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정말입니까?”
“그러면 거짓으로 말하겠나.”
설우진의 말에 주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제 그와 같은 고수와 비무를 할 수 있을까.
‘좋은 기회다.’
이때껏 그가 싸워온 이들은 하수들밖에 없었다.
피를 튀기는 싸움을 했다지만, 대부분 일방적이었고 위천강의 때를 제외하곤 긴장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무림의 말학이 선배님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좋지, 내려가세나.”
자리에서 일어난 주호는 곧바로 포권을 올렸고, 설우진은 기껍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자에서 내려간 둘은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참, 아무것도 없이 하면 심심하지 않나.”
“…예?”
천천히 설우진의 기운을 읽어가던 주호는 생뚱맞게 튀어나온 그의 말에 의문성을 내뱉었다.
“뭐라도 걸어야 하지 않겠나.”
“아…….”
의외였다.
단지 가르침을 가르쳐주려 하는 것 같았는데 갑작스레 내기를 걸어오자 주호는 실소가 나왔다.
“단순히 승패로 논하기엔 무리가 있으니 제한을 걸지. 내 옷자락 끝이라도 벤다면 자네의 승리로 판단해도 상관없네.”
“그건…….”
그건 자신을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냐며 말을 꺼낼 찰나, 주호는 그의 눈동자에 섞여 있는 진심을 볼 수 있었다.
‘작정하고 할 생각인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허투루 말해오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무엇을 걸겠는가. 난, 그래. 자네 월봉의 반년 치가 적당하겠군.”
“월봉 말입니까.”
그 말에 주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일반 교관으로 들어선 그의 월봉은 삼십 냥이었다.
물론 팽대환은 곧바로 대폭 인상해줄 것을 약조했다.
교관 사이에서도 수준은 있는 법이니.
그것을 대략 백오십 냥 정도 잡고 있으니 반년 치라면 천 냥에 가까운 액수였다.
분명 적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설우진과 같은 고수와 하는 내기라기엔 살짝 미묘한 느낌이 있었다.
“자네는 무엇을 원하는가.”
“저는…….”
주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설우진이 제시한 월봉 반년 치는 일종의 기준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내린 결론은.
“제가 무언가를 요구할 처지가 되겠습니까. 이렇게 마주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합니다.”
“하하하!”
주호의 말에 설우진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었다.
매우 유쾌했다.
어딜 가서 이런 젊은이를 만나보겠는가.
설우진은 무인의 됨됨이를 알아보는 데 있어 가장 직관적인 방법을 비무라 생각했다.
거기에 내기라도 할라치면 자신의 명성에 무언가 하나라도 더 얻어내고자 하는 그런 이들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주호의 대답은 지금까지의 이들과는 달리 너무나도 예상외의 것일 뿐.
“아, 미안하네. 비웃은 것은 아니야. 나에게 그러한 말을 했던 것은 자네가 처음이어서 말이지.”
겨우 웃음을 그친 그의 입가엔 미소가 서려 있었다.
“자, 그럼 제대로 해보지. 아, 내기는 할 걸세. 내가 이긴다면 자네 월봉의 반년 치는 내 것이 되는 거고 자네가 이긴다면……. 뭐, 적당한 것을 주도록 하지.”
“굳이 주신다면 거절은 하지 않겠습니다.”
주호는 그 말에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우진이 웃음을 터트린 것을 보니 자신의 대답이 정답에 가까운 듯싶었다.
실제로도 주호는 비무만으로도 만족했다.
초절정의 고수와 검을 겨룬다면 적지 않은 깨달음을 얻을 터.
무인에게 있어서 가장 값어치가 나가는 것은 무공이 아니겠는가.
“…….”
대화를 끝낸 주호와 설우진은 입을 다문 채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다만, 어디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로운 태도인 설우진에 반해 주호의 얼굴은 사생결단을 낸 원수를 만난 것처럼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작지 않은 차이지만.’
그와 자신 사이엔 분명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하지만 설우진이 말하지 않았던가.
-우물에서 나오려면 자신이 그 안에 있다는 것부터 알아차려야 하지. 그런 면에서 자네는 더 위의 경지로 올라갈 준비가 되었어.
