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章 분시대살진(分屍大殺陣)
"으으악……!"
"허윽!"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비명이 창천(蒼天)에 울려 퍼지며 두 인영이 썩은 짚단처럼 고꾸라졌다.
피를 샘물처럼 콸콸 쏟아 내며 구천지하로 떨어지는 이들.
전신이 핏물로 뒤덮인 이들은 여인이었다.
그들 뿐 아니라 장내에는 모두 이남육녀(二男六女)가 어울려 치열한 혈전(血戰)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미 바닥에는 칠팔 명에 달하는 여인의 시신이 깔려 있어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들은 모두 백의경장을 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지금 피로 물들여져 마치 혈삼(血衫)처럼 보였다.
여섯 명의 여인 중 네 명은 백의였다.
그 중 낯익은 여인.
그녀는 바로 천면신옹(千面神翁)의 손녀로 광혈풍에게 철천지 한을 지니고 있는 여인, 월화신녀(月花神女) 전여정(田汝庭)이 아닌가?
진유걸을 유혹하여 공력을 상실하게 했던 여인.
그에게 참을 수 없으리만큼 가혹한 형벌(刑罰)을 내렸던 여인.
그녀와 비롯해 백의를 입고 있는 여인들은 바로 유아독녀궁(唯我獨女宮)의 제자들이었다.
그녀들과 대치하고 있는 이남이녀(二男二女)!
그들은 철목산에서 진유걸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령신의의 모옥을 막아 섰던 네 명이 아닌가?
개방의 차대방주 취풍개(醉風 ),
십대기인 중 최고봉인 반야선승(般若禪僧)의 제자이며 마령신의의 손자인 옥수준재(玉樹俊才) 남궁인(南宮仁),
그의 누이동생 야생여걸(野生女傑) 남궁상아(南宮嫦娥),
그리고 진유걸의 공력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순결을 바쳤던 도화마검(挑花魔劍) 독고영(獨孤英).
이들 사 인이 지금 유아독녀궁의 무리들과 혈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취풍개는 연신 술을 마시며 한 여인을 상대하고 있었다.
"헤헤헤… 낭자는 아무래도 그 칼로 집안 일이나 해야겠소."
유아독녀궁의 제자인 그 여인은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이 거지 자식! 뒈져라!"
그녀는 수중의 유엽도(柳葉刀)를 비스듬히 날리며 취풍개의 천돌혈(天突穴)을 베어 갔다.
쉬- 쉬익- 쉭-!
예리한 도풍이 섬뜩하게 몰아치며 허공에 파공성을 일으켰다.
하지만 취풍개는 여유 있게 웃음을 날리며 미끄러지듯이 그녀의 공세를 피해 나갔다.
동시에 그는 숨을 들이키며 공력을 담아 내뿜었다.
순간.
쫘악-!
취풍개의 입에서 술줄기가 무섭게 뻗쳐지는 게 아닌가?
백의경장녀는 대경실색하며 벼락치듯 고함을 내질렀다.
"아앗! 주전(酒箭)!"
하지만 그녀는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취풍개의 기류에 격중당하고 말았다.
퍽-!
여인은 천만 근의 압력이 자신을 후려친 듯한 느낌을 받으며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아악!"
그녀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곤두박질쳤다.
그녀의 코와 입, 귀 등 칠공(七孔)에서는 시커먼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 때 또다시 참혹한 단말마의 비명이 연속해서 울려 퍼졌다.
"아아악……!"
"어어억……!"
두 여인이 피화살을 뿜어 내며 삼 장 밖까지 날아가 고꾸라졌다.
남궁상아와 독고영을 상대하던 여인들이 종말을 고한 것이었다.
그녀들은 각기 유아독녀궁의 여인들을 처치한 후 서로 마주 보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삼 년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고, 무공 역시 많이 진보된 느낌이었다.
이제 장내에는 옥수준재 남궁인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월화신녀 전여정뿐이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몹시 지친 듯 가쁜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에 비해 남궁인은 더욱 날카로운 검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는 삼 년 전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퇴보(退步)된 기색이 완연했다.
예전 같았으면 전여정쯤은 벌써 처치했을 그였다. 그러나 지금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차차차창-!
불꽃을 퉁기는 병기의 마찰이 고막을 후벼팔 듯 터져 나왔다.
"휘진청담(揮塵淸談)-!"
남궁인은 폭갈을 토해 내며 수중의 장검을 쾌속절륜하게 발출했다.
