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十章 대혈전(大血戰) (34/35)

第十章 대혈전(大血戰)

1

진유걸은 일행들을 먼저 야삼관의 평원으로 보낸 뒤, 자신은 백마산(百馬山)을 목표로 신형을 날렸다.

휘익- 휙-!

산뜻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관도를 질주하는 기분은 참으로 유쾌했다.

더구나 그에게 가장 근심거리였던 주수연과 성운이 정맹원으로 찾아왔다고 하지 않는가?

그는 신형을 표표히 날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백마산의 석굴이 아직도 그대로 있을까? 광혈풍 시절에는 그 곳에서 불철주야(不撤晝夜) 무공에만 매달렸었는데…….'

이 때 돌연.

"푸흐흐흐… 오늘은 재수가 좋은 날이다. 어서 가자."

"헤헤헤… 이 형님이 먼저다."

"여부가 있나? 자네 다음에는 이 어르신이니 빨리 끝내야 하네."

시끌벅적한 음성과 함께 세 인영이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다가 진유걸과 맞닥뜨렸다.

그들은 모두 비슷한 체격에 각기 병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인상은 한결같이 음침한 편이었고, 가운데 인물은 커다란 푸대를 짊어진 채 걷고 있었다.

그 자는 짐을 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에 힘이 있어 보였다.

진유걸은 냉랭한 눈길로 그들을 훑어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들 중 우측의 인물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진유걸은 그들의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흉흉한 인상의 그들도 진유걸의 옆을 말없이 지나쳤다.

'이상하군. 좀 전의 그 사내를 어디선가 꼭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것 느낌이 들어.'

진유걸은 아무리 기억을 떠올리려 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백마산의 석굴을 찾아 금불마공과 천살도법을 익히는 게 더 급하다."

진유걸은 천살성 사마기가 불마경과 천살도법을 동시에 익히게끔 안배한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닷새 후 있을 격전 때까지 그것을 익히기 위해 백마산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진유걸은 최절정 신법을 전개하며 빛살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반시진 가량 달렸을까?

그는 백마산 근교에 자리한 작은 촌락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대부분이 화전민(火田民)과 사냥꾼들로 이루어진 작은 고을은 무척이나 평화스러워 보였다.

진유걸이 촌락의 중심부를 막 지나치려는 순간.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옥들로부터 약간 외진 곳에 세워진 초가(草家).

그 곳에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지 않은가?

진유걸은 갈 길이 바빴으나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 안에서 구슬픈 울음소리가 흘러 나왔기 때문이었다.

"으흑흑… 으흑……!"

안에는 연로(年老)해 보이는 부부(夫婦)가 땅을 치며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곁에는 한 청년이 비분강개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는 초가 안을 들여다보며 한 중년인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 집에는 선정(善情)이라는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애가 글쎄, 오늘 새벽녘에 갑자기 실종… 엇?"

중년인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방금까지 얘기를 듣고 있던 진유걸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정녕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중년인은 넋이 나간 듯 사방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귀신에게 홀렸나? 대낮에 귀신을 보다니… 홀려도 단단히 홀렸나 보네."

중년인이 진유걸을 찾고 있는 사이.

휘익- 휙-!

진유걸은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 중년인의 말을 듣는 순간, 오던 도중에 만났던 인상이 흉흉한 세 사람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메고 있던 그 자루 속에 선정이라는 소녀가 잡혀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죽일 놈들!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을 서슴지 않다니…….'

그는 한 줄기 유성처럼 허공을 쏘아 나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세 장한이 간 듯한 방향으로 질주해 가던 진유걸은 허름한 사당 한 채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이 나누었던 대화로 미루어, 이 곳에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음이 급하여 재빨리 문을 열어젖혔다.

순간, 그의 시야로 빨리듯이 들어오는 여체(女體).

선정이라는 소녀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미 한 발 늦었는지, 그녀는 의복이 갈기갈기 찢겨진 채 발가벗겨져 있었다.

"낭자!"

진유걸은 얼른 그녀의 상체를 안아 일으켰다.

그러나 선정이라는 소녀는 이미 싸늘하게 식은 시체로 변해 있었다.

진유걸은 이를 우드득 갈아붙이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개만도 못한 놈들! 아아, 내 실수다. 좀 전에 내가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어도 이 낭자가 죽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자책감으로 가슴을 치며 선정의 몸을 여며 주다 말고 움찔 놀라고 말았다.

