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二章 재회(再會) (26/35)

第二章 재회(再會)

1

복주성(福州省).

비스듬히 누워 있는 교룡(蛟龍)처럼 장엄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성. 그 성문으로 많은 행인(行人)들이 오고 가고 있었다.

하지만 성문 입구에는 회의 차림에 병기를 휴대한 인물들이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지켜 서 있었다. 

그들은 일견하기에도 고수인 듯, 저마다 태양혈이 불쑥 돌출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성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그들의 위용에 잔뜩 주눅이 든 채 기가 죽어 있었다.

회의무사들은 형형한 안광으로 성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노려보며 가끔 사람을 붙잡아 조사하거나, 왕부(王府)에서 파견된 관병(官兵)들과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 때 홀연.

두두두두-!

말발굽이 요란하게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눈부신 백마(白馬)가 뽀얀 황진(黃塵)을 일으키며 질주해 왔다.

"엇! 어이쿠! 피해라!"

"아앗! 저 말이……!"

성문 입구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ㅎ어졌다.

그러자 회의무사 다섯 명과 관병들이 재빨리 성문을 가로막았다.

"멈춰라!"

회의무사 중 얼굴이 넙적하고 눈끝이 치켜올라간 인물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옆구리에서 날이 시퍼런 대두도를 꺼냈다.

만약 말이 멈추지 않는다면 그대로 베어 버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히잉- 히이잉-!

백마는 그들의 위협에 멈추어 서더니, 잠시 후 말 위에서 한 인영이 번개처럼 바닥으로 내려섰다.

한 송이 도화꽃처럼 붉디붉은 홍의를 입은 너무도 성숙한 몸매를 지닌 여인.

갸름한 용모에 하얀 목덜미 선이 지극히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고, 불룩하게 솟아오른 젖가슴과 팽팽하게 굴곡을 이룬 둔부는 사내의 심장에 불을 지르고도 남았다.

매혹적인 몸매의 여인은 서릿발같이 차갑게 내뱉었다.

"당신들은 어째서 내 앞길을 막는 거죠?"

회의인들과 관병들은 그녀의 앙칼진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그녀의 아름답고 농염한 모습에 잠시 넋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회의인 중 이마가 좁고 입술이 두툼한 인물이 거만하게 대꾸했다.

"왕부에 사고가 생겼소. 왕야께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조사하라는 엄명(嚴命)을 내리셨으니 낭자도 예외가 될 수 없소."

"나는 철영보의 철지연이에요!"

아, 백화낭자(百花娘子) 철지연(鐵芝燕).

강남의 소문파 철영보 보주 철악거수(鐵嶽巨手) 철웅산(鐵雄山)의 무남독녀(無男獨女)가 아닌가?

광혈풍 진유걸을 마음 속 깊이 사모(思慕)하는 여인.

그녀가 자신의 별호를 밝히자 회의인들은 흠칫 놀라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비록 철영보가 소문파에 불과하긴 하지만 상당히 역량(力量) 있는 문파가 아닌가?

더구나 철영보가 이 곳 복주에 자리하고 있느니만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철영보주 철웅산이라 할지라도 그냥 통과할 수는 없소."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붉은 장포를 입은 괴인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 역시 장포 색깔처럼 붉은색이었다.

철지연은 그를 보자 마치 괴물을 본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 노인이 나타나자 회의인들은 재빨리 포권을 취하며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외쳤다.

"속하들이 향주님을 뵙습니다."

나타난 인물은 바로 안휘성 만화장에서 진유걸과 마주친 적이 있던 적면노괴(赤面老怪) 황원우(黃元宇)였다.

금마혼천신(金馬魂天神)의 제자로 태양경(太陽經)이란 극양의 무공을 성취한 사도의 거물.

철지연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노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적면노괴 황원우는 음침한 눈빛으로 그녀의 아래위를 훑어봤다.

"태명회의 풍성당(風成堂) 향주요."

