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一章 가면(假面) 뒤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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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도착했을 때는 한참 치열한 혈전(血戰)이 전개되고 있는 중이었다.
혈궁에 비해 정맹원의 고수들이 다소 열세에 몰려 있었다.
진유걸의 시야로 신주사걸 중 둘째인 매화절검 용호표가 두 동강이 난 채 고꾸라지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진유걸의 눈에서 불꽃이 퉁겼다.
"뒈져라!"
그는 폭갈을 내지르며 수중의 천살도를 비스듬히 후려쳐 갔다.
슈슈슈슉-!
예리한 도가 공간을 흐르며 빛살 같은 기류를 섬뜩하게 뿌려졌다.
멋모르고 그의 앞을 가로막은 혈궁고수 네 명이 일시에 비명을 토해 냈다.
"으악!"
"우아아악……!"
그들은 피를 분수처럼 쏟아 내며 썩은 고목처럼 나뒹굴었다.
진유걸은 계속 신형을 날리며 장력을 번갈아 내뻗었다.
"혈영폭(血影暴)-!"
그의 입에서 폭갈이 튀어나오며 무시무시한 기류가 해일처럼 뻗어 나갔다.
우우웅-!
그의 전면에서 얼씬거리던 몇 명의 혈궁고수가 기절초풍할 듯 놀라며 황급히 몸을 피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진유걸의 장력이 그들의 몸을 무참히 휘감아 버린 것이다.
순간.
"우아악……!"
"크으윽……!"
혈궁고수들은 피화살을 뿜어 내며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갔다.
진유걸은 정맹원 고수들이 쓰러질 때마다 혈궁고수들을 향해 광란에 가까운 살수를 전개하였다.
그의 입에서는 연속 인간의 혼을 부르는 저주가 토해졌다.
"천살섬- 천살륜- 천살구류-!"
그 때마다 진유걸의 천살도가 피를 부르며 대기를 갈랐다.
츠츠츠츠-!
섬칫한 파공음이 불꽃처럼 작렬하며 허공을 누벼 나갔다.
그 때마다 참혹한 죽음의 비명들이 꼬리를 물었다.
"아악!"
"으으윽……!"
피보라가 솟구치며 절단된 혈육 덩어리가 사방팔방으로 날았다.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며 땅바닥에 흥건한 핏물이 고였다.
시산혈해(屍山血海)!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화한 혈전장에는 오직 피보라와 비명 소리만이 꼬리를 이을 뿐이었다.
진유걸의 미간으로 살괴가 모아졌고, 그는 미친 듯이 살겁을 자행했다.
그는 창졸지간에 혈궁고수 수십 명을 황천으로 보내고 말았다.
그 때였다. 진유걸의 전면으로 두 인영이 바람처럼 등장하였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그들은 흑의을 착용하고 있었고, 생김새가 흉악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가에 번뜩이는 신광은 일견하기에도 평범한 인물들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었다.
순간, 진유걸의 입에서 등골 시린 음성이 흘렀다.
"강호정랑!"
그 말이 떨어지자 두 흑의인의 입가에 괴소가 흘렀다.
"크흐흐… 태명쌍광은 운이 좋군. 골치 아픈 애송이를 만났으니……."
진유걸은 문득 장백거살이 죽어 가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듣던 대로 대단한 놈이구나. 하지만 회주와 태명쌍광(太命雙狂)의 적수는 결코 되지 못한다.
'태명쌍광이라… 얼마나 뛰어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주의해야겠군.'
그는 염두를 굴리며 즉시 금불마공을 전개하였다.
삽시간에 그의 전신은 금빛 광채로 뒤덮여 갔다.
태명쌍광은 이 괴이한 광경에 흠칫 놀라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태명쌍광(太命雙狂).
이들은 태명회 회주의 호법으로 무림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고수들이었다.
태명악광(太命惡狂),
태명흉광(太命兇狂).
그들은 각기 한 손을 맞잡으며 태명악광은 우장, 태명흉광은 좌장을 내뻗었다.
찰나.
콰르릉- 콰릉-!
우레 소리가 일며 두 줄기 엄청난 장력이 빛살처럼 쏘아 나갔다.
적중되면 어떤 물체라도 산산조각 낼 듯 강폭한 기류였다.
진유걸은 상대가 서로의 공력을 혼합하는 괴이무쌍한 무공을 펼치자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금불파경(金佛破境)-!"
