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서서히 어둠이 가시며, 희끄무레한 빛이 하늘을 물들 동틀 무렵.
[청룡신공의 숙련도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쯧.”
주호는 제 시야 한 편에 떠오른 상태창의 내용에 가볍게 혀를 찼다.
마교의 지부를 박살 낸 뒤 그는 비동을 나온 직후 지금까지 지내던 숙소로 돌아왔다.
빈 검집을 풀러 침대에 걸쳐 놓았다. 이전에 쓰던 것은 마인들의 사체 사이에 놓아두었으니 새로운 검을 장만해야 했다.
다행인 점은 이제 밤마다 밖으로 나가 마교나 사도맹의 고수들과 드잡이질을 벌일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월영사신이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로 이목이 쏠렸으니 마교나 사도맹에서 자신을 주목하고 있을 터.
꼬리가 길면 밟히기 마련이다. 저들 쪽엔 전문적으로 사람의 뒤를 쫓는 조직이 있을 테니 더 나아갔다간 뒤를 잡힐 우려가 있으니 이쯤이 딱 적당한 끝맺음이라 생각했다.
“…….”
가만히 침상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주호는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비동을 나온 직후 복수라는 일념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이 끝을 맞이하자 조금 전까지 팽팽히 곤두서 있던 신경 줄이 끊어져 버린 듯했다.
남아 있는 것은 의지를 잃은 몸뚱이뿐.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패기가 있었고, 열정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다.
그렇기에 집을 뛰쳐나와 강호를 떠돌았으며, 종래엔 무림맹에 들어가지 않았나.
절세 무공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무황의 비동으로 몸을 던지는 각오까지 했을 정도니.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것들을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가만히 손을 들어 그 위로 내공을 끌어올리자, 시퍼런 불꽃이 피어올랐다.
고금제일인 무황의 무공.
자신이 삼 년간 비동의 어둠 속에서 이룩한 경지는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테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가 버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주호는 손을 뻗어 탁상에 있던 술병을 잡아들었다.
비동을 나온 직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이미 자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었으나, 이렇게라도 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독한 화주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 갔고, 속이 달아오를 때가 돼서야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진정할 수 있었다.
“기분 더럽군.”
수려한 얼굴 위로 짙은 그림자가 서렸다.
마인을 베어내며 살육에 중독이라도 되어있었던 것일까.
이제 더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지금 당장 검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가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을 하고 싶었다.
“…하아.”
어딘가 뒤틀려 버렸다.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역시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은 하나를 주면 하나를 가져가는 노릇이었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무공이 아닌가. 이런 추상적인 개념 같은 것을 대가로 손에 거머쥘 수 있다면 그보다 남는 장사는 없을 터.
“…….”
문득 가족이 보고 싶었다.
집을 나온 지 수년째. 그들은 이미 삼 년 전에 자신이 죽은 걸로 알고 있을 터다.
지금에 와서 불쑥 찾아간다면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겠지.
“그래도.”
그래도 보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족을 보고 그다음에 무엇을 할지 정해도 늦지 않으리라.
툭.
반쯤 비어버린 술병을 내려놓은 주호는 고개를 들었다.
고민은 길었지만, 결단은 빨랐다.
취기와 피 냄새가 섞여 방 안을 어지럽혔지만, 그의 정신은 어느 때보다 선명했으니.
“…갈 길이 멀구나.”
우선 이 빌어먹을 냄새부터 씻어내는 것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았다.
***
산동성 하택.
주위 지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도시였지만, 되려 인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특히 산동에서도 수위에 들 정도로 많은 무가가 자리했다.
숫자로만 따지자면 정도와 사도가 비슷한 균형을 유지했지만, 강호의 오대세가 중 한 곳으로 유명한 산동세가의 영향으로 정도 문파가 조금이나마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택의 중심과 살짝 떨어진 주거지역에는 주가장이라 불리는 곳이 있었다.
주가장은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진 상계 가문이었다.
가진바 재력도 만만치 않아 하택 지방의 유지급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지만, 주가장주는 괄괄한 성격과는 달리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주위 세력들과 척지지 않으며 세를 부풀릴 수 있었고, 당대에 이르러 그것이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재화가 서리는 곳에 승냥이가 끼기 마련.
“…….”
주가장의 대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무사는 무엇이 그리도 불안한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대로(大路)가 아니었기에 행인은 적었지만, 인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목까지 움츠려가며 눈치를 보았다.
‘제기랄, 하필 오늘 번이 걸려서.’
평소라면 하택에서 힘깨나 쓰는 주가장의 무사인 것에 어깨에 힘을 팍 주며 당당하게 서 있을 터였지만, 작금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혈사문, 이 양아치 같은 새끼들. 제발 오지 말아라.’
혈사문(血死門).
근래 이 근처에서 갑작스레 성장한 사도 계열의 문파였다.
소문으로는 사도 무림의 중심인 사도맹과도 연관이 있다 하여 주변에 있는 정도 문파들도 관여되길 꺼리는 모양새였다.
그 때문의 혈사문의 행태는 날이 갈수록 포악해졌고, 마침내 그 손길이 주가장까지 손을 뻗쳤다.
주가장 역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당연지사 역사가 길고 재력이 쌓인 만큼 스스로 몸을 지킬 수단 정도야 가지고 있었고, 그 무력은 작은 무가의 수준을 훨씬 상회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분쟁이 있을 때마다 이득을 본 것은 혈사문이었다.
