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二章 불마성(佛魔城)
아, 보라!
천상벽이 무너져 내린 자리에 우뚝 장엄한 자태를 드러낸 한 채의 성(城)!
전설상의 궁(宮)답게 한껏 위용(威容)을 자랑하는 성(城)은 웅자(雄姿)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장려(壯麗)한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태산(泰山)처럼 솟구친 성벽은 그야말로 금성철벽(金城鐵壁)이었다.
금석(金石)으로 쌓아올린 듯한 성의 편액(扁額)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황금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불마성(佛魔城).
패왕지존(覇王至尊)이 되려거든 성(城)으로 진입(進入)하라!>
아아, 이 곳이 바로 무림인들이 꿈에서도 그리던 불마성이 아닌가?
그 누가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을 마다하겠는가?
전설 속의 불마성!
휘황찬란한 그 불마성이 드디어 강호(江湖)에 등장한 것이다.
웅장무비(雄壯無比)한 자태를 여실히 드러내며…….
포달랍궁의 세 화상,
혈궁의 세 고수,
유아독녀궁의 여인들,
그리고 태명회의 두 인물.
그들은 저마다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신비와 의혹, 호기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감정이 나타나 있었다.
혈궁의 귀응신군이 떨리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불마성… 과연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태명회의 금은쌍절 중 금절 황보금이 뼛속이 시리도록 냉랭한 음성으로 물었다.
"두렵소?"
짧은 물음이었으나 중인들은 그 음성에 정신이 깨어나는 듯싶었다.
귀응신군 합구범은 가볍게 몸서리를 치며 대꾸했다.
"그렇소. 천여 년 전, 대마황(大魔皇) 천살성(天殺星) 사마기(司馬奇)도 이 곳 불마성 출신이 아니었소이까?"
그 말이 떨어지자 중인들은 한 차례 경련을 일으켰다.
유아독녀궁의 한세귀파가 약간 질린 듯한 얼굴을 하였다.
"본궁을 비롯한 삼대궁이 사마기 그 자로 인하여 천 년 간이나 봉파를 해야 하는 치욕(恥辱)을 겪지 않았소? 불마성은 아직도 우리에게는 공포스런 존재요."
그러자 포달랍궁의 화천존인이 냉소를 날렸다.
'교활한 자들이군. 우리들에게 감히 겁을 주자는 수작이 아니고 뭔가? 하지만 우리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 둬야지.'
그는 생각에서 깨어나 중인들을 둘러보며 언성을 높였다.
"여러분들은 노납을 놀리시는 게요?"
그러자 귀응신군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존인께서는 무슨 뜻으로……?"
"여러분들이 불마성을 찾아나선 데에는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어서일 것이오. 하지만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이 곳에 삼대궁의 궁주들이 모두 빠져 있소. 이것은 각 궁이 서로 미묘한 관계에 있으며, 또한 각 궁의 수뇌들이 불마성을 경시(輕視)하고 있다는 것이오. 몰론 그것은 우리 포달랍궁 역시 마찬가지요."
중인들은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저마다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화천존인은 다시 말문을 이었다.
"본궁은 지난 천여 년 간 무궁한 발전을 거듭했소. 이제 어느 방면에서나 당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소. 지금 당장 천살성 사마기가 다시 등장한다 할지라도, 노부의 삼 초도 받아 내지 못할 것이외다."
그의 호언장담에 중인들은 내심 의구심을 품었다.
'화천존인이 이토록 엄포를 놓는 데에는 무슨 뜻이 있을 것이다. 혹시 포달랍궁도 중원을 넘보려는 흑심(黑心)이 있는 게 아닐까?'
살시나찰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교태로운 미소를 날렸다.
"존인께서는 호기(豪氣)가 대단하시군요. 좀 전, 각 궁의 미묘한 관계에 대하여 운운하셨는데… 그 부분에 대해 좀 자세히 말씀해 줄 수는 없는지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어지자 화천존인은 내심 이를 갈았다.
'여우 같은 계집!'
그러나 그는 겉으로는 환한 미소를 띄우며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중원쟁패(中原爭覇)!"
중인들은 그가 이렇듯 당당하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라, 모두 섬칫한 기분이었다.