그의 짤막한 대꾸에 철지연은 싸늘한 코방귀를 날렸다.

"흥!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태명회의 위세가 하늘을 찌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소녀가 물어 본 것은 당신의 명호예요."

그녀의 음성에는 차디찬 한기가 어려 있었다.

적면노괴 황원우는 비웃듯 음충맞은 웃음을 지었다.

"흐흐흐… 본좌의 명호를 밝힌들 너같이 어린 계집이 어찌 알 수 있겠느냐?"

그 말에 백화낭자 철지연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닥치시오! 감히 나를 능멸하다니… 에잇!"

그녀는 수중의 연편(軟鞭)을 무섭게 휘두르며 짓쳐들었다.

위잉- 윙-!

말채찍으로 사용하던 가죽띠가 허공에 편영(鞭影)을 이루며 적면노괴의 전신을 뒤덮었다.

적면노괴는 쾌속무비한 신법을 구사하며 그녀의 공격을 손쉽게 무위로 돌렸다.

"후후후… 어리석은 계집!"

그는 싸늘한 목소리를 토하며 길이가 두 척 가량 되는 단봉(短鋒)을 꺼내 들었다.

강철로 이루어진 봉은 별로 위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적면노괴 황원우는 쥐고 있던 단봉에 서서히 진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철단봉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게 아닌가?

순식간에 단봉은 불에 달군 듯 시뻘겋게 변해졌다.

이 괴이한 광경을 목격한 백화낭자 철지연은 대경실색을 금치 못했다.

"아아……!"

천하에 이렇듯 괴이한 신공(神功)이 있단 말인가?

그녀가 경이의 시선으로 황원우의 단봉을 주시하고 있을 때.

"이것이 네년의 그 고운 피부에 닿게 되면… 정녕 볼 만할 것이다."

적면노괴는 징그럽게 말하며 불덩어리가 뚝뚝 떨어지는 단봉에 침을 퉤 뱉었다.

치치치치익-!

끔찍스런 음향이 울리며 단봉에서는 하얀 김이 피어 올랐다.

백화낭자 철지연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 갔다.

"당… 신은 지금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는 거죠?"

적면노괴는 음흉하게 눈알을 굴리며 대꾸하였다.

"몰라서 묻는 게냐? 네년의 그 오동통한 살을 알맞게 익히려는 것이지!"

철지연은 가슴이 섬칫하여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러지 말아… 요."

그녀는 이제까지의 당당하던 자세는 온데간데없이 두려움으로 덜덜 떨며 목청을 높였다.

적면노괴는 그런 철지연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괴소를 터뜨렸다.

"푸흐흐흐… 복주성의 여걸(女傑)이라는 백화낭자 철지연도 별수없는 계집이로군."

이어 그는 천천히 철지연의 앞으로 다가갔다.

철지연은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뒤로 주춤주춤 밀려났다.

적면노괴는 싸늘한 냉소를 흘리며 단봉으로 철지연의 가슴을 후려쳐 가는 동시에 고함을 버럭 내질렀다.

"가거라!"

화르륵- 화륵-!

날카롭고 섬칫한 음향이 터져 나오며 시뻘건 불덩어리가 철지연의 가슴을 노리고 무섭게 쏘아 들었다.

"아악!"

철지연은 기겁할 듯이 자지러지며 민첩하게 몸을 피했다.

그녀는 수치심으로 인하여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적면노괴가 득의의 미소를 흘리며 다시 공세를 취하려는 순간.

"멈추라, 노괴!"

웅후한 폭갈이 적면노괴 황원우의 고막을 무섭게 후려쳤다.

적면노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듯 놀라며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찰나.

"헉!"

그는 목전에 등장한 흑의청년을 발견하고는 대경실색을 금치 못했다.

'저 자는 광서성에 출현하여 개방방주 영걸신개 일행에게 도움을 줬다던 그 무명인…….'

적면노괴는 이미 그에 대한 보고를 수하에게 보고받은 바 있었다.

