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章 강호정랑(江湖情郞)
휘익- 휙-!
빛살처럼 허공을 가르며 담장을 넘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지면을 박찬 뒤 웅장하게 솟아 있는 건물 위로 날아 내렸다.
달빛에 드러난 인물들은 평범해 보이는 노승과 어딘지 모르게 병색이 짙은 청년이었다.
온갖 풍상을 겪은 듯 얼굴이 온통 주름살 투성이인 노승.
그는 바로 진유걸의 생명을 두 번씩이나 구해 준 적이 있는 망정암(忘情庵)의 주지스님이 아닌가?
보원암(報元庵)을 찾아가는 진유걸을 종을 쳐 살려 주고, 또 진유걸을 살인마로 오해한 광혼객(狂魂客) 악령산(惡靈山)에게 엉뚱한 방향을 가르쳐 준 인물.
노승은 바로 십대기인 중의 한 명인 반야선승(般若禪僧)이었던 것이다.
미리 천기를 보고 살괴만이 혈겁을 방지할 수 있다고 예언한 남궁인의 사부.
또한 진유걸에게 쾌검법을 일러 준 검존(劍尊) 사도천랑(司徒天娘)과 정한이 얽혀 있는 소림파의 고승이기도 한 반야선승.
그의 옆에 서 있는 핼쓱한 얼굴의 청년.
그는 다름 아닌 옥수준재 남궁인이었다.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의 생명이 걸린 성령용골신단을 과감하게 포기했던 호남아!
또한 남궁태협의 손자이며 야생여걸 남궁상아의 오빠이기도 한 남궁인.
한데 이들 사도(師徒)가 어찌하여 이 야밤에 함께 나타났단 말인가?
"사부님!"
남궁인이 침묵을 깨며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생각에는 변함이 없느냐?"
반야선승의 음성에는 제자를 걱정하는 빛이 넘쳐흘렀다.
남궁인은 약간 쓸쓸한 기색을 띄우며 말을 이었다.
"사부님께서는 늘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라고……."
반야선승은 노안에 축축한 물기를 담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장하구나, 인아. 이제까지 이 스승이 해 온 일 중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너를 제자로 둔 것이었다."
"그렇다면… 실패한 일도 있었다는 말씀이시군요?"
기승(奇僧) 반야선승의 주름진 눈가로 물기 어린 희미한 미소가 번져 갔다.
"물론이지. 어찌 이 사부라고 해서 실수한 적이 없었겠느냐? 그것은… 노납 생애 가장 큰 마음의 상처를 남긴 일이었다."
"그것이 어떤 일이었습니까?"
반야선승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공허한 웃음을 날렸다.
"네가 독고영을 생각하는 것과 유사한 일이었다. 네가 노납의 전철을 밟는 것 같아 마음이 무척 괴롭구나."
일순 남궁인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가슴이 심하게 두방망이질쳤다.
설마 사부가 독고영에 관한 자신의 심정까지 간파하고 있을 줄이야?
그가 어쩔 줄을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을 때였다.
"웬 놈들이냐?"
찢어지는 듯한 고함 소리와 함께 몇 줄기 인영이 번뜩였다.
"사부님, 어서……."
남궁인이 다급하게 소리치자, 반야선승은 재빨리 몸을 날렸다.
"인아, 부탁한다. 결코 너의 뜻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신형은 너무도 쾌속절묘하여 육안으로 구별하기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남궁인은 반야선승이 사라지자, 자신의 주위로 몰려드는 인물들을 예리하게 훑어봤다.
그들은 모두 경장 차림에 병기를 휴대한 여인들이었다.
그 중 한 여인이 나서며 앙칼진 외침을 터뜨렸다.
"감히 본 유아독녀궁에 단신으로 뛰어들다니… 간덩이가 부은 놈이구나."
남궁인은 그녀들이 반야선승을 보지 못했음을 알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는 귀염마녀를 찾아온 손님이거늘… 어찌 이리 박대가 심하단 말이냐?"
그는 자못 큰 소리를 치며 여인들을 냉랭히 훑어보았다.
그의 싸늘한 눈초리에 여인들이 흠칫 놀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궁주님을 찾아온 손님이라면 정문으로 들어올 것이지, 왜 몰래 담장을 타고 들어온단 말이오? 당신은 대체 누구기에 본궁을 이다지도 우습게 본단 말이오?"
남궁인이 여인들을 쭉 둘러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불마공자라 하오!"
순간.
"헉! 당신이 바로……."
"흐흡! 불… 마… 성… 주……!"
