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章 풀어진 오해(誤解)
1
혈육우(血肉雨).
핏물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리며 찢겨진 혈육 덩어리가 난무하였다.
장내는 마치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처럼 참혹하였다.
병기가 허공을 가르고 섬광을 번뜩일 때마다 생의 종지부를 찍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악!"
"아아아악……!"
피보라가 몰아치며 절단된 사지가 분분히 장중을 뒤덮었다.
회의검수들은 손속에 추호의 인정도 두지 않고 살수를 전개하였다.
그들의 검이 예리한 파공음을 내며 여지없이 대기를 가르는 순간.
쇄애애액- 촤르륵- ㅊ-!
피를 갈구하는 악마의 독아처럼 짓쳐 드는 검기(劍氣)!
천지는 면밀한 검막에 휘감기며 질식할 것 같은 공포에 잠겨 들었다.
돌연.
"철영보 제자들아! 명예로운 길을 택하라!"
철영보!
그렇다. 이 엄청난 살겁이 일어난 곳은 바로 철영보였던 것이다.
철악거수 철웅산은 연신 피를 철철 흘리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한 고수와 격전을 치르고 있었다.
그 고수는 언젠가 마령신의의 모옥에 나타났던 소두철검(小頭鐵劍) 고구(高求)였다.
고구는 철악거수를 상대로 연신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철웅산이 삼십 초를 넘기지 못할 성싶었다.
그 옆에는 총관 하북공자 팽왕수와 철지연이 일곱 명의 회의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막상막하의 실력으로 싸우고 있는 이들의 전면에는 우람한 체구의 금마혼천신이 팔짱을 낀 채 격전을 방관하고 있었다.
"으어억……!"
"하아악……!"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자 금마혼천신은 입가에 소름끼치는 웃음을 띄우며 언성을 높였다.
"이래도 그 놈의 종적을 대지 못하겠느냐?"
철웅산은 가까스로 소두철검 고구의 검을 피해 내며 악을 썼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네놈을 결코 용서치 않겠다."
금마혼천신의 이마에 붉은 힘줄이 툭툭 튀어나왔다.
"괘씸한 놈! 끝까지 모른다고 잡아뗄 생각이군. 어차피 철영보을 쓸어 버리기로 했으니… 오늘이 네놈 제삿날인 줄 알아라!"
금마혼천신은 말을 마친 뒤 지면을 박차고 팽왕수와 철지연이 싸우고 있는 격전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쉬익-!
금마혼천신은 몸을 날림과 동시에 우장을 가볍게 밀어냈다.
미약한 경력이 그의 장심을 통해 발출되었다.
슈우웅-!
팽왕수와 철지연은 갑자기 닥쳐 온, 온몸을 태울 듯한 열기에 대경실색하였다.
일곱 명의 회의검수들을 막아 내기도 힘든 와중에 어찌 금마혼천신의 장력까지 막아 낼 수 있단 말인가?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순간.
츠츠츠츠-!
괴이한 파공성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귀를 찢을 듯한 폭음이 터져 올랐다.
펑-!
이어 터져 나오는 인간의 처절한 절규(絶叫).
"으으윽……!"
"으아아악……!"
"아악!"
찰나지간 장내의 상황이 급전하였다.
팽왕수와 철지연에게 덮쳐들었던 칠 인의 회의검수가 핏물을 쏟아 내며 고꾸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육신은 갈가리 찢겨져 실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금마혼천신은 어느 새 이 장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는 얼마나 놀랐던지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고, 입에서는 실낱 같은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으, 믿을 수 없다. 대체 누가…….'
경악으로 물든 그의 두 눈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것은 팽왕수와 철지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도저히 살 가망이 없음을 알고 거의 체념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가 되었으니…….
금마혼천신을 비롯한 팽왕수, 철지연, 그리고 이미 격전을 멈춘 고구와 철웅산의 눈빛이 모두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동시에 그들의 입에서 경악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앗!"
"허억!"
언제 등장했는지, 그들의 앞에 한 인영이 유유히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천신(天神)처럼…….
나타난 사람은 바로 강호정랑 진유걸이었다.
그는 유아독녀궁에서 곧장 철영보로 달려온 것이다.
