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황급히 자신의 소매를 내려다보자 한 치도 되지 않는 길이가 잘려 바람에 너풀거리고 있었다.
“허허…….”
실력의 차이는 명백했다.
전력을 내보인 것은 아니지만, 결코 메울 수 없는 벽이 있었고 닿지 못하리라 여겼다.
‘대단하군.’
설우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단지 무공만 강한 것이 아니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투지, 무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그의 가슴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졌군.”
그렇기에 그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설우진이 졌다는 표시로 두 손을 들며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주호의 귓가에 다시 한번 익숙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청룡신공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주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검을 거두었다.
반 푼의 차이였다.
설우진과의 대련을 통해 그는 딱 반 푼의 힘을 숨기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 드러낸 반 푼의 전력은 빛을 발했고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보상은 내 근시일 내로 자네에게 필요해 보이는 것을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주호는 정중한 자세로 포권을 올렸다.
이번의 비무로 얻은 것이 적지 않다. 한시라도 빨리 숙소로 돌아가 깨달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어여 가보게. 얼른 자네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나.”
설우진도 그런 그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그에 주호는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을 끝으로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허허.”
홀로 남게 된 설우진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비무의 여파로 여기저기 부서지고 손상된 장원의 풍경이 깨어져 내렸고 곧 처음과 같은 상태로 돌아왔다.
“다음 비무에는 이 진법을 사용하지 못하겠군.”
간단하게 설치했다곤 하나 그가 익힌 평생의 정수가 녹아 있는 진법이었다.
그것이 조금 전의 비무로 휘청거릴 만큼 충격을 받았기에 설우진은 혀를 내둘렀다.
지금도 이럴진 데 조금 전의 비무에서 얻은 깨달음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더 강해지겠는가.
“말년에 심심하지는 않겠군.”
곧 추월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며 그는 주호가 나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
“후우.”
숙소로 돌아온 주호는 조금 전까지의 비무로 인해 남아있던 열기의 여파를 토해내었다.
‘나쁘지 않다.’
자신보다 더 상위 경지에 있는 고수와의 비무.
그것은 한동안 막혀 있던 벽을 흔들기에 충분한 충격을 주었다.
짧은 시간 동안 나눈 적지 않은 공방은 그를 다음 경지로 인도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참.”
반듯하게 잘려나간 앞섬에 주호는 옷을 갈아입었다.
여벌의 무복은 넉넉하게 준비해뒀기에 한 벌 정도 못 입게 된 것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수업료로는 턱없이 싼 값이지.’
다음 경지에 대한 심득도 얻었을뿐더러 설우진과 내기에서도 승리했다.
그가 무엇을 줄지는 모르겠으나 필시 작은 값어치를 하는 것은 아닐 터.
설사 반년 치 월봉을 날렸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손해가 없는 장사였다.
“돈이야 궁하지 않으니.”
그의 가문인 주가장은 상계 가문으로 적지 않은 금전이 유통된다. 거기에 혈사문까지 정리했기에 기울어가던 가세가 다시 활기를 찾았다.
‘녀석, 뭐 이리 많은 돈을 준 것인지.’
가문을 떠나기 전, 그의 동생은 적지 않은 돈을 챙겨주었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이러한 것뿐이라고 말해왔지만, 주호는 그런 동생의 마음씨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참, 연락이라도 해놓아야겠군.”
무림맹에 돌아갈 때까지만 해도 정천학관에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다.
몇 달이면 다시 돌아가게 될 줄 알았건만, 교관으로 일하게 된다면 적어도 한 학기가 끝날 시점인 반년까지는 발이 묶이는 신세가 될 터.
‘향이가 실망하려나.’
본가를 떠나기 전, 가족 전부와 강호를 유람하자며 약속을 잡은 것이 화근이었다.
비싼 선물을 사가면 화가 풀릴까 싶어 고민할 찰나, 주호는 탁자 위에 있는 한 장의 서찰을 발견했다.