유아독녀궁의 여인들은 아연실색하며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당금 강호에서 그의 명호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삼궁일회(三宮一會)의 절정고수 십이 인을 가볍게 상대했을 뿐 아니라, 장백사마와 적면노괴 등의 굵직한 인물들을 모두 격살하지 않았는가?
"내가 손을 쓰게 된다면 필경 큰 살계를 범하게 될 것이다."
옥수준재 남궁인은 으름장을 놓으며 공력을 끌어올렸다.
순간.
"호호호호… 살계? 네녀석은 배짱 한 번 두둑하구나."
간드러진 웃음소리와 함께 지붕 위로 표표히 떨어지는 인영.
남궁인은 그녀를 목격하고는 가슴이 섬칫해졌다.
"살시나찰……."
살시나찰이 등장하자 다른 여인들이 재빨리 허리를 굽혔다.
"제자들이 호법을 뵈옵니다."
살시나찰은 요염하게 둔부를 흔들며 욕설을 퍼부었다.
"미련한 것들! 어찌 불마공자와 옥수준재도 분간하지 못한단 말이냐? 죽일 년들 같으니!"
그녀의 호통에 여인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살시나찰은 오만한 눈초리로 남궁인을 바라보았다.
"남궁 공자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빈녀와 달콤한 운우지락(雲雨之樂)이라도 나누시려고 왕림하셨나요?"
그녀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남궁인은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생글생글 눈웃음을 치며 교태까지 부리지 않는가?
남궁인은 그녀의 노골적인 유혹에 코방귀를 뀌었다.
"흥! 수치도 모르는 계집. 아무 곳에서나 발정(發情)을 하는 것은 짐승뿐이야."
살시나찰이 분노로 인해 이빨을 갈아붙이며 경련을 일으켰다.
"으으,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
살시나찰은 부아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올라 훌쩍 몸을 날렸다.
그녀는 허공에서 빙글 원을 한 번 그린 뒤 남궁인을 향해 흉폭하게 짓쳐 들었다.
쉐애액-!
남궁인은 미리부터 경계하고 있던 참이라 민첩하게 검을 뽑아 들며 우측으로 몸을 빼냈다.
동시에 그는 우측에 서 있던 유아독녀궁의 두 여인을 노리고 예리한 검기를 격출하였다.
남궁인의 이 한 초는 실로 섬전처럼 쾌속했다.
찰나.
"아악!"
"허억!"
그녀들은 여지없이 검기에 휘말리며 끔찍스런 단말마를 토했다.
시뻘건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두 구의 혈육 덩어리는 지면으로 곤두박질쳤다.
후원의 가산 앞.
반야선승 역시 신출귀몰 신형을 날리며 두 경장여인을 상대하고 있었다.
"가거라!"
반야선승은 절묘한 신법을 구사하며 장력을 뿌렸다.
슈우우웅-!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더불어 흉흉한 경력이 사납게 몰아쳐 갔다.
유아독녀궁의 여인들은 대경실색하여 급급히 물러섰다.
하지만 그녀들이 어찌 반야선승의 장풍을 피할 수 있겠는가?
퍼펑-!
강맹한 폭발음이 치솟으며 단말마의 비명이 밤하늘을 찢었다.
"으악!"
"아아아악……!"
구천지하로 떨어지는 귀곡성과 함께 삼 장 밖으로 날아간 그녀들의 칠공에서는 시커먼 핏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반야선승은 단 일 장에 적을 황천으로 보내고 가산에 뚫려 있는 석굴을 응시하였다.
그 곳은 마치 악마의 아가리처럼 벌어진 동굴 입구였다.
석굴의 바로 곁에는 만근석패(萬斤石牌)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명부동(冥府洞)>
반야선승은 어둠에 싸여 있는 그 석굴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곳에 수많은 협인들이 갇혀 있을 것이다."
그는 발걸음을 서서히 옮기며 내심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데, 어째서 경비가 이토록 허술하단 말인가?'
반야선승은 주위를 살피며 명부동으로 깊이 들어갔다.
동굴 내부에는 곳곳에 화섭자가 걸려 있어 주위를 밝혀 주고 있었다.
반야선승은 안으로 들어서도 저지하는 여인들이 한 명도 없자 점점 더 의혹이 커져 갔다.
얼마를 갔을까? 반야선승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럴 수가?"
그의 전면, 도저히 뚫을 수 없는 석문이 가로막고 있는 게 아닌가?
작은 열쇠 구멍만을 남긴 채 닫혀 있는 거대한 석문(石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본 반야선승은 온몸의 힘이 쭉 빠짐을 느꼈다.
