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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귀환-5화 (5/300)

#5화

제 동생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주호는 고개를 돌려 갑작스럽게 장원으로 난입한 괴한들을 바라보았다.

‘웬 놈들이지.’

어디 문파의 소속인 듯 전부 시뻘건 무복을 입고 있다.

하지만 주호가 무림에서 구른 짬이 몇 년이던가.

아직 자세한 사정을 듣진 못했지만, 한 눈으로 보아도 근래 이 주위를 활개치고 다니는 사파 계열의 무인들임을 알 수 있었다.

“응? 못 보던 얼굴이 있군. 네놈은 누구냐.”

그중 제일 화려한 장포를 걸치고 있던 중년인이 서늘한 미소를 띠며 주호에게 다가왔다.

“혈사문주! 이게 대체 무슨 후안무치한 짓이오!”

주산은 주예향을 품에 끌어안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후안무치는 무슨. 내 아량을 베풀어 며칠간의 말미를 주었다만, 그것을 무시한 것이 네놈이지 않으냐.”

“그렇다고 해서 장원의 문을 저렇게 부수며 들어오는 경우가 어디 있소!”

“아, 저것 말이냐? 저번에 보니 대문이 너무 낡은 것 같아서 말이다. 혼수품으로 새로운 정문을 가져왔으니 걱정하지 말도록.”

혈사문주의 눈짓에 그 수하들이 밖에서부터 새로운 문짝을 한 쌍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자, 이러면 됐겠지. 어서 품에 안은 그녀를 이쪽으로 보내라.”

한껏 의기양양한 태도였지만, 예의라곤 일절 찾아볼 수 없는 무례한 모양새였다.

더욱이, 선물이라는 문짝 위에는 뻔뻔하게도 혈사문의 표식이 그려져 있지 않은가.

그것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이는, 적어도 이 자리에 없지 않았다.

‘정녕, 정녕 방법이 없는 것인가!’

자신에게 손을 까딱거리는 혈사문주의 모습에 주산은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덜덜-.

그러다 문득 자신의 품에 안긴 동생의 몸이 가늘게 떨려옴을 느낄 수 있었다.

호기롭게 혈사문주에게 간다고 말했지만, 그에게 떠도는 소문이 어떠한 것인지 그가 어떠한 부류의 사람인지는 그녀도 모르지 않을 터이다.

‘미안하구나, 미안해. 이 모든 것이 내가 약한 탓이다…….’

뺨 위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문의, 자신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이런 핍박을 받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제 동생을 넘길 수는 없지 않은가.

“…주가장 전원은 들어라!”

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혈사문주는 그것을 보곤 짙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은 막다른 궁지에 몰리면 대체로 추악한 모습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주산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흥미가 동해 가만히 있었다.

그런 생각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주산은 그저 제 동생의 몸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목숨이 아까운 자는 떠나도 상관없다! 무릇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명(命)이니. 하지만!”

몸을 뒤덮은 떨림에 목소리 끝이 갈라진다. 하지만 그는 두려움 따위에 굴하지 않은 채 강한 의지를 피어 올렸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이 세상의 정의(正意)를 아는 이라면! 조금이라도 정도(正道)를 걷는 이라면!”

“감히 부탁하건대 검을 들고 앞으로 나와 이 나에게 손을 보태주거라! 저 금수만도 못한 놈에게 향이를 넘길 수는 없다!”

주가장에서 일하는 이들은 대부분 몇 대를 걸쳐 이곳에 몸담은 이들이었다.

그 때문에 가문에 대해 충성심이 남달랐지만, 상대는 무려 강호인이었다.

평생 검이라곤 부엌에서밖에 써본 적이 없는 이들이 감히 대항할 수 있을까.

“씨팔, 까짓 거 죽기밖에 더하겠나!”

하지만 그때 터져 나온 주산의 진심 어린 외침은 그들의 마음을 울렸다.

“아가씨를 넘길 수는 없다!”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은 장원을 지키는 무사들이었다.

이 자리에 있던 것은 댓 명밖에 되지 않은 인원이었지만, 제각기 검을 뽑아 주산을 호위하듯 앞으로 나와 혈사문주와 맞섰다.

“장주님!”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원에서 머물던 주가장의 무사들이 소란을 눈치채고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수가 물경 서른으로 다른 이들과 전부 합한다면 육십에 이르는 규모. 그에 반해 혈사문의 일동은 전부 스물이 조금 넘을 뿐이었다.

“다들…….”

