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오랜만이오, 남궁 소저.”
주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학관에 들어가는 이상 마주할 것이라고는 생각했거늘, 이런 식으로 재회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역시 사람이라는 것이 무슨 소리요?”
영문 모를 이야기에 그가 의문을 표하자 남궁연은 당황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혼자 식사하고 계셨나요?”
“아쉽게도 이쪽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말이오. 그나저나 위쪽에 무슨 소란이 있는 듯하오만.”
“…별일 아니에요.”
주호의 물음에 그녀의 고운 이마가 찌푸려졌다.
별일 아니라곤 했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내려온 계단으로 쿵쿵거리는 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저!”
한 사내가 발갛게 술에 취한 얼굴로 황급히 계단을 내려왔다.
“남궁 소저, 내 말 좀 들어보시오! 무언가 오해가 있었소. 그러니…….”
“더는 당신에게 들을 말은 없어요.”
남궁연은 짜증까지 서린 얼굴로 그에게 답했다. 하지만 사내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럴 것이 아니라 자리로 돌아갑시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방해가 아니오.”
사내는 우악스러운 손길로 남궁연을 붙잡으려 했다.
그녀는 질색하며 그것을 쳐내려 했지만, 그는 순식간에 남궁연의 팔을 잡아갔다.
“잠깐.”
어느새 그 둘 사이에 껴든 주호는 사내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는 눈앞의 상황이 우습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마치 옛날에 읽었던 영웅담에 나오던 한 장면이 아닌가.
“호오?”
다만, 가까이서 악역의 얼굴을 본 주호는 감탄을 흘렸다.
자신도 어디 가서 외모가 부족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사내의 외모 역시 수려하기 짝이 없었다.
아쉬운 것이라면 그 눈에 감도는 경망스러운 기운이 외모의 잘남을 갉아먹으면서 남궁연의 경멸까지 자아냈다는 점일까.
“넌 또 웬 놈이냐.”
으르렁거리는 듯한 물음에 주호는 피식 웃었다.
“곧 있으면 덤벼들겠군.”
“여자 앞에서 망신당하기 싫으면 썩 꺼져라.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그렇다는데, 어떻습니까?”
“…저 혼자 식사하고 있었는데 자꾸 합석하자며 치근덕거리더군요. 거절했는데 끈질기게 달라붙는 바람에 소란이 커졌어요.”
“그렇다는데?”
명백한 거절의 의사가 담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봐오는 남궁연의 모습에 사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놈 때문에!”
“왜 나 때문인가. 다 자네가 못난 탓이지.”
“이 개새끼가!”
자신을 놀리는 듯 말해오는 주호의 모습에 사내는 이성이 뚝 끊어졌다.
쐐애액!
곧 그의 주먹이 휘둘러졌다.
바위를 부술 수 있을 정도의 거력이 담긴 기운을 느낀 남궁연의 표정이 바뀌었고, 자신을 향해 휘둘러진 주먹에 주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탁.
하지만 그것도 거기까지였다.
기세 좋게 휘둘러지던 주먹은 주호의 손에 잡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남궁 소저를 보아 한 번은 봐주지. 두 번은 없다.”
주호는 조금 전까지 나름대로 좋은 기분이었기에 넓은 아량을 베풀었다.
물론 남궁연이 있지 않았더라면 흠씬 두들겨 맞았겠지만, 지금은 굳이 손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주먹의 기운을 해소한 주호는 그의 손을 놓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채 몸을 돌렸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다른 곳에 가서 가볍게 이야기라도 나누지 않겠습니까.”
“좋아요.”
주호의 권유에 그녀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곤 옆으로 다가갔다.
“이 새끼가!”
그 모습에 사내, 위천강의 눈에 열불이 떨어졌다.
그는 세상천지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받들어지며 자라왔다.
여자도, 재화도, 술도, 음식도.
어느 것도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한 것이 없었으며 모든 것을 충족시켜왔다.
뒤돌아선 주호의 등 뒤에 검을 뽑아 휘두른 것도 그래서였다.
감히 자신을 무시하고 능멸한 것은 단죄해야 마땅했다.
위천강의 무공은 결코, 낮은 것이 아니었다.
후기지수 중 수위를 달리는 남궁연이 그의 손을 피하지 못한 것에서부터 실력을 보였지만, 이번에 한해선 상대가 정말로 나빴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틀에 박힌 악역의 모습이로군.”
검이 뽑혀 나온 소리에 먼저 반응한 것은 남궁연이었다.
그녀 역시 더는 참지 않겠다는 얼굴로 자신의 검을 뽑아 휘두르려 했지만, 검을 쥔 손위로 주호의 큰 손이 덮었다.
“……!”
순식간에 자신의 움직임을 봉쇄한 그의 모습에 남궁연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괜찮소.”
주호는 곧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위천강의 검면을 손등으로 가볍게 후려쳤다.
쩡!
“…컥!”
위천강은 그 충격에 짧은 신음을 토해냄과 함께 검을 놓쳤다.
비어있는 자신의 손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르고 있는 검.
그 두 개를 번갈아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위천강은 곧 시야를 가득 메우며 다가온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퍽!
순식간의 그의 지척으로 이동한 주호의 주먹이 위천강의 턱을 강하게 후려쳤다.
그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고,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져 내렸다.
“수고했다, 악역.”
쓴웃음을 지은 주호는 가볍게 제 손을 털었다.
그러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남궁연과 함께 곧 자리를 떠났다.
***
“아까 심사받는 것을 봤다오.”
“부끄럽네요.”
쓰러진 위천강을 뒤로한 그들은 근처에 있는 주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녁이 지난 시간이었지만 안을 가득 메운 인파에 남궁연이 불편한 표정을 짓자 주호는 자연스레 그녀를 위층으로 인도했다.
