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13화 (13/300)

#13화

“무엇이오?”

“당신에게 검이란 무엇인가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그동안 그녀가 주호에게 물어온 것은 고향, 가족, 익힌 무공 등 신상에 관련된 것이었으니.

‘검이라…….’

주호는 멋들어진 대답을 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예전에 읽었던 어느 영웅담에서 떠올린 명언을 읊을 찰나, 여태껏 없었던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남궁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은 안휘제일미 따위가 아니었다.

같은 검의 길을 걷는 한 명의 무인이었다.

어디서 들은 낭설 따위를 말하는 것은 그녀를 모욕하는 일이 될 터.

“검을 처음 쥔 것이 일곱 살 즈음이었을 것이오. 엄밀히 말하면 검도 아니었지. 벼락 맞아 부서진 나무의 기둥을 깎아 만들었으니.”

“…….”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으나 남궁연은 아무런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때 읽었던 영웅담에서처럼 당장에라도 검기를 뿜어내고 화려한 초식을 펼칠 수 있을 줄 알았소.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뼈를 깎는 수련과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지.”

잠시 숨을 고른 주호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의 감정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하지 않았나 싶소. 검을 무엇이냐고 생각하냐고? 검을 쥔 지 고작 십구 년밖에 지나지 않은 나로선 아직… 아직은 알 수 없다고밖에 말해주지 못하겠소.”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언할 수 있는 건 검이 무엇이냐라는 것보단, 무슨 마음으로 검을 쥐냐가 더 중요하리라 생각하오.”

“…좋은 말씀, 감사해요.”

“별말씀을. 소저와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소.”

주호가 먼저 나서서 자리의 끝을 맺었다.

더는 나이가 찬 남녀가 같이 있기에 늦은 시각이었다.

그녀가 야심한 밤에 외간 남자와 술자리에 있는 걸 누군가 목격하기라도 하면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돌 수도 있을 터.

“숙소는 어느 쪽이오?”

“괜찮아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라.”

주호는 데려다 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그녀는 정중히 거절했다.

정말로 바로 근처였고, 기다리는 이들이 있어 그와 함께 가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생각이 아닌 듯싶었다.

“그럼 또 인연이 되면.”

살짝 미소 지은 남궁연의 인사에 주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곧 주점과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객잔에 발을 들였다.

본디 수십 명은 묵을 수 있는 규모를 가진 객잔이었지만, 남궁세가의 이름으로 전세를 낸 건물이었다.

“오셨습니까.”

숙소로 돌아가니 그때까지 자지 않고 기다리던 섬뢰단의 무인이 그녀를 반겼다.

남궁연은 살짝 미안하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한 요청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원래는 이런 도시라 할지라도 섬뢰단의 무인이 호위로 뒤따라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 있고 싶다는 억지를 부렸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졌었다.

“괜찮습니다만, 혹시 음주하셨습니까?”

“네, 조금 마셨어요. 그보다 밤이 깊었으니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저도 가볍게 씻고 잠자리에 들 테니.”

“알겠습니다.”

남궁연은 평소 술을 즐기지 않았다.

어쩌다 마시는 것도 안면이 있는 후기지수들과 만났을 때뿐이었고.

그랬던 그녀가 불그스름한 얼굴로 돌아왔으니 섬뢰단의 무인은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은 채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남궁연은 그가 자신이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돌아가지 않을 것을 알기에 미안하단 표정으로 작게 미소를 짓고는 침소로 향했다.

끼이익.

곧 문이 닫히고 그녀는 완전한 혼자가 되었다.

달빛만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어둠 속에서 취기 때문에 풀어져 있던 그녀의 얼굴이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정체가 뭘까.”

주호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잘 마시지 않던 술까지 마시며 상대의 방심을 풀어내려 노력했던 그녀였다.

아직 약관의 나이에 불과했고, 세상에 대한 경험이 적긴 하지만 남궁연은 이 강호에 우연이란 없다고 생각했다.

월영사신, 주호.

어째서 그는 자신을 숨긴 채 마교와 사도맹의 지부를 없애고 다녔을까.

또, 자신들과 만난 때를 기점으로 어째서 활동을 멈춘 것인가.

그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기만 했다.