그의 검에서 수백 수천의 검영이 형성되며 전여정의 요혈을 노려 갔다.
슈슈슈슈-!
이 광경을 보고 혼비백산한 월화신녀 전여정은 일신의 공력을 끌어올리며 황망히 검을 날렸다.
그녀는 일찍이 조부로부터 가전무공을 전수받은 터라 기초가 완벽한 데다 유아독녀궁의 무학까지 익혀 놀라운 진전을 이루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능히 남궁인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격전을 관전하던 취풍개가 중얼거렸다.
"남궁 소협이 근래 들어 공력이 점점 더 떨어지는군."
남궁상아 역시 안타까운 듯 발을 굴렸다.
"어서 유걸 오빠가 나타나야 남궁 오빠가 살 수 있을 텐데……."
그렇다! 옥수준재 남궁인은 자신의 오음절맥(五陰絶脈)을 치료할 수 있는 성령용골신단(聖靈龍骨神丹)을 진유걸에게 양보하지 않았던가?
만일 삼 년 내로 그 영단을 복용한 진유걸의 피를 섭취하지 못한다면 그는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 정해진 삼 년의 기한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었다.
이 때문인지 남궁인은 계속해서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그는 유아독녀궁의 월화신녀 전여정에게 밀려 피하기에만 급급하고 있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야생여걸 남궁상아가 대성질타(大聲叱陀)를 터뜨렸다.
"멈춰랏!"
그녀는 벽력같이 신형을 날리며 우장을 가볍게 뿌렸다.
순간, 그녀의 장심에서는 웅후한 잠력이 무섭게 격출되었다.
우우웅-!
폭풍처럼 몰아치는 경력은 삽시간에 전여정을 향해 짓쳐들었다.
전여정은 화들짝 놀라며 엉겁결에 빙글 신형을 돌렸다.
그 바람에 남궁상아의 장력은 애꿎은 지면만 후려쳤다.
펑-!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 올랐다.
전여정은 만면에 노기를 띤 채 앙칼지게 소리쳤다.
"비겁한… 그러고도 정파의 협인이라 자처할 테지?"
남궁상아 역시 지지 않고 서릿발 같은 음성을 토했다.
"유아독녀궁! 그런 흉물스런 집단에게 어찌 무림의 법도를 내세울 수 있단 말이냐? 전 강호인들의 공분(公憤)을 사고 있는 마녀들의 무리인 주제에!"
그녀는 지난 삼 년 간 놀랍도록 많은 견문(見聞)을 쌓았다.
그래서 외모나 행동이 예전과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전여정은 검을 똑바로 고쳐 잡으며 냉랭한 코방귀를 날렸다.
"흥, 야생여걸! 네가 나서 봤자 소용없다. 네 오라버니는 그냥 놔 둬도 곧 죽게 될 것이다."
순간, 옥수준재 남궁인과 남궁상아는 일신을 부르르 전율했다.
"가거라!"
남궁인은 폭갈을 터뜨리며 지면을 박찼다.
그는 민첩하게 신형을 날리며 수중의 검을 위에서 아래로 흉폭하게 내리그었다.
새애액-!
피를 갈구하는 검은 대기를 쪼개며 광채를 번뜩였다.
그와 동시, 남궁상아는 표표히 몸을 휘날리며 연속 삼 지를 퉁겼다.
핑- 핑- 핑-!
날카로운 파공음을 일으키며 세 가닥 지풍이 쏘아 나갔다.
이번 초식에는 그들이 전력을 다한 듯 매우 신랄하고 섬전적이었다.
그러자 전여정의 안색이 백랍처럼 창백하게 변하였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들의 공세를 한꺼번에 막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도 없지 않은가?
전여정은 전신의 공력을 검에 주입시키며 입을 악물었다.
찰나, 부드러운 암풍(暗風)이 자신의 뒤쪽에서 밀려 오는 게 아닌가?
동귀어진(同歸於盡)을 각오했던 전여정은 이 기이한 현상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 반대로 검을 내리찍던 남궁인은 극심한 압력을 느껴야만 했다.
"허억!"
그는 마치 반탄강기(反彈 氣)에 퉁겨 나가듯 삼 장 밖으로 날아가 곤두박질쳤다.
뿐만 아니고 남궁상아가 구(九) 성(成)의 공력으로 발출한 지력도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남궁인은 큰 내상을 입은 듯 입에서 피를 토해 냈다.
그의 앞섶은 핏물로 금세 시뻘겋게 물들여졌다.
