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월영사신이라. 근래 신교 내에서도 네놈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지.”
제일 먼저 앞에 나선 마인이 날카로운 눈을 치떴다.
“고작 지부 몇 개와 하수 몇을 죽인 것으로 신교와 대적하고 있는 것이라 착각이라도 했느냐?”
그는 주호의 당당한 기개를 한낱 허세로 치부하며 입가를 비틀었고, 이내 들고 있던 검을 들어 그 목에 겨누었다.
“네놈이야말로 한껏 잡은 그 분위기가 언제까지 갈지 기다려보지.”
하지만 말과는 달리 마인은 방심하지 않았다. 주호 전신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그가 절대 무시하지 못할 고수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그가 정말 월영사신이라면 단순히 경계하는 것으로도 부족한바. 월영사신의 이름 아래 쓰러진 고수 중에는 자신 역시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의 고수까지 섞여 있었다.
‘어차피 전력은 이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힘으로 찍어누르면 그만.’
휙-!
마인이 검을 휘두르자 마교 측 고수들이 일시에 몸을 날렸다. 십수 개의 검이 농밀한 살기를 품으며 어둠을 갈랐고,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제 명을 재촉하는가.”
주호는 가벼운 조소와 함께 자신에게로 닥쳐오는 마인들을 바라보며 검을 들었다.
쉭.
시퍼런 검광이 허공에 아스라이 새겨졌다. 눈 한 번의 껌뻑임과 함께 그 궤적이 사라졌을 때, 매서운 기세를 흩뿌리며 달려들던 마인들의 몸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
단 일 검에 스물에 달하는 마인이 절명했다.
검로를 알아볼 수도 없는 쾌검.
그제야 주호가 궤를 달리하는 고수라는 것을 마인은 강한 힘으로 검을 부여잡으며 이를 갈았다.
“직접 오지는 않는 건가.”
“…네놈의 힘이 빠지길 기다리면 그만이다. 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이곳에 있는 전부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스스로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아직 수하들의 수는 많으니 그들을 이용해 주호의 힘을 빼놓고 그 뒤에 나서면 그만이지 않은가.
하지만 주호는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마인을 바라보았다.
“마교의 이름이 우는군. 철대환. 고작 그런 패기로 흑영마살대의 대주라 할 수 있겠는가.”
“…무슨.”
마인, 철대환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떠보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분명 자신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름뿐이 아니라 소속과 직책까지 정확하게 맞출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이쪽에도 내부의 첩자가?’
순식간에 철대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무림맹? 아니 구파일방 쪽인가?”
남궁세가는 분명 자신들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렇다면 그 정보의 출처가 무림맹과 구파일방의 쪽이라는 소리일 터.
“글쎄, 어떨까.”
하지만 주호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두 눈을 가늘게 뜰 뿐이었다.
“…네놈.”
철대환은 다소 피해가 있더라도 그를 사로잡기로 마음먹었다.
마교는 그 특성상 첩자가 잠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 내부로 들어온 이가 있다면 중대한 문제였으니.
“저놈을 무력화시켜라.”
철대환의 명령에 삼백에 달하는 마인이 일시에 움직였지만, 주호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검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저승에서 누가 보내서 왔느냐 묻거든, 주호라 답하라.”
타닷-!
마인들이 자신에게 닥쳐왔을 때 주호는 가볍게 땅을 박차며 몸을 날렸다.
그가 도주하는 것이리라 생각한 철대환은 뒤를 쫓을 생각으로 검을 들었지만, 오히려 마인들이 응집한 곳으로 달려드는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멈춰 섰다.
쐐애애애액-!
주호는 곧 수많은 살기가 무차별적으로 자신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전신이 난도질당할 터. 그렇기에 짧게 숨을 내뱉은 그는 이내 두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파바바밧-!
그의 발이 기묘한 형태의 걸음을 밟으며 마인들의 검을 모조리 흘려내었다.
마치 구름 사이를 노니는 듯한 그 움직임에 여기저기서 헛바람이 토해져 나올 찰나, 주호는 실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운룡보(雲龍步)라 하는 것이다.”
서걱-.
다시금 새파란 검광이 사방을 휩쓸었다. 어둠을 따라 일어난 궤적이 길게 이어졌고, 그가 지나친 곳을 따라 한 박자 늦게 피보라가 일어났다.
