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잠시들 주목해주겠나.”
연회가 한창인 가운데 누군가 단상 위로 올라섰다.
“본인은 천무학관의 수석교관인 악진명이라 한다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악진명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에 모두가 그 말에 집중했다.
“연회를 즐기고 있는 와중에 흐름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더 흥미 있는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해 실례를 무릅쓰고 이 자리에 올랐네.”
그는 잠시간 숨을 고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올해 두 학관에 쟁쟁한 교관들이 많이 들어왔다고 하지. 그래서 한 번 견식 해보면 어떠하겠냐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네.”
그 말에 악진명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파악한 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형식은 비무가 좋지 않겠나. 물론 실력을 견식 하는 것이 목적이니 가벼운 형식으로 말이야.”
그는 짙은 미소를 띰과 동시에 사람들의 환호성을 가르며 번쩍 손을 들었다.
“우선, 천무학관 측의 대표일세.”
휘릭.
악진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 인영이 표홀한 보법으로 허공에 솟구쳐 단상 위에 올랐다.
“본인은 올해 천무학관에 교관을 맡은 강무석이라 하오.”
“강무석? 풍운검?”
“산동 출신의 고수가 아닌가!”
강무석이라는 이름 석 자에 장내는 놀람에 휩싸였다.
강무석은 산동에서 활동하는 고수로 그 검이 흘러가는 구름과도 여유롭다 하여 풍운검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그런 그가 천무학관에 입관했다는 소리에 다들 웅성거림을 토해냈다.
‘또 어디서 이런 고수를.’
그 뒤에 있던 팽대환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풍운검이라 하면 자신도 들어본 적이 있는 고수였다.
그 경지는 일류를 뛰어넘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어지간한 문파에서도 중진으로 있을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이는 이립 중반이었던가. 같은 산동 출신인 것으로 회유했나 보군.’
믿는 것이 있어 대련의 이야기를 꺼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설마 풍운검 정도의 고수일 줄은 예상치 못했기에 허를 찔린 심정이었다.
“이번엔 정천학관 측의 대표를 소개하지.”
휘릭.
강무석과 마찬가지로 악진명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 인영이 가벼운 움직임으로 단상 위에 올랐지만, 그때와는 조금 다른 웅성거림이 장내에 퍼졌다.
“너무 젊지 않은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있나?”
“그러고 보니 이번에 이십 대 중반의 사내가 새로이 들어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천무학관뿐만 아니라 정천학관의 이들까지 모두 의구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정천학관의 신입 교관 쪽엔 풍운검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유명세가 있는 고수들이 즐비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런 젊은이를 내보낸 것인가.
“주호라 합니다. 아직 무명 초졸인지라 이름 이외에 소개할 것이 없는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가 가볍게 포권하며 고개를 숙이자 떨떠름한 박수가 울려 퍼졌다.
“…아니, 저 친구 저기서 뭐하는 건가?”
“잠깐 바람을 쐬러 간다더니 숫제 폭풍의 가운데로 들어갔군.”
조금 전까지 자신들과 연회를 즐기던 그가 갑작스럽게 학관 대표로 비무를 한다며 단상 위에 올라섰다.
그러니 담우양을 비롯한 주호의 동료 교관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풍운검이라. 그는 분명 초일류에 다다른 고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둘의 실력 차에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담우양만이 고개를 저으며 그들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모르는 싸움일세.”
“허? 자네는 풍운검의 소문을 듣지 못했나?”
“곽형, 풍운검과 수석교관님이 비무를 한다면 어느 쪽의 승리를 점치겠나?”
“갑자기 무슨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연히 수석교관님이지 않겠나. 아무리 풍운검이라 할지라도 도호의 이름은 격이 다르니 말이야.”
“그렇다면 주호 그 친구는 절대 지지 않을 걸세.”
“…자네, 뭔가 알고 있구먼?”
곽철진이 미간을 좁히며 얼른 말해달라며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것에 담우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단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뭐, 보면 알겠지.”
***
“정천학관도 이제 한물이 간듯싶군. 이렇게나 인재가 없어서야.”
자신 앞에 선 주호를 본 강무석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가 천무학관에 입관한 것은 강호를 떠도는 것에 지쳤기 때문이었다.
어디 적당한 문파에서 식객으로 머물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나, 풍운검의 이름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만나게 된 악진명이 제안을 해왔다.
천무학관에 오지 않겠느냐고.
처음엔 코흘리개들을 가르치는 일에는 흥미가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악진명은 몇 년 있지 않아 본가로 돌아갈 때 자신을 같이 데려가 주겠다며 설득을 해왔다.
그것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천무학관은 별 관심이 없었지만, 산동악가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오대세가의 한 곳이라면 몸을 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강무석은 제안을 수락했고, 그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연회에서 정천학관의 교관과 비무를 하게 되리라는 것도 미리 언질을 받은 상태.
누가 나오던 깨부술 자신은 있었지만, 설마 이런 애송이가 나올 줄은 몰랐다.
이것은 분명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수석교관께선 무슨 생각이신 것이지.”
대표 인선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강무석뿐이 아니었다.
정천학관 소속의 교관들 역시 의아한 표정을 가지고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오직 팽대환만이 의연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강무석은 눈앞의 애송이에게 말했다.
“몸성히 내려가고 싶으면 어서 기권하거라.”
여기까지 오니 이젠 분노보단 상대에 대한 딱함이 더 커졌다.