그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자, 흑의청년 뒤에 거대한 체구의 중년 거지 한 명이 서성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짐작이 맞음을 알자, 등골이 오싹했다.

'보고에 의하면, 저 청년의 무공은 실로 불가사의하다고 했는데…….'

흑의청년과 중년거지는 바로 불마공자 진유걸과 항우였다.

그들은 보름 만에 이 곳 복주성에 오게 된 것이다.

진유걸은 적면노괴를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외쳤다.

"군자(君子)는 패할지언정 여인의 몸을 노려서는 안 된다는 것도 모르느냐? 더구나 그토록 흉물스런 열화공(熱火功)으로……."

진유걸은 호통을 치며 잠시 고개를 돌려 철지연을 응시했다.

찰나지간 백화낭자 철지연은 진유걸과 마주치자 심한 격동을 일으켰다. 

'아아, 광혈풍! 아냐, 그 분과 흡사하긴 하지만 어딘가 다르다.'

철지연은 자기를 구해 준 사람이 광혈풍과 닮았다는 사실에 흠칫 놀랐다.

진유걸은 처음 보는 철지연이 자기를 보고 놀라자 의혹을 느꼈다.

그 때였다. 철지연이 문득 다급한 고함을 내질렀다.

"앗, 공자님! 위험해요!"

진유걸은 순간적으로 그의 배후로 밀려드는 뜨거운 기류를 느꼈다.

쇄애액-!

하지만 그는 적면노괴의 암습에 코웃음을 날리며 짓쳐드는 단봉을 움켜잡아 갔다.

그 순간, 적면노괴의 안면은 희열로 가득 찼다.

'흐흐흐… 이렇게 미련한 놈이 있나? 열화봉을 손으로 잡다니… 이제 곧 네놈의 손바닥이 숯처럼 새카맣게 탈고 말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적면노괴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진유걸이 단봉을 움켜쥐고는 꼼짝도 하지 않는 게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단봉이 점점 식어 가기 시작하는 것이었으니…….

삽시간에 철단봉은 서리가 엉킬 정도로 차가워지고 말았다.

동시에 적면노괴는 손끝으로부터 스며드는 극심한 냉기(冷氣)에 일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으으……!"

그러나 그는 단봉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그의 손은 마치 단봉에 꼭 달라붙은 듯 떨어지지가 않았다.

진유걸은 무참하게 일그러져 가는 적면노괴의 안면을 응시하며 싸늘한 음성을 토했다.

"이제야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깨달았느냐?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러자 주위에 몰려 있던 회의인들이 일제히 병기를 뽑아 들었다.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그들이 나서려 하자 개방제자 항우가 고함을 내지르며 그들의 앞을 막아 섰다.

그는 흉흉한 기세로 회의인들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누구든 움직이는 놈이 있으면 머리통이 부서질 것이다."

회의인들이 그의 살벌한 기세에 주춤거리는 순간.

"으아악……!"

잔혹한 비명과 함께 적면노괴가 뒤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의 붉은 안면은 무참하리만치 창백하게 변해 있었고, 칠공에서는 피가 꾸역꾸역 흘러 나왔다. 

그는 진유걸의 한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 것이다.

회의인들과 관병들은 믿고 있던 적면노괴가 너무도 쉽게 죽음을 당하자, 덜컥 겁을 집어먹고는 진유걸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도망을 쳤다.

철지연은 그들이 물러가자 진유걸에게 다가와 감사의 말을 전했다.

"고맙습니다. 공자님이 아니었더라면 큰 봉변을 당할 뻔했어요."

진유걸은 그녀가 어딘지 낯익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어디서 만났는지는 통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외다. 단지 태명회란 문파가 방약무도(傍若無道)한 무리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라 하기에 조금 손을 봐 준 것뿐입니다."

그의 음성을 듣게 된 백화낭자 철지연은 크게 방심(芳心)이 흔들렸다.

