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11화 (11/300)

#11화

절정에 근접했지만, 절정에 이르진 못했다.

그 차이는 이전 경지들의 공백을 합친 것보다 더 큰 격차였다.

하지만 주호는 제 무위를 전부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주호라 합니다. 말학 후배가 선배님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먼저 하게나.”

팽대환이 도를 까딱이며 주호에게 선공을 양보했다.

스릉.

주호는 천천히 제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주제 파악은 잘하는군.’

주호의 검이 거리 대장간에서 쉬이 구할 수 있는 수준의 검이라는 것을 알아본 팽대환은 한숨을 내쉬며 도를 다잡았다.

‘쯧, 빨리 끝내고 입관 심사 쪽으로 가야겠군.’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보잘것없었고, 보이는 허점만 하더라도 두 손가락은 가볍게 넘어갔다.

그래도 선배 된 도리는 하기 위해 삼초를 양보했을 찰나.

“음?”

주호가 검을 들어 올리자 그 모든 것이 반전되었다.

허점투성이의 그 몸이 검의 뒤로 가려진다. 종래엔 눈앞에 남아 있는 것은 한 자루의 검뿐.

주호의 모습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왜 저러시지?”

그 옆에서 심사를 끝낸 교관들이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보냈다.

심사가 시작된 지 점점 시간이 흘러가지만, 둘은 서로를 바라만 본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주륵.

식은땀 한 줄기가 팽대환의 이마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빈틈이, 없다.’

기묘한 사술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정순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꽈아악.

도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 정도 되는 고수가 상대의 틈을 찾지 못했다.

‘즉, 평범한 청년이 아니라는 소린가.’

오대세가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현실을 바라보지 못했더라면 그는 도호(刀虎)라고 불리지 못했을 터다.

팽대환은 상대를 얕보았던 자신을 질책했다.

그러곤 주호를 경시하던 마음을 완전히 버렸다.

‘한 자루의 검.’

선명할 정도로 소름이 돋는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

자신 역시 일류를 뛰어넘었을 때 이룩한 경지이건만, 저것처럼 완벽하게 제 검과 동화될 자신은 없었다.

‘이 정도가 적당한가.’

주호는 딱 팽대환과 동수로 보일 정도의 기세만 겉으로 드러냈다.

도호라는 이름이 거짓이 아니라면 그것을 알아보았을 테고, 쉬이 움직이지 못할 터.

‘자, 그러면.’

그의 눈에는 팽대환의 전신이 빈틈투성이였다.

한 걸음만 나선다면 십 초식 이내로 제압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스윽.

내디딘 발에 힘이 들어가고, 손에 들린 검의 끝이 검로를 따라 휘둘러질 찰나.

“……?”

갑작스럽게 도를 내리는 팽대환의 행동에 주호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이거 내가 아둔해서 상대를 알아차리지 못했군.”

그는 미안하다는 기색으로 심사의 종료를 선언한 뒤, 자신을 따라와 달라며 주호에게 손짓했다.

곧 심사장의 뒤편, 으슥한 곳으로 이동하니 팽대환은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신분을 알리지 않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나, 어디서 왔는지는 알려줄 수 있겠나. 이쪽은 언질 받은 것이 없어서 말이야.”

팽대환은 주호의 신상 명세를 믿지 않았다.

저 나이대에 자신 정도에 오른 고수가 고작 상가 출신일 리는 없었다.

무림맹 외당의 무사였다는 것도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이리라고 짐작한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것에 주호는 살짝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번 붙어보고 싶었거늘.’

팽가의 자랑은 혼원벽력도의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무공은 일전 안휘에서 마교와의 교전 때 살짝 견식 해본 것이 전부였다.

대련해볼 기회는 없었기에 직접 손을 부딪치며 느껴보고 싶었으나, 팽대환은 무언가 묘한 오해를 한듯싶었다.

“사실 이분의 소개로 왔습니다.”

마침 좋은 상황이기에 주호는 품속에 고이 보관하던 서찰을 꺼냈다.

원래는 입관 심사가 끝날 때까지 보이지 않으려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적재적소에 쓰는 것이 맞으리라.

팽대환은 그럴 것을 예상했다는 듯 서찰을 건네받았고, 담담한 얼굴로 그것을 읽어나갔다.

“……!”

물론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드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로 하지 않았다.

***

정천학관은 중원제일학관이라 일컬어지는 만큼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 중 소수만이 입관할 수 있었기에 그 수준은 매우 높았고, 입관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런 만큼 입관 심사를 감독하는 교관들에게 이런저런 청탁이 들어오곤 했다.

