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章 배후인물(背後人物)
1
태명회 총단.
회주의 정체가 비밀에 싸여 있는 이 곳은 오악(五嶽) 중 남악(南嶽)이라 일컫는 형산(衡山)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형산은 호남성(湖南省)에 위치한 명산(名山)으로서 유명한 사찰(寺刹)과 절경들을 구비하고 있었다.
여기는 형산에서도 가장 경치가 뛰어나다고 소문난 자연지(自然池).
푸르스름한 물 위로는 아름다운 부용(芙蓉)이 떠돌고, 아래로는 온갖 물고기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곳.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운치 있는 것은 자연지 위로 비치는 둥근 달 그림자였다.
월광(月光)!
그것은 자연지의 모든 것과 더불어 화사한 절경(絶景)을 이루고 있었다.
이 때 홀연, 월광 아래 몇 줄기 인영이 유령처럼 자연지로 접근하였다.
선두에 선 인물은 냉랭한 기류가 흐르는 보도(寶刀)를 멘 강호정랑 진유걸이었다.
그 뒤로는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비영신성 위종출이 따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다락원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비표표국이 태명회에 의해 붕괴되었으며, 그의 부친인 비표표국 표주인 비화심표(飛和心豹) 위천진(偉天眞)마저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취풍개로부터 들게 되었다.
그 때문에 비영신성은 무서운 복수심에 휘감겨 있었다. 지금 그의 눈동자에서는 시퍼런 귀화(鬼火)가 뿜어지는 듯했다.
위종출의 뒤편으로는 신주사걸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공명서생(孔明書生) 제갈후(諸葛厚),
매화절검(梅花絶劍) 용호표(龍虎豹),
무영객(無影客) 황보성휘(皇甫星輝),
철웅거한(鐵雄巨漢) 백궁(白弓).
진유걸은 얼마쯤 걷다가 갑자기 멈추라는 산호를 보냈다.
"삼십 장 밖에 고수 두 명이 나타났다."
잠시 후, 두 인영이 자연지 위로 섬전처럼 내리꽂혔다.
휘익- 휘익-!
그들은 창졸지간에 자연지 위에 떠 있는 연꽃을 밟고 서는 것이 아닌가?
얄팍한 연꽃을 밟았건만 물결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연꽃을 비집고 나온 듯한 두 인영.
중인들은 그들의 경공에 저마다 놀라움을 나타내며 내심 탄식을 불어 냈다.
'저런 절세경공이 있다니……?'
그들을 본 진유걸 역시 슬쩍 어깨를 흔들며 행운유수와도 같이 몸을 날렸다.
"두 분 노선배님을 뵙게 되어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는 소리와 함께 자연지의 달빛 아래 내려섰다.
순간.
"헉! 저런 경공이……?"
"아, 신기(神技)로다."
연꽃을 밟고 선 두 기인은 물론이거니와 비영신성, 신주사걸 등은 경이로운 시선으로 진유걸을 주시하였다.
그는 놀랍게도 자연지 위에 내리비치는 달 그림자를 밟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정녕 불가사의한 신법조예가 아닐 수 없었다.
귀수도부는 경악에 찬 눈길로 강호정랑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맹주와 대면케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오. 마령신의가 보내 준 전서구를 통하여 대충은 들었소만…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구려."
진유걸은 그들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히며 말을 꺼냈다.
"후배는 단지 노선배님들의 은덕(恩德)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귀수도부와 광혼객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며 진유걸을 향하였다.
"그게 무슨 소리요?"
진유걸은 미소를 떠올리며 그 동안 그들이 자기를 구해 준 일들을 얘기해 주었다.
광혼객이 청청각의 수하들로부터 그를 구해 준 일,
귀수도부가 그와 주수연을 도와 준 일,
또 북망대산에서 죽을 뻔했을 때 광혼객이 관 속에 든 자신을 꺼내 살려 준 것 등…….
순간, 광혼객과 귀수도부는 인연이란 말을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었구려. 그 모든 게 진 공자를 위해 하늘이 안배한 일이었던 것 같소."
"그런데 두 분께서는 무슨 일로 이렇게 왕림하신 것인지요?"
"우리가 이렇게 달려온 것은 맹주께서 살시나찰을 찾는다는 소식을 접해서요. 지금 살시나찰은 태명회에 와 있소."
찰나, 진유걸은 걷잡을 수 없는 살심이 몰아침을 느꼈다.
