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그 이후에도 주호와 벽진양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함을 느낀 그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그런데 이 강의는 인원 편성이 조금 적은 것 같습니다.”
지금 그들이 있는 자리는 개관 전의 간단한 간담회였다.
각자 배정된 강의의 지도 교관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듣고 강의에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바로 전에 있었던 실전의 이해 강의는 최소 오십여 명에 달하는 교관이 과목에 편성되어 있지 않았는가.
하지만 지금 자리하고 있는 것은 벽진양과 주호 단둘뿐이었다.
그 의문 서린 말에 벽진양은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이 강호에 있어 상인에 대한 인식은 별로 좋지 못하다네. 정도를 걷는 일수록 청렴과 정의를 추구하지 않는가. 그래서 금전에 얽매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허울 좋은 소리가 아닙니까.”
“그 허울이라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강호인이라는 존재네.”
주호는 입을 다물었다.
그 자신 역시 무림맹에 있을 때 보고 들은 것이 적지 않기에 벽진양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명색이 학관이지 않나. 그러니 존속은 유지하되 그 규모는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것이지. 학관을 굴러가게 하는 것이 돈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벽진양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강의에 편성된 교관은 나를 제외하고 자네를 비롯해 셋뿐이네. 다른 둘은 모두 개인적인 사정으로 출타 중이고 개관식에 맞춰 돌아온다고 하더군. 그때는 돼서야 얼굴을 볼 수 있겠지.”
“그렇습니까.”
“강의는 보통 내 주도하에 이루어진다네. 자네를 비롯한 다른 교관들은 가끔 도와주기만 하면 되지. 그리 힘든 일은 없을 걸세.”
***
며칠 뒤.
학관의 개관 날짜가 이틀 뒤까지 다가왔다.
정천학관은 개관 전에 한 해를 무사히 지내기 위해 연회를 여는 전통이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다른 곳과 연계해 좀 더 큰 규모로 이루어졌다.
천무학관.
정천학관과 마찬가지로 하남에 자리한 학관으로 역사나 규모 면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였으나, 그 명성만은 큰 차이가 있었다.
예전부터 중원제일학관이라 불리는 정천학관에 비해 천무학관은 이렇다 할 유명세가 없었고,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부족했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몸집을 불리고자 정적이라 일컬었던 정천학관과 손을 잡고 성대한 연회를 개최한 것이었다.
다만, 그 명성은 상대적일 뿐 천무학관 역시 중원제이학관으로 불리고 있었다.
“잘 부탁하세.”
“이쪽이야말로.”
‘이런 능구렁이 같은 자식.’
천무학관의 수석교관이자 산동악가의 출신인 악진명은 부들거리는 속내를 감추며 넉살 좋은 표정으로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같이 정천학관의 수석교관이자 마찬가지로 오대세가 중 하나인 하북팽가 출신의 고수.
둘의 사이는 악연으로 점칠 되어 있었다.
처음엔 같은 명문 출신에 동년배란 이유로 곧잘 어울렸지만, 그만큼 서로에 대한 호승심도 컸었다.
그러던 중 강호를 종횡하던 팽대환이 갑작스럽게 정천학관에 몸을 담았고, 악진명도 질세라 그에 대응하듯 천무학관에 발을 담갔다.
둘의 악연은 그때부터가 진정으로 시작이었다.
팽대환이 입관한 정천학관의 명성은 나날이 고점을 찍었다.
수많은 유명인사가 방문하고 유력 세가의 후기지수가 그곳에 입관하기를 희망했다.
천무학관 역시 발전해나가긴 했으나, 정천학관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서로 엇갈린 선택에서 자연스레 열등감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정천학관이 입관생의 규모를 늘리고 교관을 확충한 것은 이미 장안의 큰 화제였다.
천무학관 역시 그에 뒤질세라 몸집을 불렸고, 이름있는 고수를 여럿 초빙했다.
“실력 있는 고수들이 많이 들어왔다고 들었네.”