상황이 돌변하자 취풍개와 독고영은 놀란 눈으로 고함을 질렀다.
"어느 고인이 암중에서 손을 쓰는 거요?"
취풍개의 고함이 끝없이 펼쳐진 갈대숲을 뚫고 멀리 울려 나갔다.
일순.
"당신네들은 꽤나 뻔뻔스럽구려. 이렇듯 연약한 여인들을 무수히 살해(殺害)한 것도 모자라, 남아 있는 여인마저 죽이려 하다니……."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흑의인영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멋들어진 신법을 전개하며 유유히 장내에 내려섰다.
일신에 으시시한 살기(殺氣)가 흐르는 흑의청년.
찰나 그를 발견한 순간,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지러지는 듯한 기성을 내질렀다.
"아앗!"
"헉! 광… 혈… 풍……!"
그러나 진유걸은 싸늘한 냉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불마공자라 하오!"
그의 입에서 뼛골 시릴 듯한 음성과 상대의 심장을 동결시킬 듯한 냉랭한 시선이 쏟아졌다.
괴이하게도 진유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살심이 무럭무럭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여인들의 죽음.
그것이 지금 그의 마음 속에 잔인한 피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진유걸 자신조차도 왜 그런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단지 끊임없이 솟구치는 맹폭한 살기만을 느낄 뿐.
아, 기억을 상실한 진유걸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보원암(報元庵)의 혈겁(血劫).
당시 진유걸은 유아독녀궁의 살시나찰에 의해 처절하게 죽어 간 여승들의 주검을 보며 맹세하지 않았던가?
이후 흉수를 만나게 되면 잔혹하게 죽이겠노라고.
지금 그는 잠재적으로 그 때의 일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그의 미간에는 시뻘건 살괴가 서서히 뭉쳐지고 있었다.
일순, 취풍개는 벼락을 맞은 듯 경악하며 소리쳤다.
"살괴!"
그 때였다. 진유걸이 몸을 날리며 그를 향해 천살도를 비스듬히 후려쳐 왔다.
쇄애액-!
전율한 파공음이 격출되며 무시무시한 도기가 부챗살처럼 퍼졌다.
이 일 초는 가공할 만큼 빨랐다.
일찍이 검존 사도천랑으로부터 쾌검에 관한 것을 터득한 진유걸인지라, 그 손속의 민첩함이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취풍개는 비록 절륜하리만치 기민한 신법을 지니고 있었으나, 이 순간만은 발이 얼어붙은 듯했다.
삽시간에 그는 도기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며 생명이 경각에 달리게 됐다.
'이럴 수가? 분명 광혈풍임에 분명한데, 나를 공격하다니…….'
취풍개가 혼비백산하여 어쩔 줄 몰라할 때였다.
그의 위급을 목격한 독고영과 남궁상아가 쾌속무비하게 짓쳐들었다.
"당신, 정신 나갔어요!"
두 사람은 설마 진유걸이 취풍개를 공격할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던 것이다.
독고영과 남궁상아는 진유걸을 향해 약 삼 성 가량의 장력을 격사했다.
이것은 진유걸을 공격한다기보다 위급한 취풍개를 먼저 구하겠다는 뜻이었다.
진유걸에게 장력을 날리는 그녀들의 심정은 실로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등장에 반가워하던 것도 잠시,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러나 놀라기는 전여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유걸이 왜 원수인 자신을 구해 주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진유걸은 여전히 공세를 멈추지 않은 채 좌장을 후려쳤다.
"혈풍영(血風影)-!"
일성 대갈과 더불어 성난 해일(海溢)과도 같이 휘몰아치는 손바람.
부우웅- 부웅-!
지축을 뒤흔들 듯한 기음이 작렬하며 폭풍우가 몰려오는 듯한 경력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광혈풍이 자신들에게 이토록 강맹한 공세를 가해 올 줄이야?
남궁상아와 독고영은 아직도 지금의 이 상황이 얼떨떨하였다.
"앗! 위험해!"
옥수준재 남궁인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벗어났지 않은가?
콰르릉-!
돌연 천지가 개벽(開闢)하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아악!"
"으악!"
이어 자지러지는 듯한 여인의 비명이 허공을 무섭게 강타하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진유걸이 자신들에게 이토록 잔인한 공격을 퍼붓는단 말인가?
정녕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을 당한 남궁상아와 독고영.
그녀들은 분수처럼 피를 뿜어 내며 멀리 나뒹굴었다.