화천존인은 그들의 내심을 훤하게 꿰뚫어보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이 불마성의 위치를 찾는 천하도(天下圖)와 옥경을 지니고도 지난 삼 년을 허송한 것은, 각 궁이 서로를 견제했기 때문이오. 그 결과로 누구도 중원을 차지하지 못하고 말았소. 이러한 시점에서 유일한 돌파구는 오직 불마성을……."
이 때 귀응신군 합구범이 짜증스럽다는 듯 외쳤다.
"그만 두시오! 존인께서 장황히 늘어놓지 않아도 이 곳에 오신 분들은 저마다 수뇌들의 신임(信任)을 한몸에 받고 있을 터이니 모두 알 것이오. 그보다 어서 천하도나 꺼내 보시오!"
그러자 포달랍궁의 화천존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없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중인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뭐라고?"
"천하도가 없다니?"
그들은 모두 놀란 얼굴로 화천존인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화천존인은 중인들의 흉폭한 기세에 고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천하도는 이 속에 들어 있소."
순간, 귀응신군 합구범은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이빨을 갈았다.
"으득! 약삭빠른 놈! 그러고도 목탁을 두들기고 염주를 굴리며 극락왕생(極樂往生)하기를 바라겠지."
그의 거친 말투에 화천존인은 실소를 머금었다.
"두말이 필요할까?"
별로 말이 없던 은절 황보은이 싸늘한 목소리를 토했다.
"부처를 믿기 전에 심보부터 뜯어 고쳐야겠군."
화천존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황보은을 쏘아보며 싸늘하게 물었다.
"귀하가 은절 황보은이오?"
황보은은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비아냥대듯 말했다.
"그렇소. 존인께서는 내게 무슨 하교할 말씀이라도 있소이까?"
화천존인은 막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살시나찰이 주위를 둘러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다간 날이 어두워지고 말겠어요. 어서 불마성으로 들어가요."
화천존인은 그녀를 힐끔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불마성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
휙-!
그러자 군웅들은 서로들 뒤질세라 경공을 전개했다.
잠시 후, 그들은 엄청난 크기의 성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청동(靑銅)으로 만든 듯한 거대한 문은 마치 철옹성(鐵翁城)을 연상케 했다.
한세귀파가 눈살을 찌푸리며 화천존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화상! 이제 어찌해야 되는 거요?"
이제까지 별 말이 없던 혈궁의 유명제군이 한 마디 했다.
"성벽을 넘어가면 되지 않을까?"
"그 방법은 화롯불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이나 다름이 없소."
화천존인은 점잖게 말한 뒤, 성문에 새겨진 무늬를 자세히 관찰했다.
검푸른 색을 띠고 있어 얼핏 보아서는 무엇인지 모를 무늬들이 하나의 그림을 형성하고 있었다.
우측에는 금세라도 꿈틀거릴 듯한 용이 새겨져 있었고, 좌측에는 날아오를 듯한 기세의 봉이 새겨져 있었다.
일순, 그것을 발견한 화천존인의 안면에 득의의 기색이 어려졌다.
"흐흐흐흐… 드디어 불마성의 천년신비가 열리는구나. 노납의 손에 의해!"
화천존인은 광소까지 터뜨리며 자신의 두 손바닥을 각각 용봉(龍鳳)의 머리 부분에 올려놓았다.
순간.
웅- 웅- 웅-!
기음이 발출되며 불마성의 성문이 서서히 좌우로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중인들은 그 절묘한 기관장치에 내심 까무라치도록 놀랐다.
성문 사이가 한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벌어진 찰나.
"으악!"
"헉! 누… 누구?"
중인들은 대경실색(大驚失色)하며 주르륵 미끄러지듯이 뒤로 물러났다.
성문 안.
그 곳에는 놀랍게도 눈부신 금의를 입은 한 청년이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관옥(冠玉) 같은 용모에 만인을 압도할 듯한 기상(氣象).
그의 전신에는 함부로 범치 못할 고고한 기품(氣品)이 흘러넘쳤다.
정녕 인중지룡(人中之龍)의 풍모(風貌)를 지닌 이 청년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제일 먼저 화천존인이 찢어질 듯한 경악성을 내질렀다.
"아앗! 광혈풍!"
유아독녀궁의 살시나찰 역시 놀란 음성을 토했다.