선정이 꼭 쥐고 있는 푸른 띠!

순간, 진유걸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이것은 청청각 무사들이 머리에 두르는 띠가 아닌가?"

진유걸은 문득 항주에서 청청각 수하들에게 처참하게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새벽에 마주쳤던 한 낯익은 장한에 대한 기억도 떠올랐다.

"그래, 그 놈이다! 광혼객에게 손목을 잘리고 내게 앙갚음을 했던 놈!"

진유걸의 가슴에는 잊혀졌던 복수심과 더불어 무서운 살기가 치솟았다.

'이 곳에서 오 리쯤 떨어진 곳에 청청각 분타가 있다고 했는데… 분명 그 곳에 있는 놈들일 것이다.'

진유걸은 선정의 시신을 사당에 잘 안치시킨 뒤 신형을 폭사시켰다.

얼마 후, 그는 한 장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청청각 분타였다.

진유걸은 다짜고짜 정문을 향해 일 장을 후려갈겼다.

퍼엉-!

굉음이 터지며 문짝이 산산조각 부서져 날았다.

진유걸이 정문을 부수고 들어서자.

"웬 놈이냐?"

푸른 경장 차림에 푸른 띠를 이마에 두른 청청각 수하 네 명이 뛰쳐나왔다.

진유걸은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지라 손속에 인정 사정을 두지 않았다.

"염라사자다!"

그는 훌쩍 몸을 날리며 천살도를 빛살처럼 날렸다.

새애앵-!

싸늘한 도기가 노도와도 같이 밀려 나갔다.

일순.

"으아악……!"

"허억!"

"으으윽……!"

그들은 참담한 단말마의 비명을 토해 내며 썩은 짚단처럼 나뒹굴었다.

진유걸은 일단 피를 보자 살심이 더욱 솟구쳤다.

"모두 나와!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여 줄 테니!"

그는 고함을 버럭 지르며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청청각 수하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었다.

진유걸은 덮쳐 오는 그들을 향해 수중의 천살도를 무섭게 떨쳐 냈다.

"천살폭(天煞暴)-!"

슈슈슈-!

예리한 파공성이 고막을 찢을 듯이 터져 나왔다. 이어 잔인한 도기가 사방팔방으로 난사되었다.

청청각 고수들은 섬칫한 기류에 휩싸이며 단말마의 비명을 토해 냈다.

"으억!"

"아아악……!"

피(血)!

진유걸은 이 순간, 마치 악귀나찰을 방불케 했다.

그는 청청각 인물들을 무참히 도륙내며 좌충우돌 천살도를 휘둘러 댔다.

삽시간에 청청각 고수들이 혈육 덩어리가 되어 나뒹굴었다.

진유걸은 그들의 시신을 밟으며 더욱 안으로 들어갔다.

"청청각의 잡배들! 당장 나오지 못하겠느냐?"

그의 대갈일성에 장원 전체가 흔들거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죽었는지 찬물을 끼얹은 듯 썰렁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진유걸은 기이한 생각이 들어 재빨리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청청각 뒷문으로 도망치고 있는 한 떼의 무리들이 그의 시야로 들어왔다.

그 중, 유달리 그의 시선을 끄는 인물.

그들 중 한 명이 푸른 띠를 두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저 놈이다.'

진유걸은 내심 외침을 터뜨리며 그대로 신형을 날렸다.

휙- 휙-!

청청각 고수들은 그가 추격해 오자, 공포로 사색이 된 채 부르짖었다.

"으아… 살성! 대살성이 쫓아온다!"

"사람 살려!"

그러나 진유걸은 그들 틈으로 날아 내리며 천살도를 무자비하게 내리그었다.

스윽- 사사삭-!

그 때마다 심장이 찢겨 나가는 듯한 단말마가 꼬리를 이었다.

"으아!"

"허우욱……!"

혈우성풍(血雨腥風)이 휘몰아치며 청청각 고수들이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진유걸은 그들을 순식간에 황천으로 보낸 뒤, 띠를 두르지 않은 청청각 무사의 앞을 막아 섰다.

"이 놈! 네놈의 뼈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다."

청청각 무사는 혼비백산하며 뒤로 물러섰다.

"대… 대협! 목숨만……."

그는 얼마나 두려웠던지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진유걸은 그의 애걸을 일축해 버리며 추상같이 호령했다.

"두 팔을 내밀어 보아라."