휘릭.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수십의 마인을 도륙해낸 주호는 가볍게 검을 휘둘러 그 위에 묻은 피를 털어내었다.
“…….”
마인들은 그 모습에 주춤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상대할 때는 일말의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모습으로 달려들었던 그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하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두 멈추어 서 있었다.
“오라 마교의 개들이여. 왜들 그러지? 설마 겁이라도 먹은 것인가. 그 위대하신 천마신교의 마인들께서.”
오지 않으면 자신이 가주리라.
주호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기세를 보이며 마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양 떼 속의 늑대와도 같았으니.
“이, 이 무슨…….”
마인 중 한 명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쳤다.
격이 달랐다.
그 푸른 안광은 마치 귀신을 보는 것 같았으며,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갔다.
촌각이 지났을 뿐이지만, 바닥에 누운 마인의 숫자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주호의 호흡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고, 휘둘러지는 검은 더더욱 막힘이 없었다.
“…….”
남궁연은 자신의 상황도 잊은 채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단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수십의 목숨을 베어냈지만,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경원하고, 그토록 원하는 경지가 눈앞에 있었으니.
그렇기에 그녀는 등 뒤로 다가온 기척에 반응하는 것이 살짝 늦고 말았다.
“…읏?!”
“멈춰라! 이년의 목이 베이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철대환은 남궁연의 목에 검을 들이밀며 주호에게 윽박질렀다.
남궁연은 어떻게든 반항해보려 했지만, 이미 혈도를 제압당한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도 없어 그저 분한 표정을 짓는 것이 전부였다.
“베어라.”
“…뭐?”
하지만 그 직후 돌아온 망설임 없는 대답에 철대환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인질을 잡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최소한 동요하거나 주저하는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이 정상이거늘.
“듣지 못했나? 다시 한번 말하지. 베어라. 내겐 하등 연이 없는 이들이니 상관하지 않으마.”
흥건히 고인 피 웅덩이에서 찰박거리며 걷는 발걸음 소리만이 그 뒤를 따랐다.
언제 튀었는지 모를 핏방울이 주호의 뺨에서 기다란 줄기를 그려내며 떨어져 내렸다.
천천히 손을 들어 그것을 닦아낸 주호는 움직임을 멈춘 철대환에게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다음엔 네 목숨을 거두어 갈 것이다.”
“…이 미친.”
철대환은 이를 악물었다.
안휘제일미 남궁연.
남궁세가의 금지옥엽이지 않은가. 그런 그녀를 베라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다니.
혹시 허세인가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 싸늘한 눈동자엔 일말의 거짓도 담겨 있지 않았다.
“무엇을 망설이는 거지? 정 그렇다면 내가 둘 다 한꺼번에 베어주마.”
웅웅-.
핏물이 흥건한 주호의 검 위로 시퍼런 귀화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주변을 뒤덮었던 어둠은 물러나고, 곧 청명한 불꽃이 그곳을 뒤덮었으니. 오직 주호의 나지막한 중얼거림만이 그곳에 들려올 뿐이었다.
“잠운.”
청룡검법 일초식
청룡잠운靑龍潛雲
파아아앗-!
시퍼런 검기가 마치 용처럼 몸부림치며 사방으로 솟구쳤다.
“이 미친-!”
정말로 남궁연과 함께 자신을 베어버릴 심산이리라.
찰나 동안 판단을 내린 철대환은 땅을 박차며 붙들고 있던 남궁연의 몸을 내팽개쳤다.
‘난 이곳에서 죽으면 안 된다.’
수하들을 잃은 것쯤이야 조금의 문책만 들으면 될 일이다. 어차피 대주인 자신이 있는 이상 인원 충원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터.
철대환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것을 내팽개친 채 몸을 날렸다.
아무리 주호가 날고기는 고수라 할지라도 자신이 전력을 다하면 쫓아오기 힘들 것이리라 생각했다.
“추하구나, 도망치는 것조차.”
하지만 그마저도 주호의 손바닥 안이었을 뿐이었다.
푸욱-!
남궁연의 몸을 간발의 차이로 스쳐 지나간 검기가 철대환의 몸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투두둑.
그것은 곧 온전한 형체조차 남기지 못한 채 고기 조각으로 뒤바뀌어 짓이겨졌다.
“가는 길이 심심치는 않을 것이다. 네 뒤를 따라갈 이들이 이리도 많이 남아 있으니.”
