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주호가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풋내기 시절.
낭인에게 돈을 주고 배운 무공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삼류 파락호들이야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껏 강호의 낭만에 취해있던 그는 싸움에서 승리해도 고수의 관용이라며 자신에게 적대했던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곤 했다.
적들은 그 자리에선 그의 마음이 넓음을 칭송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물론, 그것이 나중에 치명적인 독이 되어 돌아온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몇 번을 죽을 뻔했는지 세기도 힘들군.’
주호는 뼈저린 경험을 얻은 끝에 손끝이 잔혹해지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더욱이 지금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문까지 관계된 상황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도 얼마 전에 마인들과 싸웠을 때처럼 전부 죽일 생각은 없었다.
물론 더는 패악질을 하지 못하도록 팔다리 한 군데씩은 분질러 놓아야겠지만.
“쳐라!”
“문주님의 원수를 갚자!”
혈사문도들 대다수는 주호의 기세에 겁을 집어먹었다.
그렇기에 뒷걸음질을 치며 당장에라도 도망갈 기회를 엿봤지만, 그 사이사이에 섞여든 삭풍 단원들이 복수를 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시팔, 까짓거 쪽수 앞에 장사 없지.”
“한 번에 달려들어! 단숨에 때려눕힌다!”
무식하기에 용감하다고 했던가.
순식간에 그것에 고취된 그들은 각자 무기를 꼬나쥔 채 주호 앞에 섰다.
“흠.”
슬쩍 뒤로 물러난 진무량은 느긋한 표정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 숫자면 어느 정도 수준을 알 수 있겠지.’
혈사문도들은 전부 삼류 파락호 떨거지들이었지만, 숫자가 숫자인 만큼 체력이 크게 소모될 터.
서른의 삭풍단이라면 지친 주호를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크악!”
“피해! 피해!”
기세 좋게 시작된 싸움이 곧 비명이 난무하게 된 아수라장으로 뒤바뀐 것은 그가 발걸음을 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주호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손을 휘둘렀다.
비록 아무런 무기가 들려있지 않았지만,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한 명 한 명 착실하게 팔다리가 분질러져서 바닥을 뒹굴었다.
그렇게 일각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끄으으으.”
“다리, 다리가…….”
주호에게 덤벼들던 혈사문도의 절반이 넘는 숫자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구르게 되었다.
“…제법이로군.”
진무곡은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어 보이는 주호의 평안한 얼굴을 보곤 턱을 쓰다듬었다.
자신이 나서도 저렇게 깔끔한 수법으로 이들을 정리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드는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였다.
수적인 한계는 쉬이 뒤집을 수 없는 것. 만용은 그 목숨을 앗아가리라.
“삭풍발진!”
진무곡의 힘찬 외침에 삭풍단은 마치 한 몸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호들갑 떨기는.”
주호는 가늘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자신만만해하는 태도는 대충 이해가 갔다.
한 명 한 명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는 것이 이런 시골에서 볼 법한 수준의 고수는 아니었으니.
‘분명 무슨 뒷배가 있겠지.’
실전 경험도 풍부한 것인지 마주 섬과 동시에 피부를 찌를 듯한 살기가 전신에 닥쳐왔다.
“사사(沙死).”
진무곡의 짧은 명령과 동시에 삭풍단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서른에 달하는 고수가 일제히 자신을 향해 달려들었을 때, 주호는 익숙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 떠오르는 상태창을 볼 수 있었다.
[상태창]
-새로운 인물의 정보를 불러옵니다.
이름: 진무곡
나이: 마흔다섯
직업: 사도맹 삭풍단 단주
경지: 일류(七/十)
무공: 쇄혼검법
‘사도맹?’
어렴풋이 생각은 했지만, 정말로 그 이름이 튀어나오자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평범치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사도맹이 개입하고 있을 줄은.
“죽어라!”
하지만 주호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일전 자신의 손에 박살 난 마교와 사도맹의 지부가 몇 개이던가. 이전까진 그래도 손속에 여유를 두려 했지만, 살의를 품는 것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쉬시식.
사방에서 검이 쏟아져 내렸지만, 제일 먼저 주호에게 닿은 것은 정면의 공격이었다.
휘리릭-.
운룡보를 밟으며 가벼운 몸놀림과 함께 검을 피해낸 그는 자신을 향해 검을 찔러오던 이들에게 다가갔다.