"이것은 금속보다 더 단단하다는 만년석강(萬年石剛)이 아닌가? 이렇게 되면 인아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안 돼! 그렇게 될 수는 없어!"
그는 뒤로 주춤 물러서며 혼신의 공력을 모두 쌍장에 운집시켰다.
그가 입고 있던 장삼이 팽팽하게 부풀어올랐다.
찰나.
"반야선강(般若禪 )-!"
석굴이 진동할 듯한 폭갈과 동시에 두 줄기 장력이 쇄도해 갔다. 실로 어마어마한 강기의 발출이었다.
우르릉- 콰콰쾅-!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돌덩이가 휘날리며 뿌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마치 석굴이 무너져 내릴 듯한 기세였다.
하지만 석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반야선승은 암울한 눈길을 던지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 역시 안 되는구나. 천상 귀염마녀의 침실로 숨어 들어 이 곳의 열쇠를 빼내 와야만 되겠군."
그는 재빨리 등을 돌려 명부동을 나섰다.
그 순간.
"에잇!"
여인의 기합성과 함께 한 줄기 검기가 무섭게 뻗어 오며 반야선승의 몸을 휘감았다.
슈르르륵-!
반야선승은 아연실색하며 금리도천파(金鯉倒川波)의 신법을 재빨리 전개하였다.
동시에 그는 우수를 갈고리처럼 구부리며 암습을 가해 온 여인을 찍어 갔다.
그의 이 공수전환은 상당히 교묘하고 신랄하였다.
"아니?"
순간, 상대 여인이 자지러질 듯 놀라며 민첩하게 몸을 뒤집었다.
하지만 반야선승의 절륜한 손속을 간단히 피할 수는 없었다.
찌이익-!
공교롭게도 여인이 걸치고 있던 치마가 찢겨져 나갔다.
반야선승은 기회를 놓칠세라 거듭 공세를 취해 갔다.
"탄지신통(彈指神通)-!"
핑- 핑-!
반야선승은 다시 소림파의 절초를 민첩하게 퉁겨 냈다.
챙강-!
순간, 두 자루 검이 부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검을 본 반야선승은 움찔 놀란 얼굴을 했다.
"상로쌍검(霜露雙劍)!"
그것은 무림맹주(武林盟主)였던 강호운룡(江湖雲龍) 남화룡(南華龍)의 병기가 아닌가?
진유걸이 유아독녀궁에 탈취당한 그 보검이었다.
반야선승은 목전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이상하게도 찢겨진 치마 조각에 미련이 남은 듯 조금 슬픈 눈빛을 한 채 서 있었다.
몸매가 뛰어난 여인이었으나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반야선승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다시 고함을 내지르며 쌍장을 쭉 밀어냈다.
"가거라!"
"잠시 멈추시오!"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한 가닥 암경이 밀려와 반야선승의 장력을 파훼시키는 것이 아닌가?
천하에 이토록 괴이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반야선승은 이 믿지 못할 사실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만큼 반야선승의 장풍은 그 위력이 엄청났던 것이다.
반야선승은 기겁할 듯이 놀라며 장력을 파훼한 인물을 찾았다.
순간.
"아니, 불마공자!"
광혈풍 진유걸, 그가 장내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반야선승은 그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마령신의와 남궁인을 통해 모두 들었던 것이다.
그가 구해 준 사람이 진유걸이었으며, 얼마 전에 나타나 강호를 떠들썩하게 했던 불마공자라는 것을…….
반야선승을 발견한 진유걸 역시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앗! 당신은… 망정암의 노스님!"
"허허… 나를 알아보는구먼. 그렇다네. 망정암의 주지 노릇을 했던 반야선승이라네."
"예? 그럼 스님이 바로 십대기인 중의 한 명이신 그 반야선승이란 말씀이십니까?"
아,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진유걸이 그를 알아보다니?
그는 기억을 잃은 상태가 아닌가?
그렇다! 그는 생사현관이 타통되는 순간, 그 충격으로 기억을 모두 회복하게 된 것이다.
잃어버린 이제까지의 모든 기억을…….
반야선승은 그가 자신을 알아보는 듯하자, 그 동안의 의문스런 일들을 물어 보았다.
"그런데 자네는 어찌하여 유아독녀궁의 편에 서서 우리 아이들을 다치게 했단 말인가?"
일순, 진유걸의 뇌리로 남궁인 일행들을 공격하고 전여정을 살려 주었던 일들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사실은 그 동안 후배가 기억을 잃어버려……."