이 청아한 목청, 그것은 분명 자신의 연분홍빛 가슴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던 광혈풍의 음성이 아닌가?

그 어느 날, 스쳐 가는 바람처럼 들었던 목소리이지만 그녀는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공자님은 혹 광혈풍이 아니신가요?"

진유걸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나는 불마공자라 하오! 그런데 낭자는 광혈풍이란 사람을 알고 있소?"

"예, 그 사람과는 예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어요. 그는……."

백화낭자 철지연은 당시를 회상(回想)하며 쑥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놀려 대던 광혈풍에게 화가 나서 대들었지만 털끝 하나 건들지 못했던 그 때의 일이 새삼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진유걸은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이 나와 많이 닮은 모양이구려. 그리고 낭자는 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는 모양이구려?"

철지연은 그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자 얼굴을 붉혔다.

진유걸은 그녀의 볼에 떠오르는 홍조를 보며 내심 실소를 머금었다.

'광혈풍이란 사람은 정녕 행복한 인물이군. 이토록 아리따운 낭자의 사랑을 받으니…….'

기억을 잃어버린 진유걸은 한때 철영보(鐵英堡)에서 인피면구를 쓰고 진소랑(陳昭郞)이란 신분으로 있을 때, 자신과 철지연이 서로 미워하던 사이란 것을 알지 못한 채 그런 생각을 했다.

이 때 개방제자 항우가 나서며 두 사람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그들이 다시 몰려올 테니 어서 이 자리를 피하도록 합시다."

진유걸은 그제서야 흠칫 놀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을 때였다.

그들의 주위는 구경을 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이 진유걸 일행과 바닥에 쓰러진 적면노괴를 번갈아 보며 웅성거리고 있을 때였다.

"비켜라! 물러서!"

엄청난 폭갈과 더불어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두두두두-!

그 바람에 몰려 있던 군웅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장내에는 순식간에 진유걸과 항우, 철지연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등장한 한 떼의 인마.

선두에 나타난 인물은 홍안학발(紅顔鶴髮)의 노인이었다.

부리부리한 눈과 한 일자의 굳은 입술은 그의 용맹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철지연에게로 달려왔다.

"연아, 무사했구나!"

철지연은 노인에게로 매달리며 어리광이 뚝뚝 떨어지는 음성을 냈다.

"아버님, 왜 이제야 오셨어요. 그 바람에 하찮은 것들에게 수모를 당했잖아요!"

철악거수 철웅산은 그녀의 등을 토닥거려 주며 장내를 둘러보았다.

문득 그는 바닥에 나뒹구는 적면노괴 황원우를 발견하고는 대경실색하였다.

"앗! 적면노괴 황원우!"

그제서야 철지연도 상대의 내력을 알고는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적면노괴라면 금마혼천신의 제자가 아닙니까?"

철웅산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으며 침중한 빛을 띠었다.

"그렇다. 설마 네가……?"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한편에 서 있던 진유걸을 가리켰다.

"이 분 공자님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정말 큰 낭패를 당할 뻔했어요."

철웅산은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아, 뛰어난 용모와 범상치 않은 기개! 필경 대단한 내력을 가진 젊은이일 게야.'

철악거수는 진유걸에게 미소를 보이며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노부는 철영보 보주 철웅산이라 하오. 미천한 딸애를 구해 주어 정녕 고맙소이다."

진유걸은 그를 주시하며 거만한 태도로 대꾸했다.

"본 공자는 불마공자라 하외다."

'오만무례(傲慢無禮)한 놈이군. 감히 보주님께…….'

철웅산의 뒤편에 서 있던 황의청년 한 명이 진유걸의 태도에 노기를 띠었다.

장검을 착용한 청년도 상당히 준수한 측에 속했으나, 진유걸에 비하면 그야말로 달빛 앞의 반딧불이었다.

철웅산 역시 기분이 상했으나 겉으로는 내색치 않았다.

이들의 태도로 미루어 불마성의 등장이나 불마공자의 출현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싶었다.