보원암의 여승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옥수준재 남궁인를 격살한 요녀(妖女).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차가운 음성을 꺼냈다.
"그 밖에 또 어떤 인물들이 와 있습니까?"
귀수도부는 신중한 얼굴로 차분히 말했다.
"동북구성에서 출두한 장백사마의 사부인 장백거살(長白巨殺) 악극악(岳極惡)과 금마혼천신, 소두철검 고구 등이 와 있소."
"태명회주가 노선배님들을 믿은 것이 커다란 실수로군요."
광혼객은 득의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이제 곧 태명회는 끝장날 것이오!"
그들은 말을 마친 뒤, 모두 산 위로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2
이윽고 그들의 시야로 잠든 교룡처럼 웅크리고 있는 태명회 총단이 들어왔다.
어둠을 대낮같이 밝히는 등불이 곳곳에 걸려 있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제 저 황홀한 등불 아래 곧 생사의 결전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참혹하고 무자비한 혈전(血戰)이…….
일순 진유걸을 비롯한 귀수도부, 광혼객, 비영신성 등은 섬전처럼 태명회의 담장을 뛰어넘었다.
진유걸은 광혼객을 따라 깊숙이 잠입해 갔고, 나머지는 경비무사들을 덮쳐 갔다.
"죽어라!"
태명회와 철천지 원한을 갖고 있는 비영신성이 수중의 검을 신랄하게 발출하였다.
새애앵- 쌩-!
예리한 검풍이 일며 차가운 기류가 뼛골을 녹일 듯 뻗어 나갔다.
태명회 무사 두 명은 그들이 나타난 것을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검에 관통당하고 말았다.
"끄윽!"
"악!"
그들은 비명과 함께 썩은 나무 토막처럼 나뒹굴며 피를 뿌려 냈다.
공명서생 제갈후와 매화절검 용호표 등 신진협사들도 각기 병기를 난무하기 시작했다.
"적이다!"
"와… 막아라!"
"여기다!"
적막에 잠겨 있던 태명회가 소란스러워지며 여기저기서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나오기 시작하였다.
차차창-!
파르륵- 펑-!
장풍이 난무하며 고수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귀수도부는 두 자루 도끼를 양쪽 손에 움켜쥔 채 좌충우돌 마음껏 휘둘러 댔다.
그 때마다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어둠을 할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아악……!"
"우으윽… 끄윽!"
피가 분수처럼 뿜어 오르고 살덩어리가 흩어져 날았다.
일순.
뎅- 뎅- 뎅-!
긴급한 사태가 발생했음을 알리는 경종 소리가 태명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 즈음, 진유걸과 광혼객은 어느 후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살시나찰, 그 요녀의 거처가 어딥니까?"
광혼객은 수중에 들려 있는 피리로 한 별채를 가리켰다.
"저 곳이오."
그 순간, 때마침 경종 소리에 놀라 일어난 듯 살시나찰의 거처에 불이 커졌다.
진유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이자, 광혼객은 다른 방향으로 몸을 날려 갔다.
"누구냐?"
이미 인기척을 느낀 듯 살시나찰의 앙칼진 외침 소리가 창문 밖으로 터져 나왔다.
진유걸의 미간에 으시시한 살기가 모아졌다.
"저… 승… 사… 자!"
쾅-!
이어 살시나찰이 창문을 부수며 뛰쳐나왔다.
순간.
"허억! 불마공자!"
그녀는 진유걸을 보고는 기절초풍할 듯 놀라고 말았다.
십만대산에서 이미 그의 무공을 본 적이 있지 않은가?
진유걸은 심장을 얼릴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 동안 내 손아귀를 잘도 빠져 나갔다만, 오늘은 기필코 네년을 참(斬)하고 말리라."
살시나찰은 그의 냉혹한 어조에 모골이 송연해지며 머리끝이 쭈뼛 곤두섰다.
그는 자신의 사부인 귀염마녀까지 죽인 인물이 아닌가?
적의 침투를 알리기 위해 귀염마녀에게 갔다가 우연히 빈 껍데기만 남게 된 그녀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진원을 진유걸이 모두 흡수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살시나찰이 진유걸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진유걸은 천살도를 꼬나 잡으며 살심에 가득 찬 외침을 내질렀다.
"천살영(天煞影)-!"
쇄애애액-!
그의 도가 부챗살처럼 퍼져 나가며 눈부신 도영(刀影)이 삼 장 안을 뒤덮었다.