악진명은 그런 내색은 감춘 채 팽대환에게 슬쩍 말을 흘렸다.
“그렇지. 자네들 역시 그렇지 않나?”
“허허, 벌써 소문이 퍼진 게인가.”
연회엔 각 학관의 관계자 말고도 강호의 명숙이라 부를 수 있는 고수들이 여럿 참석했다.
그리고 그들은 각 학관의 수석교관인 둘의 대화에 큰 관심을 보였다.
“허허, 점점 두 학관의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것 같소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 제자들도 어디로 보내야 할지 참…….”
악진명은 슬쩍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연회의 분위기는 충분히 무르익었다. 남몰래 계획하고 있던 일을 실행하기에는 딱 좋은 적기이기에 천천히 좌중의 주목을 끌어모았다.
“그렇다면 이번에 들어온 각 학관의 교관끼리 비무를 벌여 실력을 견식 해보는 것이 어떻겠나.”
마치 방금 좋은 생각이 났다는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자네.”
그것에 팽대환이 어찌할 새도 없이 주변에 있던 이들이 관심을 표했다.
이미 흐름을 파악한 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미 악진명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기대감을 보이는 눈치였다.
‘끄응.’
팽대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교활한 친우가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으리라는 것쯤은 짐작했으나, 설마 교관끼리 비무를 하자고 할 줄은 몰랐다.
거절하자니 달아오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오, 승낙하자니 그의 의미심장한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필시 어느 이름난 고수를 초빙한 것일 테지.’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에 팽대한의 머리가 재빠르게 회전했다.
섬서검협, 풍진검…….‘
이 자리에 학관의 대표로 선보여도 망신을 당하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지닌 이들의 이름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상대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생사결이 아니었다.
그러니 보통 이상의 수준을 보인다면 어느 정도 체면치레를 할 수 있을 터.
“…그렇군.”
그러던 중, 문득 누군가에게 생각이 미친 팽대환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표하자 악진명은 계획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소매 안으로 주먹을 쥐었다.
“이각 뒤에 이 자리에서 다시 모이는 것으로 하지.”
“여부가 있겠나.”
그렇게 두 학관의 자존심을 건 비무가 성립되었다.
.
.
.
“…응?”
다른 교관들과 이야기하며 술잔을 들고 있던 주호만이 무언가 기시감을 느끼곤 의문성을 내었을 뿐이었다.
***
이번 연회는 주호에게 있어서도 오랜만의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미 몇 병의 술을 비웠고, 적당한 흥취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의문성을 내니 동료 교관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이 친구 벌써 취했나 보군. 오랜만의 연회라며 쉬지 않고 마시기 시작할 때부터 알아보았다네.”
다른 이들 역시 그의 등을 두들기며 우스갯소리를 흘렸다.
아무래도 교관 중엔 제일 젊고 얼굴 또한 훤칠하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주호 역시 머쓱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고, 이내 뺨을 긁으며 다시금 술잔을 기울였다.
“…잠시 괜찮겠나.”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그들은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석교관님.”
“괜찮네, 앉아들 있게나.”
팽대환은 손을 저으며 일어난 그들에게 앉아 있으라며 만류를 했다.
“어때, 잘들 즐기고 있는가.”
“이때껏 경험해본 연회 중 손에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참 다행인 소리군.”
누군가 넉살 좋게 대답했지만, 그들 모두 내심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비단 계급의 차이도 있었으나, 팽대환은 강호를 종횡할 때도 알아주는 고수였으니.
“앞으로 이런 연회를 겪을 기회가 많을 것이야. 그때도 지금처럼 당당한 태도로 있어 주게. 자네들은 본 학관의 얼굴이니.”
“명심하겠습니다.”
팽대환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러곤 그 끝에 있던 주호와 시선을 마주치더니 살짝 턱 끝을 당겼다.
“……?”
무언가를 뜻하는 시선에 주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생각할 찰나, 팽대환은 가볍게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잘들 즐기게나. 나중에 다시 보지.”
