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三章 맹령정패(盟令正牌) (27/35)

第三章 맹령정패(盟令正牌)

진유걸은 자신의 침상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팽 총관과의 대결이 불가피하게 됐군. 그 자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놓아 다시는 나에게 무례히 굴지 못하도록 해야겠다. 하지만 왠지 그 자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려.'

창 밖에는 어느 새 어둠이 깔리고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금세라도 쏟아질 듯한 별의 무리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진유걸은 밤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의 기억이 저 하늘의 별빛처럼 뚜렷하다면, 이토록 고심(苦心)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끝을 못 잇는 그의 눈가로 불현듯 스쳐 가는 부부(夫婦)가 있었다.

중후(重厚)한 인품의 중년인과 자애스런 모습의 부인.

신선(神仙)과도 같은 풍모의 그들은 바로 진유걸의 부모들이었다.

진유걸은 지금 십칠팔 년 전의 그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 때였다. 돌연, 진유걸의 시야로 어둠을 뚫고 달리는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들어왔다.

몹시 다급하게 질주하는 그 인영은 익숙하게 건물 사이를 빠져 나갔다.

주수연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진유걸이 실종되고부터 이제까지 쭉 그래 왔지만 오늘은 유독 더 잠이 오지 않았다.

둥- 둥- 둥-!

멀리서 삼경(三更)을 알리는 경고(更鼓)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수연은 세상 모든 시름을 잃은 듯 평온한 모습으로 잠든 아들을 내려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얘야, 너의 아버님은 정녕 안 오시려나 봐."

아아, 그렇다면 이 아이는 바로 광혈풍 진유걸의 아들이란 말이 아닌가?

그렇다. 진유걸이 철영보를 떠난 그 이듬해, 주수연이 혼자 낳은 아이였다.

비록 세 살배기 어린아이였지만 놀라울 정도로 명석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말도 못하는 말이 없을 정도였고 기억력도 출충하였다.

한 번 가르쳐 준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뿐더러, 한 번 본 것는 거의 다 흉내낼 줄 알았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던가?

아들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커 갔다.

주수연은 아들이 자라는 모습에서 가끔 진유걸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만약 그런 기쁨마저 없었다면 주수연은 삼 년이란 세월을 결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때때로 죽음이란 어휘도 떠오르곤 했지만 작은 진유걸을 보노라면 그녀의 가슴은 희망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언젠가 뜨겁게 해후할 날이 있을 거라 손꼽아 기다려 온 그녀였다.

주수연은 침상에서 가만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밤공기가 그녀의 가슴을 시원하게 식혀 주었다.

"아까 낮에 본 그분이 왜 남 같지 않은 느낌이 자꾸 드는 걸까? 전체적인 윤곽은 비슷하나, 눈빛이… 달랐어."

그녀는 낮에 본 불마공자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주수연은 달빛이 흐르는 정원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하지만 그 분일 리가 없어. 철 보주는 그 분의 사문 원수이고, 철 낭자 역시 그 분을 몹시 괴롭히지 않았는가? 한데 어떻게 그녀와 어울릴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야."

주수연은 아득한 벼랑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상공, 정녕 소첩을 잊으셨나요? 아니면 이미… 아아, 상공!'

주수연이 눈물을 떨어뜨릴 때였다.

"혜령, 이렇게 나와 주다니… 정말 고맙구려."

음침한 목소리와 함께 장건수(張建秀)가 어둠을 비집고 주수연의 앞으로 나서는 게 아닌가?

"아앗!"

주수연은 자지러질 듯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장건수는 그러거나 말거나 징그럽게 웃으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혜령, 놀라지 마시오. 매일 문을 잠가 놓고 있더니 오늘은 이렇게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흐흐흐……!"

주수연은 마음을 다잡아 먹으며 차갑게 소리쳤다.

"장 의원, 이 야비한 인간! 그 분이 오신다면 결코 당신 같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네 모자를 내팽개치고 가 버린 놈을 무엇 때문에 기다리고 있단 말이오?"

