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十一章 되찾은 기억과 잃어버린 기억 (23/35)

第十一章 되찾은 기억과 잃어버린 기억

1

태명회 고수들이 순식간에 장내를 떠나자, 그 뒤를 이어 유아독녀궁의 살시나찰 역시 전여정과 팽소미를 대동한 채 총총히 사라져 갔다.

이제 장내에는 남궁인과 그의 누이동생 남궁상아, 그리고 부상을 입은 취풍개와 독고영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내상을 입은 취풍개에게로 몰려들었다.

먼저 남궁인이 걱정스러운 듯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

"주형(酒兄)! 어떻소이까?"

두 사람은 이미 안면이 많은 듯 남궁인은 그를 주형(酒兄)이라 불렀다.

"술을 못 먹게 되는 것만 아니면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소."

취풍개의 호기에 남궁인은 실소를 지었다.

"하하… 과연 주형다운 말씀이시구려. 하지만 운기요상(運氣療傷)을 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이들이 대화를 나눌 때, 남궁상아가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할아버지가 괜찮을까?"

"걱정 마, 할아버지는 무사히 벗어나실 수 있을 거야. 우리들에게 소림사로 오라고 지시를 하시고 떠나셨어."

"언제?"

"좀 전, 모옥을 벗어날 때 전음으로 말씀하셨어.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러자 독고영이 금세 눈물을 흘릴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빠… 우리 오빠는 어찌 되셨을까요?"

이 때 강호 경험이 노련한 취풍개가 나서며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자아, 모든 일은 다 잘됐을 거야. 이러고 있다가 남궁 선배를 추적했던 태명회 노괴들이 다시 돌아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돼. 그러니 어서 이 곳을 벗어나는 게 좋겠어."

남궁상아는 진유걸을 보지 못하고 떠난다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 모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동안 정들었던 곳인데… 진 오빠와 독고 오빠도 모옥에 그대로 두고 가는 것인가요?"

"아까 할아버지께서 떠나시면서 태명회 고수들이 두 사람을 찾지 못하도록 모옥을 불태우라 하셨어."

남궁인은 말을 끝낸 뒤, 모옥의 여기저기에 불을 붙였다.

후두두- 후득-!

시뻘건 불길은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활활 타 들어갔다.

남궁인은 모옥에서 등을 돌리며 취풍개에게 물었다.

"주형! 내상은 심하지 않소?"

취풍개는 호로병의 술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리고는 지저분한 소매로 입술을 쓱 훔쳐 내며 대답했다.

"호골주(虎骨酒)를 마셨으니 이제는 괜찮소이다. 어서 갑시다."

취풍개는 큰소리로 떠들며 앞장 서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 남궁인과 남궁상아가 천천히 따라갔다.

단지 독고영만은 화염(火焰)에 휩싸인 모옥을 바라보며 언제까지고 오열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녀의 발길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투닥- 투다닥-!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언제까지고 타 들어가는 모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뻘건 불길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도 독고영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멀리까지 갔던 남궁상아가 다시 그녀를 데리러 쫓아 올라오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2

화려한 내실.

진시황(秦始皇)의 아방궁(阿房宮)보다도 더욱 사치스럽고 화사한 내부.

마치 황실(皇室)의 내전(內殿)을 방불케 할 만치 방대한 규모에 아름다운 정경을 이룬 곳이었다.

바닥은 매끄럽고 윤기가 흐르는 옥석(玉石)으로 다듬어져 있었고, 몇 아름씩 되어 보이는 대리석(大理石) 수십 개가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 기둥에는 모두 정교한 조각이 되어 있었고, 오리알만한 야명주(夜明珠)가 별자리처럼 총총히 박혀져 있었다.

아니, 그것은 정확히 성좌(星座)를 이루고 있었다.

야명주 하나면 일평생을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인데… 성좌를 이루다니…….

정녕 꿈 같은 곳이 아닌가?

이 곳의 주인은 대체 누구이길래 이토록 엄청난 재물(財物)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야명주로 이루어진 성좌들은 단순히 기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전의 벽면과 천장에도 박혀 있었다.

