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章 정맹원(正盟院)
1
정맹원 의사청.
실내에는 많은 무림고수들이 모여 있었다.
강호정랑 진유걸,
반야선승,
마령신의 남궁태협,
무당마인 표한우,
서혈천왕 혈영광군,
영걸신개와 취풍개,
비영신성(飛影神星) 위종출(偉鐘出)과 비표사웅(飛豹四雄),
신주사걸(神舟四傑),
그리고 도화마검 독고영,
야생여걸 남궁상아,
금화란 등이었다.
모두 진유걸과 만난 적이 있던 인물들이었다.
비영신성과 비표사웅은 모두 하북성 비표표국의 인물들로, 이제껏 유아독녀궁의 명부동에 갇혀 있었다.
또한 신주사걸 역시 진유걸이 풍운서생으로 역용하고 있을 때, 유아독녀궁의 정문에서 마주친 적이 있던 신진기협(新進奇俠)들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이미 많은 얘기가 오고 간 듯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일순 마령신의 남궁태협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말을 꺼냈다.
"위급한 상황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소이다. 더구나 태명회는……."
그는 말을 중단하며 개방의 차대방주 취풍개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취풍개는 옆구리에 차고 있던 호로병 중의 하나를 그의 손에 넘겨 주었다.
그 호로병은 개방제자 항우가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중인들은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호로병을 주시했다.
마령신의는 그 속에서 하나의 두루마리를 꺼내 탁자 위에 쫘악 폈다.
순간.
"이것이 무엇이오?"
"지도가 아닌가?"
모두가 웅성거리자, 마령신의가 밝혀 주었다.
"황궁(皇宮)의 내부도(內部圖)요."
"황궁의 내부도?"
"이것을 왜?"
중인들은 의아한 얼굴로 마령신의를 주시하였다.
그러자 반야선승이 나서서 설명해 주었다.
"이 내부도는 개방방주가 태성왕부에서 몰래 빼내 온 것이오. 태성왕야는 지금 태명회를 등에 업고 모반(謀反)을 일으키려는 야심(野心)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오."
찰나.
"허엇!"
"그럴 수가……?"
반야선승은 중인들의 반응을 지켜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단지 이 지도만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오. 그 외에도 수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무당마인 표한우가 침통한 얼굴을 한 채 물었다.
"반야선승은 이 일을 어찌 처리하려 하시오?"
"빈승은 여기에 대해 신의와 몇 가지 의논한 점이 있소. 이제 마령신의께서 그것을 발표할 것이오."
중인들의 눈길이 모두 마령신의에게로 옮겨졌다.
"이미 회수된 맹령정패(盟令正牌)를 발동하여 잠자고 있는 구(九) 파(派)를 본맹으로 불러들이는 동시에, 맹주를 새로이 선출할 것이오."
마령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걸신개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 이후에는요?"
"본 정맹원은 혈궁과 태명회를 감시하는 것과 시기를 같이하여 황궁에 진상(眞相)을 알릴 것이오."
무당마인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벌썩 일어서며 말했다.
"어떤 방법으로 말이오?"
마령신의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답했다.
"정맹원의 이름으로 고수를 파견할 것이오."
이들의 열띤 대화를 듣고 있던 야생여걸 남궁상아가 불쑥 나섰다.
"그렇게 되면 누가 정맹원의 맹주가 되는 거죠? 이미 강호운룡 남 대협께서는 고인이 되셨으니……."
그녀의 이 말은 상당히 당돌했으나 중요한 발언이기도 했다.
중인들의 눈길이 모두 반야선승 쪽으로 모아졌다.
"거기에 대한 것도 이미 생각해 놓았소. 이것은 마령신의가 말해 줄 것이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중인들의 시선이 마령신의에게로 모여졌다.
마령신의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맹주 자리에 오를 사람은 바로… 강호정랑 진유걸이오!"
순간.
"와아… 불마공자……!"
"강호정랑 진유걸……!"
중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찬성했다.
진유걸은 난색을 지으며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올시다. 후배가 어찌 그런 막중한 대임을……!"
반야선승이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그에게 힘을 주었다.
"강호정랑! 고인이 된 강호운룡도 이것을 바랄 것이네."
