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랑군 제3권 차례
제목: 강호랑군 제3권(전3권)
지은이: 유소백
- 차 례 -
第一章 불마공자(佛魔公子)
第二章 재회(再會)
第三章 맹령정패(盟令正牌)
第四章 분시대살진(分屍大殺陣)
第五章 천지화합비공(天地化合秘功)
第六章 강호정랑(江湖情郞)
第七章 풀어진 오해(誤解)
第八章 정맹원(正盟院)
第九章 배후인물(背後人物)
第十章 대혈전(大血戰)
第十一章 가면(假面) 뒤의 얼굴
第一章 불마공자(佛魔公子)
관도(官道).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고 널찍한 탄탄대로(坦坦大路).
그 위를 깔끔한 차림의 흑의서생 한 명이 휘적휘적 걷고 있었다.
비록 서생 차림이었으나 그의 등에는 한 자루 도(刀)가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문사(文士)가 아니라 무림인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의 생김새는 고관대작(高官大爵)이나 부호(富豪)의 자제로만 보였다.
더구나 청년의 용모는 정녕 군계일학(群鷄一鶴)의 미장부(美丈夫)가 아닐 수 없었다.
불마공자(佛魔公子) 진유걸(陳儒傑).
그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 풍모를 갖출 수 있겠는가?
탈혼사자(奪魂使者) 독고휘(獨孤煇)의 신비한 눈동자를 이식받고 광명(光明)을 되찾은 진유걸.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그의 눈빛은 잘생긴 얼굴과 조화(造化)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가에는 깊은 수심(愁心)이 가득 차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진유걸은 깊은 상념에 빠진 채 마냥 관도 위를 걷고 있었다.
광서성(廣西省)에서 호남성(湖南省)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상당히 호젓한 곳이라 인가(人家)는 물론 행인도 눈에 띄지 않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관도의 한옆에 위치한 조그만 노상 찻집이 진유걸의 시야로 들어왔다.
'목이나 축이고 가야겠구나.'
그가 들어서자 배가 나오고 얼굴이 둥그스럼한 사십대 사내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굽신거렸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가장 좋은 차를 주시오."
찻집 주인은 허리를 굽히며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래 봬도 이 곳은 전통 있는 찻집입죠. 사천(四川)에서도 알아주는 구향차(九香茶)를 올리겠습니다요."
그는 잠시 후 구향차를 내왔다.
진유걸은 차 향기를 음미(吟味)하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었다.
'어째서 그 중년미부가 자꾸 떠오를까? 그 중년미부와 세 명의 화상들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어. 그 때문에 그 중년미부를 죽이지 못하고 말았다. 살심이 발동되지 않았더라면 두 명의 라마승도 죽이지 못했을 거야.'
그는 지금 불마성에서의 격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살시나찰(殺屍羅刹)이 죽지 않고 약간의 상처만 입은 것은, 진유걸이 손속에 인정을 두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진유걸은 계속 생각에 빠져들었다.
'광혈풍, 탈혼사자… 그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그 호칭들 역시 어디선가 들어 본 기억이 나는 듯하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으니… 어쨌든 내 기억의 실마리를 잡고 있는 사람은 내가 깨어났을 때 본 그 서찰을 쓴 마령신의(魔靈神醫)라는 사람이다. 그 사람을 찾게 되면 내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소림사로 가 보자.'
이 때였다.
타탁- 타타탁-!
관도를 가로지르며 한 떼의 거지 무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일곱이었는데 한 명은 다쳤는지 업혀 있는 처지였다.
"자아, 우선 여기에 모시게."
젊은 거지가 업혀 있던 늙은 거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눕혀진 늙은 거지.
봉두난발(蓬頭亂髮)의 머리는 새가 둥지인 줄 알고 날아들 정도였고, 온몸은 때가 덕지덕지 끼여 땟물이 줄줄 흘렀다.
듬성듬성 나 있는 눈썹은 각을 이루고, 눈은 왕방울을 방불케 했으며, 주먹만한 코는 주독(酒毒)이 오른 탓인지 시뻘갰지만, 입술만큼은 그 얼굴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작고 예뻤다.
그는 잠시 후 정신을 차리더니 커다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으음, 여기가 어디냐?"
안색이 싯누런 중년 거지가 얼른 대답했다.
"광서성입니다, 방주님. 어서 기운을 회복하셔야지요."
그러자 늙은 거지는 상체를 벌떡 일으키더니 그 중년 거지의 따귀를 찰싹 후려갈겼다.
"이 놈아! 본 방주가 업혀 가는 것이 그리도 배가 아프단 말이냐? 못된 놈! 그런 심보를 가지고 있으면 평생 이 짓밖에 못한다."
늙은 거지는 호통을 치더니 다시 드러누웠다.