순식간에 혈사문의 세 배가 넘는 인원이 자신의 등 뒤로 늘어서자 주산의 얼굴에 희망이 피어올랐다.

“썩 꺼져라! 이 짐승만도 못한 것들아!”

“아가씨는 절대 못 넘긴다!”

순식간에 뒤바뀐 분위기에 주가장의 사람들이 기세등등한 태도로 혈사문의 무리를 향해 외쳤다.

“…문주님, 어찌하시겠습니까.”

혈사문도 한 명이 문주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싸우게 된다면 결국 승리하는 것은 자신들일 터지만, 인원이 세 배가량 차이가 나는 이상 이쪽도 피해가 적지 않을 터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선을 넘는구나.”

혈사문주의 얼굴엔 웃음기가 싹 가셔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어리고 아름다운 아내를 얻을 생각에 색욕에 부풀어 있던 그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오는 모욕과 적의에 그 마음이 싹 가셨다.

“네놈들은 문을 지켜라. 혹여라도 다른 잡놈들이 방해하지 못하게.”

“예!”

감정이라곤 하나 실려 있지 않은 문주의 목소리에 혈사문도들은 절로 긴장하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주가장은 멸문하겠구나.’

그의 분노를 피하지 못해 어둠 속에서 스러진 가문이 몇 개이던가.

“어디 재롱 한 번 부려보아라.”

혈사문주는 검조차 뽑지 않았다.

단지 맨손을 들어 내공을 일으켰을 뿐이지만, 피처럼 시뻘건 혈기가 그의 손에서 일렁거렸다.

“나에게 이를 드러낸 네놈들을 모조리 씹어 먹어주마. 그리고 네년!”

쭉 뻗은 혈사문주의 일지(一指)가 주산의 품에 안겨있던 주예향을 가리켰다.

그것에 겨우 두려움을 가라앉혔던 그녀는 다시금 얼굴이 창백해졌다.

“네년 오라비의 사지를 자를 것이다. 그리고 죽어가는 오라비의 눈앞에서 네년을 범해주지. 다른 놈들도 편히 죽을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그토록 아끼는 저년이 헐떡이는 소리를 들으며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주겠다.”

혈사문주의 얼굴이 마치 악귀처럼 일그러지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저주 어린 말을 쏟아내었다.

그 흉악한 형상과 귀기 어린 목소리에 담이 약한 자는 오줌을 지렸고 더러는 울음까지 터트렸다.

“…….”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어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혈사문을 몰아낼 듯 기세등등했던 주가장의 사람들이 전부 두려움에 경직되어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격이 달랐다.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라 혈사문주의 전신에서 솟구친 기세가 장내의 모든 사람의 몸을 옭아맸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그 한순간만으로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수가 많던 그의 앞에서는 하루살이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런.’

주산 역시 설마 상대가 이 정도로 고수였는지는 몰랐다.

이젠 정말로 어찌할 도리가 없어 창백한 얼굴로 좌절 어린 절망을 느끼며 손을 부르르 떨었을 때.

턱.

머리 위를 쓰다듬는 손길이 있었다.

“…형님?”

장원의 모두가 혈사문주의 기세에 얽매여 꼼짝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주호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표정으로 엷게 미소까지 지었다.

“많이 컸구나.”

그는 대견하단 얼굴로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집을 나서기 전, 기억 속의 동생은 자신의 뒤만 따라다니며 질질 짜기만 할 뿐인 울보 꼬맹이였다.

하지만 이제는 어엿한 주가장의 장주로서의 충분한 위엄과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다행이구나. 주가장은 잘 견뎌내고 있었구나.’

자신이 뛰쳐나옴으로 인해 가문이 무너지면 어찌할까 걱정도 했었다.

하지만 훌륭한 차기 장주가 있고, 또 그런 그를 믿어주는 이들도 있었다.

실제로 혈사문주의 서슬 퍼런 기세에도 불구하고 아직 등을 돌리거나 도망치려는 기색을 보이는 이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면’

[새로운 인물이 등록되었습니다.]

-혈사문주 의양

>인물 정보를 열람하시겠습니까?

주호는 시야 한 편에 나타난 글귀를 읽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작은 창이 허공에 생겨나며 그 위로 혈사문주의 신상이 표기되었다.

[상태창]

이름: 의양

나이: 마흔여덟

직업: 혈사문주

경지: 일류(六/十)

무공: 혈사검법, 사혈보, 혈사권법…….

상태창.

이것이 바로 주호가 몇 년 전 목숨의 위기에 다다라 가까스로 얻은 기연이었다.