강소성의 항주와 복건성의 복주는 상당히 떨어진 거리였지만 진유걸은 단 이틀 만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 이틀 동안 식음을 전폐하였다.
하지만 그는 잠도 오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주수연과 성운.
이들을 만난다고 생각하자 다른 모든 것들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오직 그들과의 상봉(相逢)만을 고대하며 지칠 줄 모르고 달려온 그였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것은 싸늘한 혈풍과 무자비한 주검들뿐이었다.
더구나 목전은 위급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으니…….
진유걸은 순간적으로 몸을 날리며 일(一) 초(招) 반(半) 식(式)의 공세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단숨에 칠 인의 검수들을 살해하고, 금마혼천신의 장력을 파훼시킨 것이었다.
그가 등장하자 중인들의 가슴은 저마다 희비(喜悲)가 엇갈렸다.
"불마공자님!"
백화낭자 철지연은 어린 소녀처럼 그를 부르며 달려갔다.
"저 자가 불마공자라고?"
금마혼천신의 안면에 일말의 두려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진유걸의 등장에 팽왕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돼 갔다.
그의 눈길이 철지연을 따라 진유걸로 옮겨지며 무서운 질투심이 전신을 태워 버릴 듯 강렬하게 솟구쳐 올랐다.
걷잡을 수 없는 살심이 그의 오성(悟性)을 마비시키는 순간.
진유걸이 자신의 품으로 뛰어들려는 철지연을 외면하며 철웅산에게 말을 거는 게 아닌가?
"보주님! 전날에는 실례가 많았소이다. 당시에는 급한 일이 있어서……."
철지연은 진유걸이 자기를 본 척 만 척하자 흠칫 놀라며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진한 수치심이 솟아올랐다.
무시당한 철지연의 눈에서 차가운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진유걸은 여전히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철웅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보주님께 한 여인의 행방을 묻고자 하여 다시 왔소이다."
"어떤 여인이기에……?"
진유걸은 그가 사부인 강남태을자의 죽음과 관계가 있음을 기억해 내고는 저번과는 달리 차가운 안광을 뿜어 냈다.
"이 보에 시비로 있던 혜령이라는 여인이오. 그녀와 그의 아들!"
철영보주 철웅산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하녀를 왜 찾는 것이오?"
그가 수연을 시비로 취급하자, 진유걸은 몹시 분개했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시오!"
순간.
"무엄한 놈!"
하북공자 팽왕수가 분을 참지 못하고 검을 발출하였다.
쉬- 쉬익-!
검기가 빛살처럼 뻗쳐 가며 진유걸의 유문혈(幽門穴)과 상곡혈(商曲穴)을 찍어 왔다.
이 일 초는 팽왕수의 전력이 담긴 듯 매우 신랄하였다.
진유걸은 냉랭한 코방귀를 날리며 어깨를 움찔했다.
"흥!"
그와 동시, 갑자기 그가 연기처럼 사라지며 철웅산의 면전으로 덮쳐들었다.
철웅산은 이 뜻밖의 사태에 당혹감을 금치 못하며 급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진유걸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철웅산의 완맥을 낚아채 갔다.
그의 움직임이나 손속은 매우 유연하고 쾌속절륜했다.
"헉! 용호포박십이식(龍虎浦迫拾二式)!"
철악거수 철웅산은 혼비백산하여 외쳤으나, 이미 그는 진유걸의 수중에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어찌 귀하가 본보의 절초를 아는 것이오?"
철웅산이 기겁할 듯 놀라며 소리쳤다.
"나는 그보다 더한 것도 알고 있소. 지금은 단지 한 여인의 행방만을 알고 싶을 뿐이오."
그 말이 끝나자 철지연이 나서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녀는 죽었어요!"
일순, 진유걸은 쇠뭉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휘청거렸다.
"뭣이? 그녀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철웅산도 진유걸의 가슴에 일 장을 가했다.
펑-!
철웅산은 그 여세를 빌어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호통을 내질렀다.
"귀하는 본보를 도우러 온 것이오? 아니면 시비를 걸러 온 것이오?"
급습을 받은 진유걸은 울컥 선혈을 토해 내며 부르짖었다.
"누가… 그녀를 죽였소?"
그는 너무도 분노한지라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외쳤다.