살시나찰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 경악하며 즉시 쌍장을 내뻗었다.
"귀음풍뢰(鬼音風雷)-!"
그녀의 장심에서 두 줄기 강맹한 기류가 쏟아져 나왔다.
우릉- 우르릉-!
뇌성벽력이 이는 듯 거대한 파공음과 더불어 폭풍 같은 잠력이 몰아쳤다. 그 기세는 마치 태산을 허물고 장강을 뒤덮을 듯 막강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 엄청난 장력도 진유걸의 도막을 뚫지 못하는 게 아닌가?
찰나, 살시나찰은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아……!"
그녀는 장탄식을 토해 내며 이 장 가량 물러났다.
살시나찰은 전력을 다한 자신의 공세가 기껏 진유걸의 도를 잠시 주춤거리게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천살섬(天煞閃)-!"
진유걸은 그녀의 내심을 알아채고 다시 수중의 천살도를 빛살처럼 뿜어 냈다.
전광석화(電光石火)!
천살도는 공간을 가르며 살시나찰을 섬전처럼 찍어 갔다.
츠츠츠츠-!
잔혹한 파공음이 폭출되며 도기가 그녀의 요혈로 휘몰아쳤다.
"아앗!"
그녀는 기겁할 듯이 놀라며 허리를 빙글 돌렸다.
찰나지간.
"찬살구류(天煞九流)-!"
진유걸의 천살도가 갑자기 그녀의 몸 주위에서 아홉 가지 도기를 폭사하는 게 아닌가?
그것은 정녕 눈 깜짝할 사이의 변화였다.
살시나찰은 그 순간, 전신 아홉 군데가 불에 데이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아악……!"
투툭- 투툭- 툭-!
뒤이어 그녀의 육신이 산산조각 나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종말은 실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진유걸은 살시나찰의 시신을 바라보며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궁 형! 그리고 보원암의 여승들… 이제는 편히 잠들 수 있을 게요."
이 때 돌연.
"그러나 장백사마와 살시나찰, 귀염마녀는 편치 못할 것이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한 인영이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키가 삼 척이나 될까? 난쟁이를 방불케 하는 왜소한 몸집의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키에 비해 머리털과 수염은 너무 길어 땅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귀신 같은 몰골이었으나 그의 안광에서는 새파란 독기가 뿜어져 나와 보는 이로 하여금 몸서리를 치게 만들었다.
진유걸은 그를 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악 노선배님도 이제 관 속에 들어갈 연세가 되셨지요?"
장백거살 악독악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살기를 내뿜었다.
"불마공자! 네놈이 노부의 제자들을 살해하고도 이토록 뻔뻔스럽게 굴다니… 뒈져라!"
그는 미끄러지듯이 지면 위를 날아오며 장력을 격출하였다.
윙- 위위윙-!
엄청난 장력이 휘몰아쳐 오며 진유걸에게로 짓쳐 들었다.
마치 천하를 뒤엎을 듯한 광풍(狂風)이었다.
'으흣! 과연 장백사마의 스승답구나.'
진유걸은 재빨리 염두를 굴리며 금불마공을 끌어올렸다.
"금불광망(金佛光網)-!"
그는 팔 성의 내력을 끌어올려 장력을 시전하였다.
새애애액-!
강맹무비한 기운이 뻗어 나가더니 두 가닥 암경이 중간에서 맞닥뜨렸다.
순간, 경천동지할 폭발음이 터져 올랐다
콰콰콰콰쾅-!
마치 화산(火山)이 폭발하며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이었다.
잠시 후, 엄청난 폭발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일 장의 격돌로 진유걸은 내심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럴 수가? 아무도 막아 내지 못했던 금불마공을 막아 내다니… 역시 천하는 넓고, 이인(異人)은 많구나.'
그러나 그의 경악은 장백거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들끓어오르는 기혈을 간신히 억제하며 내심 부르짖었다.
'저 어린 애송이가… 삼 갑자를 상회한 노부의 장력을 가볍게 막아 내다니……!'
두 사람 다 서로의 무공에 경악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였다.
진유걸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장백거살을 노려보며 외쳤다.
"이번에는 더욱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오."
그러나 장백거살은 코방귀를 날리며 두 자루 소도(小刀)를 꺼내 들었다. 날이 얇고 길이가 한 뼘에 달하는 소도였다.