그와 동시에 취풍개 역시 왼쪽 가슴에 일 도를 맞고 말았다.
"으윽!"
취풍개의 입술을 비집고 짧은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만일 남궁상아와 독고영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는 필경 왼쪽 몸통이 모조리 절단돼 나갔으리라.
이 광경을 목격한 남궁인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상대는 분명 자신들이 모든 것을 희생하여 구해 준 광혈풍이 아닌가?
그런데 그가 자신들을 죽이려 하다니?
그는 솟구쳐 오르는 분노에 치를 떨며 대성질타(大聲叱陀)를 터뜨렸다.
"배은망덕한 놈!"
남궁인은 엄중한 내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면을 박찼다.
그는 전신의 공력을 장검에 주입시키며 비스듬히 베어 갔다.
쇄애액-!
날카로운 음향이 튀어오르며 살벌한 검기가 부챗살처럼 퍼져 나왔다.
진유걸은 냉랭한 검기가 휘몰아쳐 오자,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상대방을 경멸하는 듯한 오만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 그의 입에서는 웅후한 대갈성이 터져 나왔다.
"가거라!"
진유걸의 천살도가 바람을 가르며 빛살처럼 폭사되는 순간, 은빛 도기(刀氣)가 허공을 날으며 섬광을 번뜩였다.
찰나.
차차차창-!
기음이 발출되며 남궁인의 장검이 수십 토막으로 절단돼 나갔다.
그와 동시, 남궁인은 가슴이 데이는 듯한 통증을 느껴야 했다.
"으윽!"
그는 비명을 토해 내며 주르륵 일 장 가량 미끄러졌다.
수중에는 검자루만 들려 있었고, 가슴에는 피가 꾸역꾸역 흘러 나왔다.
그러나 상처의 아픔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육체적인 고통이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참담한 배신감으로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아픔이 앞가슴의 도상(刀傷)보다 몇십 배 더 큰 것이었다.
남궁인은 얼굴이 일그러진 채 진유걸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진유걸도 냉혹한 자세로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추호의 미동도 없는 그의 모습은 흡사 태산 같은 장엄함이 서려 있었다.
남궁인의 눈까풀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이 때 돌연.
휘익-!
한쪽에 서 있던 전여정이 기회를 틈 타 달아나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일학충천(一鶴庶天)의 경공수법을 사용하여 재빨리 장내를 벗어났다.
진유걸은 전여정의 갑작스런 행동에 의혹을 느끼고는 고함을 버럭 내질렀다.
"낭자, 멈추시오!"
그러나 전여정이 어찌 멈출 수 있겠는가?
그녀는 그의 무공을 산공분으로 빼앗아 버리지 않았는가?
그가 어째서 자기를 구해 주었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그에게 잡히면 그녀는 죽게 될 것이다.
그녀는 혼신의 공력을 끌어올리며 신형을 폭주하였다.
'유걸 오빠… 정맹원(正盟院) 소속의 고수들이 언젠가 광혈풍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하더니만… 기어코 나타났군. 그것도 무서운 고수가 되어! 한데 오빠는 어째서 자신을 구해 준 정맹원의 인물들을 공격하는 걸까? 그래, 그는 살괴를 지닌 천하대살성(天下大殺星)라 무조건 죽이고 보는 거야! 피를 갈구하는 악마의 화신(化身)이기에!'
월화신녀 전여정은 나름대로 염두를 굴리며 경공술을 전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얼마나 갔을까? 전여정이 끝없이 펼쳐진 갈대숲을 거의 빠져 나갈 때였다.
스스삭-!
돌연 갈대를 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전여정의 앞으로 불쑥 흑의인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전여정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진유걸이었다.
그는 전여정을 바라보며 뼛골 시린 음성으로 차갑게 외쳤다.
"낭자는 참으로 은혜도 모르는구려. 금수(禽獸)도 자신을 구해 준 보답을 잊지 않는데, 하물며 인간으로서의 도리(道理)를 망각하다니……."
전여정은 그제서야 비로소 진유걸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아니라……."
진유걸은 싸늘한 눈빛을 던지며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낭자가 무슨 이유로 그들과 싸우게 됐는지 소상히 말해 주시오."
전여정은 가슴이 뜨끔해짐을 느끼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들은 우리 유아독녀궁을 멸시하고 모함(謀陷)을 서슴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런 충돌이 생긴 거예요."
진유걸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유아독녀궁이라니? 그럼 여인들만의 집단이란 말이오?"