장한은 그가 시키는 대로 두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진유걸의 예상대로 그는 한쪽 손이 없는 게 아닌가?

"흐흐흐… 네놈이 여인을 농락하고 죽였겠다? 버러지만도 못한 놈! 가거라!"

그의 좌장이 전면을 향해 쭉 뻗어지는 순간.

콰쾅-!

거대한 폭발음이 터져 나오며 끔찍스런 비명이 토해졌다.

"으아악……!"

청청각 고수의 몸은 피곤죽이 되어 실 끊어진 연 마냥 날아가 나동그라졌다.

악인(惡人)의 종말은 정녕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죽음을 끝으로 장내는 정적이 감돌았다.

진유걸은 전신으로 허탈감이 엄습함을 느꼈다.

'선정 낭자! 낭자가 쥐고 있던 띠로 인하여 쉽게 원한을 갚을 수가 있었소. 진작에 구해 주지 못해 미안할 뿐이오. 부디 좋은 데로 가시오.'

그는 숙연한 마음으로 선정의 명복(冥福)을 빌며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백마산을 향해서…….

2

닷새 후.

망망대해(茫茫大海)처럼 펼쳐진 벌판으로 한 떼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정맹원의 고수들이었다.

선두에는 십대기인 반야선승, 귀수도부, 마령신의, 무당마인, 원앙벽뢰쌍기 뇌옹과 벽파, 광혼객 등이 앞장 섰다.

그 뒤로는 비영신성 위종출과 비표사웅, 신주사걸, 지원영, 함현욱 등이 따랐고… 그들 뒤로는 불마천제 진웅과 해동선녀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특히 불마천제의 팔에는 한 어린아이가 안겨 있어 눈길을 끌었다.

진성운!

바로 진유걸과 수연의 아이가 아닌가?

성운은 몹시 기분이 좋은지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이들의 우측에는 경장 차림의 여인들이 몰려 있었는데, 단 한 여인만이 경장 차림이 아니었다.

주수연, 바로 그였다. 그녀는 걸으면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언니! 너무 심려 마세요. 이제 곧 진 오빠가 나타날 거예요."

남궁상아가 주수연에게 위로의 말을 던졌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저 깊은 곳에는 애절한 슬픔이 깔려 있었다.

이런 심정이 어찌 남궁상아, 그녀뿐이겠는가?

하북월색 강보연,

월화신녀 전여정,

도화마검 독고영,

그리고 금화란 등이었다.

여인들의 뒤쪽으로는 한 명의 화상과 도인, 그리고 개방방주 영걸신개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녹옥불장(綠玉佛杖)을 손에 쥔 위엄 있는 모습의 화상, 그는 소림파 장문인 명종대사(明宗大師)였다.

그는 반야선승의 지시를 받고 방계제자 백여 명을 이끌고 온 것이다.

그의 곁에 있는 도인은 무당파 장문인 태령자(太靈子)로, 역시 무당마인의 명을 받고 제자 이백 명을 데리고 왔다.

또한 개방에서는 삼백여 명의 제자들이 몰려왔다.

이파일방의 제자들은 취풍개의 지휘를 받으며 맨 뒤에서 웅성거리며 쫓아오고 있었다.

그 외에도 서혈천왕 혈영광군을 비롯하여 많은 정협지사(正俠之士)들이 뒤를 따랐다.

하지만 정작 보여야 할 사람…….

강호정랑 진유걸!

그의 당당한 모습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이 때 앞서 가던 반야선승 일행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뒤편에서 몰려오던 모든 사람들도 멈추어 섰다.

반야선승은 침중한 얼굴로 귀수도부 모용비를 바라보며 물었다.

"진 맹주가 어찌 이리 늦는단 말이오?"

"글쎄요? 나중에 오겠다고 했으니 좀더 기다려 보기로 하지요."

마령신의가 그들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진 맹주가 이 곳을 택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일 거요. 혈궁궁주는 계략에 뛰어난 인물이니, 본 정맹원의 움직임을 결코 묵과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오."

"그렇다면 진 맹주는 혈궁 무리들이 이 곳으로 몰려올 거라는 걸 미리 예측하고 있었단 말이오?"

마령신의는 광혼객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저기를 보십시오."

그가 어딘가를 가리키자, 정맹원 고수들과 이파일방의 제자들 역시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찰나.

"아……!"

그들이 서 있는 평원 저 멀리, 한 떼의 무리들이 몰려오고 있지 않은가?