“부끄럽기는. 오늘 하루 동안 본 사람 중에 소저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었소.”
주호는 이미 몇 병의 술을 마신 직후였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곳으로 오는 동안 천연덕스럽게 내공으로 주기를 날려버리곤 다시 멀쩡해진 정신으로 그녀와 술잔을 기울였다.
“맛있네요.”
거듭되는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남궁연은 연신 술잔을 비워냈다.
그렇게 두 병쯤 마셨을까,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조심스레 주호를 바라보았다.
“설마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나도 그렇다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
운명이라는 그의 말을 잠시 곱씹던 남궁연은 작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이곳에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술잔을 내려놓은 주호는 잠시 탁자를 두들기며 말을 골랐다.
그녀의 입관은 기정사실이 된바. 자신이 교관으로 들어가게 됐다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니, 그건 후일을 위해 남겨 두는 것이 좋겠군.’
지금이 아니라 학관 안에서 교관과 관생의 신분으로 만난다면 그 놀람이 더욱 클 것이다.
그 표정이 기대되었기에 주호는 적당히 대답했다.
“오랜 지인을 만나러 왔소. 하지만 이곳에서 소저를 만나게 될지는 정말로 몰랐다오.”
“그러셨나요.”
남궁연은 주호가 대답을 피하는 것을 눈치챘다.
무슨 개인적인 사정이겠지 하거니 생각하곤 안주 몇 점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아까 입관 심사 때 소저가 펼친 것이 창궁무애검법이오?”
“네, 세가를 대표하는 검법 중 하나죠.”
주호의 물음에 남궁연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무위는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주호가 얼마간 심사를 지켜봤지만, 그날 있던 이들 중 남궁연과 동수는커녕 발끝에 미치는 이들조차 없었다.
간간이 구파일방을 비롯한 다른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도 나왔으나, 그저 그런 실력만 지니고 있었을 뿐.
‘상태창에 나와 있는 것 역시 예사롭지 않고 말이지.’
주호가 근 하루 동안 입관 심사를 지켜보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경험의 축적으로 인해 상태창의 기능이 진화합니다.]
처음엔 그저 흥미가 동해 본 것이었지만, 그것이 몇 명을 지나자 갑작스레 눈앞에 알림이 떴다.
그리곤 원래 있던 항목에 몇 개가 추가되었다.
[상태창]
-새로운 인물의 정보를 불러옵니다.
이름: 남궁연
별호: 안휘제일미, 검화(劍花)
나이: 스물
소속: 남궁세가
경지: 일류(二/十)
무공: 창궁무애검법
잠재력: 上上
호감도: 上下
원래는 없었던 별호 그리고 잠재력과 호감도 항목이 상태창 위에 추가되었다.
설마 이런 기능까지 있을 줄은 몰랐으나, 고금제일인이라 불리는 무황의 비전이지 않은가.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것일 터. 오히려 앞으로 더 무슨 기능이 튀어나올지 기대가 되었다.
상태창의 기능이 향상되자 그것을 시험하고팠던 주호는 심사장 안쪽에 있던 수많은 후기지수의 신상을 살폈다.
하지만 그 중 上上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던 것은 남궁연이 유일했다.
이다음으로 높은 것이 고작 中下에 불과했으니 그녀의 잠재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는 항목이었다.
‘내 것을 보지 못해 아쉽지만.’
아쉽게도 절정 이상의 경지에 든 이들의 잠재력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신기한 사람.’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주호를 바라보던 남궁연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지금껏 자신에게 다가온 사람은 많았다.
그들 대부분 흑심을 품고 있었고, 더러는 남궁의 이름을 보고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남자에 관해 누구보다 예민한 감각을 가지게 된 그녀였다.
눈을 보고 몇 마디 말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성품이나 자질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느낀 주호의 성향은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외모는 어디 귀공자처럼 훤칠했고, 나이 차가 별로 나지 않아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지 않나.
‘만약 오라버니가 그 자리에 계셨더라도 그리 쉽게 마인 무리를 베어 넘길 수 있었을까.’
검절 남궁벽.
삼 년 전, 무황의 비동 탐사에 나섰다가 소식이 끊긴 오라버니 생각이 미치자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차올랐다.
그리고 주호는 그것을 놓칠 만큼 눈썰미가 없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동자에 수심이 가득하구려.”
주호의 말에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비웠다.
“저희 오라버니에 대해 알고 계시겠죠.”
“…….”
그 말에 남궁연에게 맞춰 술잔을 비워가던 그의 손이 살짝 멈췄다.
하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움직였고 비운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아니에요, 잊어주세요. 우중충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그보다 주 공자에 대해 알려주세요.”
주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화제를 바꾸는 것을 받아주었다.
“나에 대해서라.”
주호는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누구인가.
상계 가문인 주가장의 장자?
아니면 무림맹 외당 출신의 말단 무사로 무황의 진전을 이은 후계자?
남궁연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 깜짝 놀라겠지만, 주호는 당연히 그것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물론 말을 아낀 것은 그 이유만이 아니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매료되는 요소는 외모나 무공, 재화일 수도 있다.
“누구일 것 같소?”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호기심이었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반쯤은 넘어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둘의 대화는 끊기지 않았다.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남궁연이었고 주호는 그것을 막힘없이 답변해나갔다.
“이런, 시간이 많이 흘렀군.”
“그러네요.”
한창 열기를 띠며 이어 나가던 그들은 어느새 주위가 고요해졌음을 깨달았다.
밤하늘 위로 달이 기울어가는 것을 보니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 된 것일 터.
그렇기에 남궁연은 작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 질문으로 마지막으로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