진유걸은 그 동안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대강 설명해 주었다.
그제서야 반야선승은 사건의 전말을 대충 짐작하게 되었다.
"자, 나머지는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먼저 자네가 왜 유아독녀궁의 제자인 저 여인을 돕는지부터 설명해 보게."
그의 말에 진유걸은 한 곳을 가리켰다.
반야선승은 의혹을 떠올리며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던졌다.
찢겨진 여인의 치마 조각!
놀랍게도 거기에는 웅휘한 필체로 한 구절의 시구가 적혀 있었다.
我來竟何事 高臥沙丘城
城邊有古樹 日夕運秋聲
魯酒不可醉 齊歌空復情
思君若汶水 浩蕩寄南征
나는 왜 여기 왔던가? 공연히 사구성(沙丘城)에 누워 지내네.
성 가의 고목(古木)에선 낮과 밤으로 들려 오는 가을 소리… 아, 가을 소리!
노주(魯酒)로야 어디 취하기나 하는가? 제가(齊歌)는 허전하기만… 허전하기만 하네.
그대를 그리는 정(情), 문수(汶水) 같거니… 남쪽으로 가는 물에 이 글 부치네.
이것은 바로 진유걸이 항주기루(杭州妓樓)의 절세가녀 금화란(琴花蘭)에게 적어 준 시가 아닌가?
소년신투 지원영(池袁詠)과 함께 항주기루를 벗어나기 전, 그녀의 치마폭에 직접 썼던 진유걸이 어찌 그것을 못 알아보겠는가?
금화란은 그 동안 몇 차례나 계속된 다락원의 제의를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유아독녀궁의 무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순 반야선승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진유걸은 면사를 쓴 여인의 이름을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금화란……."
그러자 면사여인의 어깨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면사로 가려져 표정을 볼 수 없었으나 매우 격동한 모습이었다.
"공자님……."
금화란은 더 이상 자신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의 품으로 와락 뛰어들었다.
진유걸이 얼떨결에 그녀를 부둥켜안을 때, 모기 소리만한 반야선승의 전음이 진유걸의 귓속으로 들어왔다.
"어찌 된 연유인지 모르나 노납은 제자에게 다녀오겠네."
반야선승은 언제 빠져 나갔는지 그의 전음 소리는 이미 멀리서 들려 오고 있었다.
진유걸은 자신의 품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금화란을 꼭 끌어안았다.
"공자님, 너무하셨어요. 어쩌면 그렇게 소녀을 깜쪽같이 속이실 수가 있죠? 정말 너무하셨어요."
진유걸은 눈물로 젖은 그녀의 면사를 벗기며 용서를 빌었다.
"당시는 어쩔 수가 없었소. 이해해 주시오, 낭자!"
드러나는 금화란의 절색미모(絶色美貌).
진유걸은 가벼운 흥분을 느끼며 그녀의 허리를 바싹 끌어안았다.
"원영에게 듣고서야 모든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들 남매는 잘 지내고 있소?"
금화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공자님이 보내 준 패물로 원영과 그 누이는 기루에서 풀려 나 행복하게 살고 있답니다."
진유걸은 철영보에서 생활할 때 은밀히 사람을 시켜 원영에게 패물을 보내 주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아이에게 약간의 무공을 적은 책자도 보내 주었다. 소년신투 지원영의 재질을 살려 주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진유걸은 문득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꼈다.
'수연… 내가 당신을 못 알아보았다니… 더구나 우리들의 아이 성운까지… 아……!'
그는 주수연을 떠올리자 마음이 몹시 다급해졌다.
그리고 남궁상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마구 손을 썼던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모두 나를 얼마나 원망하고 있을까? 아아, 내가 기억을 잃은 사이… 모두에게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금화란은 갑자기 그의 안색이 변하자 걱정스런 얼굴이 되었다.
"공자님, 어디 불편하신가요?"
"아니오. 다만 주위 사람들이 걱정돼서……."
이 때 일진의 소성과 함께 반야선승이 두 사람 앞으로 날아 내렸다.
그의 품에는 피투성이가 된 남궁인이 안겨 있었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반야선승은 침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일세. 노납이 당도하였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더군."
"이 사람이 바로 스님의 제자분이신 모양이군요?"
남궁인은 진유걸을 알지만, 진유걸은 기억을 잃었을 때 그를 보았는지라 그가 남궁인임을 알지 못했다.
"그렇다네. 이 애가 바로 옥수준재 남궁인이라네."