"헉! 아… 아니야! 저 사람은 탈혼사자야."
그러자 귀응신군 합구범이 그들의 말을 모두 부정하며 외쳤다.
"아니야! 저 자는 광혈풍도 아니고, 탈혼사자도 아니야."
중인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그의 용모는 신비스럽게 변해 있었다.
저벅- 저벅-!
중인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금의청년은 열려진 성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렇소. 나는 당신들이 말한 그들 중 누구도 아니오. 나는 다만 불마성(佛魔城)을 지키는 불마공자(佛魔公子)일 뿐이오."
"불마공자!"
중인들은 합창하듯 한꺼번에 소리쳤다.
불마공자라고 자신을 밝힌 청년, 그는 신비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본 공자는 본성의 명을 이제부터 시행할까 하오."
그의 말뜻을 의아하게 여긴 살시나찰이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그녀는 절세미남(絶世美男)을 대하자 방심(芳心)이 흔들리는 듯 교태를 지으며 공손하게 말했다.
불마공자는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아……!"
그녀는 그의 눈빛을 대하자 심신(心身)이 분리되는 듯한 황홀감을 느꼈다.
'저 사람은 분명 탈혼사자야. 예전보다도 더욱 신비한 눈빛을 발하긴 하지만, 탈혼사자임에 틀림없어. 아아……!'
살시나찰은 오금이 저려 와 감히 불마공자를 마주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부인께서는 실로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계시구려."
나직하면서도 청아(淸雅)한 목소리가 불마공자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살시나찰은 황홀감으로 경련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으음, 목소리는 광혈풍 같은데…….'
그녀는 유아독녀궁에서의 광혈풍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다시 불마공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인의 육체(肉體)는 심하게 부패(腐敗)돼 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오. 그래야 본 공자가 마음껏 살수(殺手)를 펼칠 수 있지 않겠소?"
순간, 살시나찰은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과 동시에 무서운 살기가 치솟았다.
그녀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애송이 놈! 전신의 뼈마디를 모두 가루로 만들어 주마!"
살시나찰은 앙칼지게 외치며 절묘한 신법을 구사했다.
동시에 그녀는 쌍수를 갈고리처럼 구부려 불마공자의 완맥을 낚아채 갔다.
쉬익-!
그녀의 이 한 초는 과연 무림의 고수답게 민첩했으며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중인들은 그녀의 이 한 초가 능히 불마공자를 제압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불마공자는 유유히 한 발을 슬쩍 들어올리더니 빙글 신형을 돌리는 게 아닌가?
이것은 매우 느린 듯했으나 실상 전광석화처럼 빠른 동작이었다.
"앗! 저… 것은?"
화천존인은 대경실색하며 입을 딱 벌렸다.
불마공자는 살시나찰의 기묘한 금나술을 간단히 피해 내며 외쳤다.
"사부께서는 본성을 파괴하는 인물들을 결코 용납치 말라 하셨소. 따라서 본 공자는 여러분들을 모두 응징(膺懲)할 것이오."
귀응신군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당신의 사부가 누구요?"
불마공자는 얼굴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천살성(天殺星) 사마기!"
"으헉!"
일순 중인들은 경악성을 터뜨리며 그를 응시했다.
천살성 사마기는 천 년 전의 인물이 아닌가?
한데 그의 제자라 칭하는 불마공자가 나타나다니…….
그들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어리둥절해 있을 때 다시 불마공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본 공자는 그분의 의발전인(衣鉢傳人)임에 분명하오. 그러니 모두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요!"
불마공자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냉혹한 음성으로 말한 뒤, 등 뒤에서 천천히 병기를 끄집어 내었다.
도(刀).
그가 쥔 도은 약간 짧은 편이었고, 도신은 한 뼘 정도 되었다.
특이한 것은 도 전체가 핏물에 담갔다가 꺼낸 듯 시뻘건 핏빛이라는 점이었다.
그 도를 본 염라제군의 염소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천살도(天煞刀)!"
천살성 사마기의 병기로서 천하에 둘도 없는 보도(寶刀)!
무림인들은 상로쌍검(霜露雙劍)을 신검(神劍)으로 쳤지만, 마도(魔刀)에서의 신검은 당연히 천살도였다.
불마공자는 천살도를 부여잡자 무서운 살기를 뿜어 냈다.