크고 작은 야명주의 광채는 내전 전체를 마치 환상(幻想)의 궁처럼 신비스럽게 비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벽면의 공간과 공간에는 금강석(金剛石), 산호(珊瑚), 마노, 호박(琥珀), 비취(翡翠) 등, 갖가지 진귀한 보석(寶石)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실로 천하의 진기이보(珍奇異寶)를 몽땅 모아 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이 곳 주인의 내력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하의 대부호(大富豪)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때 돌연, 사자좌(獅子座)를 이루고 있던 벽면의 야명주가 좌우로 스르르 갈라지는 게 아닌가?

아, 이럴 수가?

진정 귀신조차 까무라칠 만큼 경악스런 일이었다.

이로 미루어 이 곳의 기관장치는 극히 교묘하고, 그 방면에서 달인(達人)의 경지를 이룬 명공의 솜씨인 듯싶었다.

벽면이 완전히 열려지자 그 안으로부터 한 소동(小童)이 걸어 나왔다.

이제 갓 육칠 세 가량 되었을까?

백설같이 하얀 백의를 산뜻하게 차려 입은 소동은 깨물어 주고 싶도록 귀여운 모습이었다.

백옥(白玉) 같은 피부에 초롱초롱한 눈망울, 오똑하게 솟아오른 콧날과 조그맣고 빨간 입술.

더구나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소동은 지혜가 담겨 있는 눈빛을 반짝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살금살금 발자국을 떼어 놓는 그의 행동은 뭔가를 저지르려는 개구쟁이의 모습이었다.

일순, 소동의 예쁜 입술이 벌어지며 해맑은 음성이 튀어나왔다.

"아버님, 어머님께서 화내시지는 않을까? 하지만 두 분 모르게 살짝만 보고 얼른 갖다 두면 되겠지."

소동은 앙징맞은 웃음을 띄우며 쏜살같이 금우좌(金牛座)가 새겨진 벽으로 다가갔다.

소동은 눈앞의 야명주를 자세히 살피며 어느 한 곳을 눌렀다.

스스슥-!

별자리가 갈라지며 엄청난 규모의 서고(書庫)가 드러났다.

층층을 이루고 있는 서가(書架)의 장서(藏書)들.

종류를 알 수 없는 엄청난 서적들이 밀림을 방불케 할 만큼 빽빽히 들어차 있었고, 크기도 천태만상(千態萬象)이었다.

실내의 분위기도 밝은 편이었고, 침상과 팔선탁(八仙卓)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이 곳의 야명주는 보통 크기의 두 배만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바닥에는 은은한 빛깔의 융단이 부드럽게 깔려져 야명주의 광채와 더불어 실내의 운치(韻致)를 돋보이게 하였다.

천하의 어느 서고가 이토록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겠는가?

소동은 맨 끝에 있는 서가로 다가갔다.

기이하게도 그 곳만은 음산한 기운이 흐르고 있어, 다른 곳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더욱이 그 곳 중앙에는 육중해 보이는 철문이 시커멓게 버티고 있었다.

소동은 그 곳에서 발을 멈추었다.

"성(城) 안의 모든 곳을 다 다녀 보았지만 이 곳은 처음이란 말이야. 과연 이 안에 무엇이 있을까?"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품안에서 엄지손가락만한 열쇠를 꺼냈다. 그것은 누런 황금빛이었다.

소동은 황금빛 열쇠를 육중한 철문의 구멍으로 집어넣었다.

순간.

찰칵-!

경쾌한 음향이 울리며 거대한 철문이 열려지기 시작했다.

소동은 호기심이 가득 어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바로 이 때였다.

슈슈슈슈슈-!

철문 안에서 괴이한 소리가 불꽃처럼 튀어나오며 가공할 만한 흡입력이 소동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것은 어린 소동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힘이었다.

"아앗!"

소동의 조그만 입술이 새파랗게 질리는 순간, 그는 이미 열려진 철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곳은 마치 악마의 입 안처럼 시커먼 동굴이었다.

