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주호가 고향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는 막내인 주예향과 어울리기도 했고 주산의 일을 돕기도 했으며 주가장의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마치 그동안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해 공백을 채우려는 듯 하루도 쉬지 않고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그리고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주산은 마침내 제 마음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날 밤.
적막한 달이 홀로 하늘에 걸려 어둠 속에서 기울어 갈 때, 주산은 술병을 들고 형님의 거처를 찾아갔다.
“음? 이런 시간에 무슨 일이더냐.”
한창 검의 날을 닦고 있던 주호는 갑작스러운 동생의 방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과 한잔하고 싶어 말입니다.”
“…그건 마음에 드는 소리군.”
병을 찰랑거리며 말해오는 동생의 모습에 주호는 씩 미소를 지었다.
언제고 아이에 머무를 것 같던 형제가 어느새 다 큰 성인이 되어 가문을 이끌고 있었다.
그 사실에 주호는 묘한 감흥을 느끼며 동생이 따라주는 술잔을 기울였다.
“좋구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밤이었다.
거기에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동생과 함께 있으니 어느 순간이 부럽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 이런 일이 있지 않았더냐.”
술에 달아오른 둘은 어느덧 옛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뒷산에 올라 약초를 캐다 독버섯을 먹어 사경을 헤맸던 이야기.
강호인이 되겠다며 목검을 들고 설치다 자빠져 팔이 똑 부러진 이야기.
자신조차 잊어버렸던 기억들을 나누며 이야기할 때, 주호는 동생의 얼굴에 서린 무언가를 읽을 수 있었다.
“무언가 말할 것이 있구나.”
“…역시 형님 눈은 속이지 못하겠군요.”
둘이 마신 것이 고작 한 병이었지만, 주산은 술을 잘하지 못하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역시 주가장의 다음 장주는 형님이 맡는 것이 좋겠습니다.”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언젠가 나올 말이기도 했다. 그 말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눈앞에 어엿한 장주가 있는데, 내가 왜 그 자리를 맡아야 하는 것이냐.”
“예?”
“나는 사람을 이끌고 사업을 하는 것에는 이미 손을 놓아버린 지 오래다. 그런 상태에서 주가장을 이어받아 봤자 별수 있겠느냐?”
“하지만 형님이라면 금방 배우실 수 있을 겁니다.”
주산은 제 형의 말을 부정했지만, 주호의 태도는 단호했다.
“주가장의 장주는 네 자리다. 실제로 아버지가 물러나시고 이때까지 잘해왔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턱.
자신의 어깨에 닿는 따뜻한 손길에 주산은 고개를 들어 형님을 바라보았다.
“괜찮다. 혹여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가 도와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는 주호의 미소에 주산은 한숨을 내쉬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형님께서는 앞으로 무엇을 하실 생각입니까?”
사실 자신이 장주의 자리를 권해도 형님은 수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막연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말로 궁금했던 것은 형님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다시 돌아가야지, 강호로.”
동생의 물음에 주호는 창밖에 떠오른 달을 보며 말했다.
기껏 고향에 돌아오긴 했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눌러앉을 생각은 없었다.
“일단은 무림맹에 돌아갈 생각이다. 생존 신고는 해야겠지.”
벌써 삼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간 죽었을 줄 알았던 자신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반갑게 맞이해주지 않을까.
‘내가 막강한 무공을 손에 넣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 궁금하군.’
술잔을 기울이는 주호의 얼굴은 한껏 기대된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
“정말로 벌써 가시는 겁니까.”
주호가 본가로 돌아온 지 열흘째 되던 아침, 문을 나서는 그의 모습에 주산이 섭섭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영영 만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내 간간이 서신을 보내도록 하마.”
주호의 말에도 주산의 얼굴은 시무룩하기 짝이 없었다.
“무림맹이 있는 하남으로 가신다고요?”
오히려 그 옆에 있던 주예향이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물어왔다.
주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자신도 가고 싶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저도 가고 싶지만, 작은 오라버니께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출가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시네요.”
데려가 주면 안 되겠냐는 의미를 내포한 투정에 주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향이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반년 정도 남았어요. 걱정도 태산이라니까요, 작은 오라버니는.”
“그만큼 너를 아낀다는 것이겠지. 좋다, 내 일을 마치고 그 전에 돌아오마. 그때는 부모님도 계시겠지. 여유가 된다면 가족 모두 함께 강호를 유람 하자구나.”