‘기회!’
삭풍단원은 두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삭풍진의 진정한 공격은 두 번째에서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맹렬하게 기세를 피워 올리며 검을 휘둘렀으니, 이내 항거할 수 없는 거력이 자신의 손을 비트는 것을 느꼈다.
“억?!”
검을 빼앗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휘두른 궤도가 바뀌었고 그것은 대참사를 불러왔다.
푹!
“헉!”
삭풍단원의 검이 반대편에서 오던 동료의 검을 꿰뚫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주호가 움직일 때마다 그를 공격하던 이들의 검이 미묘하게 휘어지며 같은 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화접목!”
그것이 무서울 정도로 고절한 수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들이 경악성을 내며 몸을 물렸다.
물론 주호는 그 틈을 봐줄 만큼 너그럽지 않았다.
“피해!”
삭풍 대원들이 그를 피해 물러났지만, 주호는 더욱 잔혹하게 살수를 날렸다.
우득.
일수에 목이 부러지고 일장에 가슴이 함몰되어 숨이 끊어졌다.
한식경도 이전에 두 자릿수에 달하는 삭풍 단원이 바닥에 누워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퇴(退)!”
주호의 신형이 휘릭 할 때마다 쓰러지는 수하들을 보며 넋을 잃고 있던 진무곡은 황급히 그들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뒤. 그가 분개한 얼굴로 앞에 나와 외쳤다.
“감히!”
“감히? 낯짝이 상당히 두껍군. 네놈들이 먼저 설쳐대지 않았느냐?”
주호는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녀석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네깟놈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감히 사도맹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사도맹?”
“사도맹이라고?”
갑작스럽게 이어진 고수들의 싸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고 하던 혈사문도들이 경악성을 토해냈다.
혈사문이라는 문파에 속해있긴 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뒷골목을 전전하던 삼류 파락호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사도맹이란 이름은 그야말로 하늘과 같은 것이었다.
“사도맹이 우리 뒤에 있다!”
조금 전까지 추풍낙엽으로 저들을 쓰러뜨리던 주호의 신위에 주눅 들어있던 그들이 사도맹이란 한 마디에 진위 가릴 것 없이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우습군, 내 뒤에는 무림맹이 있다. 맹은 이미 너희들의 움직임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지.
“뭐라?!”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주호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들은 경악에 잠겼다.
“벌써 무림맹이 나섰다는 건가.”
진무곡은 낭패감 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씹었다.
위에서 내려온 정보에 의하면 자신들의 움직임이 이미 무림맹으로 흘러들어 갔다.
하지만 그들은 마교의 행적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눈앞의 저자는 무엇인가.
단신으로 삭풍단과 대적할 수 있는 고수를 쉽게 내보낼 만큼 무림맹은 전력이 넘쳐나는 곳이었던가.
“…….”
진무량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을 확인한 주호는 내심 웃음을 흘렸다.
어쭙잖은 말장난이었지만, 그것을 말한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무게감이 달라지는 일이었다.
지금 상황이라면 자신의 발언에 상당한 무게가 실릴 터.
‘무림맹과 연관시킨다면 주가장의 이름도 어느 정도 가려지겠지.’
그렇다고 전부 거짓은 아니었다.
그 자신은 일전에 무림맹 말단에 몸을 담았던 적이 있었으니.
물론 벌써 몇 년 전의 이야기에도 무림맹은 사도맹이 고작 이런 시골에서 벌이는 일 정도는 신경 쓰고 있지 않을 것이다.
진실 속에 거짓을 섞는 것이 가장 손쉽게 상대를 속여 넘기는 법.
설사 구할 구푼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뭐 어쩌겠는가.
“그러니까, 잔말 말고 덤벼.”
그 이후.
삭풍단이 모두 쓰러지는 데는 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장내는 앓는 소리로 가득했다.
다만, 혈사문도들은 그저 팔다리 하나가 망가진 것에 감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이 사도맹의 출신이라며 큰소리치던 삭풍단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주호에게 당해 차디찬 주검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디 보자.”
주호는 곧바로 혈사문 내부를 이잡듯이 뒤졌다.
이들이 이 근방에서 설쳐대면서 얼마나 많은 재물을 쌓았겠는가.