장건수는 예전 우노이를 시켜 진유걸을 죽이려 한 사실이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그렇게 말했다.

주수연은 그의 흉악한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외쳤다.

"그 분은 우리를 버리고 가실 분이 아니에요. 그 분은 당신이 우노이를 시켜 불러 낸 뒤 갑자기 사라지셨어요. 당신이 그 분에게 무슨 짓을 꾸민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그 분에게 어떤 암수를 가했던, 그 분은 결코 당신 같은 자의 손에 돌아가실 분이 아니에요! 그 분은 꼭 살아 돌아오실 거예요."

"내가 어떻게 당신 남편에게 암수를 가할 수 있단 말이오? 그리고 살아 있다면 벌써 찾아왔지 여태 안 올 리가 있겠소? 당신 남편은 당신을 버린 게 틀림없소! 그러니 혜령, 나와 같이 삽시다."

"보 안에 거짓 소문을 퍼뜨려 나를 손아귀에 넣으려 하지만… 흥! 결코 쉽지 않을 거예요. 결코……!"

장건수의 안면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오늘은 내 수중에 들어오고 말걸. 오늘은 그냥 물러나지 않겠다."

수연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외쳤다.

"어림없는 수작 말고 돌아가세요. 나는 결코 그 분처럼 순순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거예요!"

장건수는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띄우며 한 발 한 발 다가들었다.

"과연 그럴까? 삼 년을 하루같이 별러 온 이 장건수가 그 따위 말 정도에 물러갈 성싶으냐?"

주수연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다가오지 말아요. 소리를 지르겠어요."

"푸흐흐흐… 어리석은 짓! 이미 보 안의 경비무사들과는 얘기가 되어 있소!"

순간, 주수연은 품안에서 한 자루 비수를 재빨리 뽑아 들었다.

"더 이상 접근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어요!"

장건수는 당혹감을 금치 못하며 일순, 멈칫거렸다.

"지독한 계집!"

주수연은 비수를 목에 갖다 댄 채 싸늘하게 외쳤다.

"물러가세요. 당신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그녀의 눈에서 구슬같이 영롱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한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애틋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장건수 같은 음흉한 인물에게는 통하지가 않았다.

"흐흐흐… 그렇게 되면 네 아들이 불쌍해지겠지. 하루 아침에 부모도 없이 천하를 떠도는 거지 신세가 될 거야."

주수연은 자신의 아들을 생각했다.

나날이 달라지며 귀여운 재롱을 떠는 귀여운 아들.

자신과 진유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너무도 귀중한 아들이 아닌가?

주수연은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오열(嗚咽)이 솟구쳐 올랐다.

"에잇!"

이 때, 그녀의 허점을 노리고 있던 장건수가 갑자기 비수를 후려쳤다.

주수연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땅그랑-!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비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

주수연은 동시에 두려움을 느껴야만 했다.

힘없이 떨어져 나간 비수가 더없이 저주스러웠고, 공연히 밖으로 나왔던 자신이 너무도 후회(後悔)되었다.

하지만 이젠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이제 남은 것은 자결(自決)뿐이었다.

비수가 없어진 이상,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곤 혀를 깨물고 죽는 일뿐이었다.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요, 열녀(烈女)는 불경이부(不更二夫)라… 황족(皇族)의 몸으로 어찌 이런 치욕(恥辱)과 수모를 당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내심 한숨을 토했으나 들려 오는 것은 장건수의 흉물스런 웃음소리뿐이었다.

"으흐흐… 더 이상 반항할 생각 말고 곱게 본인의 품에 안기시지."

그가 다가올수록 주수연의 결의(決意)는 점점 굳어 갔다.

그녀가 막 혀를 깨무려는 순간.

"죽일 놈!"

한 마디 차가운 음성이 장건수의 고막을 번개처럼 때렸다.

"누… 누구냐?"

장건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른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야로 영준하기 이를 데 없는 청년의 고고한 풍모가 여지없이 들어왔다.