지척지간이 분간되지 않는 동굴은 한없이 깊었다. 더구나 그 안에는 위맹한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소동은 그 불가사의한 회오리에 빨려들어 끝없는 흑암(黑暗)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으아아아아……!"

3

찰나.

"으헉!"

진유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침상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몸은 온통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왜 이리 어두울까? 여기가 그 동굴 안인가?"

진유걸은 중얼거리다가 문득 눈앞이 답답함을 느꼈다.

그는 손을 올려 자신의 눈을 만져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웬 헝겊 같은 것이 자신의 눈을 칭칭 감고 있는 게 아닌가?

"어? 누가 이랬지? 이상한 일이군."

그는 서둘러 헝겊을 풀어 냈다.

순간, 신비스럽고 황홀하게 빛나는 탈혼사자 독고휘의 두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니, 독고휘가 진유걸에게 주었으니… 이제는 광혈풍 진유걸의 눈이었다.

독고휘는 마령신의가 만든 기관 안에서 진유걸에게 자신의 눈을 준 뒤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이다.

"여기가 어디지? 참 이상한 곳이군."

아니, 이럴 수가……?

진유걸은 분명 당평학에 의해 실명(失明)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독고휘의 희생으로 다시 광명(光明)을 되찾게 되었는 데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진유걸은 자신이 장님이 되었는지, 그리고 독고휘가 죽어 가면서 자신에게 눈을 주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얼굴이 아닌가? 

정녕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알 수 없는 행동을 하였다.

바로 자신의 곁에 누워 있는 독고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누군데 여기에 누워 있지? 나처럼 눈에 붕대를 했군."

진유걸은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리다 말고 문득 자신이 벌거벗은 몸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철문을 열지 말라 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군. 이 곳은 참으로 이상한 곳이야."

철문이라니?

그렇다면 진유걸은 방금 꾼 그 꿈 속의 화려한 성(城)의 소동으로 착각하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여 부모 몰래 철문을 열었다가 강력한 흡입력에 의해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소동.

그렇다. 그 소동은 바로 광혈풍 진유걸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잊어버린 어린 시절…….

그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과거의 기억이 모조리 되살아났던 것이다.

하지만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어린 시절을 찾는 대신 그는 불행히도 철문을 열고 난 후부터 눈(雪) 속에 파묻힐 때까지의 모든 기억을 몽땅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거의 십오 년 간의 세월을…….

아, 엇갈린 운명(運命)!

이제 그는 광혈풍(狂血風) 진유걸이 아니었다.

오직 그만을 위해 온갖 희생을 무릅쓴 여인들도, 그리고 그의 진가(眞價)를 알고 자신의 몸도 아낌없이 바쳤던 사람들도… 이제 모두 그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끝장이었다. 모든 게 끝장이었다.

지청란의 순결도, 남궁인의 희생도, 독고영의 순결도, 독고휘의 두 눈도… 그들의 희생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니… 모든 게 끝이었다.

이제 그들의 희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지 않았는가?

이렇게 되면 강호에 몰아칠 일대 혈겁(血劫)은 대체 누가 막는단 말인가?

그에게 희망을 걸고 모든 것을 희생한 이들은 그 누구에게 보상(補償)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참으로 암담한 일이었다.

진유걸은 침상 밑에 있는 자신의 옷을 뒤졌다.

일순.

달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아주 볼품없는 단검 하나가 나왔다.

그것은 언젠가 어린 시절, 진유걸이 독고휘에게 보여 준 적이 있던 단검이었다.

"오, 여기 있었구나."

진유걸은 옷을 입고는 물그릇에 서슴없이 단검을 집어넣었다.

순간, 무디어 보이던 검날에 선명한 그림이 새겨지는 것이 아닌가?

진유걸은 입가에 득의의 미소를 띄우며 다시 검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아버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검에서 나타난 지형(地形)이 곧 성의 위치이니, 만일 길을 잃게 되면 이것을 보고 찾아오라고 하셨지."

그는 다시 독고휘를 살펴보았다.

"어쨌든 사람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나는 외부로 나온 것이 분명해. 하지만 너무 오래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닐까? 내가 성장한 것으로 보아 십 몇 년은 흐른 듯한데……."

