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9화 (9/300)

#9화

“단 노인?”

“음?”

당대 무림맹주인 단철량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호칭에 고개를 돌렸다.

곧 그는 주호와 눈이 마주쳤고 마찬가지로 두 눈을 크게 떴다.

“자네!”

“단 노인 아닙니까!”

주호는 깜짝 놀랐다.

단 노인이 무림맹주라니?

분명 그는 옛적에 자신이 하는 일이라곤 건물 몇 개에서 잡초를 뽑는 한직이라고 했었다.

혹시나 무언가 착오가 있나 싶어 고개를 들었지만, 그 직후 떠오른 상태창의 내용에 자신이 영락없이 속아 넘어갔었음을 깨달았다.

[상태창]

-새로운 인물의 정보를 불러옵니다.

이름: 단철량

나이: 예순일곱

직업: 무림맹 맹주

경지: 화경(四/十)

무공: 낙일검법

“…허.”

설마 단 노인이 무림맹주였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주호는 기가 찬 심정이 들었다.

“…허허.”

단철량 역시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무림맹주였던 그는 모두가 자신을 어려워하는 것에 심히 적적함을 느꼈다.

그렇기에 기도를 감추고 그저 할 일 없는 한량의 모습으로 자신의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외당 주변을 자주 기웃거리곤 했다.

그러던 찰나, 다른 무사들과는 달리 매일 밤늦게까지 홀로 검을 휘두르던 주호에게 흥미를 갖게 되었다.

처음엔 몇 수 조언이나 해줄까 싶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노력하는 끈기 하나는 가상하다만, 그것이 전부였다.

익힌 무공은 삼류 언저리 것에 무재가 뛰어난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도리어 자신의 몇 마디로 어설프게 성장이라도 하면 화가 되리라는 것을 알기에 단철량은 그저 평범한 노인의 모습으로 주호와 관계를 텄다.

그러던 차.

무황의 비동이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고금제일인 무황.

과거 천하제일인으로 불렸던 절대 고수의 유산이 남겨져 있다는 비동.

주호는 어떻게든 그곳에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많은 무리가 따르는 이야기였다.

고작 외당의 말단 무사인 그로선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는 사안이었으니.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낙심한 주호를 본 단철량은 고심 끝에 그가 무림맹 파견단에 들어갈 수 있도록 뒤에서 슬쩍 손을 썼다.

그리고 그것이 크나큰 실책이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보물은 욕심을 불러왔고, 욕심은 수많은 사람을 잡아먹었다.

주호 역시 그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단철량은 이런 결말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그 자신이 직접 나서서 그 근처를 샅샅이 흩었으나, 주호로 보이는 시신은커녕 그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다, 다 내 욕심 때문이다.’

단철량은 사람의 인생에 있어 무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주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저 좀 더 다양한 경험을 겪고, 고뇌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거쳐 성숙해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주호의 죽음을 불러왔다.

단철량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최대한 많은 재화를 위로금의 명목으로 그의 본가에 지급하고, 가끔 생각이 날 때마다 명복을 빌어주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웬일인가.

“살아… 있었군.”

죽었다고 생각했던 주호가 눈앞에 버젓이 살아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감쪽같이 속이고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있는 단철량은 주호의 기세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세. 서로 쌓인 이야기가 많을 듯싶으이.”

“…….”

단철량의 말에 주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을 속여 넘겼다는 것에 배신감을 느끼진 않았다.

예전부터 도움이 되곤 하는 조언을 해주는 분이었으니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을 뿐.

주호는 정문을 지키던 무사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단철량의 뒤를 따라 마차에 몸을 실었다.

현무단주 심가벽은 다시 말을 채찍질했고, 그들은 이내 무림맹 안으로 들어갔다.

***

무림맹 맹주전.

본디 주호라면 올 일도 없고 출입할 권한도 없던 금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참나.’

외당의 말단 무사였던 자신이 삼 년이 지난 지금 무림맹을 이끄는 맹주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니.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군. 이 노인네의 취향이 조금 독특해서 말이네.”