주머니가 두둑해질 정도로 꽂아주는 금전은 기본이요 비싼 값어치를 지닌 보검이나 구하기 힘든 영약이 오고 가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교관의 대부분은 청탁을 받지 않았다.

정천학관의 구조는 철저하게 상하 관계로 되어 있으므로 일개 교관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입관 심사에서 살짝 높은 점수를 주는 정도뿐.

혹여라도 걸리게 된다면 뇌물을 받았다는 불명예와 학관에서 쫓겨나게 되기에 섣불리 모험하는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선까지였다.

명문, 그러니까 소위 유력 문파나 세가에서 들어오는 청탁은 받아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것들은 먹어도 뒤탈이 없을뿐더러 일처리를 매끄럽게 했다고 칭찬까지 받을 정도였으니.

하물며 그 청탁자가 무림맹주이면 더 할 말이 없었다.

“진작 이걸 보여주지 그랬나.”

팽대환이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무림맹주의 낙인이 찍힌 서찰을 가리켰다.

‘설마 맹주님과 동문이라니.’

서찰에 적힌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주호는 현 무림맹주인 단철량의 스승에게 가르침을 사사 받았다.

배분으로만 따진다면 작금 강호에서도 최상위라 할 수 있었지만, 사제의 경험이 아직 미천한바.

스스로 역시 그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에 당분간은 이 사실을 숨길 생각이었다.

다만, 일신의 무위는 뛰어나기에 정천학관에서 경험을 쌓는다면 서로 도움이 될 것 같아 이곳을 추천했다고 쓰여 있었다.

‘도움이 아니라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팽대환은 눈을 번쩍이며 주호의 두 손을 붙잡았다.

가뜩이나 일손이 부족한 와중에 이런 인재가 들어왔다면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언제부터 일할 수 있는가?”

“당장 가능합니다.”

순식간에 뒤바뀐 팽대환의 태도에도 주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인가.

어제 웃으며 이야기했던 절친이 오늘 등에 칼을 꽂아오는 원수가 되는 것이 강호였다.

그간 자신이 겪어온 이들에 비하면 이런 변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잠시만 기다려주겠나.”

팽대환은 주호에게 호감 가득한 웃음을 지어 보이곤 접수처의 무인에게 다가갔다.

교관 심사가 끝난 것을 확인한 그는 합격자를 발표했고 이름이 호명되지 않은 이들은 낙담한 채 너털거리는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꽤 많이 뽑히는군.’

마지막 날인 것을 고려하더라도 두 자릿수를 뽑은 것은 의외였다.

입관생의 정원이 두 배로 늘었다지만 기존에 있던 교관들이 있을 것 아닌가.

“자, 주목해주시게.”

주호의 상념은 단상 위에 올라간 팽대환의 말에 깨어졌다.

“모두 합격을 축하한다네. 자네들은 지금부터 정천학관의 자랑스러운 교관들이야.”

담담히 치하하는 그의 말에 남아 있는 이들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팽대환 역시 마주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금 입을 열었다.

“본래라면 성대한 환영식과 함께 연회를 할 터지만, 시기가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있겠지. 아직 입관 심사가 여드레나 남아 있네. 심사에 통과하자마자 미안하게 되었다만 자네들은 내일부터 당장 입관 심사의 감독을 맡아주어야겠어.”

팽대환은 간단히 심사의 규정을 설명했다.

주호를 비롯한 새로 뽑힌 교관들이 해야 할 것은 예선 심사에서 일차적으로 옥석을 가려내는 일이었다.

예선 심사는 교관과 십 초식을 겨루는 것으로 진행된다. 만약 그것에서 일정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면 가차 없이 탈락이었다.

“별것 아니군.”

옆에 있던 누군가가 자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이곳에 있는 자 중 그 정도도 못 할 사람은 없었다.

옥석을 가려내는 일이야 한두 번 손을 섞어보면 대충 견적이 나오는 일이었으니까.

“그럼 다들 수고했네. 오늘 하루 푹 쉬고 내일 사시(巳時)가 되면 이곳으로 모여주시게. 자세한 규정은 그때 다시 설명하도록 하지.”

***

교관 심사가 끝난 후, 주호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입관 심사를 구경했다.