그는 자신이 낯선 곳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매우 침착했다. 그것은 그의 천성인 듯했다.

그는 침울한 얼굴로 길게 한숨을 토해 냈다.

"휴, 아버님과 어머님이 무척 심려하시겠군. 어서 이 곳을 빠져 나가야겠다."

진유걸은 통로를 찾으려고 이 곳 저 곳을 기웃거리다가 기둥에 붙여 놓은 서찰을 발견했다.

급하게 휘갈겨 쓴 초서체(草書體)의 글이었다.

<깨어나는 대로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로 오게. 자세한 얘기는 그 곳에서 하기로 하지.

이 사백은 네가 광명을 찾게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휘에게 감사하거라.

출구(出口)는 이 기둥의 아랫부분에 장치되어 있다.

사백 마령신의.>

이 글은 마령신의가 급하게 쓴 것으로 요점(要點)만 쓰여져 있었다.

그 때문에 진유걸은 이 말들이 무척 난해(難解)하게만 느껴졌다.

'무슨 뜻일까? 광명을 찾게 되다니? 누가 눈이라도 잃은 건까? 그래, 바로 저 사람이 잃었나 보군.'

진유걸은 독고휘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이미 싸늘히 식어 있었다.

아, 천녀정랑이며 탈혼사자 독고휘!

그는 영원한 안식 속으로 빠져든 것이다.

그의 영롱한 눈동자를 진유걸의 눈에 심어 주고서…….

그는 마치 잠든 사람 마냥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입술 가에는 기쁨에 찬 미소가 빙그레 어려져 있었다.

너무나도 행복에 겨운 웃음이었다.

진유걸은 그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혹 마령신의라는 사람이 나의 눈을 이 사람에게 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

그는 부리나케 독고휘의 눈을 싸맨 헝겊을 풀어헤쳤다.

일순.

"허억! 없어……."

진유걸은 그의 퀭하게 뚫린 눈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진유걸은 부르르 몸서리를 치며 중얼거렸다.

"마령신의라는 사람은 정녕 흉칙한 자구나. 내 눈을 빼려 하다니… 그 사람이 이 자의 사백인 모양이지? 아버님에게 말씀드려 그 사람을 혼내 주어야겠군. 아버님도 결코 그냥 두시지 않으실 거야."

그는 나름대로 상황을 판단하며 기둥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서찰에 적힌 대로 그 밑으로 기관장치가 되어 있었다.

기기긱-!

진유걸이 기관장치를 움직이자, 어디선가 굉음이 울렸다.

그것은 안타까움에 흐느끼는 듯한 망자(亡者)의 호곡(呼哭)처럼 길게 이어졌다.

마치 생명이 끊어진 독고휘의 귀곡성(鬼哭聲)처럼…….

그러나 진유걸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열려진 통로로 사라져 갔다.

4

십만대산(十萬大山).

중원(中原)의 남쪽이며 광서성(廣西省) 최남단에 위치한 명산(名山)이다.

비록 오악(五嶽)에는 속하지 못했지만 기암괴석(奇岩怪石)과 녹림방초(綠林防草)가 우거져 있었다.

또한 기봉준령(起峯峻嶺)이 하늘을 찌를 듯이 뾰족뾰족 솟아 있었고, 깎아 세운 듯한 석벽들은 흡사 병풍(屛風)을 연상케 했다.

수백 장이 넘는 단애(斷涯)와 험준한 계곡(溪谷)은 원시림(原始林)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는 온갖 야생동물들이 낙원(樂園)을 이루며 서식(棲息)하고 있었다.

준봉(峻峯)은 하늘에 닿고, 단애(斷涯)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산이 바로 이 십만대산이었다.

어느 날, 이 고산(高山)에서 가장 장관(壯觀)을 이루고 있는 천상벽(天上碧) 아래 십여 명의 인물들이 등장했다.

인간의 발자취를 거부해 온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웬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닌 십여 명이라니?

선두에 서서 일행을 안내하는 인물은 음흉한 얼굴의 노인으로, 팔이 하나 없는지 빈 소맷자락만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귀응신군(鬼應神君) 합구범(合丘凡)이었다.