어느 고인의 유지를 잇기 위해 마교와 사도맹을 적대한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단지 살육을 좋아하기에 적당한 이들을 노려 사냥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내가 과민반응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정말로 주호라는 사내는 정의롭고 무공이 강하며 선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자신과 동선이 겹친 것은 정말로 우연이며 인연이라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주호의 시선에서 호감과는 또 다른 무언가의 감정이 들어가 있는 것을 느꼈다.

여타 다른 사내에게서 볼 수 있었던 음심이나, 색욕의 종류는 아니었다.

‘잘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주호를 경계한 것은 아니다. 어찌 되었든 그는 자신들의 은인이었으니.

주점으로 들어가 술자리를 가졌을 때는 이런 만남도 나쁘지 않다면서 진심으로 그 순간을 즐겼다.

다만.

‘오라버니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잠깐이나마 멈칫했었어.’

남궁연은 그것을 내색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다음 이야기로 화제를 옮겨갔지만, 설렘으로 부풀었던 머릿속은 싸늘하게 식은 뒤였다.

보통 다른 이가 그 화제에 도달하면 이야기를 피하거나,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보통. 하지만 주호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그렇기에 평소의 주량보다 더 많은 술을 마시며 하나라도 더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 대화를 나눈 것이었다.

“그렇다고 알아낸 것도 없으니, 헛짓이었구나.”

가볍게 화장을 씻어낸 그녀는 복잡한 머리를 억누르고 침상 위에 몸을 실었다.

‘어찌 되었든.’

만약 주호의 말대로 무언가 인연이 있다면, 앞으로도 어떤 식으로든 마주칠 터.

정말로 그가 선의로 접근한 것이라면 그때 가서 의심한 것을 사과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

진시(辰時) 끝자락의 아침 공기가 폐부를 훑는다. 일찍이 잠에서 깬 주호는 새벽 수련을 마치고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숙소를 나섰다.

“오늘부터인가.”

정천학관의 정복(正服)은 아직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무복 중 가장 단정한 것을 꺼내 입었다.

검대에 매인 검에서 묵직함이 느껴졌다.

새로운 시작의 첫날이 주는 신선함을 곱씹으며 주호는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간단한 확인절차와 함께 그는 정천학관의 후문으로 들어갔다.

곧 입관 심사가 재개되려는 것인지 정문 앞은 개문(開門)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음?”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왔건만 적지 않은 수의 선객들이 있었다.

얼굴이 눈에 익은 것이 자신과 함께 심사에 합격한 이들일 것으로 생각하며 한쪽 구석에 자리 잡았다.

“이보게.”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주호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한 인영을 볼 수 있었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그래, 자네. 분명 어제 팽 수석교관님과 비무를 했던 그 친구 맞지?”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친근하게 거리를 좁혀왔다.

‘상태창.’

[상태창]

-새로운 인물의 정보를 불러옵니다.

이름: 담우양

별호: 섬서검협

직업: 정천학관 일반교관

나이: 서른둘

소속: -

경지: 일류(十/十)

무공: 분광검법

잠재력: -

호감도: 中上

섬서검협 담우양.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섬서 쪽에서 활동하는 검객(劍客)으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협객이라 했다.

“섬서에서 온 단모라 하네. 어제 비무가 인상적이어서 자네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지.”

살짝 각진 얼굴에 단단한 풍채.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과 함께 그는 가볍게 포권을 해왔다.

“주호라 합니다. 섬서검협의 위명은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설마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과분한 이름이라네. 그나저나 낯선 이름이로군. 자네 정도의 무인이라면 내가 이름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담우양의 말에 주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포권했다.

“강호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렇다 할 무명이 없습니다. 이렇게 선배님과 인연이 닿았으니 기쁠 따름입니다.”

“하하, 젊은 친구가 식견이 뛰어날뿐더러 예의도 바르군. 그 정도 실력을 지녔으면서 겸손까지 하니.”

포권을 받는 담우양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주호에게 다가온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전날 가장 먼저 심사가 끝난 담우양 한쪽 구석에 자리해 둘의 비무를 지켜봤다.

정말로 찰나 간의 대치였지만, 주호의 모습은 그에게 있어 머리를 후려치는 듯한 충격을 주었다.

‘평범한 청년이 아니다.’