광혼객은 진유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내심 감탄하였다.

'아, 과연 진 맹주의 지혜는 가히 천하제일이로군. 그렇다면… 그는 반드시 오고 말리라.'

짙은 신뢰감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혈궁고수들은 삽시간에 정맹원 고수들과 십여 장 떨어진 곳까지 밀려들었다.

주위는 질식할 듯한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고조되었다.

양측의 대치는 금세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일순 혈궁의 무리로부터 하얀 백의를 걸친 백포복면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서릿발 같은 눈초리로 정맹원 고수들을 훑어보며 외쳤다.

"강호정랑! 어떤 천둥벌거숭이인지 몰라도 냉큼 나서거라! 노부는 혈궁궁주 북귀천왕(北鬼天王) 귀독요후(鬼毒妖侯)이니라!"

그의 음성에는 심후한 내력이 담긴 듯, 중인들의 그의 소리를 듣는 순간 몸을 휘청거렸다.

그 때였다.

"이 놈, 장가야!"

엄청난 폭갈과 함께 한 인영이 빛살처럼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분명 정맹원 측에서 솟아올랐으나 워낙 신법이 기민한지라, 중인들은 그가 누군지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반야선승 일행조차 그의 정체를 확인할 수 없었으니 두말 하면 무엇하랴?

솟구쳐 오른 인영은 귀독요후를 섬전처럼 덮쳐 가며 그대로 장력을 내뻗었다.

찰나.

슈우웅-!

어마어마한 기류가 줄기줄기 뻗치며 귀독요후를 휘감아 갔다.

그러나 귀독요후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우장으로 반원을 그릴 뿐이었다.

그의 이 행동은 너무도 유연하여 흡사 무희(舞姬)가 춤을 추는 듯했다.

하나, 다음 순간.

콰릉- 콰콰쾅-!

엄청난 폭음이 터지며 짓쳐 들어가던 인영이 실 끊어진 연처럼 퉁겨 올랐다.

"으윽!"

비명이 허공을 스치며 핏줄기가 포물선을 그렸다.

동시에 귀독요후를 공격한 인영은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정맹원의 진영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를 발견한 중인들은 그제서야 경악성을 내질렀다.

"앗! 서혈천왕 혈영광군?"

"으헛! 혈영광군이!"

반야선승이 재빨리 몸을 날려 떨어지는 그의 몸을 받아 안았다.

주화입마로 다리를 못 쓰는 혈영광군은 시뻘건 피를 콸콸 쏟아 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하북월색 강보연이 대경실색하며 달려들었다.

"외할아버지!"

하나뿐이던 오빠 강태위를 포달랍궁 고수들에게 잃고 겨우 혈영광군과 만나게 되었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녀는 서혈천왕 마우성을 부둥켜안으며 서럽게 오열(嗚咽)을 터뜨렸다.

"외할아버지! 흐흑… 흐흑흑……!"

혈영광군은 눈을 반쯤 내리감은 채 실낱 같은 음성을 토했다.

"저 자는 혈혈대살제(血血大殺帝)의… 혈사공(血邪功)… 을 연성하였다. 그것도 완벽에 가깝도록… 아, 무림은 대체 어떻게 될것인가?"

일순 중인들은 일제히 의혹을 떠올렸다.

"혈혈대살제의 혈사공이라니……?"

그러자 그들 틈에 끼여 있던 진유걸의 부친 불마천제 진웅이 설명을 해 주었다.

"혈혈대살제는 혈궁을 일으킨 조사(祖師)요. 그에게는 혈사공이란 무공이 있었는데, 당시 그는 칠 성 가량밖에 터득하지 못했던 모양이오."

진웅은 계속해 천살성 사마기가 혈혈대살제와 파륵천존, 색선모 등 삼대궁의 궁주들과 격전을 치른 얘기를 해 주었다.

"당시 천살성 사마기에게 패배를 당했던 혈혈대살제가 항산을 내려가며 '혈사공을 구 성까지만 연성했었더라면 혼자서 능히 제압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오."

그 말을 끝으로 장내는 삽시간에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반면 혈궁의 백포복면인, 즉 북귀천왕 귀독요후가 장소성를 터뜨렸다.

"우하하하하… 그 따위 재간을 지니고 감히 본궁을 능멸하려 하다니…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그는 안하무인 격으로 외치며 삿대질을 서슴지 않았다.