뺨을 얻어맞은 중년 거지는 풀이 죽은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진유걸은 웃음을 참느라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크흐흐흣… 정녕 괴물이로군. 개방방주( 幇幇主) 영걸신개(英傑神 )…….'
순간, 진유걸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자신은 개방방주 영걸신개를 한 번도 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명호를 알고 있다니…….
'불마성에서 각 문파에 대한 것은 조금씩 익히긴 했으나, 저 늙은 거지가 영걸신개라는 것을 내가 어찌 알았을까?'
그는 자신이 영걸신개라는 명호를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저 사람이 진정 영걸신개라면 나와도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진유걸은 염두를 굴리며 계속해서 그들을 주시했다.
영걸신개는 드러누운 채 앓는 소리를 내며 엄살을 떨었다.
"끙끙… 그 놈들 정말 지독하군. 그 까짓 술 한 병 훔쳤다고 이토록 뭇매를 가하다니……."
그러자 젊은 거렁뱅이가 나서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주님, 어서 업히십시오. 또 가야 합니다."
영걸신개는 그를 힐끔 살피더니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이 곳은 향기로운 차 냄새도 나고 하니… 내가 묻히기에 딱 알맞은 장소야."
그 말이 떨어지자 주위의 개방제자들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방주님!"
영걸신개는 제자들의 눈치를 살피며 넉살 좋게 말했다.
"본 방주는 눈을 감기 전에 차 한 잔을 마셔 보고 싶구나. 누가 차를 사 오겠느냐?"
안색이 좋지 않은 중년 거지가 나서며 손을 내밀었다.
"제자가 사 오겠으니 은자를 주십시오."
그 말에 영걸신개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이 놈아! 그러니까 너는 평생 이것밖에 못한다고… 집신양… 그 무엇이냐? 뭐 그런 것을 하려면 눈치가 있어야지."
영걸신개가 말을 얼버무리자 중년 거지가 얼른 대답했다.
"집신양… 이 아니라 입신양명(立身揚名)인데요."
영걸신개는 그 말을 듣자 다시 벌떡 일어났다.
"고얀 놈! 금고를 통하여 제자가 사부를 가르친 예는 없었느니라!"
"금고가 아니옵고, 고금(古今)……."
찰싹-!
이번에는 중년 거지의 좌측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또다시 비칠비칠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뒤로 물러섰다.
영걸신개는 그를 매섭게 쳐다본 뒤 오순 가량의 제자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운삼(雲三), 숨겨 둔 은자 없느냐?"
운삼이라 불리운 개방 인물이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영걸신개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잔뜩 어려졌다.
"그렇다면… 석두(石頭)는 어떠하냐?"
돌머리라 불리운 젊은 거지도 고개를 흔들었다.
영걸신개는 더욱 인상을 쓰며 다른 제자에게도 물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모두 마찬가지로 고개를 내저었다.
영걸신개는 벌러덩 드러누우며 한탄을 했다.
"제자들이 이렇게 득실거리는 데도 나에게 차 한 잔 사 주는 놈이 없다니… 참으로 한심하구나."
그가 낙심천만하자 개방제자들은 송구스럽다는 듯 일제히 머리를 떨구었다.
"우매하고 무능력한 제자들을 질책하여 주옵소서."
그러자 영걸신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없군. 내 피 같은 은자로 차를 사서 마시는 수밖에……."
그는 품안을 뒤적이더니 은자 한 냥을 꺼내 한 제자에게 내밀었다.
"차 한 잔 주문하고 나머지는 거슬러 와."
이제까지의 모든 광경을 주시한 진유걸은 우습기도 하고 한편 어이가 없었다.
'대체 저 사람들이 지금 뭘하고있는 거야?'
그들의 행동은 진유걸의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기상천외(奇想天外)한 일을 일삼는 영걸신개 일행들.
영걸신개는 차를 주문한 뒤 제자들을 쭉 훑어보았다.
"너희들은 평소 절약정신이 부족해서 오늘날 이런 국면에 있어서도 전혀 이 사부를 위해……."
그가 횡설수설 하려 하자 운삼이 나서며 얼른 제지시켰다.
"방주님, 그만 고정하십시오. 내상이 더욱 악화되십니다."
영걸신개는 그 소리를 듣자 문득 자신이 아팠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듯 다시 비명을 질러 댔다.
"어이구! 어이구! 영걸신개가 이렇듯 황폐한 산에서 죽게 되다니… 사부님, 조사(祖師)어른, 걸신(乞神)! 제발 이 영걸신개를 굽어 살피소서."
그가 스스로의 명호를 밝히는 순간, 진유걸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영걸신개라고? 이럴 수가? 내 짐작이 맞다니…….'