“응?”
서찰이라기보단 급히 휘갈겨 쓴 한 장의 글귀였다.
“담형인가.”
내용인즉, 다른 동료들과 안면도 틀 겸 회식 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언제 돌아올지 몰라 서신을 남기니 자신만 괜찮다면 학관 앞의 주점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주호는 주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참여했을 것이었다.
예로부터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는 그였으니.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쉽지만, 비무로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는 것이 급선무니.”
사람의 기억과 감정은 영구하지 않다.
그렇기에 가장 선명할 순간, 뇌리 깊은 곳에 각인시켜놓아야 했다.
“일인실이라 다행이로군.”
교관의 숙소는 전부 일인실로 되어 있었다.
방 한쪽 구석에 짐을 풀어놓은 그는 행여나 누가 방해할까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후우.”
그러곤 다시 깊은 한숨과 함께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곤 조용히 내면으로 빠져들었다.
***
다음 날 아침.
동이 채 트기도 전에 일어난 주호는 가볍게 자리를 정리한 후에 숙소를 나섰다.
교관 숙소 옆에는 무공을 수련할 수 있는 교관 전용 연무장이 있었다.
아쉽게도 개인실은 아니었지만, 정천학관의 이름답게 부족한 시설은 아니었다.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연무장에 인적이 없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주호는 개의치 않고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아 천천히 검을 들었다.
서서히 걷혀가는 어둠 사이로 그의 검이 유려한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내공을 싣지 않아 눈에 띄는 위력을 보이진 않았으나 눈썰미가 있는 자가 본다면 평범한 초식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터.
설사 누가 본다고 하더라도 형태만 가지고 따라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기에 주호는 마음껏 연무장을 누볐다.
빠르게, 혹은 느리게.
가볍고 무거우면서도 정적임과 동시에 동적인.
반 시진 정도 홀로 검을 휘두르고 있으니 슬슬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침 수련을 하러 왔는지 가벼운 차림에 각자 병장기를 들고 있다.
주호는 그들과 가볍게 눈인사를 한 뒤 수련을 이어나갔다.
연무장에 온 교관들 역시 주호에게 무언의 화답을 하곤 다른 쪽에 자리해 서로 방해하는 일 없이 자신의 수련에 집중했다.
“자네도 나와 있었나.”
그로부터 이 각 정도 지났을까, 주호의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 형.”
슬슬 수련을 끝내고자 했기에 긴 한숨과 함께 검을 내린 그는 고개를 들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어제 낮부터 밤까지 달렸으니 말일세.”
술이 나인지 내가 술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며 담우양은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그렇다고 해서 수련을 빼먹을 수 있겠나. 검에 살고 검에 죽는 인생인 것을.”
가볍게 몸을 푼 그는 주호 옆에 자리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들을 시작으로 찍했던 연무장에 하나둘씩 발걸음이 이어졌다.
다행히 연무장은 제법 규모가 있었기에 비좁음 없이 수련을 끝낼 수 있었고, 둘은 숙소 옆에 우물에서 몸을 씻었다.
“그나저나 아쉽군. 자네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일 처리가 늦게 끝나는 바람에.”
담우양에 말에 주호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전날 새로이 들어온 교관들은 주점에 모여 술자리를 가졌다고 했다.
정천학관의 교관 정도 되는 위치면 각자 명성과 실력이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담우양 역시 섬서검협이란 별호로 알려져 있었기에 그들과 빠르게 친분을 틀 수 있었고,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뭐, 기회는 한 번만 있는 것이 아니니 차차 만나도록 하게나.”
담우양은 무인에게 있어 최우선순위는 단연 무공이었지만, 인맥이나 친분을 다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주호는 무림에 출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졸이었기에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되었을 터였기에 살짝 아쉬운 마음이었다.
“많은 지도 부탁드립니다, 담 형.”
주호는 그런 담우양의 배려가 고마웠다.