"예? 남궁인이라면 사백님이 몹시 아끼시던 손자인데… 이 사람이 노선배님의 제자라니… 세상 참 좁군요. 그런데 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진유걸은 남궁인이 성령용골신단을 양보해 주었기에 자신이 살아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반야선승은 진유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슬픈 기색을 지었다.
"자네가 어떻게 공력이 회복되고, 또 예전처럼 광명을 되찾았는지 아는가?"
"후배는 거기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다른 것은 모두 기억이 나는데……."
그것은 진유걸이 기억을 되찾는 순간, 가장 궁금하게 여기던 점이기도 했다.
반야선승은 그를 똑바로 주시하며 알고 있는 사실만 얘기해 주었다.
"자세한 것은 노납도 모르네. 마령신의가 모든 것을 알고 있지. 하지만 단 한 가지! 여기 있는 남궁인이 자네를 위해 성령용골신단을 포기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네!"
순간, 진유걸은 엄청난 충격으로 몸을 휘청거렸다.
"옛? 옥수준재가… 나를 위해……."
진유걸은 온 전신의 피가 거꾸로 치솟아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는 마치 중병에 걸린 사람 마냥 전신을 떨어 댔다.
"인이는 그 영단을 복용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영단을 자네에게 양보했네. 자네가 행방을 감추고… 죽을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자, 인이는 이왕 죽을 몸이라면 유아독녀궁에 감금돼 있는 영웅호걸(英雄豪傑)들을 구하고 싶다고 했네. 그래서 오늘 이 곳을 습격하게 된 것이네. 하지만… 살시나찰에 의해 그만 이렇게 되고 말았다네."
진유걸은 무서운 분노에 휘감기며 살음을 뱉어 냈다.
"살시나찰… 보원암의 여승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악녀(惡女)! 결코 그냥 두지 않겠다."
"늦었네. 살시나찰은 멀리 도망가고 말았다네. 한데 이상한 것은귀염마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일세."
"그녀는 이미 산 송장이 되었습니다."
"산 송장이라니?"
반야선승이 되묻는 순간.
"그것은 노부가 설명해 드리겠소."
낭랑한 음성과 더불어 두 인영이 표표히 장내로 날아 내렸다.
진유걸은 그들을 발견하자 몹시 반가워했다.
"사백님! 개방방주!"
등장한 두 인물은 남궁태협과 영걸신개였던 것이다.
남궁태협은 나타나마자마 진유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유걸! 아이들의 얘기를 듣고 대강 짐작했었네. 이제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구먼."
"사백님, 면목이 없습니다. 저 때문에 사백님의 손자인 남궁 공자가 죽게 되었습니다."
진유걸은 입술을 악물며 눈물을 글썽였다.
남궁태협 역시 피투성이가 된 남궁인을 보며 눈물이 나왔지만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그것은 모두 인이가 자처한 일이었네. 그리고 자네는 그 애의 뜻을 이루어 준 셈이야."
"저는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불마경의 기학을 모두 연성하고, 이제는 귀염마녀의 공력까지 얻었으니 말일세."
진유걸은 그 말에 고개를 떨구며 놀란 빛을 띠었다.
'과연 사백님은 천하의 명의시구나. 몇 가지 사실만으로 모든 것을 간파해 내시다니…….'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반야선승과 영걸신개는 내심 탄복을 금치 못했다.
'진유걸이 불마경을 익히고, 귀염마녀의 공력까지 흡수했다니… 정녕 복(福)이로고. 또한 마령신의도 놀랍도다. 손자의 주검 앞에서도 저토록 초연할 수 있다니…….'
"그런데 사백님, 한 가지 의문이 더 남아 있습니다. 제 눈은 분명 실명되었는데… 어떻게 볼 수 있게 되었는지요?"
그 말에 남궁태협은 잠시 망설이다 슬픈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의 눈은 독고휘가 주고 간 것이라네."
순간, 진유걸은 뇌성벽력을 맞은 듯 몸을 휘청였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그 어떤 말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탈혼사자 독고휘는 자신이 가장 저주하고 증오하던 원수가 아니었던가?
오해를 간직한 채 독고휘를 보내 버린 진유걸.
그가 그 뼈 아픈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 그게… 사실입니까?"
그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며 말까지 떨려 나왔다.
남궁태협은 그 당시의 일들을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진유걸의 심장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마령신의의 말이 끝나는 순간, 장내는 질식할 것 같은 적막감이 돌았다.
침묵(沈默).
그들은 모두 침울한 얼굴로 두 청년기협(靑年奇俠)을 묵묵히 애도(哀悼)하였다.