주가장의 무인들이 약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단지 혈사문의 수준이 그들의 예상보다 아득히 뛰어났던 것뿐이었다.
물론 주가장의 저항도 만만치 않은바. 그렇기에 혈사문은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가장 합리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바로 주가장주의 외동딸을 상대로 중매를 보낸 것이었다.
혼인을 명분으로 구애하는 것이니 주가장을 돕던 정도 문파에게도 싸움을 피할 좋은 명분이 생겼다.
그들 역시 갑작스럽게 몸집을 부풀린 혈사문과 대적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던 차. 남녀 간의 사사로운 일에 감히 자신들이 끼어들 수 없다는 명목으로 모두 손을 떼고 관망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빌어먹을 잡것들. 감히 아가씨를…….”
혈사문주는 곧 며칠 이내로 혼인을 올리겠다며 통첩을 보내왔지만, 주가장측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아무리 강호가 약육강식의 세계라곤 하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일을 밀어붙이다니?
심지어 주가장의 딸은 혈사문주의 얼굴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아니, 얼굴을 모르는 것이 문제일까. 가문의 금지옥엽으로 자라온 그녀는 누구나 어여뻐하는 아이였다.
그런 그녀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 주가장의 모두가 분개했지만, 정면에서 그들과 대적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불과했다.
“무엇이 정도 문파고 무엇이 의협인 것이냐. 정작 패악한 무리가 창궐할 때 제 몸 사리기 급급한 것을.”
주산은 주가장의 둘째 아들이다.
원래 맏아들인 주호가 있었지만, 강호인이 되겠다며 집을 뛰쳐나간 탓에 장자의 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는 지금 속이 터져 답답할 지경이었다.
이대로라면 동생을 저 무뢰배들에게 넘겨줘야 할 상황. 혈사문의 마지막 통첩에 평소 연이 있던 정도 문파에 사정을 호소하며 도움을 청했으나, 그들은 전과 마찬가지로 남녀 간의 사사로운 일에 끼어들 수 없다며 모두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주산은 그들의 허울 좋은 거절이 혈사문의 힘과 그 뒤에 있는 사도맹을 두려워하는 것에서부터 나온 것일 터.
툭툭.
주산은 집무실에 앉아 냉정하게 탁자를 두드렸다.
‘향이를 이대로 넘겨줄 순 없다.
사도맹과 관련되었다고 소문이 도는 이상 무림맹도 가만히 있진 않을 터. 사흘 전에 서신이 출발했으니 답이 오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기다려야 한다. 며칠간 답신을 미루며 시간을 끌다가 저들이 행동할 때 결사 항전하며 버틴다면……’
무력이 부족하면 재화로 메꾸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그는 은밀히 사람을 풀어 물밑에서 낭인들을 수배하고 있었다.
아무리 혈사문의 힘이 강하더라도 금을 퍼부으면 강력한 고수를 섭외할 수 있을 것이리라.
“오라버니.”
주산이 침중한 눈빛으로 고뇌하고 있을 때, 산뜻한 목소리가 문득 귓가를 들려왔다.
“…언제 들어 왔느냐?”
고개를 들자 보이는 눈앞에 보이는 청초한 미녀의 모습에 주산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기에 들어왔답니다.”
“그러더냐.”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동생인 주예향을 향하는 그의 목소리는 착잡하기 그지없다.
사내만 둘인 주씨 가문에 독녀로 뭇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란 금지옥엽이다.
주산도 동생을 아끼는 마음이 컸기에 절대로 저들에게 그녀를 넘겨주기 싫었다.
“…오라버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주산은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조금 전까지 쌓여 있던 고뇌를 지어버렸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런 일로 근심하게 하기 싫었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가는 정보 대부분을 차단했고, 아마 일각의 소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저, 혈사문주에게 가겠어요.”
“…….”
갑작스레 터져 나온 그녀의 말에 주산의 얼굴이 웃는 채로 굳었다.
곧 정신을 차린 그는 탁자 밑으로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누구에게 들었느냐?”
“저도 바보는 아니에요. 눈과 귀가 있어요. 혈사문주가 왜 저희 가문을 핍박하는지, 왜 저를 노리는지 대강은 알고 있다고요.”
“네가!”
그녀의 말에 주산은 큰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쌓여왔던 울분이 일순간 터져 나오려 했지만, 움찔하는 동생의 표정을 보곤 황급히 화를 삼켰다.
‘향이에게 화를 내어봤자 무엇하겠느냐. 정작 문제의 원흉은 따로 있는 것을.’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돌아가거라.”
“더는 저 때문에 다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싫어요.”
‘나는 네가 슬퍼하는 것이 싫다.’
원치 않는 결혼이라서가 문제가 아니다.
상대는 사도 문파의 우두머리.
만약 혼인하게 되더라도 그 끝이 좋지 않을 것이 뻔한데 하나뿐인 피붙이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둘이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드르륵.
“…소, 소장주님!”
문을 박차고 들어온 한 인영에 의해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무슨 일이냐.”
주산은 얼굴을 굳힌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번을 서는 무사가 자리를 박차고 황급히 뛰어들어올 정도라면 심각한 일이 일어났다는 소리였다.
‘혈사문인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곧 이어지는 무사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귀신, 귀신이 나타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