철지연은 그의 행동에 잠시 의혹을 느꼈으나 그것도 잠시, 위기를 넘기기 위해 금마천혼신을 가리키며 외쳤다.
"혜령을 죽인 건 저들이에요!"
그러자 금마천혼신이 대경실색하며 극구 부인하였다.
"무슨 소리냐? 우리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
진유걸의 눈길이 철지연을 향했다.
"그게 정말이오?"
백화낭자 철지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 소리에 금마천혼신이 이를 우두둑 갈아붙였다.
"이… 이 죽일 년! 감히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를 쓰려 하다니……."
철지연 역시 지지 않고 맞섰다.
"당신 짓이 아니면 누가 그들 모자를 살해하겠어요?"
"우리가 이 곳을 습격한 지는 불과 한 시진밖에 되지 않았다. 그 동안 너는 자리도 뜨지 않고 여기에 계속 있었는데, 어떻게 그들 모자가 살해된 것을 알고 있느냐?"
그러나 철지연은 추호도 물러서지 않고 반격했다.
"그들은 어제 이미 피습을 당했어요. 당신네들이 동정을 살피러 왔다가 저지른 짓이 분명해요."
진유걸은 누구의 말이 옳은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 떠나지 않는 건, 주수연과 성운이 죽었다는 말이었다.
돌연.
"죽인다!"
진유걸은 무섭게 솟구치는 살심을 이기지 못하고 무섭게 폭갈을 내지르며 등에 걸린 천살도를 뽑아 들었다.
"가거라!"
그는 신형을 표표히 휘날리며 빛살 같은 기류를 폭사했다.
슈슈슈슈슈-!
강맹무비한 도류가 유성처럼 흐르며 부챗살처럼 뻗어 나갔다.
금마혼천신을 비롯한 고구, 태명회 고수들은 아연실색하며 몸을 피했다.
하지만 진유걸의 도법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행동이 늦은 네 명의 회의인들이 도광에 휩싸였다.
그들은 일순, 눈앞이 컴컴해졌다.
"으악!"
"아아아악……!"
"크윽!"
순간, 전신 요혈이 찢겨져 나가는 듯한 끔찍한 비명이 토해졌다.
회의인들은 썩은 짚단처럼 곤두박질치며 피를 뿜어 냈다.
잘려진 팔다리가 날리며 잔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하나, 그것으로 진유걸의 살심을 가라앉히기란 불가능하였다.
진유걸은 미간에 살괴가 모아지며 이미 피를 갈구하는 천살성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천살륜(天殺輪)- 천살폭(天殺暴)-!"
그의 입에서 다시 잔인무도한 초식이 튀어나왔다.
뒤이어 천살도는 지축을 가를 듯 엄청난 파공성을 일으켰다.
츠츠츠츠-!
천하를 양단할 듯한 도기는 폭풍처럼 장내를 쓸어 갔다.
천살도!
열혈(熱血)을 원하는 마도(魔刀)는 야수같이 쇄도해 들어갔다.
찰나.
"아아악……!"
"끄으윽……!"
폐부를 짓이기는 듯한 단말마의 비명이 허공에 울려 퍼지며 혈육 덩어리가 사방팔방으로 날리며 역겨운 피비린내를 풍겼다.
순식간에 수하들을 잃은 금마혼천신은 이빨을 부드득 갈아붙였다.
"불마공자! 끝끝내 본회의 일을 방해하는구나."
"후후후… 철영보 역시 마찬가지니 섭섭해 하지 말거라."
그러자 철웅산이 흠칫 놀라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우리는 서로 아는 처지가 아니오? 그런데 어째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진유걸은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차갑게 물었다.
"당신은 설마 강남태을자를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
일순 철웅산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
자신이 행한 일생일대(一生一大)의 과오, 그것은 바로 강남태을자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그 분과 귀하는 어떤 관계요?"
그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진유걸은 냉랭한 눈초리로 그를 응시하며 내뱉었다.
"그 분은 나의 사부님이시오."
일순, 철웅산의 안색이 일시에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광혈풍……!"
순간, 철지연이 일신을 부르르 떨었다.
광혈풍이라니?
불마공자 진유걸이 바로 그녀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광혈풍이었단 말인가?
'그래, 그 때문에 왠지 정이 갔던 거야. 하지만 그는 나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잖아?'