그는 그 늙은 거지가 영걸신개임을 깨닫자 그들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았다.
순간, 진유걸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들 모두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는 게 아닌가?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진유걸은 종잡을 수 없는 상황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지경이었다.
도대체 목전의 이 해괴한 사건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포복절도(抱腹絶倒)할 이 모든 일이 단순한 장난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여기에는 필경 무슨 내막이 있을 것이다.'
진유걸은 나름대로 생각하며 그들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영걸신개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본 방주가 의식주(衣食住)를 걱정하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되면 너희들도 따를 것이냐?"
개방제자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어찌 그리 좋은 곳을 마다하겠습니까? 제자들도 꼭 데려가 주십시오."
영걸신개의 안면에 희미한 미소가 잡혔으나 그것은 일순간뿐이었다.
"그러니까 네놈들은 겨우 이런 짓밖에 할 수가 없는 거야. 모두가 내 뒤를 따르면 이 왕부(王府)에서 훔쳐 온 미주(美酒)는 누가 마실 것이냐?"
석두라는 개방제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것은 소방주께서 드시면 될 것입니다."
영걸신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멍청한! 그렇다면 누구든 이 술병을 그에게 전해야 할 것이 아니냐? 모두 나를 따르면 누가 이 술을 그에게 갖다 주겠느냐?"
그는 옆구리에 차고 있던 호로병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누가 이것을 소방주에게 전해 줄 것이냐? 눈물이 날 정도로 아깝긴 하지만, 그 자에게 이 차를 마시도록 해 주리라."
개방제자들은 서로 쭈뼛쭈뼛하며 눈치만 살필 뿐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영걸신개는 답답한 듯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이 놈들아! 그토록 꼼짝하기 싫어해서 어찌 이 짓을 하려 하느냐? 에잇! 본 방주가 손수 전하고 향기로운 차를 마셔야겠구나. 누구든지 입맛을 다시는 놈이 있다면 뺨을 후려갈기고 말겠다."
그 말이 떨어지자 중년 거지가 나섰다.
"제자가 그 일을 수행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잘못하여 뺨을 두 대씩이나 얻어맞은 인물이었다.
영걸신개는 그 자를 올려다보며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역시 때려 가면서 가르쳐야 한다니까. 아까의 매가 효과가 있었군. 부탁한다, 항우(項羽)."
항우라 불린 중년 거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진지한 얼굴로 영걸신개를 바라보았다.
진유걸은 천천히 차를 마시며 그들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저들은 결코 연극(演劇)을 하는 것이 아니다. 눈빛에 격동이 가득 차고 집념이 어려 있어. 아무래도 핵심은 저 호로병에 있는 듯하군.'
그는 눈빛을 빛내며 유심히 푸른 빛깔을 한 호로병을 바라보았다.
항우라는 중년 거지는 찻잔을 받아 들고 서서히 입으로 가져갔다.
영걸신개는 매우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설마하니 그것을 다 마실 생각은 아니겠지? 요만큼만 남겨 주지 않겠나? 요만큼만……."
그는 엄지와 인지 사이를 조금 벌려 항우의 눈앞에 내밀어 보였다.
항우는 눈을 껌벅거리며 그의 손가락을 응시하였다.
"얼마만큼이오?"
그러자 영걸신개는 손가락의 넓이를 조금 더 크게 벌리며.
"이만큼이면 돼."
항우는 울상을 지으며 찻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방주님께서 정 그러시다면 제자는 포기하겠습니다."
"아, 아냐. 자네가 다 마셔."
개방방주 영걸신개는 그렇게 말하고는 모두가 다 들리도록 투덜거렸다.
"제기랄! 정녕 아니꼽고 지독한 놈일세. 그러니 이 짓밖에 못하지. 큰 인물이 되기에는 애초에 틀렸다니까."
항우는 못 들은 체하며 차를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영걸신개는 군침을 흘리며 항우에게 호들갑스럽게 질문을 퍼부었다.
"맛이 어떤가? 응? 괜찮지? 맛있을 거야? 그럼, 그럼!"
항우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실로 향기가 기가 막힌 차로구먼요. 뱃속이 놀라겠어요."
영걸신개는 그의 손에 든 찻잔을 빼앗듯 낚아채며 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일순, 그의 안면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하나도 없어…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다 마셔 버리고 말았군."
영걸신개는 원망스러운 얼굴로 항우를 바라보았다.
"뱃속이 놀라는 게 당연하지. 너 같은 놈이 언제 이런 것을 마셔 봤겠느냐?"
항우는 그 말에 반박이나 하듯 가슴을 내밀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태명회(太命會)가 이 년 전, 개파(開派)를 선언했을 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한 줄기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흐흐흐흐… 과연 개방 인물들은 현명하군. 포위된 줄 알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니……."