"흐흐흐… 감개가 무량하군. 이 일월쌍도(日月雙刀)를 사용한 지가 거의 오십 년이 넘었는데……."
그는 살음을 뱉어 내며 두 자루 소도를 교차하더니 돌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일월절혼(日月絶魂)-!"
휘익-!
장백거살은 허공에서 풍차처럼 회전하며 그대로 진유걸을 노리며 내리꽂혔다.
진유걸의 입가에 물씬 살기가 피어 올랐다.
"어리석은 노마! 잘 가시오!"
그는 천살도를 꼿꼿이 세우며 신형을 그대로 도약시켰다.
찰나.
파카칵-!
기음과 동시에 장백거살의 일월쌍도가 한 자 가량 쭉 늘어나는 게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드득-!
관절 부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장백거살의 팔도 같이 늘어났다.
장백거살은 순간 한쪽 소도로 비스듬히 진유걸의 천살도를 후려쳐 갔다.
차창-!
진유걸은 흠칫 놀라 즉시 금불마공을 전개해 혼신강기를 형성했지만 그보다 장백거살의 소도가 더욱 빨랐다.
쇄액-!
예리무비한 음향과 함께 소도가 진유걸의 어깨에 사정없이 박혀 들었다.
팍-!
진유걸은 순간 어깨에 강렬한 통증을 느꼈지만, 이를 악물며 불마선천강기(佛魔先天 氣)로 소도를 부러뜨리는 현편, 천살도로 악극악을 사정없이 그어 버렸다.
일순.
"으윽!"
장백거살 악극악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 나오는 동시,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이 일 초에서 양패구상(兩敗俱傷)을 당하게 된 것이다.
악극악은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내려다보고는 흉흉한 안광을 빛내며 외쳤다.
"듣던 대로 과연 대단한 놈이구나. 하지만 회주와 태명쌍광(太命雙狂)의 적수는 결코 되지 못한다."
진유걸은 어깨에서 흐르는 피를 지혈시키며 이를 갈았다.
"암습을 가하다니… 좋소! 과연 그들보다 못한지 어디 다시 한 번 똑똑히 보시오!"
그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녕 피가 얼어붙을 만큼 냉혹한 기류였다.
동시에 그의 눈에서 귀기 어린 광채가 쏟아졌다.
마광(魔光)!
일순.
"허억! 회주!"
장백거살 악극악이 진유걸의 눈빛을 보더니, 기절초풍할 듯 경악하며 그렇게 부르짖는 게 아닌가?
찰나, 진유걸의 신형이 천살도와 함께 대기를 갈랐다.
"천살섬(天煞閃)-!"
화르르륵-!
진유걸이 빛살처럼 몸을 날리는 순간, 수중의 천살도가 날카로운 파공음을 일으켰다.
피를 원하는 천살도가 서릿발 같은 혈기를 담고 휘몰아치는 순간, 악극악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다.
"헉!"
그는 허파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토하며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러나 천살도의 빠르기는 그의 상상를 불허하고 있었다.
일순, 장백거살 악극악은 자신의 한 부분이 잘려 나가는 무서운 통증을 느꼈다.
"으윽!"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끈적끈적한 선혈이 악극악의 옆구리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그는 인상을 흉칙하게 일그러뜨리며 진유걸을 응시하였다.
진유걸은 어느 새 천살도를 도집에 밀어넣은 채 철탑처럼 우뚝 서 있었다.
"네놈이 어떻게 마광영안(魔光靈眼)을……?"
악극악이 간신히 입을 열고 물었다.
"마광영안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그리고 나를 보고 회주라니……?"
"네놈은… 혹시 광마록(狂魔錄)에 해 들어 본 적이 있느냐?"
"그것은 천축에서 들어 온 무학비급이 아니오? 이미 실전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진유걸은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말했다.
장백거살 악극악은 상처가 심한지 몸을 비틀거리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거기에는… 마광영안… 이라는 괴공(怪功)이… 수록돼 있지. 바로… 태명회주가 그 광마록을… 으윽!"
거기까지 간신히 말을 잇던 장백거살 악극악은 풀썩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대로 절명하고 만 것이다.
진유걸은 그의 시신 위로 눈길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태명회주가 광마록을 연성하다니… 그렇다면 독고휘는……?"
장백거살은 왜 그의 눈빛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것일까?
진유걸의 눈은 독고휘의 눈을 이식받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독고휘의 신비스러운 눈빛에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일까?