진유걸은 중인들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무림말학을 이토록 성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후배가 알기로는 서장의 포달랍궁과 혈궁은 서로를 장악하기 위해 견제해 왔고, 또 태명회와 혈궁은 서로 모종의 연계 관계에 있습니다. 여기에 다시 정맹원이 활동을 개시한다면, 그들을 뭉쳐 주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유걸은 잠시 말을 끊은 뒤, 다시 좌중을 둘러보며 음성을 높였다.
"이 시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들의 힘을 노출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적을 분쇄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용히 숨어서 검을 다듬고 시기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중인들은 모두 숙연한 표정으로 진유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밤은 으슥해져 갔건만 진유걸의 입에서는 목전의 국면에 대한 설명이 청산유수(靑山流水)와도 같이 흘러 나왔다.
<무림맹주(武林盟主) 강남운룡(江南雲龍) 남화룡(南和龍) 신위(神位)>
<남운기협(南雲奇俠) 천년정랑(千女情郞) 독고휘(獨孤輝) 신위(神位)>
<중원의객(中原義客) 옥수준재(玉樹俊才) 남궁인(南宮仁) 신위(神位)>
정맹원 내에 자리한 사당(寺堂).
진유걸은 세 위패(位牌)를 경건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중원을 구하고자 서슴없이 생명을 불사른 이들!
그들 앞에서 무엇을 언약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진유걸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뒤쪽에서 인기척과 함께 반야선승이 나타났다.
"역시 이 곳에 있었군. 이것을 돌려 주기 위해 왔네."
반야선승은 맹령정패를 진유걸에게 건네 주었다.
그 영패는 진유걸이 유아독녀궁에서 마령신의에게 넘겨 주었던 것이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후배는 맹주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또한 지금은 이것을 아직 사용할 시기가 아닙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이 맹령정패를 강호운룡 남 대협의 유물로 생각하고 간직하면 있으면 되지 않겠나? 맹령정패에 담긴 그의 손길과 영혼, 그리고 창생(蒼生)을 위한 협심(俠心)을 되새기며 말일세."
진유걸은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안 받을 수도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맹령정패를 공손히 받아 품안에 곱게 갈무리하였다.
그의 이런 모습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던 반야선승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유아독녀궁에서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예, 노선배님께서는 혹 검존 사도천랑 노선배님을 알고 계시는지요?"
순간, 반야선승의 안색이 갑자기 상기되었다.
"그녀를 자네가 어찌 아는가?"
일견하기에도 몹시 놀란 얼굴이었다.
진유걸은 검존 사도천랑과 만나게 된 동기를 대충 이야기해 주었다.
"그 분은 노선배님께 평생을 후회 속에서 지냈다는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반야선승은 진유걸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한동안 격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나직이 탄식했다.
"아아, 천랑……!"
진유걸은 그들 사이에 얽혀 있는 미묘한 관계가 어떤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
"노선배님께서는 불초가 지닌 의문을 풀어 주실 수 있겠는지요?"
반야선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축축해진 눈자위를 애써 껌벅거리며 과거지사를 하나하나 얘기해 주었다.
"오래 전 얘기일세. 지금의 원앙벽뢰쌍기는 원래 한 사문의 사형제간이었네. 그들은 어느 날, 문주로부터 서로 혼인을 올리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네. 한데 어느 날, 그들 사이에 반목(反目)이 생기기 시작했네. 그것은 정금지(鄭錦芝)를 사모하는 인물이 나타나게 되면서부터였지."
일순 진유걸의 뇌리를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그 분이 혹 사부님이 아니신지요?"
반야선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그로 인해 지금의 뇌옹(雷翁)과 자네 사부인 강남태을자가 서로 비무(比武)를 벌이게 되었지."
"승자가 벽파 노선배님을 차지하기로 말입니까?"
"그렇다네. 그들은 당시 노부를 참관인으로 초대하여 비무에 공정을 기했지. 하지만 결전은 성사될 수가 없었네."
"왜요?"
진유걸은 마른침을 삼키며 다급히 물었다.
반야선승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당시 관전을 하고 있던 벽파 정금지가 괴로움을 참다 못해 자결을 꾀했던 것이네."
"아, 그 분은 두 분 기인을 동시에 사랑했었군요?"
반야선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빈승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녀를 즉각 마령신에게로 옮겨 갔지. 당시 그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빈승은 그녀를 끌어안고 갈 수밖에 없었지. 한데 불행히도 그 광경을 목격한 여인이 있었다네."