철웅산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진유걸에게 말했다.

"공자를 본보에 모시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소이까?"

철지연도 빙긋 애교 있게 웃으며 진유걸을 독촉했다.

"그래요. 본보에 잠시만 머물다가 가세요."

"하지만 본 공자는 여기 이 사람을 호……."

그는 말을 하다 말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개방제자 항우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게 아닌가?

항우는 호로병을 소방주인 취풍개에게 갖다 주기 위해 개방으로 간 모양이었다.

그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황의청년이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걸인은 벌써 성 안으로 사라졌소. 찾아봐야 헛수고요."

진유걸은 그의 냉랭한 말투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백화낭자 철지연이 얼른 나서며 그를 소개해 주었다.

"이 분은 본보의 총관으로 계신 하북공자(河北公子) 팽왕수(彭王秀)라는 분이십니다. 사대세가의 자제분이시죠."

진유걸은 그를 슬쩍 응시할 뿐 아무런 인사말도 보이지 않았다.

철웅산은 노련한 인물답게 얼른 분위기를 바꾸었다.

"자, 팽 총관은 수하들에게 지시하여 적면노괴의 시신을 치우도록 하게. 그리고 이 분 소협께서 타고 갈 말도 준비해 주고."

팽왕수는 진유걸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마지못해 대답하였다.

"알겠습니다."

그는 가볍게 포권을 취하고는 사라져 갔다.

진유걸은 그리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들 부녀가 하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잠시 후 진유걸은 철웅산, 철지연과 함께 나란히 말을 몰았다.

철지연은 진유걸이 마음에 드는지 연방 실낱 같은 웃음을 흘리며 종알댔다.

"공자께서는 불마공자라 하셨는데 불마성은 어디에 있는 거죠?"

"십만대산에 있소."

백화낭자 철지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친을 바라봤다.

철웅산 역시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중원에는 처음 출도하시는 길인가요?"

진유걸은 철지연의 물음에 고소를 머금었다.

"글쎄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소."

철지연은 더욱 의혹을 느끼며 다그치듯 물었다.

"공자님의 본명(本名)이 어찌 되시나요?"

"진유걸이라 하오."

그가 짤막하게 대꾸하자 철지연이 읊조리듯 말했다.

"진… 유… 걸……?"

기실 강호에서는 광혈풍의 본명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철지연이나 철웅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진유걸은 혹시나 그들이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까 싶어 물었다.

"혹 강호상에서 그러한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의 물음에 철웅산과 철지연이 씁쓸한 미소를 띄웠다.

"소녀는 워낙 견문이 좁아서……."

"글쎄요, 노부 역시 금시초문(今時初聞)이오."

진유걸은 혹시나 했다가 실망을 금치 못했다.

'항우 역시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대체 어디 가서 나(我)의 잃어버린 세월을 찾는단 말인가?'

말을 주고받는 사이 그들은 철영보에 도착하였다.

2

실로 특별한 대우가 아닐 수 없었다.

어찌 외간남자(外間男子)가 규중처녀(閨中處女)의 침실을 함부로 드나들 수 있단 말인가?

진유걸은 단 향내가 물씬 피어 오르는 철지연의 침실로 들어서며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바닥은 붉은색 융단이 깔려져 폭신한 느낌을 주었고, 주홍빛 꽃무늬가 수놓아진 벽면에는 한 자루의 단검이 걸려 있었는데 칼집까지도 붉은색이었다. 단 한 가지 흠이라면 창문에 드리워진 휘장이 조금 어두운 색이라는 것이었다.

진유걸은 제법 아름답게 꾸며진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 곳의 치장은 낭자가 직접 한 거요?"

"네, 마음에 드나요?"

"낭자는 시원스럽고 명랑한 성격인 것 같구려. 성질이 좀 급하긴 하지만 남을 잘 이해해 줄 줄도 알고……."

"어머, 공자님께서는 그걸 어떻게 아세요?"

