맹주인 단 노인의 추천으로 이곳에 오지 않았던가.
그런 상황에서 천무학관으로 홀연히 떠나버린다면 그의 얼굴에 먹칠하는 셈이 될 터.
“그럴 수야 없지.”
의리보다도 예의의 문제였다.
자신에게 마음을 써준 그의 마음을 저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
정천학관의 개관식이 거행되었다. 굳게 닫혀있던 정문이 열렸고 수많은 사람이 그 안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후, 많기도 하구먼.”
학관생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족과 지인들까지. 족히 몇천 명은 될 것 같은 인파에 교관 중 한 명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중원제일학관이란 명성이 있는 만큼 정천학관은 그들 모두를 수용할 여력이 있다.
하지만 그 통제와 관리는 주호와 같은 사급, 혹은 삼급 교관들이 직접 나서서 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밀려드는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무림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이 당연지사.
정천학관의 개관식은 큰 행사인 만큼 모두 자중하는 분위기였지만, 언제 일이 터질지 몰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빼곡한 인파가 몰린 가운데, 행사가 시작된다. 흥겨운 악기 소리가 장내를 채우고 무공을 익힌 듯 화려한 움직임을 선보이는 악단이 재주를 부리며 눈을 즐겁게 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쯤, 본격적인 개관식의 차례가 시작되었다.
식에 앞서 이 자리를 참여한 명망 높은 명숙의 이름이 하나하나 소개되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고수들이 자신들 앞에서 포권을 취하자 학관생을 비롯한 관중은 크나큰 환호로 화답했고, 자신이 이곳에 입관했다는 사실에 열광했다.
주호는 다른 교관들보다 비교적 앞자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혹시나 관중 사이에서 난동을 피우는 이가 없나 감시의 임무를 맡고 있다 보니 많은 사람을 눈에 담아야 했고 익숙한 얼굴도 몇몇 발견할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그 산뜻한 미모는 숨길 수 없었다.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돋보이는 남궁연의 모습에 주호는 무심코 감탄을 흘렸다.
“그럼, 올해 수석입관생을 발표하겠습니다.”
입관식은 어느새 중반부로 넘어와 있었다. 각종 행사를 비롯해 명숙의 소개가 끝났고 입관생들의 성적을 발표하는 차례였다.
행사를 진행하는 무인이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펼친다. 그것을 보고 있던 여러 후기지수는 긴장과 설레는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였어도 그럴 테니.’
중원제일학관이라는 정천학관의 수석입관생이 된다. 후기지수에 그것만큼 크나큰 명예가 없었다.
출신 가문이나 문파의 명성도 올라가고 올 한해 강호의 주목도 한몸에 받게 되었다.
그야말로 탄탄대로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 주호는 막연히 약관의 자신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어땠을 까란 생각에 잠겼다.
수석입관생을 발표하는 무인의 말에 설렜을까, 아니면 일말의 희망도 없이 체념하고 있었을까.
‘아마, 후자일 듯싶지만.’
가문을 나온 직후면 몰라도 어느 정도 강호를 겪고 나서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
“수석입관생, 남궁세가의 남궁연!”
무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제 이름이 불리지 않은 것에 대해 허탈한 표정을 짓는 이들이 많이 있었지만, 곧 쏟아지는 환호성에 뒤덮이고 말았다.
‘그녀가?’
주호 역시 살짝 놀랐다. 화산이나 무당의 뛰어난 후기지수들도 많이 입관했다고 들었는데 남궁연은 그런 이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히 수석의 자리를 따냈다.
무림 특성상 여성의 몸으로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남궁세가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그 정도 경지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노력을 했겠는가.
그녀가 단상에 오르자 그 수려한 외모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주호는 한 사람의 무인으로 그녀가 해왔던 노력에 경의를 보냈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짧은 치하와 함께 상패와 꽃다발이 그녀의 품에 안겨진다. 좌중에 가볍게 고개를 숙인 남궁연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찰나, 주호 쪽에 시선을 보냈다.
“…….”
그에 주호는 축하한다는 뜻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고 남궁연 역시 가벼운 미소로 그에 화답했다.
“안휘제일미가 아닌가. 천하칠미에 들어가는 미인인데, 우리 학관에 들어오다니.”
“꿈 깨시게나. 상대는 남궁세가의 금지옥엽일세. 근처에 가지도 못하겠지만,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사지가 찢길 걸세. 난 괜한 불똥 튀기 싫어!”
“에이, 왜 그러는가. 만에 하나라는 일도 있지 않은가.”
근처에 있던 후기지수들이 선망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향했다. 그것은 교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궁세가라. 벅차긴 하지만, 그래도 오르지 못할 나무는 아니군.”
“주제 파악 좀 하지 그러나. 남궁세가가 아니라 그 분가도 바라기 힘든 입장에서.”
“어허, 혹시 모르지 않나!”
“…선배들이 알려줬는데, 교관과 관생 사이에 그런 일은 간간이 있다고 하네. 안휘제일미까지는 아니어도 다른 쪽은 노려볼만하지 않는가?”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 축에 드는 교관들이 숨길 수 없는 방심을 드러내었다. 젊다곤 하지만 그들의 나이는 대부분 이립을 넘어섰다.
“자네들 나이를 생각하게. 족히 열 살은 어린 젊은이들을 상대로, 쯧쯧.”
쓸데없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를 말라며, 선배 축에 속하는 교관이 그들을 나무랐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