그는 의혹을 떠올리며 숨이 끊어진 장백거살을 옆구리에 끼고 격전이 벌어지는 외전(外殿) 쪽으로 신형을 날려 갔다.
3
"가거라! 차앗-!"
파파파팍-!
"으악!"
"아아악……!"
귀수도부가 쌍도끼를 휘두르자 회의무사들이 찢어지는 비명 소리를 내지르며 나동그라졌다.
그는 여유만만한 얼굴로 수십 명의 회의인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의 우측에는 금마혼천신이 비영신성과 신주사걸 중 매화절검을 맞아 치열한 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들은 막상막하의 형세를 유지하고 있어, 도무지 승부를 예측할 수 없었다.
이들의 뒤편으로는 공명서생 제갈후와 무영객 황보성휘, 철웅거한 백궁 등이 회의인들에게 둘러싸여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들 중 백궁은 가슴과 허리에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진유걸은 허공에서 몸을 회전하며 폭갈을 내질렀다.
"멈춰라!"
그는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내리꽂히며 회의무사들을 향해 우장을 비스듬히 격출하였다.
슈우웅- 우웅-!
광풍노도와도 같은 장풍이 어마어마한 기세로 몰아쳐 나오며 삽시간에 회의무사들을 덮쳐 갔다.
그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치려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회의인들은 터질 듯한 압박감과 함께 처절한 고통에 휘감기고 말았다.
그들의 입에서는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단말마가 줄을 잇고 터져 나왔다.
"와악!"
"윽!"
"크어어억……!"
"으으윽……!"
피보라와 살 조각이 사방팔방으로 분분히 휘날리며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혈육우(血肉雨)!
피가 쏟아지고 혈육 덩어리가 난무하는 장내는 지옥을 방불케 하였다.
진유걸은 단 일 장에 회의무사 십여 명을 격살시킨 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장백거살의 시신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일순.
"앗! 부회주님!"
"아니? 부회주님이 당하시다니?"
장백거살의 시신을 발견한 회의무사들은 경악성을 내지르며 공포에 떨었다.
자신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던 장백거살 악극악이 죽다니?
진유걸은 부상을 입은 철웅거한 백궁의 상처를 돌봐 주며 회의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이 소형제의 상처를 돌본 뒤 다시 그대들에게 손을 쓰겠다. 상처를 돌보는 동안 즉시 물러가라!"
그의 외침이 끝나는 순간.
파파팍-!
괴음이 발출됨과 동시에 폐부가 으스러지는 듯한 참담한 단말마가 중인들의 고막을 헤집고 들었다.
아, 잔인한 참상(慘狀).
귀수도부의 도끼가 금마혼천신의 두개골을 그대로 쪼갠 것이었다.
회의인들은 전신으로 엄습하는 두려움에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회의인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눈치를 살피더니, 잠시 후 서로 줄행랑을 치기에 바빴다.
삽시간에 태명회 총단은 텅 비어 갔다.
이 때 광혼객이 원앙벽뢰쌍기 중 뇌옹과 함께 몸을 날려 왔다.
뇌옹은 이미 광혼객에게 모든 얘기를 들은 듯 진유걸에게 포권일례를 취했다.
"맹주의 도움에 감사하오."
진유걸은 미소를 떠올리며 마주 포권일례를 취했다.
"아닙니다. 후배보다는 여기 계신 광혼객 노선배님과 귀수도부 노선배님께 감사드리십시오."
그는 말을 마친 뒤 비영신성과 신주사걸을 돌아보며 지시를 내렸다.
"부상을 입은 백 소협을 제외하고 다른 분들은 이 곳에 불을 지르도록 하시오."
그의 지시가 떨어지자 그들은 신속히 몸을 움직여 태명회 총단 곳곳에 불을 질렀다.
잠시 후, 태명회는 순식간에 회염 속에 휩싸이며 시뻘건 불길을 토해 냈다.
진유걸을 비롯하여 귀수도부, 광혼객, 뇌옹, 비영신성, 신주사걸 등은 불타는 태명회를 뒤로 한 채 형산을 내려왔다.
그들이 정맹원을 향해 몸을 날려 갈 때였다.
"형님!"
그들의 전면으로부터 두 청년이 헐떡거리며 달려왔다.
진유걸은 그들을 자세히 살피다가 움찔 놀랐다.