진유걸은 대충 내막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분이 바로 사도천랑 노선배님이셨군요? 당시 노선배님과 그 분은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던 사이였고……."
반야선승의 입가에 처량한 기색이 스쳐 갔다.
"그렇다네. 순전히 그녀의 오해였지. 그것으로 인해 그녀는 내 곁을 떠나가 버렸네. 빈승도 그 때는 그녀가 왜 떠났는지 자세한 내막을 몰랐으므로 너무도 충격을 받았지."
"그래서 삭발을 하고 불도에 귀의하셨군요?"
"그렇다네. 이제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 하지만 당시의 나로선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었다네."
진유걸은 그제서야 사부인 강남태을자와 벽파 정금지, 검존 사도천랑과 반야선승의 복잡한 갈등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가 내심 고개를 끄덕일 때, 반야선승의 한숨 소리가 들려 왔다.
"휴, 그러나 모두 지나간 일이네. 나이가 들면 지나간 일들은 모두 추억이 되지. 괴로웠던 것이나 행복했던 것이나 모두 아름답게 느껴지기 마련이라네."
그 때.
"하하하… 옳은 소리외다. 반야선승의 법설(法說)보다도 그 말이 한결 낫군."
호쾌한 음성과 더불어 무당마인 표한우가 들어섰다.
"진 공자! 서혈천왕이 다락원주에게 알아보라던 그 여인이 누군 줄 아는가?"
진유걸은 고개를 내저었다.
"후배는 다락원에서 그녀의 이름조차 알아 낼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바로 검존 사도천랑일세."
"헉! 그럴 수가?"
"아……!"
진유걸과 반야선승은 서로 놀라며 무당마인 표한우를 응시하였다.
"기실 사도천랑은 그 일이 있고 난 후, 천하를 방랑하다가 서혈천왕을 만나게 됐지. 고독감과 절망에 휩싸여 있던 그녀는 쉽게 그와 결합해 버렸다네. 하지만 사도천랑이 진실로 사랑한 사람은 바로 반야선승이었어."
반야선승의 안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진유걸은 그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본 뒤 다시 무당마인에게 물었다.
"그럼 서혈천왕 노선배님은 원래부터 망담수에 기거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물론이네. 그는 원래 하북성 강태위의 장원에서 머물고 있었다네."
"옛?"
"서혈천왕과 사도천랑 사이에는 여아(女兒)가 한 명 있었는데,그녀가 바로 강보연과 강태위의 모친이었어."
그 말이 떨어지자 진유걸은 일시에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랬었군요. 그래서 강태위가 서슴없이 황금을 내줬던 거로군요?"
그는 독백을 하듯 중얼거리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노선배님께서는 어찌 그 사실을 알고 계신지요?"
"그야 간단하지. 보연이가 강태위의 죽음 때문에 집안을 뒤지다 단명한 그녀의 모친, 다시 말해 서혈천왕의 딸이 남긴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지. 거기에 자세한 내막과 더불어 망담수의 위치도 적혀 있었어. 보연이가 그것을 본 마인에게 가져옴으로써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이네."
이제까지의 긴 대화로 진유걸은 그 복잡한 일들을 하나하나 추리해 낼 수가 있었다.
이 때였다. 개방제자 한 명이 황급히 뛰어 들어오며 서찰을 건네 주었다.
"누가 이것을 불마공자님께 전하라고 하더이다."
진유걸은 흠칫 놀라며 서신을 받아 펴 보았다.
<불마공자에게.
이 글을 보는 즉시 정맹원으로부터 동남 방향에 자리한 관제묘로 나와 주기 바라네.
은밀히 전할 기밀(機密)이 있으니, 될 수 있으면 외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 주게.
벽파.>
진유걸은 그 짧은 글을 즉시 반야선승에게 넘겨 주고는 사당을 나섰다.
그는 유성추월(流星追月)의 경공수법을 발휘하여 빛살처럼 허공을 날았다.
2
얼마나 지났을까?
진유걸의 시야로 관제묘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허공에서 빙글 몸을 돌리며 바닥으로 내려섰다.
이경(二更)으로 치닫고 있는 밤은 금세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이 음산한 귀기를 뿌리고 있었다.