"어째서 강호정랑이라는 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느냐? 본 궁주가 두려워 땅 속에라도 숨었단 말이냐?"

귀독요후의 오만불손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정맹원 고수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될 수 있으면 시간을 오래 끌어 진유걸이 그 사이, 빨리 나타나 주기만을 학수고대하였다.

한데 돌연, 날렵한 몸매의 여인이 허리를 두어 번 퉁기며 귀독요후의 면전으로 내려서는 게 아닌가?

그녀는 바로 마령신의 남궁태협의 손녀인 야생여걸 남궁상아였다.

정맹원의 군웅들은 그녀의 당돌한 태도에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소란이 일었다.

"허억! 어쩌자고 저런 무모한 짓을……."

"아… 아니, 저 아이가……."

그러나 남궁상아는 두 손을 가볍게 허리에 걸친 채 귀독요후를 향해 거만하게 외쳤다.

"당신의 그 유치한 행동을 더 이상 봐줄 수가 없어 내가 나왔어요."

일순, 혈궁궁주 북귀천왕 귀독요후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린 계집애가 버릇없이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야생여걸 남궁상아는 귀독요후가 두렵지 않은 듯 생글생글 웃음까지 지었다.

"강호정랑이 당신이 두려워 안 오는 줄 아세요?"

귀독요후가 비수같이 예리한 안광을 번뜩였다.

"그렇지 않으면 어째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냐?"

남궁상아의 입가에 경멸 어린 미소가 흘렀다.

"당신의 배후에 있는 간악한 마두가 먼저 출현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남궁상아는 진유걸이 했던 말을 취풍개에게 전해 듣고 무심코 그렇게 말했지만,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뭐… 뭐라고?"

귀독요후는 까무라칠 듯 놀라며 무섭게 몸을 떨었다.

그는 주춤주춤 물러서더니 돌연 고함을 버럭 내질렀다.

"혈궁천하(血宮天下)-!"

그것은 자신의 어색함을 은폐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동시에 처절한 살겁을 일으키는 시작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행동은 도리어 남궁상아의 말을 인정한다는 뜻이 아닌가?

혈궁고수들은 그의 외침이 신호이기라도 하듯 함성을 일으켰다.

"와아… 와아……!"

"혈궁천하 만세… 와와……!

"혈궁천하 만세……!"

그들은 각기 병장기를 치켜든 채 정맹원의 고수들을 향해 성난 파도처럼 짓쳐들었다.

이에 놀란 반야선승도 불문의 사자후(獅子吼)를 터뜨렸다.

"명예로운 죽음의 선봉자(先鋒者)들이여! 나를 따르라!"

정맹원 고수들 역시 함성을 내지르며 조수처럼 밀려갔다.

넓디넓은 평원은 삽시간에 도륙(屠戮)의 격전장으로 화해 버리고 말았다.

반야선승 등을 비롯한 정맹원 고수들은 혈궁의 금백고수들을 찾아 몸을 날렸고, 나머지 인물들은 닥치는 대로 접전을 벌여 갔다.

차차차창-!

소름끼치는 금속성이 울려 퍼지고 고함 소리가 뒤따랐다.

"가거라!"

쉬- 쉬익- 쉭-!

검기와 도기가 난무하며 사방팔방에서 끔찍스런 비명 소리가 허공을 뒤덮었다.

"아악!"

"으아아악……!"

생의 종말을 고하며 구천지하로 떨어지는 단말마는 듣는 이의 가슴을 섬칫하게 만들었다.

이어 피보라가 일며 절단된 사지가 장내에 분분히 휘날렸다.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하며 아비규환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 갑작스런 사태에 가장 놀란 것은 아직 어린 성운이었다.

불마천제 진웅은 격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주수연을 찾아 성운을 안겨 주었다.

주수연은 무공을 할 줄 몰랐기에 혼자 뒤로 처져 있었던 것이다.

"자, 이 애를 받거라. 여기는 격전장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안심할 수 있을 게다. 만일 여기서 우리가 패한다면, 성운을 데리고 불마성으로 가거라. 너는 현명하니 알아서 잘 할 것이다. 자, 이것은 불마성으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다. 두 시진 이내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 곳을 떠나거라."

진웅은 그렇게 말하며 쪽지 한 장을 전해 주었다.

주수연은 목이 꽉 메어 왔다.

"아버님!"

