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위천강은 입관 심사 때보다 몇 배는 강맹한 기운을 풍겼지만, 주호는 이 자리에서 그를 쓰러뜨릴 마음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보다 딱 한 수 위의 실력만 내보여 적당하게 싸움이 무마되도록 할 생각이었다.
상대의 경지는 자신보다 낮지만, 무공의 수준은 결코 청룡신공보다 뒤떨어지지 않을 터.
‘그렇다면 실전에서 연습하기에 딱 좋은 상대라는 소리지.’
청룡신공엔 수많은 무공이 있었지만, 검으로 펼치는 무공은 청룡검법과 청룡검식이 있었다.
청룡검법은 한 줄기의 흐름이었다. 모든 초식이 이어져 있으며 청룡신공의 기반이 되는 무공이기도 했다.
반면에 청룡검식은 독립된 초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하나가 막대한 내공을 소비함과 동시에 차원이 다른 위력을 가지고 있어 굳이 이어질 필요가 없었다.
주호가 펼치려 하는 것은 청룡검식의 첫 번째 식.
“현검(絃劍).”
청룡검식(靑龍劍式)
현검(絃劍), 흐름의 검
강호에 출도한 후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이는 것이었지만, 비동 안에서는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한 초식이었다.
익숙한 결을 따라 청룡검식의 요지가 그의 검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렇게 느려터진 속도로 감히 내 검을 막겠다고?’
주호가 펼치는 초식을 보는 위천강의 복면 안쪽에는 조소가 피어올랐다.
하품이 나올 정도의 속도였다. 꽁지가 빠지도록 검을 휘두르고 도망쳐야 살아날 판에 그렇게 느린 검으로 무엇을 하겠는가.
하지만 주호의 얼굴엔 전혀 조급함이 없었다.
현검은 둔검(鈍劍)이자 완검(緩劍)이다.
무거움 속에 우뚝 솟은 태산이 있고 느림 속에 거스를 수 없는 장강의 물결이 있다.
“윽?!”
자신의 몸을 찍어 누르는 막대한 압력에 위천강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검에 피어올라 어둠을 태우던 검붉은 화마는 제 기세를 잃고 사그라졌고, 당장이라도 주호의 목을 벨 수 있을 것 같았던 무월십이검의 초식은 허무하게 와해 되었다.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겠다, 이거지.”
하지만 위천강은 제법이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의 공격은 단지 인사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이 전력을 낸다면 언제든 주호의 목을 벨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의 전신에선 여유가 넘쳐흘렀다.
‘손속을 두었다곤 하나 낮의 심사 때 이 몸을 당황하게 했으니 제법 괜찮은 무공을 익혔겠지. 하지만 고작 돈 셈이나 하는 가문의 출신과 나는 근본이 다르다.’
위천강은 입관 심사 이후 주호의 신상을 조사했다.
산동 하택, 주가장이란 상계 가문 출신으로 강호를 떠돌다 무림맹에 정착.
그곳에서 활동하던 중 삼 년간 실종되었다가 다시 복귀해 정천학관 교관직에 지원했다.
중간에 공백이 있던 것을 제외하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무인의 이야기였다.
삼 년.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무엇을 이루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풍기는 기세를 보아하니 기연이라도 얻은 것 같았지만, 내로라하는 절세무공을 익히고 영약을 한 아름 들이킨 것이 아니라면 결코 자신에 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왜?
자신은 천마신교의 후계자였으니까.
어릴 적부터 신교의 비전을 익힌 천마의 후예. 절대 질 리가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대체.”
그는 몰랐다.
아니,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 삼 년간의 공백 동안 주호가 과거 천하제일인이라 불렸던 무황의 무공을 익혔다는 것을.
그리고 비록 몇백 년이 지난 것이긴 했지만, 자신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고절한 영약을 한 아름 먹었다는 것을.
그렇기에 자신의 모든 공격을 한 끗 차이로 막아내는 주호의 모습에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으드득.
무려 이 각 동안 모든 공격이 막힌 위천강은 이를 갈았지만, 단순히 공격이 막히기만 해서 화난 것은 아니었다.
상대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지 않았다.
오로지 방어 일변도로 자신의 공격을 막았을 뿐.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자신의 공격을 상쇄한 주호를 보자니 위천강의 마음에 한 줄기 갈등이 피어올랐다.
‘그 무공을 사용하면.’
천마의 독문 무공.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가 모든 마(魔)의 종주에 오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천마신공의 강함 덕분이었다.