그것은 정녕 가공하리만치 엄청난 기류(氣流)였다.
중인들은 질식할 듯한 압박을 느끼며 저마다 긴장의 눈초리를 보냈다.
돌연.
"천살폭(天煞暴)-!"
우렁찬 폭갈과 더불어 불마공자의 도신이 대기를 쪼갤 듯 펼쳐졌다.
슈슈슈슈-!
천살도는 맹렬한 도기(刀氣)를 뿜어 내며 중인들을 향해 휘몰아쳐 갔다.
"앗!"
귀응신군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 경악하며 신속하게 몸을 피했다.
그러나 그의 지척지간에 서 있던 염라제군과 한세귀파는 신법을 전개하기에 너무 늦고 말았다.
그들은 각기 입술을 악물며 쌍장을 동시에 내뻗었다.
"뒈져라!"
웅- 우웅-!
두 고수가 펼쳐 낸 장력은 태산이라도 붕괴시킬 듯 막강한 위력이 있었다.
그러나 누가 짐작이라도 했으랴?
불마공자의 도법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광세기공(廣世奇功)이라는 것을!
천살도의 폭풍 같은 도기는 그들 두 사람의 장력을 뚫고 맹렬히 짓쳐 들었다.
순간, 염라제군과 한세귀파는 머리 위 천돌혈(天突穴)에서부터 항문의 장강혈(長强穴)까지가 화끈거림을 느꼈다.
그것은 그들이 생애 처음으로 느끼는 지독한 아픔이었다.
"으악!"
"크으윽……!"
그들의 입에서는 참혹한 단말마의 비명이 솟구쳤고, 피보라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이어 그들의 몸이 네 토막으로 나누어졌다.
아, 분시(分屍)!
그것은 정녕 두 눈 뜨고는 보지 못할 참혹한 정경이었다.
그러나 그 참상에 대한 놀라움보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바로 불마공자의 가공할 도법이었다.
천하에 그 어떤 인물이 단 일 초 만에 무림의 절정고수 두 명을 처치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실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남은 중인들은 모발이 곤두서는 듯한 두려움과 분노를 느끼며 제각기 병기를 꼬나 잡았다.
포달랍궁의 화천존인은 목에 걸고 있던 염주를 손아귀에 꽉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본 사제 화각존인은 탄식을 터뜨렸다.
'아, 사형께서는 결코 저것을 쓰신 적이 없었는데…….'
화천존인은 화각존인의 생각대로 불마공자를 무섭게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행동은 다른 고수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불마공자의 허점을 파악하여 일격필살(一擊必殺)의 수법을 노렸다.
그들에 비해 불마공자는 여전히 여유자적한 태도였다.
그는 단번에 두 고수를 격살하고도 호흡 한 번 거칠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일신에서는 차가운 살기가 뿜어졌다.
"여러분이 계속 주춤거리니 본 공자가 또 선수(先手)를 취해야겠구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천섬광(驚天閃光)-!"
귀응신군이 고함을 버럭 내지르며 불마공자의 후미를 베어 들어갔다.
쇄액- 쇄애액-!
그의 장검이 예리무비한 파공음을 일으키며 섬칫한 검기를 발산했다.
면밀한 검막이 형성되며 날카로운 경력이 상대의 전신으로 휘몰아쳤다.
그와 함께.
"가거라!"
살시나찰과 금절 황보금도 각각 공세를 취해 갔다.
살시나찰은 한 손으로는 장력을 날리고, 다른 손으로는 단창(短槍)을 휘둘렀다.
이 순간, 포달랍궁의 화천존인은 불마공자의 입가에 어린 미소를 발견하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불마성주의 무학(武學)이 아무리 심오(深奧)하다 하여도, 또 그가 천고광절(千古曠絶)의 무공을 연성했다 하여도… 신랄하게 취해 가는 여러 사람의 공세를 어찌 피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화천존인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불마공자는 정박절륜(精博絶倫)한 신법을 구사하며 일성토후(一聲吐吼)를 발하는 게 아닌가?
"천살구류(天殺九流)-!"
그의 천살도가 악귀의 부르짖음을 토하며 줄기줄기 도광을 폭사했다.
츠츠츠츠-!