그는 신비스런 눈동자에 무서운 살기를 띠고 있었다.

질식할 것만 같은 공기가 무섭게 팽창되었다.

청년의 입술이 나직이 벌어지며 살기에 찬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불마공자가 간악한 네놈에게 죽음을 내리겠다."

그 음성은 뼛골이 시리도록 냉랭하여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였다.

장건수는 공포에 질려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바들바들 떨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공자님,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그가 목숨을 구걸하자 진유걸은 코방귀를 날렸다.

"간악한 놈! 한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그 남편을 암계를 써서 몰아내고 헛소문을 퍼뜨리는가 하면, 이렇듯 야심한 밤에 여인에게 무례하게 굴다니……."

그의 미간에 시뻘건 기운이 모아졌다.

찰나, 진유걸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주수연의 비수를 걷어찼다.

팍-!

예리한 비수는 섬전처럼 허공을 가르며 장건수에게로 쏘아들었다.

그는 혼백이 달아날 정도로 놀라며 허둥댔지만, 비수는 여지없이 그의 등을 파고들었다.

"아악!"

그는 비명을 허공에 뿌려 내며 썩은 고목처럼 고꾸라졌다.

흥건한 피가 그의 목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 모든 일이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주수연은 눈앞에 일어난 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어쩌면… 추호도 용서 없이 잔인하게 손을 쓰는 것까지도 그분을 닮았을까?'

그녀는 진유걸과 도주하던 그 어느 날을 되새겼다.

추남추녀로 역용하여 산서성(山西省)의 중조산(中條山)을 찾아가던 중, 어느 객점에서 마주쳤던 천지교의 네 장한.

그들은 주수연과 광혈풍의 용모를 놀려 대지 않았던가?

그 때 그 네 장한 역시 진유걸에 의해 처참한 종말을 맞이했었다.

진유걸은 정신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주수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곧 경비무사들이 몰려올 테니 어서 이 곳을 피하시오."

그는 다정하게 말하며 장건수의 목에 박힌 비수를 뽑아 냈다.

순간, 진유걸은 그 비수가 결코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음, 이것은 보통 기보(奇寶)가 아니군. 검날에 정기가 서려 있어.'

그는 염두를 굴리며 비수를 주수연에게 건네 주었다.

"공자님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진유걸은 그녀의 말에 약간 주춤거리며 대꾸했다.

"무슨 말이오?"

주수연은 고개를 숙인 채 앞장 서서 걸었다.

"저를 잠시 따라오십시오."

그녀가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자 진유걸도 곧 그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도 진유걸은 자신의 심중을 내심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내가 이 여인을 따라가는 걸까? 어째서 이 여인의 말에 이렇게 옴싹달싹도 못하는 것일까?'

그는 주수연에게 신비한 힘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이상한 힘이었다.

잠시 후, 진유걸은 주수연이 기거하는 방 안으로 안내되었다.

그녀의 방은 이상하게도 진유걸에게 친근한 느낌을 주었다.

그럴 수밖에, 그는 이 방에서 주수연과 함께 달콤한 신혼 생활을 보내지 않았던가?

진유걸은 아담하게 꾸며진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침상에 누워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순간, 진유걸은 온 전신이 짜릿해지는 전율을 맛보았다.

그것은 비록 찰나지간이었으나 엄청난 충격이었다.

분신(分身)!

자신의 분신이, 자신의 혈육(血肉)이 거기에 누워 있는데… 어찌 기이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겠는가?

소록소록 잠들어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진유걸은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격류(激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심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 부자(父子) 상봉(相逢)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공자님, 이것을……."

주수연의 목소리가 기이한 충격 속에 빠져 있는 진유걸의 마음 속으로 파고들었다.

진유걸은 몽롱한 꿈 속에서 깨어나듯 고개를 돌렸다.

다소곳이 두 손을 받치고 서 있는 주수연의 손에는 하나의 정교한 옥패가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맹령정패(盟令正牌)!