그러곤 그것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후우.”
교관들은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주호 옆에 있던 담우양 역시 도호 앞에선 몸이 절로 경직된다며 우스갯소리를 내뱉었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다시 왁자지껄해진 분위기 속.
주호는 옆자리에 있던 담우양에게만 조용히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팽대환이 사라진 방향이었다.
과연 연회장의 구석진 쪽으로 향하니 팽대환이 홀로 서 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네 눈치가 빨라서 다행이네.”
자신에게 다가오는 주호의 모습에 팽대환은 역시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게 말이네.”
그 물음에 팽대환은 난처한 미소와 함께 사정을 털어놓았다.
“악진명이라고 내 오랜 악우인데 나와 같이 천무학관에서 수석교관 직을 맡고 있네. 뭔가 음흉한 속내가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갑작스레 올해 새로 입관한 교관들끼리 비무를 선보이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뭔가.”
“…그건 즉.”
“이런 말을 하기 그렇네만…….”
팽대환은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주호에게 제안하는 것은 남들 앞에서 광대 짓을 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같은 무인으로서 그것이 어떤 기분일지 알기 때문에 입맛이 텁텁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겠습니다.”
“…괜찮겠는가.”
망설임 없이 나온 대답에 그의 두 눈이 커진다. 그것에 주호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학관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이 아닙니까. 검 몇 번 휘두름으로 그럴 수 있다면 오히려 이득이겠지요.”
“자네…….”
팽대환은 감명받은 얼굴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사급 교관으로 들어온 이들 중 삼분지 일은 보통 한 해를 견디지 못하고 퇴관한다.
그것을 보고 무어라 할 생각은 없었다.
각자 맞는 삶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입관한 지 얼마 되지도 않고서부터 이렇게 학관을 생각해준다는 것에 마음이 움직였다.
‘과연, 맹주님의 사제.’
무공이 고강할 뿐만이 아니라 심성까지 올곧으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학관을 대표해서 자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겠네.”
팽대환은 주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팽대환의 속에서 주호의 평가가 높아질수록, 주호의 속에서도 팽대환의 평가가 높아졌다.
수석교관은 일급 교관을 제외한 모든 교관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위치였다.
굳이 자신에게 이런 부탁을 하지 않더라도 비무에 나가라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렇지 않다면 학관 생활이 힘들게 될 터니.
하지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더러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허영심과 자존심이 그에겐 없었다.
오히려 담백할 정도의 상쾌함이 말투나 행동거지 곳곳에서 느껴졌다.
‘하북팽가의 출신이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는 것인가.’
어중간한 위치에 있던 자가 위로 올라가게 되면 그 위치에서 오는 마성에 흠뻑 심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팽대환은 원래부터 정점에 있던 자니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는 듯싶었다.
‘뭐, 그의 성품도 한몫했겠지만.’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바람이네만.”
“예.”
“이왕 하는 것 확실하게 박살 내주지 않겠나. 이른바, 격의 차이라는 것이지.”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이 괘씸하지 않냐며 팽대환은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그것에 주호 역시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석교관님을 번거롭게 한 죄, 톡톡히 받아내겠습니다.”
“자네. 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무공뿐만 아니라 언변도 한 솜씨 하는군.”
“과찬이십니다.”
“여튼 잘 부탁하네.”
주호의 어깨를 두드린 팽대환은 그것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게 된 주호는 내공을 순환시켜 체내에 쌓여 있던 주기를 모두 방출했다.
“후우.”
살짝 서늘한 봄의 밤공기를 음미하던 그는 검대에 손을 올리며 연회장 안을 둘러보았다.
“비무라.”
갑작스러웠지만, 오히려 딱 좋은 때였다.
설우진과의 비무에서 얻은 깨달음들은 이미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몸이 근질거리던 차에 다가온 이야기는 사실 그로서도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확실하게 박살내 달라, 인가.”
주호는 지금까지 걸려온 싸움을 마다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