이어 괴상한 생김새의 세 노인이 유령(幽靈)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맨 우측의 인물, 그는 눈부신 백의를 입고 있었다.
약간 마른 편이었으나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견하기에 몹시 기쁜 일이 있는 듯싶었다.
이 웃음 짓는 노인 옆에는 그와 아주 상반되는 얼굴을 한 인물이 있었다.
중앙에 서 있는 그는 갈의에 피풍을 두르고 있었으나,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려 낼 것처럼 매우 슬픈 표정이었다.
세 번째 노인, 그는 홍색 장삼을 걸치고 섭선을 든 채 웃고 있었다.
이들 세 괴인이 출현하자 개방 인물들은 다소 긴장하는 빛을 띠었다.
그러나 개방방주 영걸신개만은 부상당한 사람답지 않게 펄쩍펄쩍 뛰며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서슴지 않았다.
"이 장백의 괴물아! 어찌 그리도 째째하냐? 겨우 술 한 병 슬쩍했을 뿐인데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장백사마(長白四魔)라는 명성이 아깝구나."
장백사마 중 장백희마(長白喜魔) 노천중(魯千衆)이 그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노물(老物)! 자네가 진정 한 병의 술만 가져왔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 아닌가? 어서 순순히 그 물건을 내놓게."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말 또한 논리정연하여 흡사 정현군자(正賢君子)가 녹림도적을 타이르듯 하였다.
영걸신개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흉칙하게 웃었다.
"후후후… 그 동안 장백산에 은거하면서 입담만 늘어 온 모양이구나."
일순.
"네놈이 진정 관(棺)을 보아야만 눈물을 흘리겠구나!"
중앙에 서 있던 갈의의 장백애마(長白哀魔) 금일정(金日正)이 악성을 내질렀다.
그는 불마성의 천상벽에서 떨어져 죽은 장백노마 금일송의 친형이었다.
이들 형제는 어린 시절부터 포악하여 일찍이 동북구성(東北九省)에서 흉명을 날리던 장백거살(長白巨殺) 악극악(岳極惡)의 문하로 입문(入門)했다.
여기서 그들은 다른 두 형제인 장백희마 노천중과 장백락마(長白樂魔) 노천하(魯千河)를 만나게 되어 마침내 장백사마라는 흉악무도(凶惡無道)한 마두들이 생겨난 것이다.
개방방주 영걸신개가 분노를 드러내며 마주 대응했다.
"네놈들은 강물이 우물물을 침범치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도 모른단 말이냐?"
장백락마 노천하가 싱글벙글 웃음을 흘리며 나섰다.
"그것은 우리가 할 소리다. 네놈들은 비럭질이나 잘 할 것이지, 어찌 감히 왕부의 일에 뛰어든단 말이냐?"
영걸신개는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신형을 일으켰다.
"어리석은 놈들! 대역죄를 저지르고 있는 줄도 모르는 우매한 놈들!"
금일송이 빠진 장백삼마는 움찔 어깨를 움츠리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무언의 눈길을 주고받던 그들 중 장백애마 금일정이 음산한 외침을 터뜨렸다.
"쓸모 없는 녀석! 받들어 올리는 경주(敬酒)를 마다하고 굳이 벌주(罰酒)를 마시려 하다니… 얘들아!"
그의 목소리가 튀어나가기가 무섭게 일신에 회의를 걸친 대한들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수중에는 시뻘건 대두도(大頭刀)와 장검, 단창(短槍) 등을 꼬나 잡고 회의무사들은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움직였다.
조직적으로 훈련을 받은 듯 매우 숙달된 동작이었다.
그러나 가장 크게 놀란 것은 뚱뚱한 찻집 주인이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영걸신개 일행에게 애걸을 하였다.
"아이고! 나리들, 제발… 제발… 고정하십시오. 소인에게는 노모(老母)와 처자들이……."
영걸신개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품안에서 금덩어리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네 주었다.
"자네는 이것을 가지고 어서 이 자리를 떠나게."
찻집 주인은 그 금덩어리를 보고는 까무러치도록 놀랐다.
방금 전만 해도 은자 한 냥이 아까워 차도 한 잔만 시켰던 노랭이가 아닌가?
무림의 괴걸(怪傑)들이 어떻다는 것은 익히 풍문(風聞)으로 들어 왔던 그였지만, 막상 자신의 눈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자 그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찻집 주인은 금덩어리를 받아 들며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이런 찻집 몇 개도 세울 수 있을 텐데……."
영걸신개는 피식 실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효어친(孝於親)이면 자역효지(子亦孝之)라는 말이 있소. 부디 늙으신 모친을 정성껏 봉양(奉養)하시오."