탈혼사자 독고휘와 옥수준재 남궁인.
이 두 청년이 진유걸에게 준 감정은 실로 지고(至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금 진유걸은 걷잡을 수 없는 격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망담수의 지하굴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서혈천왕(西血天王) 혈영광군(血影狂君) 마우성(馬宇星),
죽어 가는 순간에 친할머니처럼 따스하게 대해 주었던 검존 사도천랑,
무림맹주이며 의형인 강호운룡 남화룡,
또한 여러 번의 위기에서 구해 주었던 광혼객과 귀수도부(鬼手屠符) 모용비(毛容琵),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여인들…….
진유걸은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휘가… 혹시 저에게 남긴 말은 없었습니까?"
마령신의는 눈을 감은 채 기억을 떠올렸다.
"너의 마음 속에도, 눈 속에도, 그리고 영혼 속에도 자신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네. 또한 독고 공자는 탈혼사자보다 천년정랑(千女情郞)이란 호칭을 더 좋아했다고 전해 달라 하였네."
그 말을 듣자 진유걸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탈혼사자보다 천녀정랑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했다고?
나의 눈 속에 네가 있고, 마음 속에도 네가 있고, 영혼 속에도 네가 있다고…….
그래, 우리는 언제나 하나였지.
네가 나고, 내가 너였어.
휘야, 너에게 소개시켜 줄 형님이 한 분 계셔.
그분은 전 무림인들이 경외(敬畏)하는 무림맹주 강호운룡 남화룡이시란다.
그 분은 못난 나를 위해 대신 생명을 불살랐어.
그는 나의 형님인 동시에 너의 형님이기도 해.
형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
- 아우가 살아 있는 한, 나 역시 생존해 있는 거야.
그리고 형님은 나에게 형님을 대신해 사마(邪魔)의 무림을 처벌해 달라고 하시며 내게 맹주 신물까지 주셨지.
이제부터 나의 생명은 자네와 남운룡 형님, 그리고 남궁인의 것이야.
남궁인… 그가 살았을 때 친구가 되지 못한 것이 후회되지만, 저 세상에서 자네가 대신하여 그의 좋은 친구라 되어 주리라 믿네.
그보다 자네에게 놀란 것이 있네.
천하를 제패하겠다던 자네가 어째서 천년정랑이란 호칭을 더 좋아했을까?
자네가 남긴 그 말을 전해 듣고 자네가 원래부터 다정다감한 친구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네.
나는 운룡 형님과 자네, 그리고 남궁인의 뜻을 어김없이 지키겠네. 그래서 별호를 새로 하나 만들었다네.
강호정랑(江湖情郞)!
이제부터 불마공자이자 광혈풍은 이 이름으로 불려지게 될 거네.
진유걸이 독고휘와 마음의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그의 면전으로 수십 줄기의 인영이 섬전처럼 내리꽂혔다.
나타난 이들은 경장 차림에 제각기 병장기를 휴대한 유아독녀궁의 여인들이었다.
진유걸은 여인들을 둘러보며 이글이글 살기를 내뿜었다.
"살시나찰은 어디 있느냐?"
열화가 복받쳐 내지른 폭갈인지라 그 위력이 가히 무시무시했다.
그의 음성이 어찌나 컸던지 지붕 위에 있던 기왓장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뿐만 아니라 공력이 약한 몇몇 여인들은 피를 쏟기까지 하였다.
"우억!"
"헉!"
무공이 절정에 달한 반야선승이나 마령신의, 영걸신개조차 기혈이 들끓어올라 내심 공력을 운용하여 안정시켜야만 했다.
이들이 이러할진대 유아독녀궁의 여인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녀들은 안색이 변한 채 심신의 격동을 진정시키느라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금화란 역시 입술을 깨물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 때였다.
휘익-!
일진의 소성이 들리며 한 인영이 장내에 나타났다.
"벽파(霹婆) 정금지(鄭錦芝)!"
누군가의 입에서 그녀의 명호가 튀어나왔다.
십대기인인 원앙벽뢰쌍기(鴛鴦霹雷雙奇) 중의 일 인.
진유걸은 그녀를 이미 하북성 제일부호 강태위(姜太衛)의 장원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진유걸의 사부인 강남태을자(江南太乙子)와도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지 않았던가?
벽파는 장내의 인물들을 둘러보며 외마디 경악성을 터뜨렸다.
"아니? 반야선승, 마령신의, 영걸신개……."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쭈뼛거릴 때.