팽대환에게 밉보인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을 터.
하지만 강무석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주호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그에게 말해왔다.
“한 세 수를 양보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
풍운검 강무석.
그는 본디 어렸을 적부터 재능이 출중했다.
거기에 더해 운 좋게 상승 무공을 익혀 꽃이 활짝 피었고, 젊은 나이임에도 산동에서 이름을 알리는 고수의 반열에 올랐다.
어딜 가나 무시하는 이가 없었고, 어떻게든 연을 잇고 싶어 안달이 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구파일방과 더불어 무림의 으뜸이라는 오대세가 중 한 곳인 산동악가까지 손을 내밀어 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한 세 수를 양보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뭐라고?”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무례를 넘어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허무맹랑한 주호의 발언에 그는 헛웃음을 토해내었다.
악진명의 부탁이 있었다만, 아무렴 신출내기 상대로 진심을 보일 수는 없기에 손속에 자비를 두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천천히 제 기도를 가다듬었다.
“몸성히 내려갈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호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정도를 걷는 무인이라기엔 너무나도 짙은 살기였다.
가벼운 도발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찢어발길 듯한 기세를 내뿜는 모습에 그는 실소를 머금었다.
서로 간의 격차가 명백했기에 상태창을 볼 필요도 없었다.
‘느껴지는 기세로 보자면 이제 막 초일류에 올라선 정도인가.’
분명 대단한 경지였지만, 근래 여러 깨달음을 얻은 자신의 상대는 아니었다.
“자, 가벼운 대련인 만큼 서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길 바라네. 물론 치명적인 살수나 의도적으로 상해를 입히는 것은 금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명심하겠습니다.”
둘 사이로 다가온 악진명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비무를 시작시켰다.
그것에 강무석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장내에 들릴 정도의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본인은 산동 출신의 강무석이라 하외다. 강호 동도들이 과분하게도 풍운검이라는 별호로 불러주고 있소. 이번 대련에서 한 수 배우길 바라는 바요.”
어찌 보면 호쾌한 성격으로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으나, 주호에게는 그 속뜻이 훤히 보여 같잖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은 채 강무석에게 마주 포권을 지었다.
“저 역시 산동 출신의 주호라 합니다. 강호 초졸인 몸인지라 많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많은 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호오, 산동의 출신이었다.
주호의 말에 강무석은 오히려 잘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같은 본향의 출신이라면 이런저런 잡음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나 산동악가의 힘으로 덮어버릴 수 있었다.
‘팔다리 하나 정도가 망가져도 말이지.’
물론 보는 눈이 많기에 심하게 손을 쓸 생각은 없었다.
그저 골병이 들 정도로 한구석을 짓이겨 놓으면 교관 일을 하는데 지장이 생길 터.
명예를 실추시킨 데다 몸 또한 성치 않다면 정천학관에서 그를 품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스릉.
“삼 초를 양보해준다고 하였지.”
강무석은 압도적인 실력 차를 선보여 대련을 끝낼 생각이었다.
주호가 말한 삼 초식.
아니, 그것조차 필요 없었다.
‘내 일 검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당장 학관에 같은 교관으로 있는 동년배들로만 보아도 자신의 적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주호가 눈에 들어올 리가 있을까.
웅웅-
“호오.”
그의 검이 울며 토해내는 소리에 장내에 있던 고수들이 감탄을 흘렸다.
“역시 풍운검이로군. 본가의 정예 고수와 비교해보아도 뒤떨어지지 않아.”
“악가와 손을 잡았다는 소리가 있는데, 과연 저 정도면 부족하지 않지.”
의식하지 않아도 들려오는 감탄 소리에 강무석은 의기양양해졌다.
스릉.
마찬가지로 주호도 검을 뽑아들었다.
강무석의 검과는 달리 저잣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철검이었지만, 그와 비슷할 정도로 매끄럽게 뽑혀 나오는 발검에 장내는 또 다른 의미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저 젊은이의 이름이 주호라고 했던가. 처음 드는 이름이거늘.”
“발검만으로 보자면 풍운검에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군. 오히려 그 나이를 보자면 훌륭하다고 할 수 있지.”
“사문은 알려지지 않은 건가.”
귓가에 속속히 들어박히는 말과는 별개로 강무석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고수는 상대의 단 한 동작만 보아도 어느 정도의 실력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주호의 발검에서 그 실력이 예상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과연, 밉보여서 내보내진 것은 아니란 소린가.’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을 앞에 두고 저리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지 못할 테니.
강무석은 살짝 신중을 기하기로 했다.
자신은 이 대련에서 승리를 따내도 본전인바.
만약 허점을 찔려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만큼의 추태는 없었다.
“…….”
둘은 서로를 향해 검을 뽑아 들고 원을 그리며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숨 막히는 탐색전에 장내를 뒤덮던 웅성거림도 가라앉았고 모두가 긴장 어린 시선으로 대련을 지켜보았다.
‘자, 그럼.’
주호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이 순간을 즐겼다.
연회에 자리하고 있는 이 중엔 강호의 명숙과 유력 문파의 중진들이 다수 자리하고 있었다.
풍운검을 꺾고 신위를 떨친다면 강호에 이름을 알리는 교두보가 될 터.
파바바밧-!
선공은 서로 이야기했던 것처럼 풍운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구름을 밀어내는 바람이라는 별호답게 그의 검이 날 선 파공성을 일으키며 주호에게로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