다음 경지로 향하는 길은 언제 열릴지 모른다. 지금의 비무에서 일수도, 아니면 어느 날 길을 걷다 문득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었다.
웅웅.
청룡신공의 내공인 청룡기(靑龍氣)를 잔뜩 머금은 주호의 검이 깊은 울음을 토해냈다.
그 안에 깃든 내력이 범상치 않음을 느낀 설우진은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보여 보아라. 어떤 무공이 이런 고수를 키워냈는지를.’
앞서 말했듯 그는 소싯적 여러 곳을 떠돌며 많은 것을 보고 배웠기에 어지간한 무공이라면 대충 알아볼 수 있는 눈썰미를 가지고 있었다.
주화 같은 신진고수를 키워냈다면 필시 범상치 않은 무공일 터.
“호오.”
푸른 불꽃이 그의 검을 휘감는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태워버릴 듯 세차게 일렁거리며 존재감을 펼치는 그것에 설우진 역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저적.
“……!”
그가 검을 뽑자마자 공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아니, 공기뿐만이 아니었다.
장원을 장식하고 있던 풀도, 길을 메우고 있던 흙도 모두 서리가 낀 채 그 모습을 감췄다.
“…한천설령검법.”
“오호, 이 무공의 이름을 알고 있는 자는 드물 텐데 데 말이지.”
주호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설우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저 멀리 사시사철 한설이 몰아치는 북해의 출신이었다.
한천설령검법 역시 북해의 무공으로 중원엔 알려지지 않았으나, 북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강맹한 무공이기도 했다.
하늘마저 얼어붙고 눈 속에 혼을 가두는 검법.
한천설령검법의 정수가 설우진의 손에서 펼쳐졌다.
허공에 솟아난 검이 얼어붙은 허공을 베어 갈랐지만, 푸른 불꽃 역시 뼈 시린 냉기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피워 올리며 내리 앉은 서리들을 녹여갔다.
“자, 들어오게.”
“그러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쐐애애애액!
마치 신기루처럼 사방에서 쏟아져 내리는 설우진의 검에 주호는 힘껏 땅을 박찼다.
서늘한 검기가 발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주호는 표정의 아무런 변화 없이 가볍게 몸을 뒤집고는 날카로운 일 검을 내질렀다.
파바바밧-!
분명 검이 휘둘러진 것은 한 번이었다. 그러나 수 줄기의 시퍼런 검기가 솟구쳐 허공을 갈랐다.
“설마 이것이 전력이라 하진 않겠지?”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설우진 역시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그것들을 간단히 막아냈다.
탁.
바닥에 내려선 주호는 깊은 숨을 들이 내쉬었다.
설우진은 딱 그가 생각한 정도의 강함을 보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 격차는 더 절실히 느껴졌고, 자신의 부족함은 뼈저리게 다가왔다.
‘정말 우물 안의 개구리였군.’
꽈아악.
검을 잡은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솟아올랐다.
솔직히 자만하던 마음도 있었다. 경지의 차이가 있지만, 자신은 무황의 무공을 익히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이 정도는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발악만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격차가 있었지 않은가.
‘머리는 차분히, 가슴은 뜨겁게.’
주호는 싸늘히 내려앉은 두 눈으로 설우진의 검을 응시했다.
주위를 노니는 한 줄기 미풍은 금방이라도 꺼질 것같이 가벼웠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는다면 그 속에 숨어있는 뼈 시린 냉기에 전신이 얼어붙을 터.
“후우.”
주호는 천천히 제 전력을 끌어올렸다.
일전에 있었던 위천강과의 싸움으로 작은 깨달음이 있었던바.
비록 어느 정도 손속을 두었다 할지라도 천마신공을 겪은 것은 그에게 있어서 작은 기연이라 부를 수 있었다.
천마신공과 청룡신공.
상반되는 기운을 가진 두 절기의 격돌에서 주호는 자신의 미숙함을 느꼈고, 검을 가다듬었다.
“그것이 네 절기인가.”
설우진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주호의 검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탄을 자아낼 실력이었다.
이 정도면 학관에서 열 손가락 안에도 꼽을 수 있는 경지지 않나.
하지만 더 숨겨둔 것이 있는 듯한 모습에 흥미가 동했다.
“그렇다면 이쪽도 마주하는 것이 예의인 법.”