자지러지는 듯한 기음이 발출되며 불마공자의 천살도에서 아홉 가지 기류가 섬전(閃電)처럼 뻗어 나갔다.
그 기류에는 심장이 동결될 듯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한꺼번에 덮쳐 들던 귀응신군 합구범과 살시나찰, 금절 황보금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고 말았다.
'천하에 이런 도법이 존재한단 말인가?'
그들은 서리를 맞은 듯 한기가 온몸으로 엄습함을 느꼈다.
다음 순간,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단말마가 난무하는 기류 속에서 터져 나왔다.
"끄윽!"
"으아아악……!"
"허억!"
시뻘건 핏물이 쏟아지며 세 인영이 지면으로 곤두박질쳤다.
퍽- 퍽- 퍽-!
끔찍한 음향과 함께 세 사람은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귀응신군은 눈을 까뒤집은 채 그대로 절명(絶命)하고 말았다.
그는 가슴에 주먹만한 구멍이 난 채 피를 콸콸 흘리고 있었다.
금절 화보금 역시 참혹한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의 면상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져 있었다.
얼굴의 한 부분이 도기에 의해 완전히 절단돼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 비해 살시나찰은 약간의 상처만 입었을 뿐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안색은 백랍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어 무척 놀란 듯했다.
창졸간에 귀응신군과 금절이 참혹하게 죽어 나가자, 나머지 인물들은 더욱 경각심을 돋우었다.
하지만 그들은 물밀듯이 몰려오는 두려움에 흥건히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화천존인은 은절 황보은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황보은은 담담한 눈길로 불마공자를 응시할 뿐, 금절이 죽은 것에 대해 아무런 동정심도 없는 듯했다.
화천존인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물었다.
"귀하는 형이 죽음을 당했는 데도 어찌 슬픈 기색도 없소?"
그러자 은절 황보은이 화천존인을 냉랭하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는 당신은 불마공자를 제압할 수도 있을 듯한데, 어째서 중인들의 죽음을 묵과하고만 있는 것이오?"
날카로운 반박이었다.
그러나 화천존인은 그보다 한 수 위인 듯 음흉한 미소를 머금으며 마주 대꾸했다.
"그것은 귀하도 마찬가지 아니오? 더구나 노납의 물음을 피하는 것은 뭔가 뒤가 구리다는 얘긴데……?"
그가 단정을 짓듯 말하자, 은절 황보은은 미간에 은은한 살기를 띄웠다.
"화천존인! 당신은 지금 중인들을 선동(煽動)하고 있소. 그래서 자신의 속셈을 은폐하려고……."
황보은도 만만치 않게 화천존인을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으음, 생각보다 노련한 인물이로구나.'
화천존인이 염두를 굴리며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불마공자가 만면에 미소를 떠올리며 성큼 나섰다.
"잠깐! 두 사람은 계속 입씨름만 벌일 셈이오? 듣자하니 두 분의 재간이 본 공자를 능가하는 것 같은데,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가르침을 받고 싶소."
그의 말에 화천존인과 은절 황보은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불마공자는 눈길을 돌려 남아 있는 칠 인의 고수들을 쓱 훑어보았다.
"이번에는 좀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오."
그의 말은 화천존인과 은절 황보은에게 불길한 느낌을 주었다.
일순.
"타앗-!"
황보은의 입에서 무서운 기합성이 하늘을 진동시키며 튀어나왔다. 동시에 그의 신형은 섬전을 무색케 할 만큼 쾌속하게 솟구쳐 올랐다.
휘이익-!
그러자 화천존인은 기기묘묘한 신법을 전개하며 수중의 염주를 비스듬히 날렸다.
그는 이 일 초에 불마공자를 격살코자 포달랍궁의 절기를 최대한 전개했다.
"흑투신살(黑投神殺)-!"
파파파파-!
화천존인의 수중에 있던 염주가 수십 개로 분리되며 폭사돼 나갔다.
이것은 전혀 뜻밖의 공세였고 그 기세는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銀河水)가 쏟아져 내리듯 흉폭절륜하였다.
과연 이 두 고수의 공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매서웠다.
이번 공세에는 불마공자조차도 어쩔 수 없을 성싶었다.
이런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혈궁의 유명제군과 유아독녀궁의 음산치파가 재빨리 신형을 날려 열려진 불마성문으로 쏘아 들어갔다.