남궁연의 신형을 품에 안은 채 바닥으로 내려선 주호는 이내 차가운 눈으로 남은 마인들을 바라보았다.
대주인 철대환의 죽음 이후 남은 잔당들은 고작 일각을 버티지 못했다.
그것마저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채 사방으로 도주하는 이들을 잡아 죽이느라 시간이 더 걸린 것이었으니.
“…….”
남궁연은 한 명이라도 사로잡아 무언가 정보를 캐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지만, 살벌한 기세로 마인들을 도륙하는 주호의 모습에 감히 말을 붙이지 못했다.
“…후.”
최후의 한 명까지 사로잡아 숨을 끊은 주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사방을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수백의 마인으로 이루어진 시산혈해. 그 시신은 산처럼 쌓였고, 고인 핏물은 바다는 아니어도 강이 되어 흐를 정도였다.
파각.
조금 전까지 주호의 손에 들려 맹렬히 마인을 베어 가르던 철검에 균열이 일며 부서져 내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건가.”
피 웅덩이 속에 조용히 부러진 검을 내려놓은 주호는 가만히 눈을 감고 과거의 동료들을 추모했다.
“…….”
그 복잡한 표정을 본 남궁연은 주호가 작지 않은 사연을 품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월영사신에 대한 소문은 무성한 것에 반해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것은 없었다.
그녀 나름대로 그 정보들을 취합해 대략적인 형상을 그렸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주호의 모습은 그와 정반대였다.
눈동자에 서린 한기(寒氣)만 가신다면 어디 무가의 공자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수려한 외모였으니.
이윽고 그 짤막한 추도식이 끝났을 때, 남궁연은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
“남궁연이라 합니다. 은공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됐소. 보은을 바라고 행한 일이 아니니.”
“아닙니다, 구명의 은혜를 받았으니 필히 보답해야 하는 법이지요.”
주호의 말을 받은 것은 지친 얼굴로 다가온 남궁진영이었다.
내상을 입었는지 얼굴이 편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모두가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는지 감사하단 인사와 함께 포권을 올려왔다.
“전공을 당신들의 것으로 해도 상관없소.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시오.”
단호한 주호의 말에 남궁진영은 그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필시 어딘가의 은거 기인이시라.’
젊고 훤칠한 저 외모는 분명 정교한 인피면구일 터.
실상은 맨얼굴에 그저 귀찮을 뿐이었지만, 그것을 알 도리는 없었다.
주호는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뒤처리를 맡긴다는 뜻을 전하곤 마인의 목을 꺾었을 때처럼 가차 없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 직후 자신의 팔을 잡아 오는 손길에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니에요, 은공. 은공이 아니셨더라면 저희는 무사할 수 없었겠죠. 부디 이 은혜에 보답하게 해주세요.”
주호는 가늘어진 눈으로 뒤를 돌아 자신의 팔을 붙잡은 남궁연을 바라보았다.
“소저.”
“네, 은공.”
그녀는 기필코 주호에게 감사를 구하고 싶었다.
봉문 이후 세가를 알리는 첫 작전에 나가고 싶다는 자신의 욕심으로 이들 전부를 위험에 빠뜨리게 했다.
그 잔혹한 손속은 어찌 되었든 큰 은혜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옆에 있던 남궁진영의 입이 떡 벌어져 놀라는 표정이 될 정도로 평소 하지 않던 고집까지 부리며 주호에게 매달린 것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돌아온 대답은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외인의 신체를 함부로 건드리지 마시오. 하마터면 죽일 뻔하지 않았소.”
거짓이 아니라는 듯 주호의 두 눈에는 선명한 살기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
당황한 남궁연은 입을 벌렸다.
그러곤 곧 그의 잔혹한 손속을 기억해내곤 황급히 손을 놓았으니.
“시, 실례를 범했습니다, 은공!”
퍼뜩 정신을 차린 남궁진영이 황급히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괜찮소, 그러니 더는 귀찮게 하지 마시오.”
별로 기분이 상한 것 같지 않은 담백한 대답에 남궁진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그 직후 말을 이으며 고개를 들었지만, 주호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잠깐의 침묵 후, 남궁연은 영혼을 잃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부단주, 저희가 귀신에 홀린 건가요?”
남궁진영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도 악귀는 아닌 것 같아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