순간, 그의 쌍장에서 금빛 광채가 눈부시게 발출되었다.
콰콰쾅-!
양측의 공력이 중간에서 충돌을 일으키며 고막이 터질 듯한 폭발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 여파로 주위 삼 장 이내에 있던 몇몇 인물들이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진유걸은 그들이 자신의 십 성 공력을 막아 내자 내심 무척 놀라고 말았다.
'이 자들은 장백거살 악극악보다 한 수 위로군. 아무래도 속전속결 해야겠다.'
그는 심기일전(心機一轉)하며 태명쌍광 쪽을 뚫어져라 응시하였다.
태명악광 흉광도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으음, 이토록 심후한 공력을 지닌 인물이 있다니… 회주나 혈궁 궁주와도 맞먹겠군.'
이윽고 그들 사이에 휘몰아치던 소용돌이가 걷히자, 그 자리에는 움푹 패인 큰 구덩이만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진유걸과 태명쌍광의 잠력이 충돌하며 생긴 구덩이였다.
진유걸은 그들 태명쌍광을 냉랭히 훑어보며 좌수로 허공에 원을 그렸다.
손의 움직임은 매우 느릿하여 육안으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태명쌍광이 그의 행동을 의아한 얼굴로 지켜보는 순간.
갑자기 그들이 동시에 비명을 터뜨리는 게 아닌가?
"으헉!"
"악!"
일순, 그들은 신형을 비틀거리며 앞가슴에서 피를 콸콸 쏟아 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란 말인가?
진유걸은 공세를 취하기는커녕 허공에 원을 그렸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에는 어느 샌지 각기 세 군데씩 손가락 굵기만한 구멍이 뚫려져 있었다.
지풍(指風)!
그것은 분명 지력에 의해 당한 상처였다.
하지만 지풍이 격사된 적은 없었지 않은가?
태명쌍광은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꼭 알고 가야겠다는 듯 간신히 입을 열어 물었다.
"사술이냐……?"
그들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진유걸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불마삼무지(佛魔三無指)!"
순간, 태명쌍광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불마삼무지……?"
진유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소리도 없고, 바람도 없고, 타격도 없다!"
그 말을 끝으로 진유걸은 돌아섰고, 태명쌍광은 풀썩 고꾸라졌다.
그들의 가슴에서 쏟아져 나온 핏물은 금세 바닥을 축축이 적셨다.
일순, 진유걸의 눈에 백포복면인에게 몰리고 있는 반야선승과 마령신의의 모습이 들어왔다.
진유걸은 첫눈에 그가 혈궁의 최절정 고수임을 알아보았다.
"멈춰라!"
그는 대갈일성을 토하며 번개처럼 몸을 날려 그들 사이에 내려섰다.
"오, 맹주!"
그들 두 기인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백포복면인이 그를 주시하며 냉갈을 터뜨렸다.
"흐흐… 드디어 강호정랑께서 등장하셨군."
진유걸이 막 반격하려는 순간, 마령신의의 전음이 모기 소리만 하게 들려 왔다.
"그가 바로 사대천왕 중 가장 음흉한 북귀천왕 귀독요후일세. 또한 혈궁궁주이기도 하네. 혈사공을 연성했다고 하니 부디 조심하게."
진유걸은 차가운 눈빛으로 귀독요후를 노려보며 물었다.
"궁주! 포달랍궁은 어찌 처리하셨소?"
"크크크… 모조리 지옥으로 보내 주었지. 덕분에 본궁의 오묘한 진법을 오늘은 펼칠 수 없게 되었다. 네놈들에게 매우 다행한 일겠지만 그리 좋아할 것은 없다. 어차피 죽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진유걸의 입가에 냉소가 흘리며 천천히 좌수를 들어올렸다.
"과연 당신의 뜻대로 될 수 있을까?"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진유걸은 살벌한 미소를 흘리며 허공에 원을 그려 갔다.
이 때 돌연.
"궁주, 호신강기를 펼치게."
폭갈과 동시에 눈매가 찢어지고 매부리코를 가진 노인이 장내에 내려섰다.
그의 외침에 깜짝 놀란 귀독요후가 민첩하게 호신강기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의아하게 여긴 귀독요후가 매부리코의 노인에게 물었다.
"회주! 도대체 무슨 일이오?"
진유걸은 회주라는 말에 흠칫 놀라며 나타난 노인을 예리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태명회주라면… 동마천왕(東魔天王) 마혼살군(魔魂煞君) 손포(孫砲)가 분명하군.'