불마천제 진웅은 뭉클 솟아오르는 뜨거운 심정를 억누르며 그녀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아가, 염려 말거라. 유걸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성운의 볼을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몸을 날려 혈전이 벌어지고 있는 격전장으로 달려갔다.

뒤에 남은 주수연은 걱정스런 얼굴로 성운을 꼭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상공, 어째서 오시지 않습니까? 소첩이 그립지도 않으십니까? 성운이 보고 싶지도 않으세요? 무정하신 분……."

그 때였다.

"그래서 이렇게 오지 않았소."

사기가 물씬 풍기는 음성이 그녀의 고막을 휘저었다.

순간, 주수연은 자지러질 듯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아앗! 당신은……?"

주수연의 전면, 음침한 인상의 청년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녀는 두려움으로 인해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백표서생(白豹書生) 당평학(唐平鶴)!

그가 능글맞게 웃으며 주수연의 전신을 훑어보고 서 있는 게 아닌가?

"흐흐흐… 역시 당신이군. 전에는 내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당평학은 음흉한 눈알을 굴리며 주수연에게 천천히 다가들었다.

성운도 공포를 느낀 듯 울먹이기 시작했다.

"어머님… 무서워요……."

주수연은 성운을 품안에 꼭 끌어안은 채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녀의 뒷걸음질은 금세 끝나고 말았다. 거대한 암벽이 그녀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푸흐흐흐… 물러나도 소용없다니까 그러네. 자아, 그 어린 놈을 살리려거든 어서 본좌의 품에 안기는 게 좋을 거야."

당평학은 음침한 어조에 주수연은 온 전신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추상 같은 호통을 내질렀다.

"하늘이 두렵지도 않아요? 어떻게 이런 흉악한 짓을 저지를 수 있죠?"

당평학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아니지. 본좌는 평생 하늘에 감사할 것이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그 때였다. 청아하고도 낭랑한 음성이 당평학의 고막을 때렸다.

"그래, 곧 하늘에 감사드리게 될 거야."

"으헉!"

당평학이 기절할 듯이 놀라며 고개를 돌린 순간, 몇 군데 요혈이 화끈거림을 느꼈다.

그와 동시, 그의 앞으로 한 명의 절세미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순, 주수연은 그를 보더니 넋 나간 얼굴이 되었다.

강호정랑 진유걸, 바로 그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얼마나 그리웠던 님이었던가?

그로 인해 눈물로 지새운 밤이 몇 날 며칠이며, 그를 떠올리며 몸부림친 날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이 순간, 그 동안의 온갖 시련과 고초가 말끔히 날아가 버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 수 없음은 웬일인가?

다만 말없이 그를 바라보는 주수연의 눈에는 눈물만 흘러내릴 뿐이었다.

진유걸은 혈도가 짚여 꼼짝도 못하는 당평학을 냅다 걷어찼다.

퍽-!

"우욱!"

그는 비명을 토해 내며 이 장 가량 날아가 곤두박질쳤다.

진유걸은 감회에 찬 얼굴로 주수연과 성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상공……!"

주수연은 몽롱한 의식에서 깨어나듯 진유걸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수연!"

그들 두 사람은 감격에 찬 해후를 하며 서로를 깊이 끌어안았다.

말이 필요치 않았다.

서로의 감촉에서, 서로의 숨길에서, 서로의 눈길에서… 그들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때.

"아이, 숨막혀."

그들 사이에 있던 성운이 불평을 토하며 두 사람의 가슴을 밀어냈다.

두 사람은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성운을 내려다보고는 쿡! 웃음을 터뜨렸다.

이 때.

"우욱!"

바닥에 고꾸라져 있던 당평학이 갑자기 비명을 토했다. 이어 그의 입에서는 시뻘건 피가 흘러 나왔다.

그는 진유걸의 보복이 두려워 스스로 자결을 하고 만 것이다.

"지독한 놈! 스스로 혀를 깨물다니… 한 가지 물을 것이 있었는데……."

진유걸이 당평학의 혈도만 짚고 그를 살려 준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가 당평학에게 눈을 잃고 죽음을 당하기 직전, 한 여인이 나타나 순결을 바침으로써 살아나게 되지 않았던가?

그 때 자신을 살려 준 그 여인의 행방을 묻고자 함이었다.

하나, 당평학이 자결하는 바람에 영영 물어 볼 수 없게 되고 만 것이다.

진유걸은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 오는 격전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주수연과 성운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고는 쏜살같이 혈전장을 향해 신형을 폭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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