“정말요? 약속하신 거예요!”
주호의 말에 주예향은 방방 뛰며 기쁨을 표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그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다른 동생에게 말했다.
“그럼 나중에 보자꾸나.”
“…조심하십시오.”
“네 몸도 잘 챙기거라.”
인사를 마친 주호는 주가장을 나섰다.
막 성년이 되어 출가했던 것같이 당찬 발걸음이었지만, 이젠 그 속에 담겨 있는 깊이가 달랐다.
‘부모님을 뵙지 못하고 나가는 것은 아쉽지만, 건강이 괜찮아지셨다 했으니.’
슬슬 자신의 소식이 적힌 전서가 사천에 닿았을 것이리라.
죽은 줄로만 알았던 맏아들이 사실은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들으신다면 대체 무슨 표정을 지으실까.
쓰게 웃은 주호는 다시 한번 가문을 나와 발걸음을 내디뎠다.
목적지는 무림맹이 있는 하남.
주가장이 위치한 산동에서는 남서쪽으로 걸어가야 했다.
여정은 순탄했다.
첫날, 옆 도시에서 방을 잡고 저녁을 먹던 그는 안휘에서와 같이 주위 사람들에게 술을 사주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사람이 모이고 술이 들어가면 절로 입이 열리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주호가 들은 강호 정세는 참으로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중원의 각 문파는 전쟁이라도 할 것처럼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병장기와 식량을 비축하는 것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였다.
그 덕에 상인들은 신났지만, 생필품이 겹치는 백성들이 물가가 올라 곤란을 겪고 있었다.
술을 받아먹던 상인 중 한 명은 정말로 전쟁이라도 나는 것이 아니냐며 무거운 얼굴로 말했지만, 주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렴 전쟁이 그리 쉽게 일어날까.’
뒤이어 들려온 것은 정천학관의 입관 시험에 관해서였다.
정천학관.
이름은 학관이었지만, 실상은 무림의 후기지수들이 다니는 무학관에 가까웠다.
하남에 자리한 정천학관은 백여 년에 걸친 역사를 지닌 곳으로 중원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그 결과 명망 있는 고수를 수없이 배출해냈으며, 작금엔 무림의 중심이 되었다고 해도 관이 아닐 만큼의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약관이 된 후기지수들은 하나같이 이곳으로 몰려들었고, 지금에 와선 무림 출도를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자리 잡았다.
“정천학관이라…….”
막 강호에 출도한 주호 역시 정천학관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 더욱 뛰어난 무공을 익히고 같은 후기지수들과 생활하는 그런 멋진 광경을 꿈꿨다.
하지만 지닌 실력이 미천해 입관 심사에서 빛보다 빠른 속도로 탈락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 해마다 입관 심사를 보러 전 중원에서 몰리는 인원이 어마어마했다.
그들 대부분이 무가 출신이었고, 일신의 수준도 주호와 비교할 수 없이 높았던바.
또 한 번 현실의 씁쓸함을 깨닫고 뒷골목을 떠돌았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뭐, 어찌 되었든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군.’
물론 지금에서는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
전과 같이 도적들을 만나거나 하는 일 없이 순탄하게 하남으로 입성한 주호는 곧바로 무림맹을 향했다.
“이곳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구나.”
자리를 비운 지 몇 년이나 지났건만, 거리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단지 바뀐 것이라면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주호는 훤칠한 외모 때문에 어느 곳을 가나 이목을 끌었다. 예전에는 그를 어느 가문의 귀공자로 착각했던 사람도 있을 정도였으니.
“맹에 방문한 목적이 무엇이오?”
무림맹의 정문으로 다가가니 입구를 지키는 무사가 방문 목적을 물었다.
“복귀 신고를 하러 왔소이다.”
일전에 동생에게 들으니 안휘로 떠난다는 서찰이 온 뒤, 몇 주 후에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무림맹 역시 자신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것일 터.
그렇기에 주호는 입구를 지키던 무사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큰 상처를 입어 사경을 헤매다 얼마 전에 겨우 의식을 회복했고, 깨어난 뒤에는 고향을 들렀다가 무림맹으로 복귀하는 길이라고.
“…지금 그것을 나보고 믿으라고 한 소리요?”