동마천왕 마혼살군은 귀독요후를 바라보며 냉랭히 외쳤다.
"태명쌍광이 당했네. 본좌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들은 불마삼무지에 의해 손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당했네."
"헉! 그가 불마삼무지를……?"
귀독요후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진유걸을 응시하였다.
그러나 진유걸은 동마천왕 마혼살군을 쏘아보며 야멸차게 내뱉었다.
"동마천왕! 바로 당신이 중조산의 무왕동부에서 독고휘로 역용하여 나를 절애 아래로 떨어뜨린 장본인이오?"
동마천왕 마혼살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역시 네놈은 똑똑하구나. 바로 그렇다."
그가 시인하자, 진유걸은 이빨을 우두둑 갈아붙였다.
"독고휘와는 무슨 관계요?"
태명회주 마혼살군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곧 죽을 놈이니 말해 주마. 그와 본좌는 사도간이다."
진유걸은 장백거살 악극악이 죽어 가면서 했던 말을 추리해 이미 그런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장백거살 악극악은 독고휘의 눈을 이식받은 진유걸의 눈빛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았던가?
그것은 태명회주 마혼살군 역시 진유걸과 똑같은 눈빛을 지니고 있었기에 당황하여 그런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진유걸은 태명회주 마혼살군이 독고휘와 무슨 관련이 있으리란 것을 짐작하게 된 것이다.
거기다 독고휘의 눈빛은 몹시 신비스러워 아무리 인피면구로 얼굴을 가린다 해도 눈빛을 속일 수가 없었는데… 무왕동부에서 자신이 속아넘어간 것으로 미루어, 독고휘와 똑같은 눈빛을 가진 자가 가짜 독고휘로 변장했으리라는 결론을 나온 것이다.
진유걸은 그 모든 것을 대충 짐작하고는 있었으나 막상 마혼살군이 진실을 털어놓자 전신의 맥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휘의 사부이면서 어째서 그를 그렇듯 궁지로 몰아넣었단 말이오?"
"애초에 그 놈을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그 놈에게서 패도적인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는 실상 마음이 약한 놈이라 본좌가 이루려는 대업에 마땅치 않았다. 때문에 놈을 유아독녀궁으로 넘겨 준 것이다."
이럴 수가?
그렇다면 여태 진유걸에게 일어난 그 모든 일들은 마혼살군이 만든 계략이라는 뜻이 아닌가?
무왕동부에서 진유걸에게 암습을 가하여 그로 하여금 독고휘를 원수처럼 여기도록 만든 사람도,
주수연이 배신한 줄 알고 그토록 진유걸이 방황했던 것도, 그리고 독고휘가 귀염마녀에게 진원을 갈취당한 일도…….
그 모든 것이 마혼살군의 음모라는 게 아닌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진유걸은 분노로 피가 끓어올랐다.
마치 그의 손아귀에 놀아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한데, 이번에는 귀독요후가 나서는 게 아닌가?
"네놈은 강남태을자가 누구의 음모로 피살되었는지 아느냐?"
순간, 진유걸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철웅산의 자결로 깨달은 바가 많아 그 사건을 영원히 묻어 두려 했었다. 그런데 귀독요후가 애써 그 일을 들추어 내다니?
"그렇다면… 그 일이… 바로 당신의 짓이란 말이오?"
진유걸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차갑게 물었다.
혈궁궁주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본 북귀천왕 귀독요후가 아니면 누가 감히 그런 계교를 생각해 내겠느냐?"
순간, 진유걸은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살심이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너무도 강하여 금세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이 죽일 놈들!"
그는 절규를 토해 내며 천살도에 진기를 주입시켰다.
그와 동시, 핏빛 살괴가 그의 미간으로 모여지며 금빛 광채를 뿜어 냈다.
그러자 귀독요후와 마혼살군 역시 자세를 고쳐 잡으며 각기 병기를 꺼내 들었다.
귀독요후가 손에 든 것은 다섯 마디로 나누어진 오절편(五節鞭)으로 윤이 반지르르 흘렀다.
그에 비해 마혼살군은 십팔반 외문병기의 일종인 혈비겸(血飛鎌)을 꺼내 들었다.
반짝-!
혈비겸의 시퍼런 날이 태양을 받아 살기 어린 빛을 발했다.
진유걸은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돌연 폭갈을 터뜨렸다.
"천살섬(天煞閃)-!"