휘- 휘익-!
그러나 불마공자는 그들의 행동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는 수중의 천살도를 빛살같이 날리며 정박심오(精博深奧)한 신법을 유감없이 구사했다.
불마공자는 허공에서 내리찍는 은절의 공세를 절묘한 신법으로 피해 내며 화천존인의 염주알을 후려쳐 갔다.
타탁- 타타탁-!
삼십육 개의 방위를 노리고 짓쳐들었던 화천존인의 염주알은 불마공자의 엄밀한 도막(刀幕)을 뚫지 못하고 사방으로 퉁겨 나갔다.
불마공자는 이들의 합공에 내심 기겁할 듯이 놀라고 말았다.
'역시 다른 고수들과는 다르군.'
그러나 그보다 더욱 경악한 인물들은 바로 화천존인과 은절 황보은이었다.
그들은 놀라움이 극에 달한 듯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이럴 수가? 두 번의 공세에서는 전혀 신법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과연 대단한 자로군.'
화천존인은 기실 불마공자가 귀응신군이나 금절 등을 상대할 때 신법이 미약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충분히 승산(勝算)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마공자의 신법이 미약하기는커녕 절묘하기 이를 데 없지 않은가?
그러한 점에서는 은절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더구나 그는 화천존인과는 달리 더욱 피부로 느끼고 있었으니…….
'으으, 이것은 혈영광군의 팔방풍영보!'
혈영광군(血影狂君)면 바로 사대천왕(四大天王) 중 한 명인 사혈천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중조산 절애 아래의 망담수에서 겨우겨우 생존해 가고 있는 서혈천왕 마우성.
한데 불마공자는 어찌 이 무공을 시전하는 것이며, 은절 황보은은 또 이것을 어떻게 알아보는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때 돌연.
"아악!"
"으으……!"
간담이 서늘한 비명 소리와 함께 불마성으로 들어갔던 유명제군과 음산치파가 퉁기듯 빠져 나왔다.
그들은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쥔 채 괴로운 듯 울부짖었다.
"안 보여! 내 눈이 안 보여!"
"앗! 눈이… 내 눈이… 앞이 안 보여!"
유명제군과 음산치파는 눈을 감싼 채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들은 멋모르고 불마성에 뛰어들었다가 불마공자가 만들어 놓은 기관장치에 당하고 만 것이다.
불마공자는 두 사람이 괴로워하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언젠가 그런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은 생각이 언뜻 들었다.
하지만 뚜렷하게 생각나는 것이 아니고 마치 안개 속처럼 뿌연 느낌이었다.
그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올랐다.
그는 비스듬히 신형을 날리며 몸부림치는 유명제군과 음산치파에게로 덮쳐 갔다.
"천살도가 난무하면 혈해(血海)가 이뤄지고, 불마성이 진동하면 천하가 궤멸(潰滅)하리라."
불마공자의 외침이 끝나는 순간, 천살도가 대기를 가를 듯 섬광을 번뜩였다.
이번의 손속은 너무도 쾌속하여 화천존인이나 은절조차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쇄애액-!
다만 악령(惡靈)의 호곡성 같은 파공음이 고막을 후비고 작렬했다.
찰나, 심장을 도려 낼 듯한 단말마의 비명이 천공(天空)을 할퀴었다.
"으악!"
"허억!"
유명제군과 음산치파는 허리가 양단되며 썩은 고목처럼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며 금세 역겨운 피 내음이 후각(嗅覺)을 자극했다.
중인들은 불마공자의 잔인한 손속에 부르르 치를 떨었다.
"으하하… 가거라!"
불마공자는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리며 수중의 천살도를 떨쳐 내며 남아 있는 인물들에게도 짓쳐 들었다.
화르르르-!
천지를 양단시킬 듯한 도기가 부챗살처럼 펼쳐지며 중인들을 휘몰아쳐 갔다.
실로 가공할 도법(刀法)!
불마공자는 마음이 불안하고 다급한 듯 천살도를 무섭게 휘둘러 댔다.
이 때, 화천존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아앗! 살괴다!"
그러자 은절 황보은도 황망히 경악성을 내질렀다.
"천… 살… 성!"
그들은 일제히 자지러질 듯 놀라며 피하기에 급급하였다.