설우진의 검에도 이전과 다른 강맹한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숫제 검기를 넘어 검강이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기운이었다.
하지만 주호는 주눅드는 일 없이 검을 휘둘렀다.
“현검(絃劍).”
청룡검식(靑龍劍式)
현검(絃劍), 흐름의 검
청룡검식은 막대한 내공과 복잡한 무리(武理)를 필요로 했다.
그렇기에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숙련도가 있는 것은 현검밖에 없었다.
‘하지만!’
구우우웅-!
현검에서 발산된 막대한 압력이 북풍한설의 냉기를 찍어 눌렀다. 그 가공할만한 힘에 설우진은 무심코 감탄을 흘렸다.
“좋구나, 좋아!”
우웅.
동시에 그의 검에서도 눈 부신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한천(寒天)-”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하늘도 땅도 공기도 푸른 초목도.
날숨에서 새어 나온 입김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고, 푸른 불꽃으로 휩싸인 주호의 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크윽?!”
궤를 달리하는 검세(劍勢)에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주호는 이를 악물었다.
비무라 하기에 어느 정도 손속에 사정을 두어줄 줄 알았건만, 이것은 숫제 사생결단을 내는 싸움이 아닌가.
‘먼저 그렇게 마음먹은 것은 내 쪽이지만.’
일순간이라도 틈을 보이면 단숨에 심장까지 얼어붙게 할 냉기가 혀를 내밀며 그의 전신을 압박해왔다.
쉬시시식!
설우진의 공격은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한순간의 여유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바람과 동시에 매서운 검격으로 주호를 몰아세웠다.
캉!
궁지에 몰린 주호는 겨우 그의 검을 강하게 후려쳐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후우.”
숨을 내쉬자 새하얀 입김이 솟아올랐다.
분명 지금 계절은 완연한 봄일 테지만, 이 주변은 한겨울인 마냥 서리가 내리 앉아 있었다.
“쯧.”
주변뿐만이 아니었다.
주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자신의 팔.
검을 쥐고 있는 손부터 팔 전체가 얼어붙어 제대로 된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다.
부스스스-
청룡신공을 운용해 내기(內氣)를 일으키자 그것들은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어떤가, 계속할 텐가?”
서로 전력을 다하지 않았지만, 힘의 격차가 명백히 드러난 상태에서 온 물음이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짓궂은 성격이시군.’
물론, 그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는 아직 패배했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가.”
패기 넘치는 대답에 설우진은 미소를 지었다.
‘진법은, 아직 괜찮나.’
그의 시선이 주변의 풍경으로 향했다.
이 장원 주변으로 기운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는 진법이 펼쳐져 있었다.
자신이 취미로 공부한 것이었으나, 그것이 몇십 년이 지나니 어느 경지를 이루었다.
어지간히 난동을 부려도 괜찮을 터. 하지만 흥이 넘쳐 생각보다 힘을 과하게 쓰고 말았다.
‘그이는 싸움에 빠져서 그런 생각도 못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학관 내에서 이렇게 큰 소란을 벌일 수야 없지 않은가.
설우진은 주호를 볼 때마다 꼭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자네도 이 뒤의 일정이 있을 테니 이 한 수로 끝내지.”
진법의 한계를 가늠해본 설우진은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곤 결착을 내자 말했다.
한 수로 끝내자는 말에 주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폭풍 같던 둘의 기세는 다시 갈무리된 채 고요한 바다의 움직임처럼 서로를 향했다.
곧 한 줄기 바람이 그들의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얼어붙은 초목의 나뭇잎이 그것에 휩쓸려 바닥에 떨어졌을 때, 둘의 신형은 짜기라도 한 듯 뒤바뀌어 있었다.
서걱.
“…….”
주호는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잘려나간 앞섬 사이로 스산한 공기가 스며든다. 실전이었다면 생사를 가를 만한 상처였다.
“내기는 내가 이긴 것 같군.”
설우진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검을 거두었다.
앞섬이 잘려나간 주호와는 달리 그의 태도는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주호 역시 마찬가지로 가벼운 미소와 함께 그의 왼쪽 소매를 눈으로 가리켰다.
‘설마?’
의미심장한 그의 표정에 설우진의 얼굴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