"아니, 너는 원영이 아니냐? 그리고 당신은 태성왕부의 금위무사 함현욱!"
그는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지원영은 진유걸이 공력을 잃었을 당시, 항주에서 만났던 소년신투였다.
당시 그는 기녀가 된 누이를 빼내기 위해 남의 은자를 훔치던 중, 우연히 진유걸을 만나게 된 것이다.
훗날 진유걸은 그에게 주수연의 패물과 몇 가지 무공을 수록한 책자를 은밀히 보내 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함현욱은 태성왕부에서 그의 눈에 띄었던 강직한 성품의 금위무사였다.
진유걸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의 손을 맞잡았다.
"오랜만일세. 그 동안 어떻게들 지냈나? 여기는 웬일들이고?"
소년신투 지원영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형님이 해동거사로 변장하여 태성왕부로 들어간 후, 수연 군주님과 도주했다는 소문이 들리지 뭡니까? 그리고 해동거사가 광혈풍이라는 소문이 들리길래, 이상해서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정맹원에 갔다가 금화란 누님을 만나게 되어 자초지종을 듣고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진유걸은 듬직하게 성장한 그를 보며 물었다.
"그 동안 무공을 많이 연성하였느냐?"
"물론입니다. 형님 덕분에 누이도 이분 함 형과 혼인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진유걸은 함현욱에게 시선을 옮기며 기쁜 얼굴로 말했다.
"그것 참, 축하하네. 그보다 내 함 형에게 용서를 빌게 하나 있네."
갑작스런 그의 말에 함현욱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옛? 용서라니요? 무슨 말씀입니까?"
"함 형에게 신분을 감쪽같이 속여서 말이야. 하지만 당시에는 어쩔 수가 없었네."
함현욱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덕에 태성왕부에서 쫓겨나게 되었지만… 그래도 가치가 있었습니다. 저와 맹주님이 다 사랑의 결실을 맺었으니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진유걸의 눈가가 우수에 젖어 들었다.
"하지만 수연과 성운의 생사조차 모르고 있으니… 휴!"
진유걸이 길게 한숨을 내쉬자, 지원영과 함현욱이 서로 마주 보며 의미 있는 웃음을 지었다.
지원영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성운 소공자님께서는 형님을 많이 닮았더군요."
찰나지간.
"아니,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성운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니……?"
그러자 함현욱이 한술 더 뜨며 놀리듯이 말했다.
"맹주님, 여복이 많으시더군요. 수연 군주님 외에도 꽃다운 낭자들이 두 분이나 더 있으시던데요?"
진유걸은 답답하다는 듯 두 사람의 팔을 흔들며 재촉했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얘기 좀 해 보게!"
지원영은 그제서야 정색을 하며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수연 군주님과 소공자님께서는 지금 정맹원에 와 계십니다."
순간, 진유걸은 걷잡을 수 없는 환희 속으로 빠져들며 탄성을 발하였다.
"아, 그랬었군. 정말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야!"
하지만 그는 곧 안색을 회복하며 물었다.
"한데 꽃다운 낭자가 둘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건가?"
소년신투 지원영과 함현욱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거기에 대해선 저희들도 잘 모릅니다. 나중에 직접 알아보십시오."
진유걸은 기억을 떠올리려 하였지만, 그 두 사람이 누군지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생각을 떨쳐 버리며 함현욱에게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나를 해동거사로 태성왕부에 추천하는 바람에 함 형이 낭패를 당하였으니, 이제는 내가 함 형을 정맹원에 추천하리다."
진유걸은 주수연과 성운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자 힘이 솟아올랐다.
이 때 지원영이 갑자기 진유걸의 발 아래 무릎을 꿇더니 느닷없이 큰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사부님!"
"사부라니?"
진유걸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주시하자.
"저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셨으니 이제부터 형님이 아니라 사부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러니 정식으로 사부님께 제자의 예를 올리겠습니다."
진유걸이 지원영의 절을 받고 있을 때.
휘익- 휙-!
일진의 소성이 울리며 장내에 두 거지가 등장하였다.
개방방주인 영걸신개와 취풍개였다.
진유걸은 그들을 돌아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여지껏 그 곳에 숨어 무엇을 하고 있었소이까?"
그의 말은 이미 그들의 등장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중인들은 내심 진유걸의 심후한 공력에 경탄을 터뜨렸다.
'역시 맹주의 화후는 상상도 못할 경지에 올라 있군.'