지난 몇 년간 이 상태창이란 것은 자신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죽기 직전의 자신을 구해주었으며, 잘려나갔던 왼팔을 되돌려줬고, 마지막엔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 법한 지고(至高)의 무공까지 알려주었다.

‘더는 네가 무엇인지 궁금해하지 않으마.’

이곳으로 오기 전, 통이문에 들려 조사를 의뢰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알 수 없음이었다.

하지만 이제 무엇이 중요한가.

목숨을 구해주고, 또 이런 강력한 무공까지 쥐여주었으니 그런 사소한 것은 이제 상관없었다.

상대의 무위는 고작 일류.

그에 반해 자신의 경지는 이제 막 절정 초입에 이르렀다.

절정과 일류의 싸움.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와 중무장한 병사와의 차이와도 같았다.

‘내가 무엇 때문에 삼 년이란 세월을 그렇게 몸부림치며 보냈는가.’

바로 이 순간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어이가 없군.”

혈사문주는 자신의 앞에서 시시덕거리며 떠드는 주호를 보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놈, 이름을 밝혀라.”

혹시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한 고수가 개입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지만, 곧이어 들려온 이름에 눈살을 찌푸렸다.

“주호, 주가장의 장자다.”

주호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담아 제 이름을 말했다.

“주호?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건만.”

혈사문주가 곰곰이 되새겨 보았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이름이었다.

“형님은 무림맹 소속의 무사이시다!”

주호를 의식하는 혈사문주의 모습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되찾은 주산이 큰소리로 외쳤다.

“…무림맹?”

무림맹이라는 소리에 혈사문주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콧방귀를 끼었다.

‘설사 저놈이 정말로 무림맹 소속이라 할지라도 주가장의 출신이라면 말단 무사나 하다 왔을 터. 이곳에서 전부 죽여 입을 막으면 그만이다.’

소문도 말할 수 있는 자가 있어야 퍼지는 것이 아닌가.

“…검을 뽑지는 않는 것이냐?”

싸움의 이전, 혈사문주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신을 눈앞에 두고도 검을 뽑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그 모습이 의아스러울 따름이었다.

혹시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기에 슬쩍 물었지만, 들려온 대답은 너무나도 가벼웠다.

“굳이.”

굳이 뽑을 필요가 있을까.

주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를 도발했다.

투둑.

혈사문주의 이마에 시퍼런 핏줄이 튀어 올랐다.

그는 그리 인내심이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주호란 변수와 주가장을 한꺼번에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관짝을 보아야 눈물을 흘릴 놈이로군.”

혈사문주는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얼핏 보면 정면으로 걸어가는 듯싶지만, 그 궤적은 사선으로 향해있었다.

‘기세는 읽히지 않는다. 특수한 무공을 익혔나?’

파바바밧-!

길게 끌어서 좋을 것이 없다고 느낀 혈사문주는 먼저 땅을 박찼다.

쐐애액.

집채만 한 바위조차 가볍게 부술 힘이 담긴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롭게 솟구쳤다.

스치는 것만으로 뼈가 부서지고 피부가 찢겨 나갈 터.

하지만 주호는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것으로 그것을 가볍게 피해냈다.

“……!”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지만, 자신의 공격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무력화되자 혈사문주의 두 눈이 커졌다.

하지만 고수는 고수라는 것인지 곧바로 몸을 반전시켜 날카롭게 발끝을 내질렀다.

파앙-!

공기가 갈라지며 파공성이 터졌다.

주호 역시 그의 공격을 좌시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턱.

“컥?!”

소리조차 나지 않는 표홀한 보법으로 공격을 흘려낸 뒤 그대로 손을 뻗었다.

“……!”

혈사문주는 방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고 넘칠 정도로 경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뻗은 손에 목을 잡히자 두 눈을 부릅떴다.

‘고수, 그것도 상당한 경지……!’

그제야 주호가 자신 따위가 감당할 수 없는 경지의 고수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간바.

쿠웅-.

항거할 수 없는 거력이 자신의 전신을 짓눌렀다.

“잠깐……!”

온몸의 털이 쭈뼛거릴 정도로 위기감을 느낀 혈사문주가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주호는 그러거나 말거나 싸늘한 조소를 흘렸으니.

“별 볼 일 없는 네놈의 무공에 감사를 표하지. 어중간하게 강했다면 검을 써야 했을 텐데 말이야.”

그 시퍼런 귀화가 서린 두 눈동자는 마치 사신(死神)의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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