진유걸은 여전히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방 안의 분위기가 가르쳐 주었소. 그리고 창문에 드리워진 휘장 색깔이 어두운 것으로 미루어 우울한 면도 있겠구려."

철지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듯 놀랐다.

"방 안의 장식만 보고도 사람의 성격을 알아맞히다니… 정녕 놀라운 혜안을 지니셨군요?"

이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아가씨,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시비인 듯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일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진유걸은 자신도 모르게 한 줄기 전율을 느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지고 들어와요."

이어 한 여인이 옥으로 만든 듯한 쟁반에 차 주전자를 담아 들고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다.

아, 해월영(海月影) 주수연(朱洙淵)!

바로 광혈풍 진유걸의 연인 주수연이 아닌가?

사랑하는 한 남자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여인!

오직 진유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기대 속에 살아온 그녀가 아니던가?

주수연은 주렴을 헤치고 들어서다 진유걸과 눈이 마주쳤다.

찰나.

"앗!"

그녀는 기절초풍할 듯 놀라며 들고 있던 차 쟁반을 놓치고 말았다.

쨍그렁-!

바닥에 떨어져 조각 난 그릇들.

그것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주수연의 가슴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었다.

철지연은 대경실색하여 외쳤다.

"아니, 혜령(蕙玲)! 이 무슨 추태예요? 어서 치워요."

혜령이라 불린 주수연은 얼른 깨진 도기 조각들을 주워 모았다.

'상공이 아냐. 겉모습도 많이 달라져 있고, 특히 눈이 그 분의 눈빛이 아냐. 한데, 저 분을 보는 순간 왜 이리도 마음이 심란할까?'

진유걸은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태도에서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혜령이라 했소?"

그의 목소리가 울려 나오는 순간 수연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 분이야. 상공……!'

그녀는 얼른 고개를 들며 진유걸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 쏟아지는 그 빛은 마력적이긴 하나, 부드러우면서 깨끗한 진유걸의 눈빛이 아니지 않는가?

또다시 주수연에게는 허탈감과 함께 진한 아픔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어찌 그가 사랑하는 남자의 눈빛을 모르겠는가?

음성은 그가 분명한데, 눈빛이 그가 아니라니?

진유걸은 그녀의 태도에 의혹을 떠올리며 물었다.

"당신은 혹 나를 알고 있소?"

수연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철지연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공자님! 장원 밖에도 잘 나가지 않고, 아기까지 있는 부인이 어찌 공자님을 알겠어요?"

주수연에게 아기라니?

진유걸은 큰 실망을 느끼고 말았다.

'으음, 하긴 강호인들도 모르는 나를 저 여인이 알고 있을 리가 없지!'

"혜령의 남편은 어느 날 사라져 버렸어요. 그래서 지금은 본보의 장 의원이……."

순간, 혜령의 입에서 비단폭이 찢어지는 듯한 절규가 토해졌다.

"아가씨!"

철지연은 그 바람에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알았으니 새로 차를 가져와요."

혜령은 비통한 얼굴을 한 채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축 처진 어깨가 진유걸의 가슴에 아프게 새겨졌다.

"보 안에서는 소문이 자자한데 정작 당사자인 혜령만 부정하고 있으니……."

진유걸은 그녀의 일에 대해 이상하게도 집착이 갔다.

철지연은 그가 혜령에게 관심을 보이자, 그녀를 화제로 삼아 말을 이어 갔다.

"장 의원과 그녀의 염문(艶聞)은 이미 보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하지만 당사자인 혜령만은 극구 부인하고 있어 아버님께서 골머리를 앓고 계시지요."

"무엇 때문에 말이오?"

"아버님께서는 혜령이 외로울까 봐 장 의원과 맺어 주려 하시거든요."

진유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참 좋은 일이구려."

아아, 이 무슨 웃지 못할 비극(悲劇)인가?

자신의 정녀(情女)가 남의 남자와 맺어지려 한다는데 좋은 일이라고 말하다니?