“맹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니 뭔들 맞지 않겠습니까.”

살짝 뼈가 들어있는 대답에 단철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그렇게 놀리지 말게나. 죽었던 이가 몇 년 만에 살아 돌아와 어안이 벙벙한 상태이니.”

그 소탈한 모습은 예전과 다름이 없기에 주호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변한 것이 없어 보여 다행입니다, 맹주님.”

“되었네, 이 사람아. 우리 사이에 그런 낯간지러운 호칭은.”

“하하하, 그래도 계속 단 노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그런 건 밖에서만 신경 쓰세. 난 상관하지 않는다만, 맹에 워낙 고지식한 아이들이 많아야지.”

“알겠습니다, 단 노인. 사실 저도 맹주님이라는 것보단 단 노인이라는 호칭이 입에 더 붙습니다.”

주호의 말에 단철량은 사람이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그 누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삼 년 전의 얼치기가 아닌 자신의 신분을 알아버린 이 상황에서.

“자, 그러면 나는 자네에게 미안해야 하는가 아니면 반갑다고 해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추궁해야 하는가?”

두루뭉술한 말이었지만, 주호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반갑다고 하는 건 다시 보게 된 것에 대해.

추궁해야 하냐는 것은 예전과 다른 무공을 보유하게 된 자신에 대해.

하지만 첫 번째로 말한 미안해야 하는가에 대한 뜻은 잘 와닿지 않았다.

“미안해야 하는 것은 뭡니까? 설마 무황의 비동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 때문에 그런 겁니까?”

“음? 몰랐는가? 원래 자네 실력으로는 임무는커녕 차출되는 것도 어림없었다네. 내가 입김을 넣어서 뽑힌 것이지.”

“아…….”

생각지도 못한 비사에 주호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운명처럼 생각했던 일이 모두 무언가의 작용이었다.

설마 자신이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노인이 무림맹주일 줄은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달그락.

용정차의 깊은 향이 방안을 채운다. 무림맹주란 자리가 고상한 것을 즐겨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단철량은 제 외모처럼 단정하고 정갈한 것들을 좋아했다.

주호에게 호감을 느꼈던 것도 그 점이 한몫 차지했다.

‘소싯적의 나를 보는 것 같지 않은가.’

고개를 들자 훤칠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단철량 역시 젊었을 무렵 옥면신룡이라 불리며 뭇 많은 여성의 마음을 흔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자랑스러운 별호였으나, 지금에 와서는 그저 낯간지러운 한때의 추억이 되었다.

그렇기에 주호를 보고 있노라면, 그때의 자신을 보고 있는 듯했기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자네가 영락없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네.”

“저 역시 정말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좋게 끝났으니 다행 아닙니까.”

“그건 그렇네만.”

살짝 풀이 죽은 듯한 단철량의 모습에 주호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가 힘을 써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무황의 비동은커녕 안휘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무황의 무공을 손에 넣었으니 말이지.’

실상 은인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나저나 이야기 좀 풀어보게. 도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나?”

단철량이 호기심 짙은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주호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차를 한 모금 머금었고, 이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교의 흑풍대가 습격했을 때에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경비대에서도 나름대로 고수라고 거들먹거리는 이들도 칼질 한 번에 갈려 나갔으니 정신을 차릴 새가 없었죠.”

거짓을 말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진실과 적당히 버무리는 것이었다.

설사 상대가 눈치챈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기에 더욱 안성맞춤이었으니.

“난전 와중에 시체 하나를 위에 겹쳐 겨우 살아남았다 싶더니, 남아 있던 마인 한 명과 눈을 마주쳤지 뭡니까.”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때의 일을 묘사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그 끝에 다다른 막다른 절벽에서 주호는 몸을 날렸고, 주위의 풍경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가공할 진법이로구나.”

천지를 가르던 만장의 절벽이 사라지고 꽃과 나비가 가득한 도원향이 눈앞에 펼쳐졌다는 말에 단철량은 제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감탄을 터트렸다.