그 때.
삐이꺽-!
소름끼치는 음향이 울리며 관제묘가 열리더니, 그 안에서 벽파 정금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와 주었구먼."
진유걸은 그녀에 대한 말을 모두 들었는지라 재빨리 포권일례를 취했다.
"노선배님께서는 어인 일로 후배를 찾으셨는지요?"
벽파는 희미한 웃음을 뿌리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수연 군주의 소식을 아는가?"
순간, 진유걸은 까무라칠 듯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예? 그녀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노신도 모르고 있네. 하지만 파양쌍귀상인이 알고 있다네."
파양쌍귀상인( 陽雙鬼商人)!
파양천귀( 陽天鬼) 범서(梵瑞)와 파양지귀( 陽地鬼) 방윤(方允).
이들은 미녀도, 즉 천하도를 강태위에게 매매했던 인물들이 아닌가?
그는 다소 흥분하며 그들의 행방을 추궁하듯이 물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제발 가르쳐 주십시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네. 하지만 알다시피 그들은 대가를 원하고 있네."
진유걸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재촉했다.
"좋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진유걸은 벽파의 뒤를 따르며 널 뛰듯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주수연과 성운.
그들 모자(母子)가 진유걸에게 차지하는 마음의 비중은 실로 엄청났던 것이다.
진유걸은 그를 위해 죽어 간 인물들이 없었다면, 벌써 주수연과 성운을 찾아나섰을 것이다.
그는 언제 무슨 일을 하든 두 사람을 결코 잊지 못했다. 천하의 모든 것은 버릴 수 있어도, 두 사람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때 홀연.
"헉!"
"으윽!"
두 마디 비명이 어둠을 뚫고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진유걸은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스쳐 감을 느꼈다.
"앗! 파양쌍귀상인이?"
두 사람은 대경실색하며 신형을 섬전처럼 폭사시켰다.
진유걸은 피를 쏟으며 나뒹굴고 있는 파양쌍귀상인 중 파양지귀 방윤을 안아 일으켰다.
"파양지귀! 정신차리시오! 수연은 어디 있소?"
파양지귀는 간신히 입을 벌리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바로 낙……."
바로 그 찰나.
"위험해요, 공자님!"
여인의 외침이 허공을 찢으며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순간적으로 진유걸은 전신에 선천강기(先天 氣)를 형성하며 지면을 박찼다.
"타앗-!"
순간이었다.
파카칵-!
괴음이 치솟으며 심장을 동결시킬 듯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악!"
파양지귀 방윤의 목에 벽파의 우수가 그대로 꽂혀지는 것이 아닌가?
암습(暗襲).
진유걸의 생명을 노린 갑작스런 벽파 정금지의 암습이었다.
진유걸은 뜻밖의 사태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호통을 내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는 동시에 자신에게 위험을 알려 준 여인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순, 그의 시야로 저만큼 멀어지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비쳤다.
황색 승복에 머리를 삭발한 비구니(比丘尼)였다.
하지만 진유걸은 그녀를 쫓기 이전, 목전의 상황부터 해결해야만 했다. 벽파가 다시 또 공격을 가해 온 것이다.
"죽어라!"
정금지는 진유걸이 죽지 않자 화가 있는 대로 치솟아 우수를 내뻗었다.
쇄애액-!
순간, 엄청난 장력이 진유걸의 전신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 때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파양천귀 범서 또한 장검을 비껴 들고 진유걸을 향해 덮쳐 들었다.
'아뿔사! 함정이었군.'
진유걸은 암담한 심정이 되며 입술을 깨물었다.
우르릉- 쇄액-!
우레 소리 같은 거센 장력과 부챗살 같은 검기가 사면팔방에서 휘몰아쳤다.
그러나 진유걸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마치 죽기를 작정한 사람마냥…….
순간.
콰쾅-!
지축이 뒤흔들리는 듯한 굉음과 동시에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악……!"
그것은 파양천귀의 입에서 토해진 단말마였다.
파양천귀는 검을 내리치는 순간, 강력한 반탄지력을 느꼈다.
그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파양천귀는 반탄되어 나오는 검에 의해 복부를 깊숙이 찔리고 만 것이다.
쿵-!