그의 물음에 전여정은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자님. 하지만 공자님이라면 본궁에서도 반드시 환영(歡迎)할 거예요."
그녀는 정감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진유걸을 바라보았다.
진유걸은 신비로운 눈길로 그녀를 향했다.
마치 사람의 혼백을 앗아 갈 듯한 마력의 눈빛!
일순, 전여정은 한없이 포근하고 감미로운 느낌을 받았다.
'아아, 유걸 오빠! 소녀는 결코 오빠를 잊을 수 없는 모양이에요. 이 나약한 계집은… 오빠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그 동안 얼마나 괴로웠는지 몰라요.'
그녀는 그의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순간 몸을 휘청거렸다.
"앗! 낭자!"
진유걸은 민첩하게 몸을 날려 쓰러지려는 전여정의 허리를 기민하게 낚아챘다.
"낭자! 왜 그러는 거요?"
진유걸의 뜨거운 입김이 전여정의 전신을 달구었다.
주수연으로 변장하여 그와 함께 했던 그 어느 날 밤의 정사(情事).
폭풍같이 타올랐던 그 때의 일이 아련하게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타오르고 싶어.
불꽃 송이처럼 활활 마음껏 불타오르고 싶어.
그리하여 한 줌의 재가 되어 훨훨 날아가고 싶어.
이 복잡하고 갈등이 심한 곳을 떠나 어디론가 멀리멀리…….
전여정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유걸 오빠! 오빠! 으흐흑… 미안해요! 미안해요!"
그녀는 오열을 토해 내며 진유걸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진유걸은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울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낭자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소?"
그는 전여정이 자신의 잃어버린 십오 년과 무슨 관계가 있음을 직감했다.
진유걸은 거센 흥분을 느끼며 소리쳤다.
"낭자! 나를 어찌 알고 있는지 상세히 얘기해 주시오. 나는 지금 미칠 것 같소이다. 내가 대체 누구요? 내가 누군지 좀 가르쳐 주시오!"
찰나.
"그대는 불마공자가 아닌가? 천살성 사마기의 제자인……."
음침하기 짝이 없는 괴성이 터짐과 동시에, 몇 줄기 인영이 바람처럼 등장했다.
진유걸은 상대방의 절륜한 신법에 흠칫 놀라며 예리한 눈초리로 그들을 훑어봤다.
일순, 진유걸의 눈썹이 허공으로 꿈틀 치켜져 올라갔다.
그들 중 두 명은 바로 불마성의 천상벽을 깨뜨렸던 포달랍궁(包達拉宮)의 화천존인(和天尊人)과 태명회의 은절(銀絶) 황보은(皇甫銀)이 아닌가?
그들은 살시나찰(殺屍羅刹)과 함께 진유걸의 손에서 도주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진유걸은 그들과 시선이 마주치자 차갑게 코방귀를 날렸다.
"예전에는 꽁지가 빠지라 달아나더니 오늘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군."
진유걸은 냉갈을 터뜨리며 다른 인물들을 둘러보았다.
시뻘건 경장 차림에 두툼해 보이는 단창을 휴대한 중년인들.
그들의 숫자가 모두 일곱이었는데, 기이하게도 안색이 창백하였다.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그들은 마치 관짝을 뜯고 나온 송장과 같은 모습이었다.
포달랍궁의 화천존인이 진유걸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폭언을 서슴치 않았다.
"이 놈! 노납의 사제들을 살상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결코 네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금은쌍절(金銀雙絶) 중 은절 황보은도 기괴한 웃음을 날렸다.
"푸흐흐흐… 불마공자! 이 곳에 네놈의 뼈를 묻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겠지?"
불마공자 진유걸은 가소롭다는 듯이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감히 본 공자에게 함부로 지껄이는 걸로 미루어, 당신네들은 이 귀신 같은 무리를 꽤나 믿는 모양이군. 하지만 잠시 후면 불마성에서처럼 꽁지라 빠져라 도망하게 될걸. 그러나 이번에는 어림도 없다. 절대로 도망칠 수 없어!"
그는 말을 끝내며 칠 인의 혈의경장인들을 노려보았다.
은절 황보은은 괴소를 흘리며 칠 인을 향해 손짓을 했다.
"혈궁(血宮) 제자들은 분시대살진(分屍大殺陣)을 펼쳐라!"
순간.
휙- 휘익-!
일진의 옷자락 소리가 곳곳에서 일며 일곱 명의 중년무사들은 진유걸을 중앙에 두고 빙 둘러쌌다.
