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0화 (20/300)

#20화

그 당사자조차 비현실적인 이야기라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을 때, 과열된 양상에 주위 눈치를 보던 담우양이 제 일행을 말렸다.

“그 정도만 해두게. 일부 사람들에겐 금구(禁句)인 것을 알지 않나.”

“…내가 조금 흥분했군.”

“동감일세.”

그제야 이 식당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그들은 헛기침하며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무황의 비동에 관련된 사건은 탐사대에 포함된 인원들의 출신 가문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금기와도 같은 일이었다.

실제로 그 사건이 있고 난 직후 술자리에서 종종 우스갯소리로 나오다 칼부림까지 일어난 적이 있어 전반적으로 조심하는 느낌이었다.

설마 삼 년이나 지난 일로 뭐라 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생각했지만, 정천학관은 중원을 대표하는 학관.

관련자들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기에 그들 역시 슬쩍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다른 이들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기에 다시 식사를 이어나갔다.

아침 식사 이후, 사급 교관들에 대한 과목의 배치가 공지되었다.

“아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로군.”

“한 명뿐이지만 말입니다.”

주호는 담우양과 같이 실전의 이해라는 과목에 배정받았다.

아쉽게도 그동안 안면을 튼 이들은 각자 다른 과목으로 갈렸기에 안면이 있는 이는 서로뿐이었다.

“실전의 이해라. 어제 들은 기억이 있군. 아마 남사일 대협께서 일급 교관으로 있으신 과목이었지.”

“그 화산의 매화선풍검 말입니까?”

“그렇네, 우리는 나름대로 운이 좋은 축에 속하는 것 같군.”

매화선풍검(梅花旋風劍) 남사일.

주호가 그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벌써 십오 년도 전의 일이었다.

남사일은 후기지수 때부터 화산의 제일가는 기재로 알려졌다.

어릴 적부터 무공에 있어 뛰어난 두각을 보여 뭇 많은 사람의 기대를 받았는데, 이립이 되던 해에 더 넓은 세상을 겪어보겠다며 하산을 선언했다.

그는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된 상황이었다.

당연히 강호에 대한 경험은 필요한 것이었기에 화산은 남사일의 강호행을 허락했다.

하지만 설마 그것이 십오 년이나 계속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사문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변절로 간주하여 무공을 폐하고 사지 근맥을 끊어 암굴에 가두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었고 감히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남사일의 스승은 현 화산파 장문인의 사제(師弟)였다.

무공에 매진해 폐관 수련에 들어간 장문인을 대신해 사문의 전권을 휘두르는 그를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거기에 더불어 길어진 강호행 동안 그는 협행을 하며 덕을 쌓았고, 때로는 눈부신 신위를 보이며 악적들을 무찔렀다.

이젠 스승조차 강제하기 힘들 정도의 위명을 쌓아 화산파에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최후의 보루로 선택한 것이 바로 장로의 직분을 준 것이었다.

위치는 책임을 불러온다고 하였다. 화산에서도 그러한 생각으로 그에게 최연소 장로란 직분을 쥐여준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남사일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세인(世人)들은 그런 그에게 매화선풍검이란 별호와 같이 다른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화산제일기인, 입니까.”

“듣기로는 관주님께 무언가 은혜를 입어 이곳에서 일하는 것이라 하던데. 어제 선배 교관들의 말을 들어보니 명숙답지 않게 화끈한 성격이라 하셨네. 뭐, 실제로 보아야 견적이 나오겠지만 적어도 심심할 일은 없겠군.”

“저는 미움이나 받지 않으면 만족합니다.”

“아마 자네를 제일 좋아할 듯싶네. 그분은 재능있는 자를 좋아하신다니.”

“과찬이십니다.”

둘은 잡담을 나누는 사이 강의실에 도착했다.

이미 몇 명의 인원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곳엔 사급 교관보다 더 윗급의 교관들도 심심치 않게 모습을 보였다.