혈육 덩어리로 화한 그의 체구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이것은 벽파 정금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반탄지력에 의해 십 장 밖으로 나뒹굴며 입에서 핏덩어리를 울컥울컥 토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전설의 금불마공……!"
지금 진유걸의 전신은 금빛 광채로 싸여 있어 도저히 마주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경이로움에 휩싸였고, 전신에는 가는 경련이 일어났다.
진유걸은 천천히 금불마공을 해소시키며 벽파의 전면으로 다가들었다.
"노선배님! 후배는 정녕 실망을 금할 수가 없소이다. 이미 노선배님과 사부님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진유걸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는 보았던 것이다.
벽파 정금지의 노안에 뜨겁게 어린 눈물방울을…….
거기에는 말하지 못할 수많은 사연이 잠재돼 있는 것 같았다.
벽파는 서글픈 미소를 떠올리며 힘겹게 내뱉었다.
"뇌옹(雷翁)이 그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어… 할 수 없이……."
"태명회에서 뇌옹 노선배님의 목숨으로 정 노선배님을 위협했군요?"
그녀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유걸은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를 위로하였다.
"정 노선배님, 우선 정맹원으로 돌아가 이 일을 의논하기로 합시다."
벽파는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금불마공을 어찌 연성하게 되었나?"
기실 진유걸은 귀염마녀의 공력을 흡수하고 임독양맥이 타통된 이후, 이 기공(奇功)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런 얘기하기가 쑥스러워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돌연.
휘익- 휙-!
일진의 옷자락 날리는 소성과 함께 몇 줄기 인영이 멀리서 날아오는 게 아닌가?
진유걸의 공력은 이미 불가사의한 경지까지 오른지라 즉시 안력을 돋구었다.
"엇? 저분들은 개방방주와 반야선승, 그리고 마령신의… 아니, 저 분들은?"
진유걸은 자지러질 듯 경악하며 지면을 박찼다.
동시에 격정 어린 대갈을 토해 냈다.
"아버님! 어머님!"
반야선승 일행 속에 섞여 몸을 날려 오는 중년남녀!
유생 차림에 문사건을 두른 불혹(不惑)의 중년인과 탐스러운 머리채를 휘날리고 있는 아리따운 중년미부.
이들이 누구인가?
바로 진유걸이 꿈에도 잊지 못하던 그의 부모들이 아닌가?
그의 부친은 굵은 눈썹에 성목을 지니고 있었고, 입술에는 굳은 의지(意志)가 담겨 있었다.
우뚝 솟은 콧날은 태산준봉(泰山俊峯)을 방불케 했고, 전신에는 함부로 범접치 못할 고고함이 엿보였다.
또한 진유걸의 모친으로 보이는 여인은 비록 중년의 나이였지만 우아하고 고귀한 품위가 넘쳐흘렀다.
그녀의 수려한 이목구비는 결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절세적이었다.
실로 젊은 시절에는 천하에 제일가는 미인으로 손꼽혔을 만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들 부부(夫婦) 역시 감격에 찬 외침을 터뜨렸다.
"유걸아!"
"유걸아, 네가 정녕 살아 있었단 말이냐?"
이들 세 가족은 약 이십 성상(星霜) 만에 다시 해후를 하게 된 것이다.
"어머님! 아버님!"
"유걸아!"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뿌려 냈다.
진유걸의 방.
진유걸은 부모에게 그 동안에 겪었던 일들을 다 얘기해 주었다.
불마천제(佛魔天帝) 진웅(陳雄),
해동선녀(海東仙女) 하미련(河美蓮).
진유걸의 부모들은 그의 얘기가 계속되는 동안 연신 눈시울을 붉혔다.
진유걸이 그 동안 겪어 온 파란만장(波瀾萬丈)한 고난(苦難)들이 그들의 가슴을 후벼팠던 것이다.
얘기를 하는 진유걸의 눈에서도 뿌연 물기가 피어 올랐다.
이윽고 얘기가 끝나자 불마천제와 해동선녀는 애틋한 슬픔 중에도 한 가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주수연과 성운에 관한 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진유걸이 불마경에 수록된 금불마공을 십 성까지 연성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들 부부는 흐뭇한 심정으로 이제는 어른이 된 진유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진웅이 물기 젖은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네가 풍립동(風立洞)에서 실종한 후, 바닷가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주변은 온통 뒤졌으나… 헛수고였다."