영걸신개와 취풍개는 안색을 붉히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자꾸 나가자고 했는데, 방주께서 조금만 더 있자고 하셔서 그냥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개방방주 영걸신개가 벌컥 화를 냈다.
"이런 유치한 놈! 내 핑계를 대? 너 같은 놈이 내 제자라니? 원통하고 복통하고, 애통, 절통할 일이로고!"
취풍개가 익살맞게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디 그뿐입니까? 통자로 끝나는 말에는 밥통 먹통, 두통… 치통… 생……."
"그만!"
영걸신개의 이마에 시퍼런 힘줄이 새겨졌다.
"아직도 많이 있는데, 어찌 막으십니까?"
"더 이상 계속했다가는 이 짓거리도 못하고 죽겠다."
취풍개는 흐물흐물 웃으며 코끝을 실룩거렸다.
"편안히 가십시오. 차대방주 취풍개가 지키겠습니다."
영걸신개는 이를 우두둑 갈아붙이며 소리쳤다.
"빌어먹을 놈! 네놈 때문에 내 코가 이렇듯 벌개졌는데,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는 진유걸을 바라보며 애걸하듯 입술을 떼었다.
"맹주! 천하에 이토록 무지한 제자가 있겠습니까?"
진유걸을 비롯한 중인들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두 사람을 주시하였다.
영걸신개는 진유걸을 붙잡고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저 놈이 나에게 방주 자리를 내놓으라고 협박에 갖은 고문을, 아니 이건 아니고… 하여간 별의별 수단을 다 부렸습니다."
"그래서요?"
소년신투 지원영도 재미를 느낀 듯 그에게 물었다.
영걸신개는 울상을 지으며 자신의 붉은 코를 만지작거렸다.
"저 놈이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해 왔습니다. 술 마시기 시합을 해서 방주를 돕자는 것이었지요."
순간, 신주사걸 중의 첫째인 공명서생 제갈후가 얼른 입을 열었다.
"시합한 결과 주독 오른 빨간 코만 남은 것이로군요? 후후……!"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중인들은 저마다 배를 움켜잡고 포복절도할 듯 웃어제꼈다.
"와하하하……!"
"푸후후……!"
"으하하하하……!"
숨넘어갈 듯한 중인들의 웃음소리가 밝아 오는 새벽을 힘차게 깨웠다.
진유걸은 문득 두 사람의 태도에서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방주! 필경 희소식이 있는 모양이구려? 무엇인지 어서 알려 주시오."
영걸신개와 취풍개는 그의 지혜에 다시금 감탄하고 말았다.
"그렇소이다. 포달랍궁 고수들이 드디어 혈궁을 습격하였습니다."
일순, 중인들의 안면에 화색이 돌았다.
진유걸의 입가에도 신비스런 미소가 감돌았다.
"짐작하고 있던 바요. 혈궁궁주가 스스로 무덤을 팠군."
영걸신개는 거기에 대해 세부적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노화자가 알아 낸 바에 의하면, 혈궁궁주가 포달랍궁 고수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계책을 사용했다고 하더이다."
광혼객이 인상을 약간 찌푸리며 의혹을 나타냈다.
"계책이라니요?"
개방방주는 신광을 번쩍이며 입을 열었다.
"백여 년 전 사천방이 붕괴될 당시, 서혈천왕 혈영마군과 남악천왕 악심골제가 가장 커다란 내상을 입었다 합니다. 이것은 서혈천왕이 직접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남악천왕은 그 때부터 본신 전력을 겨우 오 성밖에 활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하더군요."
귀수도부가 불쑥 도중에 끼여들었다.
"한때 무림에서는 사대천왕이 서로 먼저 불마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천하도를 놓고 다투었다는 소문이 떠돌았었지……."
영걸신개는 그의 말이 끝난 뒤 계속해 말을 이었다.
"한데 혈궁궁주는 남악천왕을 보내 맹주를 상대하도록 했었지요. 물론 맹주께서도 알겠지만, 그 자리에는 포달랍궁의 화천존인도 있었지요."
그의 말에 진유걸은 혈궁의 적동고수들이 펼치던 분시대살진(分屍大殺陣)을 기억해 냈다.
당시 남악천왕 악심골제가 직접 진을 선두 지휘하지 않았던가? 화천존인 역시 그들과 함께 있었고…….
상념에 잠긴 진유걸의 귓가로 영걸신개의 음성이 계속해서 들려 왔다.
