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17화 (17/300)

#17화

이레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주호는 그동안 정천학관의 교관으로 수백 명의 입관 후보생의 심사를 끝마쳤다.

그리고 여드레째의 아침.

드디어 입관 심사가 모두 끝났기에 가뿐한 기분으로 일어난 주호는 숙소 안에 있던 짐을 정리했다.

그 이후 객잔에서 간단히 요기한 그는 곧바로 정천학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학관 입구에 도착하니 전날보단 한산한 인파가 그를 반겼다.

입관 심사가 끝났기에 정식 개관까지 학관을 개방할 이유가 없었지만,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곳을 기웃거리는 것이었다.

그들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은 주호는 당당히 학관 안으로 들어갔다.

외원을 가로질러 내원으로 들어가니 작은 정원이 나왔다.

이미 몇 명의 인원이 그 안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주호의 등장에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자네, 왔는가.”

“좋은 아침입니다.”

담우양은 주호의 인사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곤 그를 데리고 가 조금 전까지 자신과 담소를 나누던 이들에게 소개했다.

“자자, 인사들 하시게. 아마 교관으로는 최연소 나이라지?”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주호라 합니다. 무림에 출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명은 없습니다.”

담우양이 그의 나이가 스물여섯이라는 것을 말하자 모두가 놀란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주호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이립(而立)이 훌쩍 넘은 나이이지 않은가.

“혹시 사문이 어떻게 되나?”

“스승님께선 세속을 등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따로 댈 만한 이름은 없습니다.”

“호오, 흔히 있는 이야기군. 자네 같은 고수를 후계로 두신 것을 보면 대단하신 분일 것 같은 느낌이 드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문을 물어보는 말에 이제 주호는 익숙한 듯 거짓말을 청산유수처럼 쏟아냈다.

다들 그의 무공이 나이에 비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기에 대충 수긍하는 눈치였다.

담우양은 그가 어려워하지 않도록 돌아가며 다른 이들과 인사를 시켰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대략 소개가 끝나자 주호는 담우양에게 감사를 전했다.

숫기가 없진 않았지만, 무림인 특성상 남을 경계하는 문화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다른 이들과 안면을 트는 데 시간이 걸릴 터였으나, 섬서검협이라는 이름에 편승해 손쉽게 무리에 녹아들 수 있었다.

“선배는 무슨. 나이도 얼마 차이도 나지 않네만, 편하게 부르세. 앞으로 같이 활동할 동료이니 말이야.”

“사실 저도 딱딱한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담형.”

주호는 씩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담우양 역시 넉살 좋게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맞잡았고, 그 이후로도 다른 이들과 섞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통성명은 다들 하였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팽대환을 비롯한 몇 명의 인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선임 교관들로 보이는 이들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지만, 맨 뒤에서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걸어온 중년인을 본 순간 주호는 감탄을 흘렸다.

[상태창]

-새로운 인물의 정보를 불러옵니다.

이름: 설우진

별호: 빙백검

직업: 정천학관주

나이: 예순 하나

소속: 정천학관

경지: 초절정(四/十)

무공: 한천설령검법

잠재력: -

호감도: 中上

‘단 노인을 제외하곤 지금껏 만난 자 중 가장 고수다.’

과연 중원제일학관인 정천학관의 관주라는 것인지 일신에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흠.”

설우진 역시 흡족한 얼굴로 장내에 있는 교관들을 바라보았다.

올해 작년보다 입관생을 많이 뽑았던 건 구파를 비롯한 유력 문파들의 은근한 압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교관의 인원을 무리하게 확충했지만, 생각보다 평균 수준이 높았다.

‘특히.’

교관들 앞에 나선 팽대환이 학관에 대해 공지를 할 찰나, 설우진의 눈이 주호를 주시했다.

주호는 평상시 자신의 기세를 내부에 갈무리해놓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어지간한 실력이 아니고서야 그의 경지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설우진은 주호보다 몇 수위의 고수였다.

‘듣기로는 스물 중반이라고 했는데, 저 정도 경지라니.’