그의 신형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그와 동시, 수중의 천살도가 악마의 원성을 토해 냈다.
촤르르륵-!
진유걸의 도는 허공을 가르며 귀독요후와 마혼살군을 동시에 베어 갔다.
이 한 초의 빠르기란 실로 전광석화가 무색할 지경.
하지만 상대는 이미 백여 년 전, 명성을 천하에 드높이던 사대천왕 중 두 명이 아닌가?
"혈사비편(血邪飛鞭)-!"
"혼살륜(魂殺輪)-!"
그들도 폭갈을 내지르며 마주 수중의 병기를 각각 쳐냈다.
쇄애액-!
쉬쉭-!
섬전처럼 짓쳐 드는 오절편!
피를 갈구하는 혈비겸!
그들은 신출귀몰하게 몸을 날리며 공세를 취해 갔다.
일순.
파파파팍-!
불꽃 같은 기음이 작렬하며 그들의 신형이 서로 엇갈려 떨어져 내렸다.
순간, 진유걸의 가슴 부위와 허벅지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두 사람의 공격에 의해 호신강기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귀독요후와 마혼살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몸에서도 시뻘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음, 정말 얕볼 수 없는 놈이로구나. 우리 둘의 합공을 막아 내다니…….'
귀독요후와 마혼살군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진유걸은 금불마공을 극도로 끌어올리며 그들의 무시무시한 공세에 맞설 최후의 초식을 준비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순간, 귀독요후와 마혼살군의 입에서 가공할 폭갈이 터져 나왔다.
"혈사불멸(血邪不滅)-!"
"혼살섬강(魂殺閃 )-!"
그들의 신형이 공중으로 솟구치며 좌우로 번개처럼 갈라졌다.
범인의 육안으로는 도무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빠른 행동이었다.
이어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듯한 파공음이 돌출되며 엄청난 살기가 휘몰아쳐 왔다.
파르르르- 쇄쇄액-!
천지가 온통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깜깜해지며, 공포스런 기류만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것이었다.
사신(死神)!
그것은 마치 죽음의 마수(魔手)가 시시각각 압박을 가해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진유걸은 이빨을 으스러져라 악물며 수중의 천살도를 힘있게 움켜쥐었다.
돌연.
"금불천살류(金佛天煞流)-!"
천지를 진동시킬 듯한 음성이 허공을 격하게 때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츠츠츠츠-!
이어 천살도가 날카롭게 공간을 파고들며 뜨겁게 작렬하는 순간, 칼날 같은 예리한 소리가 터지며 금빛 기류가 난사되었다.
일대(一大) 장관(壯觀)!
금빛 광채가 천살도를 타고 사방팔방으로 뿌려지는 모습은 정녕 눈부시도록 황홀하였다. 그것은 마치 은하수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금빛 조각 하나하나에는 실로 상상도 하지 못할 살기가 깃들여져 있었으니…….
순간, 동마천왕 마혼살군과 북귀천왕 귀독요후는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 아닌가?
찰나지간, 두 사람은 온몸이 난자당하는 고통이 뼛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와 함께 토해지는 죽음의 절규.
"으아아아……!"
"크으악……!"
그들은 단말마의 비명 소리와 함께 처참하게 분시(分屍)된 채 허공에 흩날렸다.
혈궁궁주와 태명회 회주의 죽음.
이것은 곧 치열한 혈전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었다.
"와아……!"
"와와……!"
"이대천왕이 죽었다! 와……!"
정맹원 고수들은 사기가 충천(沖天)하여 환호성을 터뜨렸고, 혈궁과 태명회의 잔당들은 서로 도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때 망연히 서 있는 진유걸에게로 그의 부친인 불마천제 진웅이 날아 내렸다.
그는 감격에 복받친 듯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걸아… 장하다. 결국 금불마공을 천살도로 시전하는 법을 깨달았구나."
"그 때문에 조금 늦었습니다. 그보다 아버님, 몇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의문이라니?"
그 때 반야선승과 마령신의, 뇌옹, 귀수도부 등이 몰려왔다.
그들의 안색은 한결같이 희희낙락한 표정들이었다.
진유걸은 그들을 훑어보며 침중한 얼굴로 물었다.
"첫번째는, 이대천왕의 배후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마혼살군이 탈혼사자 독고휘로 역용했을 때 사용한 인피면구입니다. 그것은 나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인피면구였습니다. 이 점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요?"
그 때였다.