그들 모두 불마공자의 모습과 기세에 압도당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천살도는 폭풍(暴風)처럼 대지를 여지없이 핥아 갔다.
이어 튀어나오는 핏줄기와 참담한 비명(悲鳴)!
"으어억……!"
"크악!"
두 마디 처절한 단말마가 바람을 타고 흐르며 피보라를 일으켰다.
혈우(血雨)!
끔찍한 핏줄기가 폭우처럼 쏟아지며 역겨운 피비린내가 풍겨 올랐다.
장내는 금세 질식할 듯한 적막(寂寞)에 휩싸이며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지면에는 또다시 두 구의 시체가 늘어났다.
포달랍궁의 화각존인과 화평존인이 무참하게 격살당하고 만 것이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 나온 피가 땅을 흥건히 적셨다.
불마공자는 천살도를 움켜쥔 채 웅장한 거목(巨木)처럼 우뚝 서 있었다. 장내에는 오직 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불마공자는 사방을 둘러보며 폭갈을 내질렀다.
"나와!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나오란 말이다!"
그러나 그 소리는 멀리 퍼져 나가며 흔적도 없이 흩어질 뿐, 아무도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다.
살아남은 포달랍궁의 화천존인과 유아독녀궁의 살시나찰, 태명회의 은절 황보은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불마공자를 가리켜 살괴라고 했다.
또 누구는 그를 천살성이라고 했다.
살괴,
천살성.
그렇다면 불마공자 그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기억을 잃어버린 광혈풍 진유걸이었다.
철목산 마령신의의 모옥에서 독고휘에게 눈을 이식받았으나, 성장 과정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진유걸.
그는 원래 불마성에서 태어난 선택받은 기재(奇才)였다.
그러나 들어가서는 안 될 서고로 들어가 기억을 상실한 채 외부로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떠돌이 낭인(浪人)처럼 천하를 방랑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회복하고 불마성으로 돌아왔으나 그의 부모들은 이미 간 곳이 없었다.
하나뿐인 아들을 찾기 위해 어디론가 떠난 것일까?
진유걸은 그 동안 부모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며 불마성의 무학을 연마해 나갔다.
그러기를 어언 삼 년.
그는 천살성 사마기가 남겨 놓은 무공은 물론이거니와, 그 밖의 모든 유파의 무학을 거의 통달하였다.
하지만 진유걸은 시간이 갈수록 가슴이 답답하여 미칠 것만 같았다.
부모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잃어버린 십오 년의 세월은 어떻게 된 것일까?
도대체 십오 년 동안 자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냈단 말인가?
드디어 진유걸은 터질 듯한 가슴을 억누르며 잃어버린 십오 년을 찾기 위해 강호(江湖)로 나가기로 결심을 굳혔다.
바로 그 때, 삼대궁과 태명회의 고수들이 찾아왔던 것이다.
진유걸은 풀 수 없는 답답함과 외부인에게서 불마성을 지켜야 한다는 감정이 뒤엉켜 자신도 모르게 미간에 시뻘건 핏빛을 띠게 된 것이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피를 뿜듯 절규를 토했다.
"내가 누군가? 도대체 내가 누구란 말인가?"
진유걸의 웅후한 대갈은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진유걸은 그 동안 무인(武人)으로서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남궁인이 자신의 생사조차 도외시한 채 양보한 성령용골신단을 복용한 데다, 불마성의 천고광절(千古曠絶)한 무학을 모두 연성하였으니…….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삼화취정(三花聚頂), 오기조원(五氣朝元)!
고금(古今)을 통틀어도 이러한 출신입화(出神入化)의 경지에 오른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이제 무림 유사 이래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무공(武功)을 연성한 패웅지존(覇雄至尊)의 신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진유걸에게는 그런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고금제일의 기협(奇俠)이 되고 패도마황(覇道魔皇)이 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자신에게는 아무도 없고, 자신은 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진유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석양(夕陽)이 깔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붉은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채색(彩色)돼 가는 저녁 노을은 황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진유걸은 그 아름다운 하늘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무겁게 짓눌려 있는 자신의 가슴이 그것을 허락치 않았다.
하염없이 하늘을 보며 서 있는 진유걸의 등 뒤로 붉은 해가 저물고 있었다.
3권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