앞서 팽대환의 말을 들었을 때는 제법 한 가닥 하는 후기지수로만 생각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니 확연히 달랐다.

팽대환은 그보다 몇 수 아래였기 때문에 진면목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일 터.

‘과연, 맹주가 친히 서신을 보내올 법하구나.’

천하의 무림맹주를 키워낸 고수가 스승이니 말년에 들였다곤 하나 그 제자 역시 범상치 않았다.

“관주님.”

이야기를 끝마쳤는지 자신을 불러오는 목소리에 설우진은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군. 재밌는 걸 발견해서 말이야.”

“나중에 저도 귀띔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자네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설우진은 미소를 지으며 팽대환의 앞으로 나갔다.

그러곤 자신을 향해 시선을 보내는 이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반갑군, 본인은 설우진이라 하네. 부족하나마 이곳의 관주를 맡고 있지.”

“관주님을 뵙습니다.”

그의 소개에 장내에 있던 교관들이 각자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설우진은 소싯적 강호를 종횡하던 고수였다.

보통 그 정도의 명성이나 무공을 가지고 있으면 명문 문파나 세가에 초청을 받거나 그렇지 않다면 일가(一家)를 이루어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는 일신의 양명을 쫓기보단 정천학관에 들어가 후학을 양성하는 것을 택했다.

지금에 와선 정천학관이 중원제일학관으로 우뚝 서는 것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설우진은 간략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교관으로서의 마음가짐, 정천이란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대부분 해마다 의례적으로 말해온 내용이었지만, 교관들은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그에 집중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길어지면 지루한 법이지.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세.”

마지막으로 자네들에게 기대하고 있다며 한 명 한 명 시선을 맞추어 고개를 끄덕여준 그는 수고하라는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아.”

하지만 장원을 나가기 전,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걸음을 멈춘 설우진은 팽대환을 보곤 작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알겠습니다.’

귓가에 들려온 전음에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내용인즉, 누군가와 이야기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나 보군.’

설우진은 굳이 전음까지 써가면서도 그 대상이 누군지는 정확하게 지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가리키는 사람을 파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네, 잠깐 나 좀 보지.”

***

“다들 반갑군, 본인은…….”

정천학관의 관주인 설우진의 등장에 다들 존경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한 남자가 있었다.

‘읽혔다.’

주호는 무거운 마음을 지우지 못했다.

아무리 상대의 경지가 자신보다 출중하다곤 하나, 이쪽에선 작정하고 철저히 기운을 감췄다.

물론 무림맹주 정도 되는 단 노인에게 무공을 들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초절정 초입에 있는 설우진에게까지 무위를 읽히는 것은 예상치 못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길어지면 지루한 법이지.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세.”

자네들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말을 끝으로 그는 자리를 떠났다.

‘음?’

그때 주호는 밖으로 나가던 설우진의 입술이 작게 달싹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엇인가 싶었으나,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 굳이 심력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다른 교관들과 함께 배정된 숙소로 향했지만, 이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자네, 잠깐 나 좀 보지.”

“저를 부르셨습니까?”

팽대환의 눈은 분명 주호를 지목하고 있었다.

다른 교관들 사이에서 살짝 웅성거림이 일어났을 때,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행정 처리에 뭔가 문제가 있어서 말이네. 그리 중한 것은 아니지만, 괜히 잡음이 생기기 전에 빨리 정리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주호는 담우양에게 잠깐 다녀오겠다며 눈짓을 하곤 팽대환의 뒤를 따라갔다.

정원을 나선 둘은 나란히 길을 걸었다. 그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주호 쪽이었다.

“그래서 저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눈치도 빠르군. 용모도 수려하고 무공 또안 동년배에 적수가 없으니 도대체 자네의 모자란 부분이 무엇인가.”

“그런 본인께서 얼굴에 금을 칠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칭찬엔 칭찬으로.

주호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팽대환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 친구 사회생활도 잘하는군. 보자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네. 관주님께서 자넬 만나고 싶다 하셨어.”

“관주님께서 말입니까.”

주호는 살짝 놀란 마음이 들었다. 맹주의 서신을 들고 있다곤 하지만, 이렇게 먼저 손을 뻗어올 줄은 몰랐다.