그녀가 염두를 굴릴 때 진유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또한 혜령의 남편인 진소랑(陳昭郞)이기도 하오."
순간, 철웅산과 철지연은 다시 경악하고 말았다.
"아아, 그… 그럴 수가……?"
철지연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진소랑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왜 예전에 손을 쓰지 않았죠?"
"처음 인피면구를 쓰고 진소랑(陳昭郞)으로 이 곳에 왔을 때는 무공을 잃은 상태였고, 불마공자로 왔을 때는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윽!"
갑작스런 비명 소리가 두 사람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순간, 두 사람의 시선으로 철웅산이 스스로 심장에 검을 꽂은 채 비틀거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 아버님."
위풍당당하던 철웅산의 모습은 이 순간, 더할 수 없이 허약해 보였다. 마치 몇십 년을 한꺼번에 늙어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철웅산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진유걸을 바라보며 힘없이 뇌까렸다.
"귀하와 맺은 원한을 이것으로 마무리지어 주시오."
진유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침통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혜령과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며칠 전 여기를 떠난 것이오."
순간, 진유걸은 안도의 숨을 깊이 내쉬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두 사람이 살아 있다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혹 모르시오?"
철웅산은 고개를 내저으며 힘겹게 말했다.
"미안하오… 불마공자. 한때의 웅심(雄心)이… 천추(千秋)의 한(恨)을 남길 줄… 미처 몰랐소."
진유걸은 죽어 가는 그의 모습에서 문득 무림인의 비참한 종말을 느꼈다.
피는 피를 부르는 수레바퀴처럼 윤회(輪廻)하는 무림의 생리(生理). 그것은 그에게 슬픔을 안겨 주었다.
진유걸은 천살도를 천천히 갈무리하며 등을 돌렸다.
철웅산의 음성이 끊어질 듯 희미하게 들려 왔다.
"팽 총관, 우리… 지연… 이를 부탁하네. 무림을 떠나 행복하게 살게. 그러면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 으윽!"
일순.
"아버님! 흐흐흑……!"
"보주님! 으흐흐흐흑……!"
팽왕수와 철지연은 철웅산의 식어 가는 육신을 붙잡고 몸부림쳤다.
그 때, 진유걸은 금마혼천신을 노려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금마혼천신! 내가 손쓰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모든 상황를 지켜보고 있던 금마혼천신과 소두철검 고구는 찔끔하였다.
"……."
"지금 여기서 손을 쓰지는 않겠다. 그러니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회주에게 훗날 강호정랑이 태명회를 방문한다고 전하거라!"
금마혼천신은 그의 안하무인 격인 태도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였다.
하지만 그는 역시 강호 경험이 풍부하고 약삭빠른 인물답게 행동했다.
"후후후… 쌍수를 들어 환영(歡迎)하마. 우리를 살려 주다니… 살성이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군."
진유걸의 입가에 처연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살성 광혈풍은 이제 없다. 이제는 강호정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금마혼천신은 서둘러 수하들을 이끌고 물러갔다.
휘이잉-!
제법 싸늘한 바람이 진유걸의 옷자락을 스치며 날렸다.
진유걸과 팽왕수의 애절한 통곡 소리가 바람에 실려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
진유걸은 그들의 흐느낌을 뒤로 한 채 천천히 철영보를 벗어났다.
2
진유걸이 복건성과 강서성의 경계지역에 막 도달할 즈음.
돌연, 여인의 앙칼진 외침이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불마공자, 잠깐만 멈추세요!"
진유걸이 걸음을 멈추는 순간, 일진의 소성과 함께 일남이녀가 그의 앞으로 날아 내렸다.
그들을 발견한 진유걸은 일순, 섬뜩한 심정이 되었다.
"상아……."
일남이녀는 바로 취풍개와 남궁상아, 독고영이었던 것이다.
진유걸은 비록 기억을 잃은 상태이긴 했지만 그들에게 부상을 입히지 않았던가?
더구나 성령용골신단을 복용하는 바람에 남궁인을 죽게 만들었다.
그뿐인가? 독고영의 순결을 빼앗고 독고휘의 눈을 이식받지 않았는가?
진유걸이 그들을 보는 순간, 죄책감을 갖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남궁상아는 그를 찬바람이 돌 정도로 차갑게 바라보며 외쳤다.