담우양은 근 몇 년간 무공이 정체 중이었다.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새로운 경지에 오를 것만 같은데 그 조금의 틈을 도무지 메울 수가 없었다.

섬서검협이니 뭐니 불려도 그 역시 무림인이었다.

자신의 무공에 대한 집착은 상당했고, 좀 더 넓은 세상을 겪기 위해 섬서를 나와 여기저기 떠돌던 중 정천학관에서 교관을 뽑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거다.’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배우는 것이다.

떠돌이 생활에 질리기도 했고 수많은 이들이 모이는 만큼 무언가 얻는 것이 있을 거란 부푼 기대를 안고 이곳에 왔다.

그러던 중 보게 된 주호의 비무.

검을 뽑고 화려한 초식을 보인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기수식을 취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담우양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신검합일……!’

자신이 꿈에도 바라던 경지가 아닌가.

주변에 있던 다른 무인들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보던 중 몇 마디 말이 오고 간 뒤로 허무하게 끝나버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대는 그 도호다. 이 주변에 있는 머저리들과는 달리 저 청년의 경지를 확실히 알아보았던 것이겠지.’

그렇기에 담우양은 확신했다. 이 청년은 평범한 이가 아니라고.

“앞으로 잘 부탁하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몇 마디 말이 오고 간 뒤, 그들의 대화는 끝을 맺었다. 하지만 담우양은 결코, 조급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청년을 알아갈 기회는 많다.’

“다들 모였군.”

약속한 시각이 되었을 때 팽대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 합격 통과를 받은 이들이 한 명의 결원도 없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을 확인한 그는 수하들을 시켜 좌중에 무언가를 나누어주었다.

“본 학관의 교관임을 증명하는 증표일세. 정복을 비롯한 물품들은 입관 심사가 끝나고 지급될 예정이지.”

주호 역시 그것을 건네받았다.

평평한 원형의 그것은 대략 엄지손톱만 한 크기였다. 그리고 그 위로 푸른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정천(正天)이라 쓰여있었다.

“다들 그것을 왼쪽 가슴에 붙이게.”

다른 사람들을 따라 무복의 왼쪽 가슴에 붙이자 접착제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단단히 고정되어 떨어지지 않았다.

“물을 묻히면 쉽게 떨어짐세. 단, 그 이후에는 접착력을 잃으니 잘 알고 있고. 어차피 심사에만 사용할 것이니 상관없나.”

팽대환은 그 이후로 입관 심사에 관해 설명했다.

입관 후보생을 부상시키지 말고, 모욕을 주지 마라, 등등 여러 주의 사항을 들었지만, 딱히 어려운 것은 없어 보였다.

약 이각 후, 주호는 다른 이들과 같이 비무대 위로 올라갔고 입관 후보생을 맞았다.

“합!”

막 약관에 오른 후기지수부터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올해를 노린 재수생들까지.

많고 많은 사람이 비무대 위에서 각자의 기량을 한껏 뽐냈다.

“호오.”

각지에서 모인 만큼 가끔가다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기묘한 무공을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비단 신기했던 것은 무공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집안 족보부터 무공의 기원까지 읊는 이도 있었고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기습해오는 사람까지 있었다.

처음엔 그 신선함에 주호는 그들을 정성껏 상대해주었다.

팽대환의 말대로 일정 수준에 이르지 못한 이들에겐 가차 없이 탈락을 선언했지만, 나름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열 명이 되고 스무 명이 되고, 이제 숫자를 세는 것조차 포기했을 때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막 떠오르던 태양은 어느새 하늘의 정 중앙을 지나 불그스름한 빛깔과 함께 저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언제 끝나오?”

끊이지 않는 심사에 참다못한 주호는 자신의 옆에서 기록을 적고 있는 심사관에게 물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친 얼굴로 서 있던 심사관은 들고 있는 서류를 확인하더니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오.”

“그나마 다행이로군.”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교관들 역시 싫증이 나거나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자신이 원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을.

“위천강, 올라오도록.”

심사관의 호명에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입관 후보생이 땅을 박차곤 비무대 위로 멋들어지게 몸을 날렸다.

제 딴엔 점수를 따고 싶은 마음이겠으나,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했던 주호에겐 그저 같잖아 보일 뿐이었다.

“위천강이라 합…….”

입관 후보생은 포권을 하던 중 그 자리에서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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