"하지만 너의 아버님과 나는 네가 생존해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더구나 너의 품안에는 본성의 지형이 들어 있던 불마비(佛魔飛)가 있으니,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십 년… 우리는 끈질기게 너를 기다렸지. 하지만 그 기다림의 세월은 너무도 길었다. 허탈감과 함께 절망이 몰려왔단다."
"너의 아버님은 상심한 나를 위해 여행을 제의해 왔단다. 그것은 여행을 하면서 너를 찾자는 말씀이셨지."
진유걸은 부모님들이 자기 때문에 상심했을 생각을 하자 마음이 아팠다.
"그렇다면 여태까지 유랑(流浪)을 하고 계셨단 말씀입니까?"
해동선녀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몇 년 전부터는 황궁에서 생활하고 있단다."
순간, 진유걸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옛? 아니, 어떻게……?"
해동선녀가 진웅을 쳐다보자 그가 동기를 설명해 주었다.
"여행을 다니던 중 우연히 천자(天子)의 생명을 구해 주게 되었는데… 천자의 권유로 그 때부터 황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단다. 또 전국적으로 방을 붙여 너의 행방을 찾을 겸하여……."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진유걸은 태성왕의 음모를 털어놓았다.
그러나 진웅은 놀라기는커녕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얼굴이 아닌가?
"거기에 대한 일은 이미 황궁에서도 눈치채고 있었단다. 그래서 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나를 파견한 것이다."
"아, 그렇다면… 아버님께서 천자의 밀사(密使)?"
"그래. 그 때문에 황궁을 나섰다가 불마성과 불마공자에 관한 소문을 듣고 너를 찾아오게 된 거란다."
진유걸은 그의 말을 들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상대하는 데 무리가 없겠군요?"
"음, 그러나 태명회 절정고수들과 혈궁의 금백고수(金白高手)들은 나도 겨우 상대할 정도로 고강하다. 하나, 너라면 반드시 그들을 제압하리라 본다. 불마경의 무학은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니……."
"그런데 아버님, 천살성 사마기와 불마성에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진유걸의 물음에 불마천제 진웅은 지나간 고사(故事) 하나를 들려 주었다.
천살성 사마기.
그는 비록 대살성으로 알려졌지만 기실 정의롭고 용맹한 영웅(英雄)이었다.
당시 그는 천기를 통해 포달랍궁, 혈궁, 유아독녀궁 등 삼대궁이 중원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마기는 삼대궁의 최절정 고수들과 일전을 전개하였다.
포달랍궁의 파륵천존(破勒天尊),
혈궁의 혈혈대살제(血血大殺帝),
유아독녀궁의 색선모(色仙母).
이들 셋과 천살성 사마기의 접전은 경천동지할 만한 것이었다.
그 당시 삼대궁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패하게 된다면 천 년 동안 강호에 나오지 않겠노라 선포하였다.
그들은 오악 중 가장 험준한 항산(恒山)에서 칠 주야(晝夜)에 걸친 대혈전을 치렀다.
그 결과, 삼대궁의 인물들은 천살성 사마기의 금불마공에 의해 모두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삼대궁의 인물들은 복수를 다짐하며 일제히 봉문(封門)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것은 천여 년 전의 일이었다.
얘기를 듣고 난 진유걸은 한 가지 의문을 느꼈다.
"그렇다면 삼대궁이 봉문해 있는 동안 금불마공을 제압할 무공을 창안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금불마공이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글쎄……."
그러자 해동선녀가 끼여들며 힘있게 말했다.
"그러나 천살성이 불마성을 건립하여 놓은 점으로 미루어, 분명 그에 대한 대비를 갖추어 놓았을 거예요."
진유걸은 뜻밖이라는 듯 놀란 얼굴을 하였다.
"불마성을 건립하신 분이 천살성 사마기라고요?"
그러자 부친 불마천제 진웅이 말을 받았다.
"그렇단다. 그는 그 곳에 자신의 무공과 불마경의 무공을 함께 간직하여 전인(傳人)을 구하려……."
순간, 진유걸은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소리쳤다.
"그래, 맞아요! 불마경과 천살도법(天煞刀法)! 그는 분명 이것을 생각했을 겁니다."
진웅과 해동선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주시하였다.