이틀 차라 그런지 어제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고, 슬슬 이름있는 문파나 세가의 후기지수들이 다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

그때 어디선가 요란한 함성이 들려온다. 그것에 고개를 돌리니 주호는 익숙한 얼굴의 여성을 볼 수 있었다.

휘릭.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검법 중 하나인 창궁무애검법의 유려한 초식이 검 끝에서 펼쳐졌다.

검법의 이름처럼 시원하게 허공을 베어 가른 그녀가 검을 멈추자 심사를 맡은 교관은 흐뭇한 얼굴로 합격을 외쳤다.

“올해로 약관이었던가.”

안휘제일미 남궁연.

주호가 안휘에서 구했던 여인이 선녀와 같은 자태로 비무대에서 내려갔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뭇 남성들의 눈에 하나같이 선망의 감정이 피어올랐다.

“검화(劍花)라는 이름이 딱 들어맞는군. 올해 후기지수 중 최고수 중 한 명으로 꼽힐 만해.

“어제 화산의 남 소저가 나온 것을 보았는데, 검화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군.”

이런저런 말이 관중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외모뿐만이 아니라는 건가.’

외모로 이름을 알리는 후기지수는 상대적으로 무공에 대한 말이 적기 마련.

하지만 안휘제일미라는 수식 옆에 검화라는 이름이 붙어 다니며 그녀가 검에도 재능이 있음을 알렸다.

설마 이런 식으로 인연이 이어질 줄은 몰랐기에 주호는 살짝 마음이 동했다.

“나중에 인사라도 해둬야겠군.”

곧 입관 심사가 끝났고, 주호 역시 발걸음을 돌려 학관을 빠져나갔다.

이제 내일부터는 학관에 매인 몸으로 교관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했다.

살짝 성급하게 움직인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학관을 나온 주호는 그대로 예약해둔 객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붉은 잉어 튀김이 일품인 곳으로 일전에도 몇 번 왔었을 만큼 그의 입맛을 사로잡았었다.

다만, 맛집인 만큼 일, 이층은 사람이 가득 차 있었다.

번잡한 것이 싫었던 주호는 점소이에게 웃돈을 얹어주었고, 삼층의 전망 좋은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슬슬 저녁 시간인지라 하늘이 어둡게 물들어가며 해가 떨어져 간다. 그럼에도 거리는 여전히 수많은 이들로 활기가 넘쳤다.

“좋구나.”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얼마를 기다리니 곧 요리가 나왔다.

고소한 냄새와 함께 화려한 향신료로 한껏 맛부린 잉어 튀김이 그의 앞에서 고운 자태를 뽐냈다.

“음.”

바삭한 식감과 함께 부드러운 살점이 입안을 노닌다. 그것은 미미(美味)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맛이었다.

거기에 강소성에서 만들어져 달콤하고, 부드럽고, 연하고 맑은 산뜻한 특징을 지닌 양하주(洋河酒)까지 곁들이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었다.

한 잔의 술에 거리를 음미하고 한 잔의 술에 흥취를 느꼈다.

눈과 귀와 입이 모두 만족스러운 자리였다.

그렇게 세 병의 양하주를 비웠을 때.

“……?”

주호는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고개를 들었다.

우당탕탕.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것인지 집기가 깨지거나 탁자나 의자 따위가 바닥을 나뒹구는 소음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쯧, 얌전히 마실 것이지.”

아마 술에 취한 누군가가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이리라.

‘간도 크군.’

정천학관의 입관 심사 때문에 사방에 깔린 것이 무림인이었다.

까딱하다 칼침 맞고 눕기 딱 좋은 시기에 소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나 잡아 주쇼, 라는 소리와 같았다.

주호는 굳이 나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약간의 소음이 방해했지만, 그래도 술과 음식은 훌륭했으며 거리의 활기찬 모습은 여전히 보기 좋았다.

“--, ---!”

하지만 그것도 결국 끝을 맞이했다.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온다. 명백히 심기가 불편한 그 걸음걸이에 주호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도대체…….”

그러곤 따끔하게 한소리라도 해줄까 싶어 계단 쪽을 바라보았지만, 되려 그의 두 눈이 커졌다.

“…당신.”

그것은 상대 쪽도 마찬가지였다.

남궁연은 설마 이곳에서 주호와 마주칠지 몰랐다.

입은 은혜가 있기도 했고 눈까지 마주쳤는데 인사를 하지 않고 가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

그렇기에 그녀는 주호의 앞으로 다가와 가볍게 포권했다.

“오랜만에 뵈어요, 은공. 역시 사람이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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