구파일방의 인물들을 부릴 수 있는 지고무상(至高無上)한 맹주의 신물(信物).

진유걸 대신 육신(肉身)을 불사른 무림맹주(武林盟主) 강호운룡(江湖雲龍) 남화룡(南華龍)의 영패(令牌)였다.

남화룡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이것을 진유걸에게 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에게 뜨거운 절규를 토하지 않았던가?

무림평화를 위해 사용해 달라고!

하지만 진유걸의 뇌리에 당시의 일이 추호도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그 영패를 보는 순간, 무언가 알지 못할 슬픈 전율이 찌르르 그의 전신을 휘감다가 아스라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진유걸은 그녀가 받쳐 든 옥패를 받아 들며 입을 열었다.

거기에는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맹자(盟字)가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광혈풍은 그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자 실망한 기색을 띠었다.

"그것은 무림에서 상당히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들었어요. 보아하니 공자님께선 협의인신 것 같아……."

진유걸은 맹령정패를 샅샅이 훑어보며 말을 꺼냈다.

"진귀한 물건 같은데… 저에게 주는 것에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태명회가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고 하는데… 혹 이것이 그들을 제지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을까 해서……."

진유걸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 옥패에 어떤 효험이 있길래 감히 한 방파를 제압할 수 있단 말이오? 더욱이 태명회라면 당금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대문파이거늘……."

그는 항우와 함께 복주성으로 오는 도중 태명회에 관한 얘기를 비교적 자세히 들었던 것이다.

주수연은 그 신물에 대해 얘기를 해 주었다.

"기실 이것은 맹령정패라는 무림맹주의 신물이에요. 그러니 이것으로 구파일방의 고수들을 모아 태명회를 상대할 때 쓰도록 하세요."

일순, 진유걸은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맹주의 신물! 으음……!"

그는 신음을 삼키며 주수연에게 의혹의 눈길을 던졌다.

"부인께서는 어찌 이러한 물건을 지니고 있으며, 왜 태명회와 적대관계를 맺으려 하시는 겁니까?"

그의 돌연한 질문에 주수연은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응수했다.

"그 물건은 우연히 거두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태명회는 악(惡)의 집단이란 얘기를 들었어요. 그 때문에……."

진유걸은 그녀가 뭔가를 감추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되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아이가 무척 귀엽군요.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주수연은 침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대꾸하였다.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아니? 세 살이나 된 아이에게 아직 이름이 없다니?

진유걸은 커다란 의혹을 느꼈다.

"어째서 여태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순간, 곤하게 잠든 줄 알았던 아이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까부터 깨어 있었는지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하고 진유걸을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바보. 아들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 주는 거야. 그래서 아직 내 이름이 없는 거야."

어린아이의 의젓한 말에 진유걸은 그만 할 말을 잊고 말았다.

"허허… 그렇군. 이 아저씨가 잘 몰랐구나, 얘야."

진유걸은 아이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어머니, 그런데 저 아저씨가 왜 우리 방에 있어요?"

그 말에 진유걸은 흠칫 놀라며 주수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응, 이 분께 드릴 것이 있어서 모셔 왔단다. 이제 곧 가실 거야."

진유걸은 그녀의 담담한 태도에 크게 감복하고 말았다.

'아, 이러한 여인이라면 태산(泰山)이 무너져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진유걸은 내심 감탄하며 밖으로 나섰다. 더 이상 어린아이의 눈에 벗어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자님, 부디 맹주의 신물을 유용히 써 주십시오."

떨리는 듯한 주수연의 음성이 진유걸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진유걸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저 여인의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사람이길래 저 여인에게 저토록 강한 신념을 안겨 주었을까? 그리고 저 여인은 태명회와 어떤 철천지 원한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주수연과의 관계를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 진유걸.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분신인 아들도 못 알아보는 불운을 겪고 있었다.

그러한 그가 어찌 주수연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황족의 여인으로서 거대한 반란(反亂)을 꿈꾸는 태성왕(太成王)의 세력인 태명회를 붕괴시키려는 그녀의 뜻을…….