“사실인 것을 어찌하겠소. 삼 년 전의 인명부를 보면 외당 소속으로 주호란 이름이 있을 것이오.”
무사의 반응은 딱 생각했던 대로였다.
하지만 미심쩍은 것은 정공법으로 해결해나가면 그만. 주호는 곧 자신의 신상을 상세하게 설명했고, 무사는 안쪽으로 들어가 그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했다.
“…주호라는 무사가 삼 년 전 외당 소속이었다는 것은 확인되었소만, 그것이 당신이라는 것은.”
“내 동료들이 있을 것이오. 내가 돌아왔다고 말하면 그들이 신분을 증명해주겠지.”
여기까진 그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다음부턴 의외의 난관에 봉착했다.
“…없단 말이오?”
“외당 무사였던 담월은 그다음 해에 다른 곳으로 발령 났군. 기록을 보면 한해 전 사도맹과의 전투에서 사망했소. 진가설은 은퇴해서 고향으로 내려갔고…….”
주호가 알고 있던 동료들은 하나같이 죽었거나 모종의 이유로 맹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옛 기억을 곱씹으며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떠올렸지만, 그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젠장.”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당혹스럽소.”
무사 역시 난색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바뀐다고 했지만, 고작 삼 년밖에 지났을 뿐이다.
그렇기에 지금과 같은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끄응. 보증을 서주는 사람이 없다면 입맹하기 힘들 것인데.’
굳이 지금에 와서 맹에 집착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한때 몸담았던 곳이기에 아쉬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아, 단 노인! 혹시 마지막으로 단 노인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줄 수 있겠소?”
주호의 말에 무사는 수하를 불러 단 노인이라는 자를 찾게 했다.
하지만 일각이 흐른 후, 돌아온 대답은 단 노인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구려. 괜히 시간만 허비하게 했소. 미안하군.”
주호는 자신에게 어울려준 무사에게 사과를 건넸다.
“되었소. 이런 일도 있는 법이지. 그나저나 당신도 대단하시오, 만약 내가 죽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면 그대로 고향에 눌러앉았을 터인데.”
“사람의 천성이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 모양이오.”
“그건 그렇겠지, 하하.”
실없는 이야기를 끝낸 주호는 무사에게 수고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리곤 한 줌의 아쉬움을 가진 채 몸을 돌려 돌아가려 했지만, 그 직후에 들려오는 긴 호각 소리에 자리에서 멈춰 섰다.
“이건?”
“맹주님이 돌아오셨다는 소리요. 이년 전에 새롭게 정해진 신호지.”
‘무림 맹주라…….’
주호는 공교롭게도 무림맹에 몸담고 있을 일 년이란 시간 동안 무림 맹주를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맹주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직위가 높은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행사에 참여해도 그 끝자락에서 희미한 잔영만 보고 끝났을 뿐이니.
‘얼굴이나 보고 갈까.’
이왕 무림맹을 떠나게 될 것, 무림맹주의 얼굴이나 보고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두두두두.
네 필의 말이 이끄는 마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그들이 서 있던 정문으로 다가왔다.
“워워.”
주호는 마차를 이끄는 마부가 맹주 직속 호위 부대이자 무림맹 사대 정예 조직 중 한 곳인 현무단임을 알 수 있었다.
[상태창]
-새로운 인물의 정보를 불러옵니다.
이름: 심가벽
나이: 서른아홉
직업: 무림맹 현무단 단주
경지: 초일류(二/十)
무공: 유운검법
동시에 상태창에 새로운 정보가 표시되었다.
‘지금껏 만났던 자 중 가장 고수로군.’
주호가 만났던 이들 중 무공의 수위가 가장 높았던 이는 안휘에서 싸웠던 천마신교의 마인 중에 있었다.
하지만 진가벽은 그보다 몇 차원 위의 고수였다.
“흠.”
주호는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현무단은커녕 내당의 고수들만 봐도 엄청나게 강해 보이며 범접할 수 없는 경지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십 초식 이내로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렵지 않게 그를 쓰러뜨리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이곳부터는 걸어가겠네. 계속 마차에만 있으니 허리가 쑤셔서 말이야.”
주호의 상념은 마차 안에서 들려온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에 깨어져 나갔다.
곧 마차의 문이 열리며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에 주호의 두 눈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