그들의 신법은 매우 경쾌하여 일견하기에도 고수들임을 짐작케 했다.
진유걸은 여전히 태산처럼 버티고 선 채 입술을 달삭였다.
"당신은 혈궁 인물이었소?"
은절 황보은은 그로부터 질문을 받자 의미심장한 웃음을 띄웠다.
"그렇다. 본좌의 진면목을 보여 주기로 하지. 마지막 가는 길에 견문을 넓힐 수 있을 게다."
그는 음충맞게 입술을 놀리며 자신의 우수를 들어올려 얼굴로 가져갔다.
진유걸과 그의 곁에 있던 전여정의 시선도 자연히 황보은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일순, 황보은이 얼굴에 쓴 인피면구를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드러난 안면.
그것은 두 번 다시 보기 끔찍한 용모였다.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에 시퍼런 귀기가 감도는 모습.
그것은 도저히 나이를 분간할 수 없는, 늙고 시체처럼 추악한 얼굴이었다.
황보은은 진면목을 드러낸 채 강시처럼 시퍼렇게 말라 있는 입술을 열었다.
"노부는 악심골제 남악천왕이라 한다."
아, 남악천왕(南惡天王) 악심골제(惡心骨帝) 남궁인후(南宮仁厚)!
신비에 싸여 있던 사대천왕(四大天王) 중 일 인이 아니었던가?
백여 년 전, 붕괴됐던 사천방(四天幇) 방주 중의 한 명인 그가 이 곳에 나타나다니?
전여정은 기겁할 듯이 놀라며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악심골제 남악천왕… 궁주께서는 사천방이 천하도로 인하여 파괴될 때, 남악천왕이 가장 심한 부상을 당하였다고 하셨다. 그 때문에 그는 본신의 진원을 오 성 가량밖에는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녀는 내심 걱정하였으나 진유걸은 추호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기억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무림사에 대한 기억도 모두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악심골제 남악천왕?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길래 도주를 차 마시듯 한다지?"
진유걸은 남악천왕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남악천왕은 분노가 살갗을 뚫고 나올 지경이었다.
은절 황보은으로 변장하여 태명회 인물처럼 가장했건만, 불마성에는 진입도 해 보지 못하고 낭패를 당했었지 않은가?
"죽일 놈!"
악심골제 남악천왕은 무섭게 이를 갈아붙이며 서서히 장내로 들어섰다.
진유걸은 그가 합세하여 진을 발동할 것임을 예측하며 전여정을 밀어냈다.
"낭자는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내가 이 쓸모 없는 자들을 모두 처치하고야 말겠소."
전여정은 진 밖으로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유걸 오빠! 조심하세요. 혈궁은 천여 년 간 신비 속에 묻혀 있던 문파이니 부디 조심하셔야 해요."
진유걸은 전여정의 말을 듣는 순간, 다시 한 번 가슴이 설레임을 느꼈다.
'유걸 오빠… 그래, 저 여인은 분명히 나를 알고 있어. 다정한 그녀의 눈길이, 부드럽고 포근한 그녀의 음성이… 왠지 잊었던 기억을 일깨어 주는 것만 같다.'
그는 주위를 빙 둘러보며 혈궁고수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악심골제 남악천왕의 안면에 무서운 살기가 일렁였다.
"불마공자! 본 혈궁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잠룡와호(潛龍臥虎)의 기세를 유지하고 있다. 그 중 이 칠살진창대(七殺陣槍隊)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노부가 이들을 지휘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말에 진유걸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본 공자가 그 따위 엄포에 넘어갈 성싶으냐?"
악심골제 남악천왕은 사납게 인상을 찌푸리며 외쳤다.
"이 진창대는 궁주께서 손수 이루신 만큼 엄청난 위력이 있다."
그래도 진유걸은 코웃음을 날릴 뿐이었다.
"진창대… 엉망진창이라는 얘기로군."
일순 악심골제의 안면이 썩은 돼지간처럼 흉물스럽게 변하였다.
"진식을 발동해라!"
그가 커다랗게 부르짖자 단창을 든 칠 인의 혈궁고수들이 신속하게 이동하였다.
그들의 발걸음은 극히 규칙적이고 보폭도 일정하였다.
진유걸은 그들의 행동을 유심히 주시하며 내심 탄복을 금치 못했다.
'일곱 명의 움직임이 하나같은 걸 보니 철저히 훈련을 받은 자들이군.'
그 때 돌연.
"분시선환(分屍旋還)-!"