"전에는 우리들을 본 척도 안 하더니 오늘은 웬일로 알아보네요?"
진유걸은 그들이 마령신의를 만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당시는……."
진유걸이 황급히 변명을 하려 하자, 남궁상아가 그의 말을 자르며 소리를 질렀다.
"변명하지 말아요. 유아독녀궁의 그 계집이 그렇게도 좋던가요? 우리들은 모두 생명을 바쳐 가며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해 주었건만……."
"그게 아니오."
"듣기 싫어요!"
남궁상아는 그에게 너무도 쌓인 한이 많았는지 말이 끝나는 순간 분노의 일 장을 격출했다.
슈우웅-!
강맹한 경력이 노도처럼 진유걸의 가슴으로 휘몰아쳤다.
하지만 진유걸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화가 풀릴 수만 있다면 죽을 때까지 맞아도 좋았다.
펑-!
둔탁한 음향과 함께 진유걸은 주르르 뒤로 밀려 나가며 피를 한 움큼 토했다.
"우욱!"
진유걸이 반격도 하지 않고 일격을 얻어맞자, 남궁상아가 의외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끝까지 우리들을 기만할 작정인가요? 왜 가만히 있죠? 그렇다고 내가 인정을 베풀 거라고는 생각지 말아요."
그녀는 쌀쌀하게 외치며 또다시 쌍장을 뻗어 냈다.
남궁상아의 잠력은 여지없이 진유걸의 가슴을 강타했다.
퍼펑-!
이번에는 진유걸의 신형이 허공으로 붕 떠올라 반 장 뒤로 나뒹굴었다.
핏덩어리와 함께 짤막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윽!"
그러나 그는 피를 흘리면서도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남궁상아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며 눈썹이 상큼 치켜져 올라갔다.
"나쁜 사람 같으니… 왜 피하지 않는 거죠? 왜 반격하지 않는냐 말이에요? 어서 출수해요. 저번처럼 말이에요!"
그녀는 몹시 분개한 듯 다시 신형을 날렸다.
남궁상아는 진유걸의 앞으로 내려서며 그의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짜악-!
"허억!"
진유걸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순간.
"그만해 둬! 그러다가 정말 진 공자님이 죽겠어."
잠자코 있던 독고휘의 누이동생 도화마검 독고영이 황급히 외치며 달려왔다.
그녀는 눈물 어린 눈동자로 진유걸을 응시하며 얼른 그의 상체를 일으켰다.
남궁상아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고함을 버럭 내질렀다.
"영 언니는 억울하지도 않아! 오기도 없고 배알도 없어! 어째서 그를 감싸는 거야? 어째서?"
독고영은 진유걸을 부축하며 쓸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은 이제 그만해. 나는 네가 진 공자님을 누구보다 더 아낀다는 것을 알아. 그래서 더 화가 나서 그런다는 것고 알고 있어. 그러니 이제 그만해. 그러면 그럴수록 네 마음만 더 아플 뿐이야."
그러자 남궁상아가 더욱 펄쩍펄쩍 뛰며 절규를 토하듯이 외쳤다.
"아니야! 언니가 뭘 알아?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하고 증오해!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그를 경멸한단 말야!"
독고영은 서글픈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그렇다면 어째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니? 전력을 다했다면 진 공자님은 죽었을 거야. 하지만 너는 그렇지 못했어. 아니 그럴 수가 없었지. 왜냐하면… 그를… 사랑하니까."
순간, 남궁상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윽… 흑흑… 바보같이… 왜 피하지를 않는 거야? 흐윽… 왜? 흑흑… 왜……?"
그녀의 이 뜻밖의 행동은 진유걸에게 당혹감을 안겨 주었다.
'상아가 나를……!'
독고영은 피를 흘리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는 진유걸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보셨죠? 상아는 원래부터 진 공자님을 마음 속 깊이 사모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말을 잇다 말고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참, 소녀를 기억하나요? 유아독녀궁 원주로 있을 때 아진이란 이름으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죠? 하지만 저의 진짜 이름은 도화마검 독고영이에요. 독고휘의 동생이죠. 오빠에게서 진 공자님에 관한 말은 많이 들었어요. 무척 많이요."