‘급에 따라 정복의 색도 바뀐다고 하였지.’

사급 교관인 그들은 회색 무복이 지급되었다.

덧붙여 삼급은 흑색, 이급은 청색이었지만 일급 교관의 경우에는 딱히 지정된 정복이 없었다.

“다들 모여있군.”

주호가 강의실에 자리한 면면들을 살피고 있을 때, 어느샌가 단상 위에 올라온 한 장년인이 있었다.

연한 자색 무복 위로 울긋불긋한 매화꽃이 화려하게 피어올라있었다.

그가 바로 화산의 제일 기인이라 불리는 매화선풍검임을 알아본 주호는 흥미로운 눈으로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흠.”

강의실에 자리한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해가던 남사일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만남을 좋아하는 그였다.

작년까지 같이 일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삼분지 일 정도는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기에 반가운 마음이 컸다.

그러던 중 남사일의 눈이 한 청년에게 닿았다.

“…허?”

그는 무심코 헛바람을 내뱉었다. 조금 전 있었던 학관 간부들의 회동에서 올해 새로 들어온 교관들의 수준이 제법이란 소리를 들은 차였다.

하지만.

‘저건 제법이란 말로 평가될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남사일의 두 눈은 정확하게 주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본인의 이름은 남사일이라 하네. 화산의 장로로 학관에선 일급 교관직을 맡고 있지.”

그에게서 뿜어지는 묘한 기운에 다들 입을 다물며 시선을 모았다.

등장만으로 어수선한 장내 분위기를 정리한 남사일은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 앞에 선 이들을 둘러보았다.

“올해는 관생뿐만 아니라 교관들도 출중한 이들이 많이 입관했다 들었는데, 과연 그렇게 말할 만 하군.”

주호 근처에 있던 사급 교관들은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이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에 힘을 넣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하지만 주호만은 알 수 있었다.

남사일의 의미심장한 빛을 품은 시선이 자신을 스쳐 지나갔다는 것을.

‘너무 잘난 것도 문제로군.’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과거에는 빼어난 용모로 인해 여인들에게 관심을 받았다면, 지금은 출중한 무공으로 인해 만나는 고수마다 진한 흥미를 표하고 있었다.

그가 뒤바뀐 상황에 속으로 고개를 젓고 있을 찰나, 남사일은 이제 자신의 밑에서 일하게 될 교관들에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주위에 있는 교관들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깊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감명받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주호의 시선은 그보다 조금 더 옆으로 치우쳐 있었다.

[상태창]

-새로운 인물의 정보를 불러옵니다.

이름: 남사일

별호: 매화선풍검

직업: 정천학관 일급 교관

화산파 장로

나이: 마흔다섯

소속: 화산파, 정천학관

경지: 절정(五/十)

무공: 이십사수 매화검법

잠재력: -

호감도: 中中

‘나보다 몇 수 위의 고수다.’

남사일은 주호가 만난 사람 중 무림맹주 단철량과 정천학관주 설우진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경지의 고수였다.

과거 화산의 제일가는 기재이자, 지금은 화산을 대표하는 고수 중 한 명.

불혹에 나이에 들어 완숙의 경지를 이루었고 그동안 쌓은 업적과 위명으로 매화선풍검이라는 별호로 불렸다.

그리고 그로 인해 주호는 자신의 위치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 세가의 장문인이나 가주는 무리지만, 그 밑의 장로급들과 비슷한 경지인가.’

물론 비슷한 경지라 할지라도 보통 나이가 젊다면 실전 경험에서 큰 차이가 나기 마련.

하지만 주호는 가상전투 훈련으로 인해 수많은 고수와 생사를 건 싸움을 수도 없이 넘어왔다.

비록 현실과 괴리가 있어 전부 적응하지 못했지만, 그들을 뛰어넘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그리고 나는 아직 젊다.’