"죽어라!"
갑자기 중인들 틈에 끼여 있던 원앙벽뢰쌍기 중 뇌옹이 진유걸에게 검을 내뻗는 것이 아닌가?
진유걸과 그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기에 미처 손을 쓸 여유가 없었다.
뇌옹의 장검은 정확하게 진유걸의 우측 가슴을 관통하고 말았다.
"으윽!"
진유걸의 가슴에서 핏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너무도 찰나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앗!"
"아니, 이럴 수가……?"
"뇌옹이……?"
중인들의 경악성이 터지는 가운데.
펑-!
진유걸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린 불마천제가 뇌옹의 가슴에 일 장을 가했다.
그의 반격도 상당히 민첩했기 때문에 뇌옹은 여지없이 그의 장력에 격타당하고 말았다.
"으억!"
뇌옹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며 그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이 장 밖으로 나뒹군 그의 입에서 시뻘건 선혈이 울컥울컥 뿜어졌다.
귀수도부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도끼를 번쩍 쳐들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 놈! 골통을 빠개어 뇌수를 마시리라."
그의 쌍도끼가 내리쳐지려는 순간이었다.
진유걸이 불마천제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 그를 만류하였다.
"그만 두시오."
귀수도부는 그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살아 있자 너무 반가워 옆에 있는 마령신의에게 황급히 물었다.
"맹주의 상세가 어떻소?"
"뇌옹의 장검이 심장을 약간 비켜 갔기 때문에 간신히 생명은 구했네."
그제서야 귀수도부 모용비는 안심한 듯 뒤로 물러섰다.
진유걸은 얼른 장검을 뽑고 응급처치를 취했으나, 그래도 여전히 피는 멈출 줄 모르고 흘러 나왔다.
그는 통증이 매우 심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광혼객에게 지시를 내렸다.
"누구도 오지 못하도록 이 곳의 접근을 막아 주십시오."
광혼객은 뭔가 이유가 있음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유걸은 다시 귀수도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뇌옹 노선배님의 인피면구를 벗겨 주십시오."
일순, 뇌옹의 안색이 밀랍처럼 창백하게 변해 갔다.
중인들의 눈길이 모두 뇌옹에게로 향해졌다.
귀수도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뇌옹의 얼굴에 씌어 있던 인피면구를 벗겨 냈다.
순간, 진유걸과 중인들은 기겁할 듯이 놀라고 말았다.
"헉! 태성왕야!"
인피면구 뒤에 감춰진 얼굴.
그는 뜻밖에도 태성왕(太成王) 주웅(朱雄)이 아닌가?
그는 당금 황제와 인척간이며, 절강성과 복건성 일대를 통치하는 왕야의 신분이 아닌가?
한데, 그러한 인물이 뇌옹으로 역용하여 강호정랑 진유걸에게 암습을 가하다니…….
진유걸은 그를 향해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태성왕야! 어찌하여 내 생명을 노렸소?"
태성왕은 이빨을 우두둑 갈아붙이며 살기 어린 음성을 발했다.
"네놈이 내 백년대업(百年大業)을 철저하게 망가뜨렸는데, 내가 어찌 네놈을 용서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당신의 어리석은 망상(妄想)이었을 뿐이오. 황궁에서도 이미 당신의 역모를 눈치채고 있었소. 한데, 진짜 뇌옹 노선배님은 어디에 계시오?"
태성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그 자는 죽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그렇다면 왕야는 벽파 노선배님이 암습에 실패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말씀이오?"
"물론이다."
진유걸은 그의 깊고 음흉한 심기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러니 북귀천왕과 동마천왕이 이용당할 만도 하지.'
다시 태성왕 주옹이 말을 이었다.
"네놈이 뇌옹을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광혼객이 왔더군. 그래서 이제껏 네놈을 죽이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네놈을 미리 제거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
순간, 진유걸의 뇌리로 한 줄기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갔다.
"귀하는 그 면구를 누구에게 입수했소?"
태성왕 주옹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체념한 듯 실토하였다.
"이것은 마혼살군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진유걸은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정도로 정교한 인피면구는 누구도 만들지 못하오. 당평학이라 할지라도 말이오."
그는 말을 멈춘 뒤, 뇌옹의 면구를 보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마혼살군이 썼던 탈혼사자의 면구, 그리고 뇌옹의 면구……."
순간, 진유걸은 한 줄기 무서운 예감이 머리를 스쳐 감을 느끼며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것은 오직 한 사람밖에 만들 수 없는 것이오!"