중조산 근교에서 광혈풍에 의해 팔을 절단당하고, 이후 강태위의 장원에 나타나 그를 암살하려 했던 혈궁고수가 아닌가?

그의 뒤에는 냉막한 표정의 늙은이 두 명이 따르고 있었다.

약간 마른 체격인 그들의 눈에서는 형형한 안광이 무서울 정도로 뻗쳐 나오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내외공이 상당한 경지에 이른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들 뒤에 있는 인물은 뭔가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태성왕부의 금위대 총령 장백노마(長白怒魔) 금일송(金日松)이었다.

또 그의 옆에는 태명회 고수인 금은쌍절(金銀雙絶)이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배후에는 요기가 흐르는 중년미부와 두 노파가 따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호호백발에 주름살 투성이의 두 노파는 눈매가 비수보다도 날카로웠고, 체구는 비슷했으나 생김새는 극히 딴판이었다.

중년미부는 유아독녀궁의 호법인 살시나찰임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으나 두 노파의 내력은 불분명했다.

그리고 맨 뒤에는 뚱뚱하게 살이 찐 세 명의 화상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포달랍궁(抱達拉宮)의 화천존인(和天尊人)과 화각존인(和覺尊人), 화평존인(和平尊人)이었다.

아아, 천여 년 간 침묵을 지키던 마(魔)의 삼대궁과 신비 문파가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모두 함께…….

이것은 정녕 무림에 있어 청천벽력(靑天霹靂)이며 불운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이들은 무엇 때문에 같이 행동하며, 무엇을 노리고 십만대산에 올랐는가?

이윽고 그들 십이 인의 목전에는 높이를 추정할 수 없는 장엄한 벽암(碧岩)이 가로막고 있었다.

온통 짙은 푸른 빛깔의 암석으로 이루어진 천상벽력이었다.

귀응신군 합구범이 걸음을 멈추며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휴, 이제야 겨우 목적지 입구까지 도달하였소. 그러나 앞으로가 문제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질 급한 장백노마 금일송이 물었다.

"대체 성(城)의 입구가 어디에 있단 말이오?"

그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날 정도로 커서 모든 중인들의 시선을 받았다.

그러자 살시나찰의 옆에 있던 작달막한 체구의 노파가 혀까지 차며 합구범에게 면박을 주었다.

"장백산(長白山)의 어린애가 어째서 이런 일에 끼였을까? 거미줄에 보리알 끼이듯이… 쯧쯧……!"

장백노마는 금세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며 고함을 쳤다.

"이 할망구가 당장에 요절이 나고 싶으냐? 감히 어르신에게……."

노파는 지지 않고 더욱 냉랭한 독설을 퍼부었다.

"이 놈아! 너의 증조 할미도 노신에게는 언니라고 칭하거늘, 네놈이 함부로 아가리를 놀릴 작정이냐?"

그러자 장백노마는 두 눈을 무지막지하게 부릅뜨며 달려들었다.

"이 할망구! 이빨을 모조리 뽑아 주마."

그들이 아웅다웅 다투자, 중간에 귀응신군이 합구범이 나서며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

"자, 그만 두시오. 우리는 어차피 함께 행동해야 할 사람들이 아니오?"

그러자 포달랍궁의 화천존인이 점잖게 나서며 한 마디 했다.

"귀응신군! 이것은 서로를 모르는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것이오. 앞으로는 행동을 함께해야 할 사람들이니, 서로 알고나 지내야 할 것이 아니오?"

그제서야 귀응신군은 그가 서장(西藏) 출신의 고수임을 상기하며 유아독녀궁의 두 노파를 소개했다.

"이 분들은 오십여 년 전, 명성을 떨친 바 있던 한세귀파(恨世鬼婆)와 음산치파(陰山癡婆)요. 귀하들도 익히 들은 바가 있을 것이오. 그 동안 유아독녀궁에서 기거하고 있었지요."

그의 말에 포달랍궁의 화천존인이 어깨를 움츠렸다.

'공동파(  派)를 피로 씻어 내렸다는 그 괴물들이로군.'