진유걸은 이미 마령신의에게 모든 걸 들었는지라, 그녀에 대한 연민의 정이 불끈 치솟아 오름을 느꼈다.
진유걸은 슬며시 손을 뻗어 그녀의 섬섬옥수를 거머쥐었다.
"알고 있소. 나를 위해 그대가 베풀었던 희생을 어찌 모를 리가 있겠소?"
독고영의 영롱한 눈동자에 금세 눈물방울이 맺혔다.
"오빠는 진 공자님에 관해 너무도 많은 얘기를 해 주었어요."
진유걸의 눈가도 물기로 축축이 젖어 갔다.
"나도 휘에게서 영 누이의 말은 수없이 들었소. 휘는 항상 영 누이를 찾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곤 했소."
이 때 돌연, 컬컬한 음성이 장내의 분위기를 깨고 들려 왔다.
"어? 취풍개가 있는 곳에 눈물이 있다니… 믿을 수가 없군."
의외의 음성에 놀란 취풍개와 일행들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나귀를 끌고 있는 괴인.
그는 맨발에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고, 머리는 봉두난발이었다. 거기다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불진(佛塵)을 쥐고 있었다.
괴인이 끄는 삐쩍 마른 당나귀 등에는 검은색 궤짝이 하나 실려 있었다.
검은 옻칠을 하여 윤이 반지르하게 흐르는 궤짝은 엄청나게 커서 사람이 들어가고도 남을 것 같았다.
취풍개는 그 괴인을 발견하자, 반가운 듯 포권을 취했다.
"표(瓢) 기인(奇人)께서 어떻게 중원까지 오셨는지요?"
표 기인이라 불린 괴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소화자야! 어째서 이 모양들을 하고 있단 말이냐? 하나는 울고, 다른 한 쌍은 서로 속삭이고, 또 네놈은 멍청하게 서 있으니참으로 해괴한 일이로고."
취풍개는 누런 이빨을 싱긋 드러내며 일행들에게 표 기인을 소개해 주었다.
"이분은 십대기인 중의 한 분이신 무당도장이시오. 모두 인사드리시오."
무당마인(武當魔人) 표한우(瓢漢宇).
당금 무당 장문인 태령자(太靈子)의 사숙으로 알려진 그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항상 계율에 얽매이기를 싫어했고 언제나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였다.
그 때문에 마인이란 명칭으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무당마인은 주로 무당산 심풍곡(心風谷)에서만 생활하는 인물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이 곳에 등장한 것이다.
진유걸은 독고영의 부축을 받으며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무림말학 진유걸이 노선배님을 뵙습니다."
찰나.
쾅-!
무지막지한 음향과 당나귀 등에 있던 궤짝 뚜껑이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게 아닌가?
그와 동시에 커다란 폭갈이 고막을 터뜨릴 듯 튀어나왔다.
"뭐야? 진유걸이라고?"
이 이외의 상황에 일행들이 놀라 기겁하는 순간.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장발괴인이 궤짝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순간.
"앗! 서혈천왕 노선배님!"
진유걸은 혼비백산하며 땅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서혈천왕(西血天王) 혈영광군(血影狂君).
그는 가짜 독고휘에게 암수를 당해 망당수로 떨어진 진유걸을 살려 주고, 그 대가로 세 가지 조건을 요구하지 않았던가?
중인들은 진유걸의 돌연한 행동에 모두 의아하여 서로를 쳐다보았다.
"네놈이 설마 본 천왕의 명을 어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괘씸한 놈!"
상자 속에 앉아 있던 장발괴인이 분노가 극에 달한 듯 일신을 부들부들 떨며 시퍼런 살광을 뿜어 냈다.
"사나이로 태어나 철석 같은 약속도 제대로 이행치 못했으니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다만 저의 몸에 얽힌 은원이 많으니 잠시 말미를 주십시오."
장발괴인은 서릿발 같은 냉소를 터뜨리며 음산한 목소리를 꺼냈다.
"듣기 싫다. 본 천왕은 자나깨나 네놈을 믿고 있었건만, 네놈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무당마인의 도움을 받아 이렇게 몸소 무림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내 당장 네놈을 요절내 골수에 맺힌 한을 풀리라!"