반야선승은 벽파를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파파, 오랜만이오. 그 동안 신색이 더욱 좋아지셨구려."
벽파 정금지는 그에게 암울한 눈빛을 던지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휴, 모두가 여러분 덕이 아닌가 하오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일견하기에도 둘 사이에 뭔가 복잡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진유걸은 그들을 주의깊게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
'사부님과 벽파 노선배님은 어떤 관계였을까? 그리고 노선배님은 왜 반야선승과 마령신의에게 저리도 난처한 얼굴을 짓는 것일까? 또한 검존 사도천랑은 어째서 반야선승에게 평생을 후회 속에서 지냈다고 전해 달라 했던 것일까?'
그가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장내의 국면은 점점 더 무거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진유걸은 벽파 정금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하북성 강 부호의 장원에서 헤어진 후, 실로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벽파는 움찔 놀라며 말을 꺼냈다.
"공자는……?"
"강남태을자가 바로 불초의 사부님 되십니다."
순간, 벽파는 자지러질 듯 놀랐다.
"그대는 풍운서생(風雲書生)… 아니, 광혈풍?"
"이제는 강호정랑이라 불러 주십시오. 그것보다 살시나찰은 왜 보이지 않습니까?"
"그 애는 궁주님께 보고를 드린다고 갔네."
"그렇다면… 지금쯤 멀리 도주하고 있겠군요."
진유걸의 중얼거림에 벽파가 의아한 듯 황급히 물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귀염마녀는 보고를 보고받을 몸이 아니니까요. 그녀는 이미 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벽파 정금지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게 정녕 사실인가?"
그녀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제까지 귀염마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고도 모르는가? 파파는 정녕 늙었군 그래?"
벽파는 개방방주에게 쌀쌀한 눈빛을 던진 뒤, 주위에 있던 여인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뭣들하고 있는 게냐? 궁주님은 타계하고, 살시나찰은 이미 도주하였는데… 너희들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려는 게냐?"
그녀의 외침이 떨어지기 무섭게 몰려든 여인들이 혼비백산한 채 각기 흩어져 갔다.
벽파는 여인들이 모두 사라지자, 진유걸 일행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설마 내 앞을 가로막지는 않겠지요?"
말과 동시에 그녀가 막 신형을 날리려 하자, 반야선승이 급급히 말을 이었다.
"명부동의 열쇠는 어디 있소?"
"그것은 살시나찰이 지니고 있어요."
벽파 정금지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며 차갑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그녀의 옆구리에 열쇠 꾸러미가 차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줄도 모르고 반야선승은 탄식을 터뜨렸다.
"아, 명부동에 갇혀 있는 무림인들을 무슨 수로 구한단 말인가?"
그 때 영걸신개가 나서며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
"그냥 뚫고 들어가면 될 것 아닙니까?"
반야선승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무엇이 문제겠소?"
"우선 가 봅시다."
마령신의가 앞장을 서고, 그 뒤를 일행들이 따랐다.
진유걸은 금화란이 지닌 상로쌍검을 감개무량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형님이 내게 주신 유물(遺物)을 낭자가 지니고 있구려."
"공자님께서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돌려 드리겠습니다."
진유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낭자가 항주에서 내게 베풀어 준 호의에 대한 대가로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오."
일향 금화란은 가슴이 와르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무정하신 분! 지금 그 말은… 이 금화란을 친구로 대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금화란은 진유걸이 자기의 마음을 몰라주자, 너무도 슬펐다.
하지만 그녀는 오랜 기루 생활을 통해 한 가지 배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인내였다.
금화란은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억지로 삼키며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석문 앞.
반야선승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두르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뚫기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소. 모두의 힘을 합쳐 한 번 뚫어 보도록 합시다."
그러자 진유걸이 나서며 공손하게 말했다.
"노선배님들, 제가 한 번 해 보겠습니다."
반야선승은 그가 자신 있게 나서자 뒤로 물러났다.
"불마경… 그 전설상의 무공을 견식할 기회가 생겼군."
그는 비록 말은 그렇게 했으나, 내심 고개를 내저었다.
'십이 성에 달하는 노납의 반야선공(般若禪功)에도 끄덕없었는데… 어렵지.'
이런 생각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유걸은 신비한 미소를 머금으며 서서히 공력을 운집시켰다.
찰나, 그의 전신이 순식간에 휘황찬란한 금빛에 휩싸이는 것이 아닌가?
"아니?"
"허억! 이럴 수가……?"
장내에 있던 중인들은 까무라칠 듯 경악했다.