음산치파와 한세귀파.

두 노파는 오십여 년 전, 공동파와 작은 시비가 벌어졌었다.

당시 그녀들은 맨몸으로 공동파에 뛰어들어 방계제자 칠십여 명을 학살(虐殺)하는 만행을 저지른 뒤 자취를 감추고 말았던 것이다.

화천존인은 노파들 옆에 있는 혈궁의 두 고수를 가리켰다.

"이 분들은……?"

귀응신군의 양쪽에 서 있던 냉막한 인물의 노인들 중 한 명이 나서며 짧게 명호만 밝혔다.

"유명제군(幽冥帝君)이라 하오!"

그러자 다른 한 노인도 똑같이 음산한 목소리로 명호를 밝혔다.

"염라제군(閻羅帝君)이라 하오!"

유명제군과 염라제군.

사도쌍제군(邪道雙帝君)으로 불리우는 이들은 사파무림의 대표적인 존재들로 알려져 있었다.

청청각(靑靑閣)이란 소문파의 각주로도 활동하는 이들은 사술(邪術)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그들 두 명의 합공(合功)인 쌍파선환진(雙破旋幻陣)은 무림의 독보적인 존재로 전해지고 있었다.

이 때, 귀응신군이 품속에서 연한 녹색을 띤 물건을 꺼냈다.

옥경… 그것은 반쪽의 옥경(玉鏡)이 아닌가?

광혈풍의 사부이며 십대기인 중 일 인이던 강남태을자가 이것으로 인하여 생명을 잃지 않았던가?

또한 망담수에서 비참한 생을 영위하고 있던 서혈천왕 혈영광군 마우성도 진유걸의 생을 구해 준 대가로 이것을 가져오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반쪽 옥경이 귀응신군의 손에 있다니?

정녕 믿지 못할 일이었다.

귀응신군은 그것을 손에 든 채 살시나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서 꺼내 보시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살시나찰은 그의 재촉을 받자 역시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 냈다.

아,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것 역시 반쪽의 옥경이 아닌가?

그녀의 손에 들려진 것도 분명히 반쪽의 옥경이었다.

그렇다면 원래부터 이 반쪽 옥경은 두 개였단 말인가?

그리고 여기에는 또 어떤 비밀(秘密)이 숨겨져 있단 말인가?

귀응신군 합구범은 살시나찰의 옥경과 자신이 지니고 있던 반쪽의 옥경을 서로 맞춰 보았다.

달칵-!

순간, 옥경이 정확하게 하나로 맞아떨어지며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졌다.

<반(半)과 반(半)이 더해지니 하나를 이루고…….

십만대산(十萬大山)의 천상벽이 성(城)을 갖추도다.

태양(太陽)과 수직(垂直)으로 됨에 입구를 가리키고…….

이 곳에 용봉(龍鳳)이 진입하니, 하늘이 열리노라.>

"으음……!"

귀응신군은 나직한 신음 소리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이 세 번째 구절을 어찌 생각하시오?"

그는 이렇게 물으면서도 득의에 찬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장백노마가 아니꼽다는 듯이 코방귀를 날렸다.

"흥! 합 형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 뭐 때문에 묻는단 말이오?"

그가 불만스런 어조를 토하자, 살시나찰이 요염하게 웃었다.

"호호호… 금 총령께서는 꽤나 순진하시군요. 그는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의 명석한 두뇌를 과시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이번에는 한세귀파가 나서며 쏘아붙였다.

"물론 거기에는 보다 많은 몫을 차지하겠다는 욕심도 들어 있으렷다?"

귀응신군은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중인들의 눈총을 받게 됐다.

'에잇! 역시 앉아서 일(?)을 치루는 족속과 소인배는 상대를 하지 말아야지.'

그는 내심 욕설을 퍼부으며 청천(靑天)을 올려다봤다.

때마침 붉은 해는 그들의 머리 위를 유유히 내리비추고 있었다.

귀응신군 합구범은 잘 맞춰진 옥경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신속히 뒤로 물러났다.