정녕 영걸신개는 당대의 괴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목전의 긴박한 국면은 아랑곳없이 엉뚱한 곳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찻집 주인은 허리를 깊숙이 굽히며 주춤주춤 장내를 벗어났다. 그의 얼굴은 뜻밖의 횡재로 입이 찢어질 듯하였다.
그 때였다. 지극히 맑고 낭랑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방주께서는 큰 잘못을 저지르셨소이다."
개방방주 영걸신개를 비롯한 제자들이 모두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감탄에 찬 음성이 흘러 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진유걸이었다.
그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영걸신개 일행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진유걸이 비스듬히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의 출충한 용모를 이제서야 보게 된 것이다.
영걸신개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잘못이라니?"
"방주는 그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라 명부(冥符)를 안겨 준 셈이오."
찰나.
"헉!"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영걸신개의 안색이 무섭도록 창백하게 변해 갔다.
그는 재빨리 허리를 틀며 찻집 주인이 달려간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보였다. 회의무사의 검이 빛살처럼 공간을 가르는 처절한 광경이…….
그 뒤를 이어 터져 나오는 끔찍스러운 단말마의 비명.
"으아악……!"
찻집 주인이 피를 분수처럼 뿜어 내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가 좀 전에 띄웠던 기쁨의 미소는 공포와 고통으로 인하여 자취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으윽! 이 끔찍한 살인마들!"
개방방주 영걸신개는 우악스럽게 고함을 지르며 신형을 폭사시켰다.
휘익- 휘익-!
그가 몸을 날리자 장백희마 노천중과 장백애마 금일정이 재빨리 앞을 가로막았다.
"멈추어라, 노물!"
영걸신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지라 그대로 일 장을 뻗어 냈다.
"죽어라!"
우우웅-!
천지를 갈라 놓을 듯한 장력이 노해광도(怒海狂濤)와도 같이 휘몰아쳤다.
장백희마 노천중과 장백애마 금일정도 공력을 끌어올리며 쌍장을 내질렀다.
"경천풍운(驚天風雲)-!"
그들의 장심에서 희뿌연 기류가 맹폭하게 쏘아 나갔다.
두 가닥 장력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영걸신개의 전신으로 몰아쳐 간 것이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양측의 장력은 정면에서 충돌을 일으켰다.
일순.
콰쾅-!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폭음이 터지며 일진광풍(一陣狂風)이 사납게 몰아쳤다.
그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짤막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으음……!"
그것은 너무도 작은 소리였으나 지켜보던 중인들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이윽고 모질게 장내를 휘감고 있던 격류가 서서히 사라졌다.
장백희마 노천중과 장백애마 금일정은 제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개방방주 영걸신개는 주르륵 다섯 걸음이나 물러나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시뻘건 피가 꾸역꾸역 흘러 나와 앞섶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그 정경을 목격한 개방제자들은 일제히 몸을 떨며 쾌속하게 신형을 날렸다.
"이 놈들!"
그러자 회의무사들이 각기 병기를 휘두르며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거렁뱅이들아!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결과는 이것뿐이다!"
희의인들은 제각기 절초를 발휘하며 벌 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들의 손속은 기민하고 행동 또한 나무랄 데 없이 민첩했다.
하지만 개방제자들 역시 노련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타구봉(打狗棒)을 좌우로 난무하며 용맹하게 맞붙었다.
"뒈져라!"
위위윙- 윙-!
잔인한 기류가 난무하며 섬칫한 기합성이 장중을 뒤덮었다.
피를 갈구하는 병기의 소름끼치는 음향이 불꽃처럼 작렬했다.
그들은 이제 치열한 격전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유걸은 싸움을 하고 있는 그들을 지켜보며 망설였다.
'이 싸움에 개입하여야 하나? 그렇게 되면 필시 많은 인명들을 살상(殺傷)하게 될 텐데…….'
그는 염두를 굴리며 다시 장내를 주시했다.
그 때 항우라는 걸인이 푸른색 호로병을 옆구리에 차고 슬금슬금 장내를 빠져 나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놈! 어디를 가느냐?"
회의무사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는 고함을 버럭 내질렀다.
동시에 수중의 단창을 꼬나 잡으며 항우의 장문혈(丈門穴)을 찔러 왔다.
쇄애액-!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파공성이 일어나며 싸늘한 기류가 쏘아들었다.
항우는 낭랑한 웃음을 띄우며 신형을 빙글 회전했다.
"뒈진다!"
폭갈이 터져 나옴과 때를 같이하여 그의 주먹이 허공을 날았다.
퍽-!
끔찍한 음향이 일어나며 처절무비한 절규가 그 뒤를 따랐다.
"아악!"
회의인은 머리통이 부서진 채 자그만치 이 장이나 날아가서 곤두박질쳤다.