무황의 무공을 얻기 전까지 그의 강호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무림맹에 들어가고 겨우 동료라 부를 수 있는 소수의 사람이 생기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홀로 살아남았다.
그렇다고 해서 설우진과 비무를 하느라 가지 못했다는 것을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강호에 있어서 지나친 이목을 끄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분란을 가져왔다.
하물며 관주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여러 이야기가 나올 터.
주호는 그렇게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침 수련의 열기를 씻어낸 그들은 무복을 갈아입고 조식을 들기 위해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많은 사람이 자리에 앉아 식사하고 있었고 음식을 받은 주호와 담우양이 자리를 찾고 있을 때, 누군가 그들을 불렀다.
“여기, 여기로 오게나!”
“곽 형!”
그의 부름에 담우양은 반색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주호도 그 뒤를 따라 자리에 앉았고 천천히 그들을 둘러보았다.
‘별 특징은 없나.’
담우양을 부른 곽철진을 비롯해 다섯 명의 사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모두 전날 인사를 하며 안면을 튼 사이였기에 주호 역시 무리 없이 일행에 녹아들 수 있었다.
“참, 자네들 과목은 정했는가?”
“우리 같은 사급 교관들은 아마 선택권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네.”
“듣기로는 오늘 발표한다고 했었는데.”
정천학관의 교관의 직분은 일급부터 사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사급은 주호처럼 갓 학관에 취직한 이들을 가리켰다.
삼급은 일 년 차 이상의 교관으로 연차가 쌓인다면 무리 없이 승진할 수 있었다.
이급은 팽대환같은 고수들이 대부분으로, 이중 대표를 수석교관이라 칭했다.
일급 교관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장로급들로 어딜 가도 배분이나 명성이 밀리지 않을 명숙이 자리했다.
보통 큰 과목의 중심을 일급 교관이 담당하고 그 밑으로 세부적인 항목을 나누어 하위급의 교관들이 맡았다.
본래 자신의 특기와 적성에 따라 가르칠 과목을 선택할 수 있었다.
다만, 갓 들어온 신입 교관들은 심사를 볼 때 평가된 수치로 임의의 강좌에 배치받게 되었다.
“까놓고 말해서 구파일방이나 오대 세가 급의 후기지수들이 있는 과목은 가능한 되지 않았으면 한다네. 그들이 익힌 무공이야 우리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이지 않나.”
“그렇지, 괜히 무공에 지적해봐야 좋은 소리가 돌아오지도 않을 테니.”
푸념 섞인 말들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주호 역시 공감하는 바였다.
제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익혔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 내려온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역사를 이기긴 힘들었다.
거기에 괜한 지적으로 인해 그들의 사문에 말이 흘러들어 가게 된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어지간하면 유력 세가의 후기지수들과 마주하는 것은 꺼리는 성향이 강했다.
“어디 기연 얻을 곳이라도 없나.”
“그러고 보니 사 년 전인가 삼 년 전인가 무황의 비동이 나돌지 않았나.”
“그러면 뭐 하나. 입구도 무너졌고 안에 들어간 이들도 꼼짝없이 갇혀 아사 아니면 서로 싸우다가 죽었을 텐데.”
“아쉽군, 무황의 무공을 얻었다면 벌써 세상을 호령하고 있을 텐데.”
“무황도 무황 나름이지. 삼백 년 전 사람의 것이 지금 시대에 통하지 않을 수도 있잖는가.”
“어허, 그래도 고금제일이라 불렸던 사람이 아닌가.
어느새 화제는 무황의 무공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
삼백 년 전이라도 고금제일의 고수라 칭송받을 정도였으면 작금 시대에도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르지 않겠는가.
교관들은 그것을 주제로 갑론을박을 벌였다.
그것에 주호는 애써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식사를 이어갔다.
‘내가 그 진전을 이은 것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삼 년에 걸친 작업 끝에 땅을 뚫고 그곳에서 나온 이가 있다면 사람들은 과연 믿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