대문파의 유망한 인재들이 불혹의 나이에 이룩한 경지를 채 이립이 되기 전에 도달하지 않았던가.

아직 주호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았다.

“자세한 것들은 다른 교관들이 설명해줄 걸세.”

그가 잠깐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 남사일의 이야기가 끝났다.

담우양은 그런 주호의 어깨를 툭 치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는가?”

“간밤에 잠을 설쳐서 그런가 봅니다.”

“싱겁기는.”

곧 그들의 앞으로 이급 교관이 다가와 설명을 시작했다.

주호가 배정된 ‘실전의 이해’는 실습 위주로 진행되는 강의였다.

삼, 사급 교관에게 각각 몇 명의 인원이 분배되고 남사일의 지도에 따라 교육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끝으로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괜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지양하도록. 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각자 잘 알 것이라 믿는다.”

그 의미심장한 끝맺음에 다른 이들은 당연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주호는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유력 문파의 후기지수들을 이야기하는 걸세.”

옆에서 그의 표정을 본 담우양이 조용히 귀띔해주었다.

아무리 정천학관의 교관이라 할지라도 어지간한 명상과 무공이 아니라면 개인이 단체와 맞먹기는 힘들었다.

혹시라도 유력 문파의 후기지수들에 실수라도 하면 개인과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문에까지 영향을 끼치니.

주호는 담우양의 짤막한 설명을 듣고서야 그 속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복잡하기 그지없군.’

정천학관에 들어오게 된다면 그런 사소한 것쯤은 넘어갈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곳일수록 그런 알력들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자신이 평범한 무인이었더라면 그런 요소들에 노심초사해야 했을 터.

‘턱도 없었군.’

철없던 시절, 아무것도 모르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 입맛이 살짝 씁쓸해진 주호였다.

***

주호는 전공 항목에 속하는 실전의 이해와는 별개로 교양 과목 중 하나인 ‘재화 관리’도 같이 배정받았다.

이유인즉, 그의 출신이 상계 가문이라는 것에서였다.

출신만 상계 가문일 뿐 상법이나 셈법에는 손을 놓은 지가 몇 년째인가.

당황함을 금치 못했지만, 이미 위에서 내려진 결정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가장이라, 주형과는 면식이 있지.”

하지만 주호는 그곳에서 묘한 인연을 만났다.

재화 관리의 담당은 이급 교관인 벽진양이란 중년인이었다.

벽진양은 호남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는 거부로 금을 산처럼 쌓아놓았다고 하여 금적산(金積山)이라 불렸다.

그렇기에 본래는 이런 일을 하지 않고도 편안히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심심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몇 해 전부터 교관직으로 와있었다.

무인으로서의 명성은 거의 없었지만, 상인으로는 초고수의 반열에 드는 위치.

그렇기에 상인으로서 대성(大成)했다고 인정받아 정천학관의 이급 교관직을 맡을 수 있었다.

“제 부친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같이 사업까지 한 사이지.”

상계 가문에서 자란 주호 역시 그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부친과 친분이 있을 줄은 몰랐기에 놀란 마음이 컸다.

“주형께선 소싯적, 내가 힘들 때 여러 도움을 주셨지. 잘 지내고 계시는가? 몇 해 전까진 간간이 연락이 닿았는데 갑작스레 끊겨서 말이네.”

“…저도 사정이 있어 얼굴을 뵈지 못한 지 벌써 몇 해가 지났습니다. 얼마 전에 본가에 들렸더니 몸이 좋지 않으시다면서 어머니의 본향인 사천으로 요양하러 가셨더군요.”

“이런, 산삼이나 몇 뿌리 다려 보내드려야겠구먼.”

벽진양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곤 주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주형의 아들이면 내겐 조카와 다름없지. 너무 어려워할 것 없네. 사석에선 숙부라 불러도 괜찮으이.”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벽 숙부, 그러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