‘해코지하려 부르진 않았겠지만 말이야.’

빙백검(氷白劍) 설우진.

예전엔 그저 그의 일 푼이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호출받는 신세가 되었다.

살짝 오묘한 기분을 느끼며 팽대환의 뒤를 따랐다.

“자, 이쪽으로 들어가면 된다네.”

“같이 가시진 않는 겁니까?”

“관주님께서 보자고 하신 건 자네 한 명뿐이니 말이야. 설마 아직 보모가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

“대협 같은 분은 언제나 환영입니다만.”

“이것 참, 자네 화법엔 못 당하겠군. 어서 가보게, 기다리시겠군.”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짓하는 팽대환을 뒤로한 채 주호는 작은 장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 외부에서 온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사용하는 곳인 듯했는데, 정갈하게 꾸며진 정원 중심으로 작은 정자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오르게나.”

정자 안쪽에서 차를 마시던 설우진이 그에게 손짓했다.

주호는 짐짓 공손한 얼굴로 계단에 올라 그의 앞에 섰다.

“앉으시게.”

“그럼, 감사히.”

과하지도 어긋나지도 않은 적당한 예의를 차리며 주호는 설우진 앞에 앉았다.

그의 앞에 또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설우진은 손짓으로 그것을 권했고 주호는 천천히 그것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고수는 한 걸음, 한 마디 나누는 것으로 상대의 경지를 알 수 있다고 하지. 자네는 어떤가?”

갑작스러운 물음.

주호는 목 안으로 천천히 흘러들어 가는 차의 향을 음미하며 살짝 뜸을 들이곤 입을 열었다.

“아쉽게도 그러한 경지에 오르지 못해 잘 모르겠습니다.”

무난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설우진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이 씨알도 먹히지 않은 듯싶었다.

“그런가. 절정의 경지라면 충분히 큰소리를 치고 다녀도 부족하지 않을 것인데.”

도호(刀虎)라 불리는 팽대환도 자네의 적수는 아니지 않냐며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를 시험하려는 것인가.’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일종의 시험인 것이 분명했다.

찰나의 순간 생각을 마친 주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련을 끝내고 하산했을 때까지만 해도 온 세상을 발아래 둔 듯했습니다. 스승님께서도 제 나이대에 이런 성취를 이룬 자는 없다고 하셨고 무공을 대성하기만 한다면 천하제일인으로 불리기 부족함이 없다고 장담까지 하셨으니 말이죠.”

“맞는 말일세. 내 수십 년간 강호를 떠돌며 견문이 넓다 자부할 수 있거늘, 지금껏 그 나이에 자네와 같은 성취를 이룬 자를 본 적이 없네.”

주호의 말에 설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절정의 경지는 인간이란 종의 한계를 탈피하기 위한 도약의 준비를 하는 과정이었다.

보통의 재능이라면 평생의 수련 끝에 도달하는 단계였고, 각종 영약을 섭취하고 뛰어난 스승 밑에서 일류 무공을 사사 받은 후기지수라 할지라도 빨라야 이십 대 후반, 아니 이립은 되어야 겨우 눈앞에 두는 경지기도 했다.

‘맹주의 보증이 없었다면 어느 고인이 반로환동이라도 한 것인가 의심했겠지만.’

성숙한 티를 내나 눈빛 속에 있는 치기 어린 기운은 분명 젊은이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맹주님과 관주님을 마주하니 그저 제가 우물 안의 개구리였음을 깨달았습니다.”

“하하하, 보통은 자신이 갇혀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도 못한다네. 우물에서 나오려면 자신이 그 안에 있다는 것부터 알아차려야 하지. 그런 면에서 자네는 더 위의 경지로 올라갈 준비가 되었어.”

설우진은 주호가 마음에 들었다. 외모가 출중하고 무공이 고강한 것도 한몫했지만, 지닌 것에 비해 겸손한 성품이 자신이 그리던 이상과 부합했다.

“이참에 어떤가. 이 늙은이와 한 수 겨뤄보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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