물론 그것은 주호가 어릴 적 어느 무용담에서 읽었던 도입부일 뿐이었다.

“그곳에서 한 노인을 만났습니다. 세상을 등졌다면서 떠나게 될 때까지 결국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저에게 이 무공을 전수해주셨죠.”

말을 마친 주호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우웅-

그러자 깊은 공명음과 함께 청명한 기운이 그의 손끝에서 피어올랐다.

‘대단하구나.’

이제 겨우 기를 유형화시킬 수 있는 후기지수의 수준이 아니었다.

맹에 있는 어지간한 고수보다 완숙의 경지에 오른 그 모습에 단철량은 몇 번이고 모를 감탄을 흘렸다.

“식견이 짧지 않다고 자부해왔거늘, 나로선 그 근원조차 짐작할 수 없구나.”

주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순수할 정도로 맑은 정(正)의 기운이었다.

“정말로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연신 탄식을 내뱉는 그의 모습에 주호는 미소지었지만, 단철량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느낀 것이, 이 강호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일세. 설사 그렇게 보일지라도 결국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지. 아무리 천운이 따른다고 해도 자네가 자격이 없었다면 그 무공을 익히지 못했을 것이네.”

단순하게 기연이 찾아온다고 해서 모두가 절대 고수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대다수가 자신에게 기연이 찾아오는 것을 바라지. 그것이 이미 지나갔는지도 모른 체 말이네.”

기연은 준비된 자의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기연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 되어 있지 않으면 소용없었다.

단철량은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오며 눈앞에서 그것을 놓치는 이들을 허다하게 봐왔다.

‘그나저나 대단하군. 그 동년배 중엔 적수가 없겠어.’

그가 기억하기로 주호의 나이는 이제 막 스물 중반이 넘었다.

작금 강호를 울리는 후기지수 중 그와 견줄 수 있는 경지를 가진 무인이 있을까.

‘저 화산의 신룡이나, 무당의 기재인 태극검의 후예 정도는 되어야 겨우 발끝에 서겠군.’

후기지수와 비교하기에 미안할 정도로 주호의 기세는 너무나도 뛰어났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찌할 계획인가? 원한다면 맹 내에 자리를 만들어주겠네.”

주호의 무공은 당장 무림맹 최정예 조직의 수장을 맡아도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그의 무공이 차고 넘쳤다.

물론 무공만 강하다고 그런 자리를 꿰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강호의 이해관계부터 인성, 그리고 경력과 경험까지.

주호에게 부족한 것은 경력과 경험이다. 외당의 무사 출신인 그로선 무림맹 주요 작전에 참여해본 적이 없었으니.

하지만 그런 것은 얼마간의 실전을 통해 충분히 해결될 터.

‘더군다나 이런 전력을 놓치고 싶진 않고 말이야.’

특히 지금같이 강호 정세가 심상치 않을 때는 한 명의 고수가 아쉬운 법이었다.

“청룡단은 어떤가? 조장 자리를 추천해주겠네. 자네 무공에 비하면 부족한 자리나 어느 정도 경험을 쌓으면 부단주로 승격할 테고 단주까지는 이 년도 채 걸리지 않을 걸세.”

그쪽 부단주가 하도 사고를 많이 쳐서 내쫓을 생각이었다며 단철량은 툴툴거렸다.

“아니면 주작단? 현무단이나 백호단은 별로 추천하지 않는 다네. 고리타분한 임무만 잔뜩 있거든.”

단철량은 무림맹 정예 조직의 이름을 죽 나열했다.

모두 정도 무인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세를 자랑하는 곳들이며, 누구나 다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조직이었다.

‘자리라…….’

자신에게 이것저것 말해오는 단철량의 모습에 주호는 감개무량한 마음이 들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무림맹주 본인이 알선해주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이구먼.”

담담한 주호의 표정을 본 단철량이 놀리듯 말했다.

“무공 좀 익혔다고 눈까지 높아졌는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만약 맹주 직을 말씀하셨으면 당장에라도 수락했을 텐데 말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