그가 쌍장을 들어올려 진유걸에게 손을 쓰려는 순간.
휙- 휘익-!
미미한 소성이 일며 왜소한 두 인영이 진유걸과 장발괴인 사이를 막아 섰다.
남궁상아와 독고영이었다.
장발괴인은 그녀들이 나서자, 불만스런 말투로 물었다.
"어쩌려는 것이냐?"
남궁상아는 장발괴인이 행여 진유걸에게 손을 쓸까 초조해 하며 얼른 입을 열었다.
"진 오빠가 어떤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길래 죽이기까지 한단 말이에요?"
"너희들은 알 필요가 없다. 그러니 냉큼 물러서라!"
그러자 독고영이 나서며 조리 있게 말했다.
"노선배님, 너무 일방적이십니다. 약속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진 공자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 분명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노선배님, 진 공자님의 말을 일단 들어 보고 난 뒤에 손을 써도 늦지 않으니…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그녀의 말에 힘을 얻은 남궁상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요.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진 오빠에게도 변명할 기회를 주세요."
장내를 지켜보던 취풍개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조금 전만 해도 진 공자를 무조건 죽이려고 하고선… 허허… 정녕 여자들의 마음이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장발괴인이 무당마인을 돌아보며 외쳤다.
"말코도사야! 이 계집들은 대체 누구냐?"
무당마인 표한우는 재빨리 허리를 굽히며 정중하게 말했다.
"그것은 저도 모릅니다."
일향 취풍개와 남궁상아, 독고영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상대는 십대기인 중의 한 명이 아닌가?
그러한 인물이 장발괴인에게 쩔쩔매다니…….
의혹을 금치 못한 남궁상아가 불쑥 물었다.
"노선배님의 존성대명은 어찌 되시는지요?"
"노부는 서혈천왕 혈영광군이라 한다!"
일순 취풍개와 독고영은 경악성을 내질렀다.
"아앗! 서혈천왕 혈영광군……!"
"사대천왕……!"
그러나 남궁상아는 그를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따라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소녀의 방명은 남궁상아라 하옵고, 외호는 야생여걸이라 합니다. 저희 조부께서는 마령신의라는 별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이 당돌하고도 깜찍한 태도에 서혈천왕 마우성은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오, 그래? 네가 마령신의 손녀라고? 노부는 지금 그를 찾아가던 중이었는데……."
그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춘 뒤, 진유걸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저 녀석과는 어떤 관계냐?"
남궁상아는 그를 힐끔 응시하며 말을 더듬었다.
"소녀가 그를… 좋… 좋아하나… 봐요."
그녀의 이 노골적인 애정 표현에 중인들은 한결같이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방심을 이토록 쉽게 내비치다니…….
그러나 오랜 기간을 철목산에서 생활했던 남궁상아로서는 지극히 당연하고 순수한 표현이었다.
그러자 무당마인이 씁쓰레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저 놈이 용모가 걸출하고 기상이 웅후하여 내 제자와 성혼시키려 했더니… 틀렸구먼."
그 소리에 발끈한 남궁상아가 무당마인을 째려보았다.
그 때, 취풍개가 나서며 물었다.
"아니, 마인께서 언제 여제자를 두셨단 말씀입니까?"
무당마인은 자신의 제자를 떠올리는 듯, 몇 가닥 남지 않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네놈의 눈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절색이지. 이제껏 그녀의 명성도 들어 보지 못했단 말이냐?"
"후배는 금시초문입니다."
"그럴 테지. 그 애가 출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하북월색(河北月色) 강보연(姜寶蓮)이 바로 내 제자일세."
순간, 진유걸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강보연……!'
강태위의 장원에서 그녀가 자신을 간호해 주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 우아하고 순결하던 강보연이 무공을 익히다니?
그가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서혈천왕 마우성의 고함 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이 놈아! 무얼 꾸물거리느냐? 어서 냉큼 변명을 늘어놓지 않고! 이건 모두 상아가 귀엽기 때문에 특별히 배려하는 게야!"
진유걸은 서혈천왕의 목소리에서 끈끈한 정을 느꼈다.
그는 그 동안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차분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얘기가 끝났을 때, 남궁상아와 독고영의 눈에서는 어느 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유걸에게 그러한 일들이 있었을 줄이야?
그녀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