찰나, 태성왕 주옹의 전신이 학질 걸인 사람마냥 심한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그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진유걸이 태성왕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중인들은 진유걸의 돌연한 태도에 의혹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진유걸과 태성왕 사이에 중인들이 알 수 없는 뭔가가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태성왕 주옹의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침착하고 여유 있게 대꾸하던 그가 어째서 진유걸의 눈물을 보고는 입술을 깨물며 피눈물을 참고 있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강호정랑 진유걸은 눈물을 흘리며 태성왕 주옹을 한참 바라보더니, 잠시 후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 때 진유걸의 시야로 멀리 주수연이 성운을 안은 채 그의 모친 해동선녀와 함께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환희에 넘치는 순간이었건만, 진유걸은 추호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짙은 슬픔이 그의 가슴에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태성왕 주옹의 인피면구 뒤에 도사리고 있는 인물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
천면신옹(千面神翁) 전우(田友).
인피면구의 대가인 바로 그였던 것이다.
천면신옹, 그가 권력과 부(富)를 한꺼번에 움켜쥐기 위해 인피면구 몇 장으로 사람들을 속이며 이 모든 흉계를 꾸몄던 것이다.
진유걸은 여전히 침울한 얼굴로 해동선녀와 주수연 사이에서 터벅터벅 걸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때 주수연의 품에 안겨 있던 성운이 고사리 같은 손을 움직여 진유걸의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그제서야 진유걸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성운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는 수많은 군웅들에게도 힘차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불마공자 만세……!"
"광혈풍 만세……!"
"강호정랑 만세……!"
이들과 멀리 떨어진 곳, 일남일녀가 철탑처럼 선 채 장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북공자 팽왕수와 이제는 그의 여인이 된 백화낭자 철지연이었다.
그들 남녀는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진유걸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뒤편으로 또 한 여인이 서 있었으니…….
여승(女僧).
황색 가사를 곱게 차려 입고 진유걸에게 망연한 눈길을 던지고 있는 이 여승이 누구란 말인가?
아아, 비운(悲運)의 여인 지청란(池淸蘭)!
바로 그녀가 아닌가?
진유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순결한 몸을 당평학에게 더럽혀야만 했던 여인.
또한 벽파의 암습 때도 그녀가 나타나 구해 주지 않았던가?
그녀는 순결을 더럽힌 후, 불도에 귀의하여 멀리서 진유걸의 행복을 빌어 왔던 것이다.
그녀의 눈에서는 지금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미타불… 언제나 시주의 행복(幸福)을 기원(祈願)하겠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단장(斷腸)의 슬픔이 배어 있었다.
"와아아아……!"
"강호정랑 만세……!"
환호성이 진동하는 장중, 몇몇 여인이 발을 구르고 있었다.
남궁상아를 비롯한 강보연, 금화란, 전여정, 독고영 등이었다.
그녀들은 점점 멀어져 가는 진유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초조한 심정의 여인들.
그녀들의 시선이 거듭해서 마주치고 있었다.
문득 남궁상아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독고영을 툭 쳤다.
"언니는 진 오빠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어요?"
그녀의 이 당돌하고 깜찍한 질문에 독고영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글쎄……."
남궁상아는 그녀가 본심을 털어놓지 않자, 이번에는 강보연에게 물었다.
"연 언니는 어때요?"
강보연은 처량한 어조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나… 나는… 차라리 죽어 버릴 거야."
그녀의 이 대담한 말은 다른 여인들에게 공감(共感)을 안겨 준 듯했다.
야생여걸 남궁상아는 다시 금화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니도 역시 마찬가지죠?"
항주 기녀였던 금화란은 머뭇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궁상아는 마지막으로 전여정에게 물었다.
"언니는요?"
"수연 군주님은 모두 같이 살자고 하셨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남궁상아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중얼거렸다.
"나 혼자만 몰래 가려 했는데… 천상 언니들과 같이 가야겠군."
이 말에 독고영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디로……?"
남궁상아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어디긴 어디예요? 진 오빠가 가시는 불마성이죠."
"그렇다면 어서 가자!"
누군가의 힘찬 외침에 여인들은 침울함에서 벗어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때 마침 하늘에는 불타는 듯한 붉은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석양(夕陽).
그 아름다운 빛이 대지에 축복(祝福)을 내리듯 한 폭의 그림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었다.
<大 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