건물 몇 군데를 부수며 돌아다니니 수북이 쌓여 있는 금전과 보물, 그리고 염왕채를 놓은 것으로 보이는 명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필요 없으니까.”
티딕.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 것으로 삼매진화를 일으켜 명부를 태워버린 주호는 산더미처럼 쌓인 재화를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몇 놈 남겨둘 것을 그랬나.”
아무리 그가 고수라지만, 이것들을 모두 들고 가기엔 현실적으로 많은 무리가 따랐다.
적어도 한두 명의 손은 빌리고 싶었으나, 바닥을 기는 혈사문도들은 어디 하나씩 불구가 돼 있는 상태.
그런 상태에 있는 이들을 겁박할 정도로 주호의 심성은 뒤틀려 있지 않았다.
“음?”
여러 번에 나누어 움직여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주호는 혈사문 밖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적의 증원인가.’
하지만 느껴지는 기세가 보잘것없는 것이 파락호 중 누군가가 혈사문의 소란이 난 것을 알고 도우러 온 듯했다.
저벅.
누군가가 부서진 정문으로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그러곤 장내에 쓰러져 있는 이들을 보고 무어라 소리치더니 천천히 혈사문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훌쩍 몸을 날린 주호는 그들 앞에 가볍게 내려섰다.
그러곤 무리에 있는 익숙한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아?”
“형님!”
불청객들의 정체는 주산을 필두로 한 주가장의 무사들이었다.
“이게 대체…….”
주산을 비롯한 주가장의 인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이 형님이 조금 강하다.”
주호는 머쓱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자신을 바라봐오는 눈길에는 숨길 수 없는 선망과 존경이 담겨 있었다.
그러한 시선은 처음 받는 것이기에 부끄러운 마음이 컸지만, 애써 태연한 척을 하고는 바닥에 수북이 쌓인 재화들을 가리켰다.
“마침 잘 왔구나. 이것들 좀 챙겨라.”
“이게…….”
쓰러진 혈사문도들을 보고 놀랐던 그들은 눈앞의 재화를 보곤 또다시 놀람에 빠졌다.
주가장은 상계 가문으로 적지 않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 대부분은 부동산이거나 어음의 종류였다.
재화 역시 적진 않았지만, 이렇게 바닥에 쌓아놓고 늘어놓을 정도까진 않았다.
“혈사문의 재산이다. 챙겨가거라.”
“…….”
주산은 입을 닫은 채 굳은 안색으로 재화와 주호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는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형님의 말씀이라도 부정하게 쌓은 재물을 탐할 수는 없습니다.”
‘녀석.’
주호는 단호히 고개를 젓는 동생의 모습을 보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적부터 바라게 자라온 아이였다.
혈사문이 어떻게 재물을 축적했는지는 멀리 있던 자신보단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거부하는 것일 터.
“탐하라는 것이 아니다. 제 주인들에게 돌려주라는 것이지.”
“…예?”
“이들에게 핍박받은 이들이 있을 것 아니더냐. 재물로는 전부 충족할 수 없겠으나, 지난날의 설움을 어느 정도 보상받을 순 있겠지.”
나눠준 뒤 혹여라도 남는 것이 있다면 그땐 수고비로 취해도 되지 않겠냐며 주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형님…….”
“그렇게 바라보지 마라. 징그러우니까.”
존경을 듬뿍 담은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생의 모습에 주호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아까운 감도 있었다.
이 정도의 재물이라면 주가장이 한층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될 터.
하지만 재물은 욕심을 부르고 화를 부른다. 임시나마 주가장을 맡은 동생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형 된 도리로 그것을 따라주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주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온 무사들에게 재물을 나르게 하였고, 장원으로 가지고 돌아가 그간 혈사문에게 핍박받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챙긴 건 주호의 말대로 소량의 수고비뿐.
“자, 그러면 여기도 마무리해야겠지.”
주호는 혈사문의 무리를 선별했다.
비교적 죄질이 가벼운 이들은 방생하고, 갱생의 여지가 없는 범죄를 저지른 이들은 관아에 넘겼다.
방생된 이들도 어차피 전부 어디 하나씩 불구가 되었기에 더는 파락호 짓을 하는 것은 불가능할 터.
그렇게 하택을 주름잡던 혈사문은 하루 만에 몰락했고, 그 일은 주호라는 이름 두 글자가 조금이나마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