그의 머리는 철퇴로 얻어맞은 듯 으깨졌으며 온통 피투성이였다.
가공할 만한 신력(神力)을 가진 항우.
그가 회의인 한 명을 간단하게 처리하고 나자, 이번에는 세 명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그들은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듯 조심스럽게 품(品)자형을 이루며 그를 에워쌌다.
항우는 그들 회의인을 한눈에 쓸어 보며 외쳤다.
"뒈진다!"
그 일갈이 떨어진 순간, 그의 육중한 체구는 회의인들의 면전에 내리꽂혔다.
동시에 항우의 쌍수가 바람을 가르며 짓쳐들었고, 그의 우측 발은 허공을 때렸다.
그의 이 일련의 동작은 매우 신랄했고 무거워 보였다.
회의무사들은 윙윙거리는 소리에 혼비백산하며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항우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은 그들의 상상을 불허하고 있었다.
항우의 주먹과 발길질이 어느 틈에 그들의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게 아닌가?
그들은 놀랄 사이도 없이 각각 가슴과, 복부, 옆구리 등을 가격당하고 말았다.
우두둑- 퍽-!
잔인한 소리와 함께 고통에 찌든 단말마의 비명이 줄을 이어 터져 나왔다.
"으아악……!"
"끄악!"
"아아악……!"
세 회의무사는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사정없이 곤두박질쳤다.
그들은 모두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일순.
"제법 한가락 할 줄 아는군. 하지만 이제 그만 죽어 줘야겠다."
느긋한 음성과 함께 장백락마 노천하가 항우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 있었다.
항우는 그를 마주 노려보며 차갑게 외쳤다.
"뒈진다!"
그는 격전을 시작하면서 오직 이 한 마디만 입에 담고 있었다.
장백락마는 가소롭다는 듯 이죽거렸다.
"이번에는 네가!"
항우가 어깨를 흔드는 순간, 그의 신형은 전광석화처럼 날아 장백락마 노천하의 백회혈(百會穴)과 천돌혈(天突穴)을 동시에 노려 갔다.
쉬익- 쉭-!
그의 이 기습은 상당히 민첩하고 웅후하여 장백락마는 일순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는 역시 절정에 달한 고수였다.
"흥!"
장백락마는 싸늘한 코방귀를 날리며 퉁기듯 뒤편으로 몸을 뽑았다.
"타앗-!"
이어 그는 일갈과 함께 땅을 박차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는 거기서 몸을 두 바퀴 회전한 뒤 항우에게 돌연 역습을 가했다.
장백락마의 이 한 초식은 변화가 기기묘묘하여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였다.
항우는 삽시간에 장백락마 노천하의 수중에 들어간 꼴이 되고 말았다.
장백락마의 입술 끝에 살기 어린 미소가 매달렸다.
'흐흐흐… 애송이 놈! 이제는 끝장이다.'
그가 득의에 차 있을 때, 돌연.
핑- 핑-!
두 가닥 지풍이 섬칫한 파공성을 내며 빛살처럼 뻗어 오는 것이 아닌가?
장백락마는 혼비백산하여 공세를 회수하는 한편 재빨리 땅으로 내려섰다. 그의 등줄기에는 흥건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어떤 놈이냐?"
노천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불마공자다!"
한 마디와 함께 시커먼 그림자가 스쳐 가는가 싶더니, 곧 그의 정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흑의에 도를 메고 있는 청년.
그는 바로 진유걸이었다.
장백락마는 그가 보여 준 지풍과 신법에 놀라움을 드러냈다.
"너 같은 애송이가……?"
"미리 밝혀 두겠지만 본 공자의 손매는 무섭소."
장백락마는 진유걸의 전신에서 은근히 풍기는 위압감에 안색이 변하였다.
"네놈은 혹 이살이 아니냐?"
그는 중원에서 활동한 적이 없었지만 이살에 관한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던 것이다.
진유걸이 절세미남인 데다 무공에도 뛰어나자, 소문과 비슷하여 물어 보았던 것이다.
진유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비웃듯 말했다.
"이살이라니… 사람을 혼동할 정도로 머리가 오락가락하니, 당신도 이제 그만 세상 하직할 때가 된 모양이구려. 하긴 어서 가는 것도 복(福)이지."
장백락마의 온화한 얼굴이 갑자기 싸늘하게 변해 갔다.
"무례한 놈! 죽어라!"
그는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며 쌍장을 힘껏 내질렀다.
그러자.
슈웅- 슈우웅-!
무시무시한 음향이 울리며 흉폭한 기류가 해일처럼 몰아쳤다.
그것은 정녕 패도적인 경력이었다.
진유걸은 잔인한 미소를 흘리며 슬쩍 소매를 흔들었다.