정녕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진유걸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아파 왔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 조금 전, 혜령이라는 여인이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는데… 다시 들어오면 그 때 물어 봐야겠군.'

그러나 잠시 후, 혜령 대신 다른 시녀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진유걸은 내심 실망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묵묵히 차를 마셨다.

이 때, 철웅산과 총관 팽왕수가 방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아버님."

철지연이 애교를 떨며 일어났으나 진유걸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일순, 팽왕수의 눈썹이 치켜올려졌다.

그렇지 않아도 철지연의 일로 인해 심사가 뒤틀려 있던 그였다.

"불마공자!"

실내가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으나 진유걸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았다.

"본 공자는 귀가 막히지 않았소!"

"귀하는 너무 방자하구려. 본 총관이 한 수 가르침을 내리지 않는다면 본보에 사람이 없는 줄 알겠소!"

"팽 총관은 너무 자신만만한 것 같구려. 하지만 본 공자가 이러는 것은 사문의 규칙 때문이오."

팽왕수는 이빨을 부드득 갈아붙이며 노기를 터뜨렸다.

"사문의 규칙이라니?"

"사부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히거나 예를 먼저 취하지 말라 하셨소. 물론 이것을 내세워 총관의 가르침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니오."

그의 끝말은 상대를 비아냥거리는 듯한 인상이 짙었다.

하북공자 팽왕수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귀하의 사부님이 대체 어떤 인물이시길래 그다지도 안하무인(眼下無人) 격이란 말이오?"

"천살성 사마기라 하오!"

"헉! 천살성?"

"사마기라고?"

"사마기의 전인?"

세 사람은 동시에 까무라칠 듯 경악하였다.

설마 그가 천여 년 전의 대살성인 사마기의 후예일 줄이야?

그러나 누구보다 더 놀란 사람은 그와 시비를 벌였던 팽왕수였다.

그가 무림 사대세가 중의 자손으로 철영보에 입문한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백화낭자 철지연!

바로 이 여인을 깊이 사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원래 하북성에서 누이동생 팽소미를 찾기 위해 출두했었다.

옥봉여협 팽소미라면 바로 탈혼사자 독고휘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여인이 아닌가?

하북공자 팽왕수는 그녀를 찾아 유아독녀궁까지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씁쓸한 심정으로 돌아가던 중 우연히 철지연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첫눈에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고는 그 길로 철영보에 몸을 의탁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를 일 년 남짓, 이제 어느 정도 철지연과의 사이가 무르익어 가는 판인데 난데없이 불마공자가 출현했으니…….

하지만 팽왕수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를 생각하며 얼마나 많은 날들을 뜬눈으로 새웠던가?

오직 한 여인의 사랑을 얻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그가 아닌가?

한데 이제 와서 그녀를 단념해야 하다니? 

이것은 정녕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북공자 팽왕수는 입술을 으스러져라 깨물며 음성을 높였다.

"귀하가 설혹 그 마황(魔皇)의 전인이라 할지라도, 본 총관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게요."

그의 당당한 태도에 놀란 것은 오히려 철웅산과 철지연이었다.

철웅산은 팽왕수를 말리기 위해 그를 불렀다.

"이것 보게, 총관."

팽왕수는 철웅산이 어떤 말을 하려 하는지 미리 짐작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보주님께서는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저의 뜻을 막지 말아 주십시오."

그의 입가에 쓸쓸하면서도 기이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복잡한 그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이튿날 비무(比武)를 벌이기로 합의했다.

날이 이미 어두워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팽 총관은 원래 온순하고 침착한 분이었는데……."

진유걸은 철지연의 중얼거림을 귓전으로 흘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팽 총관! 진 공자를 객실로 안내해 드리게."

늙수그레한 철웅산의 목소리가 웬일인지 떨리듯 새어 나왔다.

실내의 분위기는 착잡한 가운데 일말의 냉기가 배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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