악심골제 남궁인후가 버럭 고함을 질러 댔다.
그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단창을 든 고수들이 신법을 쾌속하게 전개했다.
휘익- 휙-!
그들의 몸놀림이 어찌나 정교한지 한 명이 움직이는 듯 신속무비하였다.
일순 진유걸은 당혹감을 금치 못하며 신음을 삼켰다.
'이들은 결코 오합지졸(烏合之卒)들이 아니군. 이들 개개인의 무공 실력은 일류고수급이야.'
그가 긴장하며 등 뒤의 천살도를 뽑아 드는 순간.
"분시투혼(分屍鬪魂)-!"
거대한 폭음이 울림과 동시에 한 인영이 빛살처럼 몸을 날렸다.
쇄쇄쇄쇄액-!
단창이 대기를 뚫으며 섬칫하게 짓쳐 들었다.
진유걸은 냉랭한 살기를 입가에 뿌리며 천살도를 유연하게 마주쳐 갔다.
그 순간, 덮쳐 오던 인영이 중간에서 멈칫거리며 재빨리 단창을 회수하는 게 아닌가?
그와 함께 또 다른 방향에서 단창이 예리하게 날아들었다.
불마공자 진유걸은 그들의 절묘한 수법에 경악하며 그쪽으로 천살도를 후려쳐 갔다.
"가거라!"
하지만 그 자 역시 신속하게 물러갔다.
또다시 진유걸의 후미에서 날카로운 파공성이 작렬했다.
파르르르-!
단창이 무섭게 공간을 가르며 섬전보다 빠르게 폭사됐다.
진유걸은 그들의 이 진식이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빙글 몸을 회전하며 뒤에서 날아오는 단창을 내리찍었다.
하지만 이번 역시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들 칠 인의 공격은 진유걸을 계속 긴장과 궁지 속으로 몰아넣었다.
진유걸은 시시각각 진식의 오묘함에 빠져들며 비지땀을 흘려 냈다.
좀 떨어진 곳에서 장내를 관전하던 남악천왕이 음흉한 미소를 띄우더니 대갈을 터뜨렸다.
"분시대살(分屍大殺)-!"
그의 외침이 터져 나옴과 동시, 혈궁고수들이 일제히 지면을 박찼다.
다음 순간, 그들이 뻗어 낸 단창이 전율할 속도로 공간을 갈랐다.
츠츠츠츠-!
소름끼치는 음향이 일어나며 사방팔방에서 은빛 살기가 소용돌이쳤다.
단창은 마치 피에 굶주린 야수의 독아(毒牙)같이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것이었다.
찰나, 불마공자 진유걸의 미간에 시뻘건 핏빛 살괴가 꿈틀거렸다.
그는 위급한 순간이 닥치자 무의식중에 마령신의로부터 익힌 환형분신대법(幻形分身大法)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삼백 년 전의 비급 환신록(幻身錄)에 수록돼 있던 비전절학(秘傳絶學)으로, 사람의 형상이 아홉 개로 분리되는 환각을 일으키는 절공이었다.
광혈풍 진유걸도 이 수법으로 인하여 남궁상아에게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만큼 이 신법은 기기묘묘한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진유걸은 환형분신대법을 구사하는 동시에 폭갈을 내질렀다.
"천살구류(天煞九流)-!"
천살도가 무섭게 난무하며 아홉 가닥의 기류를 잔혹스럽게 뿌려 냈다.
칼날같이 예리한 도기가 뻗쳐지며 주위를 온통 휘감았다.
아홉 개로 분리된 진유걸의 분신에서 각기 아홉 가닥의 도기가 뿜어지자 그것은 여든하나의 기류로 화했다.
빛살처럼 폭사되는 여든한 가닥의 살기.
일순 무서운 살기의 회오리 속에 처절한 단말마의 행렬이 이어졌다.
"으악!"
"우왁!"
"아아아악……!"
끔찍한 비명 소리와 함께 피가 분수처럼 치솟고, 혈육 덩어리가 이리저리 흩어졌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전개된 참상이었다.
혈궁의 진창대 고수 일곱 명은 맥박이 끊어진 채 모조리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들은 이미 지옥의 문턱을 넘어선 것이다.
그들에 비해 진유걸은 입술을 악문 채 중앙에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과 허벅지에는 단창이 박혀 있었고, 그 곳에서는 진홍빛 선혈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극심한 부상을 입고 있는 듯싶었다.