천하에 이런 괴공(怪功)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눈이 부셔 진유걸을 제대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반야선승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아아, 천고기학(千古奇學) 금불마공(金佛魔功)이… 바로 불마경에 수록돼 있었구나."
순간.
"금불파천(金佛破天)-!"
진유걸의 입에서 폭갈이 터지며 두 줄기 금빛 기류가 빛살처럼 발산되었다.
슈슈슈슈슈-!
섬칫한 파공성이 불꽃처럼 작렬되며 만년석강으로 휘몰아쳐 갔다.
그것은 정녕 일대 장관(壯觀)이 아닐 수 없었다.
찰나지간.
콰콰쾅-!
천지가 괴멸되는 듯한 폭발음이 솟구치며 만년석강이 무너져 내리는 게 아닌가?
그와 동시에 석강의 파편(破片)들이 빛살처럼 사방팔방으로 휘날렸다.
촤르르르르-!
"앗! 피해라!"
영걸신개가 대경실색하며 급급히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
투투툭- 타탁-!
석강 조각들이 중도에서 힘없이 떨어져 버리는 게 아닌가?
암경(暗勁).
진유걸은 암암리에 진기를 발출하여 날아오는 석강 덩어리를 모조리 막아 버렸던 것이다.
정녕 불가사의한 내공 수위가 아닐 수 없었다.
중인들은 모두 경악에 찬 얼굴로 진유걸과 석문이 있던 곳을 번갈아 주시하였다.
기실 진유걸의 공력은 이미 화경(化境)에 달한지라, 이런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성령용골신단으로 본신의 진원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불마성에서 금불마공을 연성하기 위해 불마대금과(佛魔大金果)라는 천고의 과일을 복용했던 것이다.
이 과일은 천 년이나 된 것으로, 공력을 일 갑자 증진시키는 한편, 금불마공을 익힐 수 있는 체력으로 만들어 주는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다 진유걸은 귀염마녀의 공력을 모두 흡수하지 않았는가?
그녀는 다른 세 고수의 공력까지 지니고 있었던 터라, 그야말로 진유걸의 진원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진유걸은 만년석강을 순식간에 부숴 버린 뒤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후배는 이제 여기서 작별을 고해야겠습니다."
그의 말에 남궁태협이 흠칫 놀랐다.
"어딜 간단 말이냐?"
"자세한 것은 다녀와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이 끝난 후 정맹원으로 가겠습니다."
반야선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당부의 말을 했다.
"자네의 두 어깨에 무림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달려 있네. 부디 인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게."
진유걸은 숙연한 자세를 취하며 웃음 띤 얼굴로 죽어 있는 옥수준재 남궁인을 주시하였다.
그의 신비스런 두 눈에 핑 눈물이 돌았다.
"최선을 다하겠소, 남궁 형!"
진유걸은 입술을 꽉 깨물며 마령신의에게 부탁의 말을 전했다.
"사백님, 금 낭자를 부탁하겠습니다."
진유걸은 다시 반야선승을 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노선배님, 다시 뵙게 되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진유걸은 말을 마친 뒤, 총총히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순간, 개방방주 영걸신개가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내게는 뭐라고 말도 하지 않는군. 이렇게 거렁뱅이 꼴을 하고 있다고 무시하는 건가? 그렇다면 앞으로 비단옷을 걸치겠네."
그러자 진유걸의 낭랑한 음성이 그 뒤를 따랐다.
"방주께서 금의(錦衣)를 입으신다면 중원의 비단이 머지않아 동이 나겠군요."
그의 목소리가 석굴에 윙윙 울렸건만 모습은 이미 간 곳이 없었다.
개방방주 영걸신개는 손바닥에 침을 퉤 뱉어 무릎을 탁 내리치며 소리쳤다.
"강호정랑이 있는 이상 아직 희망이 있어."
마령신의는 걱정스런 얼굴로 진유걸이 간 곳을 주시하였다.
"하지만 그의 등장으로 마두들이 경계하게 될 것이오. 이제까지 서로 눈치만 보던 태명회나 혈궁도 서로 손을 잡을지도 모르고……."
"그렇소. 확실히 그런 점은 걱정스럽소. 더구나 혈궁과 태명회 고수들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자들이니……."
반야선승의 말에 영걸신개가 손을 내저었다.
"자, 그런 걱정은 발 닦을 때나 하고… 어서 무림인들이나 구해 냅시다."
그의 말에 따라 나머지 세 사람은 만년석강 조각을 밟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맨 뒤를 따르던 금화란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음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