"불마경에 수록된 금불마공을 천살도법에 이용하는 것입니다. 역시 천살성 사마기 그 분은 역시 기인이십니다. 저는 그 분의 깊은 심기(心機)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군요."
불마천제 진웅의 미간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진유걸은 신념에 찬 눈빛을 하며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가능합니다. 그보다 태성왕 주웅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의 물음에 불마천제 진웅이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태명회만 붕괴시키면 그는 흔들리게 될 거야. 그 후에는 황실에서 처리하겠지."
이들이 신중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밖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진 맹주, 마령신의가 뵙기를 청하오."
"맹주라니?"
불마천제와 해동선녀는 의아한 눈길로 진유걸을 응시하였다.
진유걸은 계면쩍은 얼굴을 하며 방문 쪽에 대고 외쳤다.
"사백님께서는 어서 들어오십시오."
진유걸는 남궁태협이 방문을 들어서자, 핀잔을 던졌다.
"사백님께서는 제자를 어찌 자꾸 맹주라 칭하십니까? 거두어 주십시오."
마령신의는 의미 있는 미소를 지었다.
"강호운룡 남 맹주가 그 권위를 맹주에게 넘겨 주었을 뿐 아니라, 그것은 또 정맹원 전 고수가 원하는 일이니… 굳이 피하지 마시게."
그제서야 불마천제 진웅과 해동선녀는 뭔가를 깨달은 듯 흡족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령신의는 그들의 호응에 힘입어 계속 말을 이었다.
"진 맹주도 알고 있겠지만, 나에게는 몇 명의 지기가 있네. 그 중 귀수도부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지."
일순 진유걸은 운몽루(雲夢樓)와 태성왕부로부터 쫓기고 있을 때 만났던 천 도부, 아니 귀수도부 모용비를 떠올렸다.
그는 십대기인들을 통해 천 도부가 귀수도부 모용비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그가 아니었더라면 수연과 나는 지금쯤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마령신의의 말이 다시 들려 왔다.
"귀수도부는 태명회의 정보를 빼내기 위해 지금 그 곳에 몸담고 있는 척하고 있다네. 그가 좀 전에 전서구(傳書鳩)를 통해 소식을 보내 왔는데… 태명회 회주를 비롯한 고수급 인물 오십여 명이 어디론가 잠적했다는 것일세."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유걸이 나서며 말했다.
"정맹원의 고수들을 의사청으로 모두 불러 주십시오."
마령신의가 웃음을 지으며 의미 있게 웃었다.
"이미 모여 있다네."
진유걸은 그 길로 마령신의를 따라 의사청으로 향했다.
그가 막 의사청 안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순간.
"맹주께서 듭십니다."
커다란 외침과 함께 중인들이 저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진유걸은 어쩔 수 없이 비어 있는 상석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들은 어서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지만 누구 한 사람 앉지를 않았다.
반야선승이 그의 우측에서 작게 귓속말로 말했다.
"맹주께서 어서 앉으셔야 우리들도 앉지요."
진유걸은 머리를 설레설레 내두르며 할 수 없다는 듯 상석에 앉고 말았다.
순간.
"정맹원주(正盟院主) 강호정랑(江湖情郞) 만세……!"
"무림평화(武林平和) 정맹원군(正盟院群) 만세……!"
웅후한 외침이 의사청 내를 진동하였다.
진유걸은 가슴이 뿌듯해짐을 느끼며 정맹원에서 해야 할 일들을 지시하였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실로 엄청난 지혜가 번뜩이고 있었다.
중인들은 진유걸의 이 출충한 계교(計巧)에 저마다 경탄성을 발하며 혀를 내둘렀다.
진유걸은 비표표국의 총표두였던 비영신성을 비롯하여 청년협사들인 신주사걸 등을 데리고 정맹원을 나섰다.
그들이 나선 뒤, 곧 영걸신개와 취풍개도 불마천제 부부를 안내하여 어디론가 총총히 사라져 갔다.
이들이 모두 떠난 그 이튿날.
햇살이 느릿느릿 대지 위에 깔리는 시각.
돌연, 정맹원을 찾아든 세 여인과 한 소동이 있었다.
여인들과 어린 소동은 몹시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이들 일행은 피곤한 발걸음을 끌며 정맹원의 웅장한 정문을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