진유걸이 막 문 밖을 벗어나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뒷모습을 슬픈 눈길로 주시하던 주수연이 다시 말을 건넸다.

"죄송하지만… 공자님께서 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시지 않겠는지요?"

그녀는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이 말을 꺼낸 뒤 한숨을 내쉬었다.

진유걸은 돌아서고 싶었다. 하지만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아이의 영롱한 눈동자가 자신의 양심을, 자신의 의도를 꿰뚫어볼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서며 뒤돌아보지 않은 채 짧게 한 마디 했다.

"성운(星雲)!"

그것으로 끝이었다.

진유걸은 자신이 어떻게 그런 이름을 떠올렸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는 발걸음을 빨리 놀려 그 장소를 벗어났다.

잠깐 사이, 그는 수연의 거처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수연의 입에서 토해진 아이의 성(姓)을 듣지 못했다.

"진… 성… 운……."

울적했다. 더할 수 없이 막막하고 심사가 뒤틀렸다.

철없는 아이라면 눈물이라도 펑펑 쏟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째서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일까?

진유걸은 스스로에게 자문(自問)하였으나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다만 가슴에 응어리진 그 무엇인가가 단단히 걸려 있는 듯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진유걸은 철웅산이 마련해 준 거처로 발걸음을 옮기다 문득 서찰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그것을 줍는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혈서(血書).

그것은 피로 쓴 글이었다.

<철 낭자에게.

장부(丈夫)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기(義氣)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오.

그러나 이 팽왕수(彭王秀)는 그 어느 것도 겁내지 않소.

다만 그대의 마음을 영원히 차지하지 못할까 오직 그것이 두렵소.

이것이 추호의 가식(假飾)도 없는 본인의 심정이외다.

이 몸의 열혈(熱血)이 싸늘히 식어 갈 때 그대는 기억해 주시오!

당신의 샛별 같은 눈망울을 미치도록 좋아했고, 그대의 꽃잎 같은 입술을 한없이 사랑한 불쌍한 청년을…….

하지만 나는 행복하오. 너무도 희열에 벅차서 가슴마저도 울렁거리고 있소.

별을 헤아리며 보낸 수많은 밤들보다도, 밝아 오는 날의 격전(激戰)은 얼마나 희망적인지…….

이제야 본인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을 고백(告白)하고 있는 것이오.

그렇지만 본인은 알고 있소. 이별(離別)의 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말이오.

널 뛰듯이 뛰는 가슴의 고동(鼓動)과 떨리는 손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소.

그대의 앞에서 시뻘건 피를 뿌린다면, 그것은 그대에게 드리는 사랑에 목마른 청년의 정열(情熱)로 믿어 주시오.

정열의 꽃!

이것은 사랑의 꽃이며, 희망의 꽃이며, 행복의 꽃이며, 영원의 꽃이오.

그대는 잊지 마시오.

뜨거운 심장과 거칠게 뛰는 맥박(脈搏)을 지닌 청년을…….

팽왕수(彭王秀) 서(書).>

진유걸은 차가운 한기가 스쳐 가는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철 낭자는 그가 별로 말이 없고 온순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철 낭자를 절실하게 원하는 열정적인 청년이었군.'

서신은 팽왕수가 철지연에게 보내는 연서(戀書)였다.

하지만 그는 차마 철지연에게 그 서신을 보내지 못하고 품속에 지니고 다니다 어디선가 서신을 흘린 모양이었다.

진유걸은 서신을 들고 자신의 거처와는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얼마쯤 가자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이 드러나며 한 채의 별실이 나타났다. 바로 철지연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휙-!

진유걸은 내력을 담아 철지연의 방으로 수중의 혈서를 날려 보냈다.

쌩-!

혈서는 철지연의 창문을 꿰뚫고 들어갔다.

챙그랑-!

찰나.

"누구냐?"

철지연의 고함이 버럭 터져 나오는 순간, 진유걸의 신형은 이미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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