그 속에서 한 줄기 부드럽고 미약한 경력이 발출되는 순간.
와르르릉-!
두 가닥 장력이 허공에서 충돌을 일으키며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굉음을 터뜨렸다.
땅거죽이 움푹 파이며 사방으로 휘날리고, 모든 것이 폭풍을 만난 듯 사납게 휘날렸다.
다른 곳에서 격전을 치르던 회의인들과 개방제자들 사이에도 그 여파가 밀어닥칠 지경이었다.
얼마 후, 소용돌이가 멈추자 장내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진유걸은 당당히 버티고 선 채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에 비해 장백락마의 몰골은 실로 비참하였다.
그가 입고 있던 홍의는 광폭풍우(狂暴風雨)를 만난 듯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고, 텁수룩하던 수염은 몇 가닥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칠공(七孔)에서 피를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천하에 어찌 이토록 괴이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진유걸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는데… 장백라마의 칠공에서 피가 흐르다니…….
이 때 진유걸의 고막으로 항우의 부르짖음이 들려 왔다.
"뒈진다."
그는 여전히 뒈진다를 외치고 있었으나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회의무사 칠팔 명에게 휩싸여 이리저리 피해 다니기에 바쁜 그의 몸에서는 실낱 같은 핏줄기가 여러 군데서 흐르고 있었다.
금세라도 쓰러질 듯 그의 둔중한 체구가 휘청거렸다.
"비켜랏!"
그 광경을 목격한 진유걸이 대갈일성을 터뜨리며 신형을 폭사시켰다.
동시에 그의 등에 걸려 있던 천살도(天煞刀)가 빛살 같은 기류를 뿜어 냈다.
쇄쇄쇄쇄액-!
회의인들은 혼비백산하여 물러섰다.
그들의 안면에는 극렬한 두려움이 땅거미처럼 깔려 있었다.
다음 순간, 그들은 느껴야만 했다.
살갗을 파고드는 예리한 도(刀)의 감촉을…….
그것은 그들이 생애 최초로 느끼는 아픔이며 고통이었다.
이어 통렬한 단말마의 행렬이 끔찍스럽게 이어졌다.
"끄윽!"
"아아아악……!"
"허윽!"
"으악!"
피를 분수처럼 쏟아 내며 썩은 고목처럼 나뒹구는 회의인들.
참담한 비명과 함께 최후를 마친 그들의 시신은 보기에도 처참하였다.
진유걸의 미간에 핏빛 기운이 서려졌다. 천살성(天殺星) 사마기(邪魔祁)의 살괴(殺塊)가 드러난 것이다.
"천살륜(天煞輪)-!"
그의 목청이 대지를 질타하며 공중으로 치솟았다.
이어 그의 천살도가 으시시한 도망을 형성하며 난무했다.
그 때마다 회의무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
악귀 나찰 같은 비명 소리와 혈육 덩어리가 사면팔방으로 흩어졌다.
진유걸은 마치 신들린 사람 마냥 천살도를 떨쳐 냈다.
피, 피, 피!
뜨거운 선혈을 갈구하는 천살도의 파공성은 악마(惡魔)의 호곡, 바로 그것이었다.
무서운 도(刀)의 기류가 천지를 난무하며 피를 불렀다.
"으아아악……!"
"아악!"
진홍빛 선혈을 대지 위에 토하며 거꾸러지는 인영들.
장내는 그야말로 아수라(阿修羅) 지옥도(地獄圖)를 연상케 했다.
일순, 미친 듯이 도를 난무하는 진유걸 앞으로 장백희마와 장백애마가 나타났다.
"이 찢어 죽일 놈!"
그들은 몹시 격동한 듯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장백희마 노천중이 한쪽을 가리키며 분노에 찬 외침을 내질렀다.
"네놈의 짓이 분명하렷다."
그 곳은 그의 아우 장백락마가 비참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진유걸은 싸늘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대꾸했다.
"그렇다! 본 공자의 마기참혼장(魔氣斬魂掌)이다."
찰나 장백희마 노천중과 장백애마 금일청은 뒤통수를 쇠뭉치로 얻어맞은 듯 경악했다.
"마기참혼장……!"
"천살상의 무학을… 아앗!"
그들은 갑자기 무엇엔가 놀란 듯 경련을 일으키며 뒤로 펄쩍 물러섰다.
"살(殺)… 괴(塊)!"
그들은 그제서야 진유걸의 이마에 피로 뭉쳐진 듯한 살괴(殺塊)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찰나, 진유걸의 입에서 무서운 폭갈이 떨어졌다.
"뒈진다!"
그는 항우의 말투를 흉내내며 빛살처럼 신형을 날렸다.
"천살구류(天煞九流)-!"