마도의 무공으론 절대 천마의 무공을 꺾을 수 없다. 그것은 긴 역사를 가진 무림에 있어서 변하지 않은 법칙이기도 했다.
천마의 천마신공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신공의 부류뿐.
대표적인 예로는 소림의 반야신공이나 무당의 태극신공이 있었다.
꽈아악.
위천강은 끝내 결정을 내렸다.
처음 습격을 계획했을 때는 무월십이검이면 충분하고도 남을 줄 알았다.
그 위력에 비해 세간에 알려지지도 않았고 흔적만 잘 지운다면 자신이 개입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를 터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상대하기엔 상대의 무공이 예상보다 강했다.
“좋다, 인정하지. 네놈은 내 예상보다 강하다.”
그리 큰 차이도 아니었다.
딱 한 수,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메워질 격차였지만, 무월십이검이란 무공의 한계 때문에 그 간극은 채울 수 없는 무저갱과 같이 깊어졌다.
“하지만.”
위천강의 검에 피어올랐던 검붉은 마기가 사라진다. 주호는 이제 그가 싸움을 포기한 것인가 생각했지만, 직후 그 빈자리를 메우며 더 성대하게 피어오른 시커먼 마화(魔火)에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호오.”
조금 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중압감이 그의 전신을 짓눌렀다.
보기만 해도 따끔거리는 마기가 자욱하게 주위를 뒤덮었으며 살기는 칼날이 되어 그 끝을 날카롭게 벼렸다.
“오늘 이 자리에서 네놈이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몸서리가 쳐질 만큼 싸늘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주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답했다.
“마인이란 놈들은 다 틀에 박힌 대사밖에 하지 못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작위적이라 극단에라도 들어간 기분이군.”
비아냥거리며 말했지만, 그는 위천강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천마신공인가.’
주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질릴 정도로 패도적이고 강렬한 기운.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천마신공과 싸운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상태창의 기능 중 하나에는 가상 전투 훈련이라는 것이 있었다.
무황이 강호를 활동했을 때를 기준으로 약 오백여 명에 달하는 인원의 정보가 그 안에 기록되어 있었다.
지난 몇 년의 세월 동안 주호는 그들 하나하나를 격파해나갔고, 그 안엔 당연히 천마나 마교의 소교주 역시 자리했다.
천마는 밖으로 나올 때까지 일초지적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마교의 소교주와의 싸움은 길게는 백 초식까지 버텨내며 수십 번을 넘게 자웅을 겨루지 않았던가.
후우욱.
모든 기류가 위천강을 중심으로 휘몰아친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찢어발길 듯한 기운에 주호 역시 검을 바로 세웠다.
“후우.”
살짝 흥분되는 마음도 있었다.
무공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
무릇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났다면 수단계는 진보했을 터.
‘진짜 천마였다면 목숨이 남아나지 않겠지만.’
비동에 나오기 전까지 천마와의 싸움은 처음과 같은 양상을 보였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고, 그대로 싸움은 끝을 맞이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보다 한참은 하수인 위천강을 상대로 하고 있다.
신공과 신공의 격돌.
그것에 주호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만 죽어라.”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위천강이 검이 허공을 베어 갈랐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휘두름이었지만, 그 결과는 절대 단순하지 않았다.
저적.
밤을 가득 채운 어둠조차 그것을 피하지 못했고, 유리가 부서져 나가듯 균열이 일며 갈라졌다.
천마검식(天魔劍式)
일식(一式) 극마(極魔)
“그쪽에서 최고로 나온다면, 이쪽도 질 순 없지.”
바로 세운 주호의 검에 청명한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어둠을 좀먹는 마기를 몰아냈으며 세상을 가득 채우는 한 줄기 빛이었다.
“멸천”.
청룡신공(靑龍神功)
멸천(滅天)
천마검식에 대항해 주호가 꺼내 든 패는 멸천이란 초식이었다.
그것은 청룡신공의 근간이 되는 초식이었다.
검은 물론이고 권이나 장으로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범용성이 높았지만, 무공의 성취가 일정 수준 이하라면 아예 사용도 하지 못할 정도로 고절한 수준이기도 했다.
더욱이, 현재 주호가 펼칠 수 있는 무공중 가장 강한 위력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번쩍-!
주호의 검에서 솟아난 거대한 청룡이 어둠을 거칠게 찢어발겼다.