"공력의 반을 잃어버린 악심골제는 결국 맹주의 손속을 당하지 못하고 황천으로 가게 됐지요."
제갈공명(諸葛孔明)의 후손으로 자부하는 공명서생 제갈후가 나름대로 판단을 내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화천존인으로 하여금 그 혈궁의 무공을 과소 평가하게 만들었군요. 과연 혈궁궁주는… 엇?"
그는 말을 잇다 말고 의아한 점이 있어 머리를 갸웃거렸다.
영걸신개가 물음을 던졌다.
"왜 그런가?"
"혈궁고수들은 옷색깔로 항렬을 구분하는데, 그는 어떤 옷을 입고 있었습니까?"
진유걸이 간략하게 대답했다.
"적의(赤衣)였소!"
그러자 뇌옹이 나서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들은 다섯 가지 의복 색깔로 구분하는 외에 그 앞이나 뒤에 금(金), 은(銀), 동(銅)을 집어넣어 부르고 있지요. 예를 들어 혈궁의 최절정 고수를 금백고수(金白高手)라 부르고, 다음은 은흑고수(銀黑高手)로 부릅니다."
그 말이 끝나자 영걸신개도 의혹을 느끼며 입술을 열었다.
"남악천왕 악심골제는 겨우 적동고수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화천존인이 혈궁을 침범할 생각을 가졌을까? 악심골제보다 강한 인물들이 수두룩한 혈궁에?"
이것은 정녕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 혈궁궁주가 화천존인을 이용하려 했다면, 악심골제에게 백의을 입혔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어야만 화천존인은 금백고수가 쉽게 당하는 것을 보고 혈궁을 침범할 생각을 가졌을 텐데…….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중인들은 의혹이 깃든 눈길로 진유걸을 바라보았다.
그가 어떤 말이라도 해 주기를 바라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진유걸은 의미 있는 미소를 흘리며 자신의 생각을 얘기해 주었다.
"여러분들은 화천존인에 관해 자세히 모르고 계십니다. 그는 무척 심기가 깊고 음흉한 인물이오. 때문에 일반적인 생각으로 그를 상대해서는 안 됩니다. 혈궁궁주는 이 점을 알고 그를 역이용한 것입니다."
순간.
"아……!"
중인들의 입에서 일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공명서생 제갈후는 존경과 흠모가 어린 눈길로 진유걸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본다면, 혈궁궁주는 화천존인보다 한 단계 위군요?"
"그렇소. 하지만 그 역시 화천존인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오."
그는 다시 영걸신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보다 방주께서 다시 한 번 수고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맹주께서는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즉각 시행하리다."
진유걸은 영걸신개의 공손한 태도에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혈궁과 포달랍궁의 격전에서는 필시 포달랍궁이 패하게 될 것이오. 하지만 혈궁 역시 큰 피해를 입을 것이오 그리고 태명회 고수들까지 모여 있으니…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천추에 한을 남기게 될 것이오."
영걸신개가 걱정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사대천왕 중 가장 막강한 동마천왕(東魔天王) 마혼살군(魔魂煞君) 손포(孫砲)와 북귀천왕(北鬼天王) 귀독요후(鬼毒妖侯) 장태무(張太武)가 생존해 있을 뿐더러, 여러 일류고수들이 버티고 있는데……."
"그러나 여기서 물러선다면 그들이 먼저 정맹원을 노릴 것이오. 그리고 이건 내 생각인데, 동마천왕과 북귀천왕보다 더 무서운 인물이 뒤에 있는 듯싶소."
찰나, 중인들의 얼굴이 일시에 굳어졌다.
십대기인 중의 일 인인 귀수도부 모용비가 모두를 대신하여 물었다.
"그 무서운 인물이 누구라는 것이오?"
"그것은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동마천왕과 북귀천왕이 서로 협조할 까닭이 없지 않겠습니까?"
중인들은 숙연한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며 저마다 염두를 굴렸다.
사대천왕보다 더 가공한 인물이 있다니…….
모두가 염두를 굴리고 있을 때, 진유걸은 영걸신개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정맹원에 계시는 반야선승 노선배님께 닷새 후, 혈궁의 야삼관(野三關)으로부터 삼십 리 가량 떨어진 평원(平原)에서 만나자고 전해 주십시오."
"시간은요?"
"오시경(午時更)이 좋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중인들의 눈 속에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비장한 결의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