그의 천살도가 절륜한 파공성을 내며 도기를 아홉 군데로 발산시켰다.
츠츠츠츠츠-!
고막을 찢을 듯한 음향과 더불어 예리한 도기가 섬전처럼 폭사했다.
장백희마 노천중과 장백애마 금일정은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들은 급급히 몸을 피했다. 살괴를 지닌 천살성의 화신(化身)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진유걸은 그들이 몸을 뽑아 내자, 다시 초식을 전개했다.
"천살폭(天煞暴)- 천살혈망(天煞血網)-!"
천살도는 심혼(心魂)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듯한 악령의 부르짖음을 토하며 허공을 뒤덮었다.
크르르르르-!
예리한 기류는 대기를 가르며 장백희마와 장백애마의 전신 요혈로 몰아쳐 갔다.
그들은 기겁할 듯이 놀라며 자신들의 신법을 최대한으로 발휘했다. 하지만 천살도는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쾌속하고 날카로웠다.
노천중과 금일정의 안면이 순식간에 사색으로 물들어졌다.
일순, 육체가 산산이 부서져 나가는 듯한 단말마의 비명이 무섭게 허공을 긁어 댔다.
"으아아악……!"
"크으윽……!"
장백애마 금일정과 장백희마 노천중은 전신에 수십 자국의 도상(刀傷)이 난 채 바닥으로 곤두박칠쳤다.
칼자국이 스쳐 지나간 곳은 여지없이 핏물이 쏟아져 내렸다.
진유걸은 천살도를 움켜쥔 채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그들의 시신 위로 눈길을 보냈다.
'이래서 손을 쓰는 것을 망설였는데…….'
그는 천살도를 뽑아 들면 걷잡을 수 없이 변하는 자신이 두려웠다.
공허한 시선을 던지는 진유걸의 곁으로 한 떼의 거지가 몰려들었다.
개방방주 영걸신개는 운삼이라 불렀던 노인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그들의 옆에는 두 명의 개방제자가 한 명의 동료를 안고 있었는데, 그는 이미 숨이 끊어진 듯했다.
영걸신개는 진유걸의 전신을 빠르게 훑어보며 사의를 표했다.
"고맙소. 소협 덕분에 이 고비를 무사히 넘겼소이다."
그러나 진유걸은 마음이 착찹할 뿐이었다.
그는 천살도를 갈무리하며 어두운 얼굴로 바닥에 나뒹구는 시체들을 가리켰다.
"방주는 그럴지 몰라도 이들은 나를 원망할 것이오."
그가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 놓자, 개방방주 영걸신개가 그를 불렀다.
"이것 보시오, 소협!"
진유걸은 흠칫 발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방주는 본 공자에게 무슨 가르침이 있소이까?"
"공자? 당신이 누구건 간에 어쨌든 이대로는 가지 못하오?"
진유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하면?"
영걸신개는 입술을 깨물고 단호하게 외쳤다.
"죽이고 가시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진유걸은 갑작스런 그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누구를 말이오?"
"우리 모두를……."
진유걸은 씁쓸한 미소를 흘리며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이유가 없소."
영걸신개는 물러서지 않고 그를 막아 서며 막무가내로 어거지를 썼다.
"저들의 졸개들이 잠시 후 패거리를 이끌고 다시 이 곳에 나타날 것이오. 하지만 우리들은 너무 허약하여 그들과 싸울 수가 없소. 그러니 차라리 죽여 주시오."
진유걸은 영걸신개가 억지를 쓰자 은근히 화가 났다.
살려 줘도 걱정, 죽여도 걱정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쩌란 말이오?"
그의 언성이 다소 높아졌다.
"우리들을 구해 준 책임을 끝까지 져야지 않겠소?"
진유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머금었다.
"그래요? 어떻게 말이오?"
영걸신개는 기대가 잔뜩 어린 노안으로 진유걸을 응시하며 말했다.
"항우를 복주성(福州城)까지 보호해 주시오. 아니면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를 죽여 주시오."
진유걸은 그의 바램에 찬 눈빛과 신념을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하지만 그 외의 억지는 쓰지 마시오."
순간, 영걸신개는 진유걸의 손목을 덥석 거머쥐었다.
"고맙소이다, 정녕 고맙소이다. 꼭 좀 부탁하오."
그는 감격에 떨며 힐끔 항우를 물기 어린 눈으로 돌아본 뒤, 나머지 제자들을 이끌고 쏜살같이 장내를 벗어났다.
"갑시다."
진유걸은 망연히 서서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항우의 등을 가볍게 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항우는 그래도 뭔가 아쉬운 듯 그들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충성심이 대단한 사나이군.'
진유걸은 그런 항우에게서 왠지 믿음직한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