청룡과 마화가 서로를 집어삼키려 날카로운 이빨을 세웠다.
곧 그것들은 팽팽한 접전을 이루었고, 결국엔 서로의 힘에 밀려 형태가 짓뭉개지더니 아무런 흔적 없이 공멸(共滅)하고 말았다.
파스스-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리는 검기의 편린에 주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나도 아직 멀었군.’
상대에 맞춰 무위를 조절했다 할지라도 근본적인 격차가 있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깔끔하게 백중지세를 이룬 것은 아직 초식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상대는 초식의 이해도가 높다는 말도 되었다.
‘어쩔 수 없나.’
하지만 그는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청룡신공은 신공이라 불릴 만큼의 난해한 절학이었다.
상태창의 도움이 있다곤 하나 혼자의 힘엔 한계가 있는 법.
반면에 상대는 천마신교의 소교주였다.
어릴 적부터 마교의 최고수들에게 가르침을 받아왔을 테니 차이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맹주가 제자를 권했을 때 명목상이라도 수락할 것을 그랬나.’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무황이 죽어가면서까지 남긴 의지가 상태창이란 형태로 발현되어 있었다.
그것에 부족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신이 기연에 대한 자격이 부족하다는 것일 터.
‘이제 시작이다. 부족한 부분은 시간과 경험이 채워줄 터.’
주호는 망설임 없이 미련을 털어냈다.
”…네, 네놈. 정체가 무엇이냐.“
반면 위천강은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당황과 격분의 감정에 휩싸여 있는 상태였다.
무월십이검이 통하지 않은 것은 그럴 수 있었다.
고절한 무공이라곤 하나 곁가지로 익힌 것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이해가 얕고 성취가 낮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동년배 중에선 자신의 검을 받아낼 자는 없다고 생각했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구파일방이나 오대 세가 등등 중원에서 내로라하는 명문정파 후기지수들의 심사를 견식 했지만, 딱 생각한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것은 지금껏 만난 교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 자신과 비등하거나 웃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하북팽가 출신의 고수인 도호(刀虎) 팽대환뿐.
하지만 이것은 잘못되었어도 무언가 심하게 잘못되었다.
천마신공은 지고의 무공.
위천강은 설사 팽대환이 오더라도 자신의 극마라면 그를 능히 베어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베지 못했다.’
베기는커녕 철저하게 동수를 이루었다.
아니, 동수를 이룬 것조차 의심스러웠다.
이 한 수에 끝낼 작정으로 자신은 전력을 쏟았지만, 상대는 전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제야 위천강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옛적 자신의 무공을 지도해주던 신교의 고수들을 마주했을 때와 같은 것이었다.
수준의 차이가 명확히 눈에 보인다면 경계가 서리지만, 차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격차가 벌어진다면 도리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믿을 수 없다.’
위천강의 두 눈이 흔들렸다.
중원이 아무리 넓다고 한들 저 젊은 나이에 자신보다 강한 고수가 존재했다니.
‘그들이 중원을 무시하지 말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래서였나.’
동시에 호기심도 들었다.
어떻게 해서 저런 무공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 그것도 상계 가문의 출신으로.
‘삼 년간의 공백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냔 말을 끝으로 위천강의 투기가 거두어지자 주호 역시 검을 내렸다.
딱히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침묵하고 있었을 찰나, 갑작스럽게 울린 알림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곤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호감도가 왜 오르는 것이지?’
이름: 위천강
별호: 소천마(少天魔)
직업: 천마신교 소교주
나이: 스물
소속: 천마신교
경지: 초일류(四/十)
무공: 천마신공
잠재력: 上中
호감도: 中中
낮까진 분명 下下이라 되어 있었던 호감도가 어째서인지 中中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자식 혹시…….’
그때 주호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위천강이 마교 출신인 이상 특이한 성벽을 가지고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마교에 도는 기괴한 소문들에 남색(男色) 정도는 얌전한 범주에 속할 정도였으니.
“…….”
주호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아니겠지 하며 의심 서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위천강은 검을 거두곤 다시 그 기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목을 너무 끌었군. 오늘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철컥.
검집에 검을 넣은 위천강은 몸을 돌리며 시커먼 귀화가 타오르는 눈으로 주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잊지 말아라. 항상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곤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종적을 감추었다.
“…….”
주호는 그 뒷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본 채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정열적인 눈빛,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
“…이런.”
아무래도 이상한 놈이 꼬인 것 같은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