'으음, 이제 보니 혈궁은 결코 평범한 집단이 아니구나. 호신강기인 불마천살강(佛魔天煞 )을 이 성 가량 연성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가슴을 관통당할 뻔했어.'
그는 염두를 굴려가며 가슴과 허벅지에 박혀 있는 단창을 뽑아 냈다.
순간.
"죽어라!"
악심골제 남악천왕과 화천존인이 대갈을 터뜨리며 장력을 격출했다.
그들의 쌍장에서는 엄청난 경력이 폭풍처럼 쏟아져 나왔다.
우우우웅-!
무서운 기세로 휘몰아쳐 오는 양대기류.
이 광경을 목격한 월화신녀 전여정이 대경실색하며 외쳤다.
"앗! 안 돼!"
그녀는 민첩하게 몸을 날리며 포달랍궁의 화천존인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전신의 공력을 쌍장에 주입시키며 마주 장력을 뻗어 냈다.
그녀가 신속하게 신형을 옮겨 화천존인을 상대하자, 진유걸은 남악천왕에게 일 장을 뿜어 냈다.
"마기참혼(魔氣斬魂)-!"
웅후한 폭갈과 더불어 강맹한 압력이 노해광도(怒海狂濤)와도 같은 기세로 밀려 나갔다.
그러자.
쿠르르릉- 쾅-!
두 군데서 엄청난 폭음이 터져 나오며 경풍에 휘말린 갈대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이어 두 마디 비명이 허공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아악!"
"으윽!"
진유걸은 입에서 시뻘건 피를 흘리며 일 장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에 비해 악심골제 남악천왕은 그 자리에 고꾸라져 칠공에서 피를 흘러 내고 있었다.
그는 첫눈에 보기에도 오장육부가 제자리를 벗어난 듯 보였다.
그러나 그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듯 좀처럼 눈을 감지 못했다.
그와 약간 떨어진 곳, 전여정이 신형을 휘청거리고 있었다.
내상이 몹시 심한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그녀의 맞은편에는 화천존인이 철탑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진유걸은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전여정을 주시하였다.
그의 시야로 급기야 신형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는 전여정의 모습이 비쳐졌다.
"앗! 낭자!"
진유걸은 훌쩍 몸을 날리며 재빨리 전여정을 부축했다.
'이 여인이 나에 관한 모든 열쇠를 지니고 있다.'
그가 다급한 심정으로 전여정의 상세를 살피는 순간.
포달랍궁의 화천존인은 죽어 가는 악심골제를 바라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흐흐흐… 사대천왕도 별것 아니로구나. 불마공자의 일 장도 견디지 못하다니… 이렇게 되면 필경 혈궁에서는 불마공자를 제거하지 않을 수 없겠지? 구태여 노납이 손을 쓰지 않더라도 말이야. 어서 서장으로 돌아가 장문 방장에게 시기가 왔음을 알려야겠다.'
그가 음심을 품고 있을 때였다.
악심골제 남궁인후는 간신히 눈까풀을 밀어올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화천! 너는 막내 사제에게 속았어!"
하지만 그의 음성은 너무도 미약하여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포달랍궁의 화천존인이 사대천왕 중 가장 귀계(鬼計)가 출중한 북귀천왕(北鬼天王) 귀독요후(鬼毒妖侯) 장태무(張太武)에게 속다니?
도대체 무슨 뜻일까?
화천존인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유령처럼 장내를 빠져 나갔다.
진유걸은 그가 달아나는 것을 보았지만 못 본 척했다. 우선 전여정을 구하는 것이 더 급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세도 돌보지 않고 그녀의 명문혈에 진기를 주입시켰다.
"낭자! 잡념을 떨쳐 버리고 내상 치유에 주력하시오."
전여정은 진유걸의 뜻을 알아채고 즉시 운공요상(運功療傷)에 들어갔다.
진유걸의 장심으로부터 웅후한 진력이 용솟음쳐 나왔다.
잠시 후, 진유걸은 전여정의 명문혈에서 손을 떼며 길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휴우!"
그러는 그의 몸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뿐만 아니라 탄창에 다친 가슴과 허벅지에서도 피가 쏟아졌다.
너무 많은 피를 흘려 현기증이 일어나자, 그는 피를 지혈시킨 뒤 즉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불마선천신공(佛魔先天神功)으로써 내상을 치유해야겠군.'
진유걸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무념(無念), 무상(無常), 무아(無我)의 경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가만히 눈을 감고 망아지경에 빠진 그의 모습은 마치 해탈을 앞둔 고승처럼 장엄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