중인들은 모두 기대 어린 눈길로 옥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찰나, 빛을 머금은 옥경이 멀리 천상벽의 한 곳을 희미하게 비추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정녕 가공하리만치 강렬한 빛이었다.

다만 천상벽과의 거리가 너무 멀고 햇살이 밝기에 자세히 보이지 않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 곳의 십이 인은 무림의 절정고수들이 아닌가?

그들은 천상벽의 상단 부분에 어리는 빛을 바라보며 저마다 장탄식을 금치 못했다.

"흥! 높이가 족히 백여 장은 될 것 같군."

"이야! 저 곳을 무슨 수로 올라간다지? 어휴, 산 너머 산이로군."

중인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천상벽을 망연히 응시했다.

까마득히 높이 솟은 천상벽은 중인들을 놀리듯이 우뚝 솟아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여러 가지 숙의(熟議)를 거듭한 끝에 한 가지 방안을 세웠다.

제일 먼저 포달랍궁의 화천존인이 우렁찬 장소를 터뜨리며 몸을 날렸다.

"우아아아……!"

그가 땅을 박차고 몸을 날리자 곧바로 화각존인도 신형을 퉁겼다.

휘이익-!

뒤이어 화평존인이 몸을 도약시켰고, 다음에는 귀응신군이 나섰다.

"타앗-!"

우렁찬 기합성이 천상벽을 연속적으로 울렸다.

두 번째로 신형을 퉁긴 화각존인은 먼저 몸을 날렸던 화천존인의 손바닥을 박차며 다시 솟구쳤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세 번째인 화평존인에게 힘을 빌리고, 다시 두 번째 화각존인의 장심을 밟고 허리를 퉁겼다.

쉬이익-!

네 번째로 튀어올랐던 귀응신군은 화천과 화각, 화평의 힘을 빌려 더욱더 높이 치솟았다.

다시 그 뒤로 유명제군과 염라제군이 허공으로 솟구쳤고, 장백노마는 맨 뒤를 따랐다.

"으라랏-!"

장백노마 금일송은 둔중한 몸을 빙글 회전하며 천상벽에 거미처럼 달라붙었다.

이것은 실로 눈 깜빡할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전광석화(電光石火)를 방불케 하는 날렵함과 심후한 공력(功力), 풍부한 경험과 세심한 동작이 조화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을 과연 누가 흉내낼 수 있을 것인가?

오직 무림의 일류고수들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리라.

천상벽의 높은 곳에 벽호공(壁虎功)을 전개하며 붙어 있는 장백노마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제기랄! 귀응신군 그 여우 같은 놈은 모르는 것이 없군. 어떻게 노부가 벽공에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는 맨 마지막으로 일을 맡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이 때 돌연.

"금가야! 뭐하고 있느냐? 어서 입구를 찾아보거라!"

귀응신군 합구범이 아래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댔다.

유아독녀궁의 한세귀파도 날카롭게 외쳤다.

"누가 그 곳에 올라가 옴짝달싹도 하지 말라고 했느냐? 무서우면 일찌감치 내려와 고모(姑母)에게 도움이나 청하거라!"

장백노마는 내심 울화가 치밀었으나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흥! 모두 제 명(命)에 못 죽을걸."

그는 중얼거리며 서서히 몸을 이동하여 나갔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었으나 그의 이마에는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동작 하나하나에 혼신(渾身)의 힘을 불어넣은 듯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이윽고 그는 원상태에서 우측으로 이 장 가량 이동하여 작은 구멍 하나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구멍이라기보다는 바위 틈에 가까운 그 주위는 매끈한 운석으로 다듬어져 있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장백노마는 희열의 빛을 띄우며 아래에 대고 소리쳤다.

"찾았다! 조그마한 틈새가 벌어져 있어! 흡사 계집의 그……."

그는 목청껏 떠들다 말고 움찔 입을 다물었다.

유아독녀궁의 노파에게 또 무슨 핀잔을 들을지 몰라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와아… 드디어 찾았다!"

천상벽 아래에 있던 중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귀응신군 합구범은 옥경을 들고 중인들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이 옥경에 드러난 글의 마지막 구절은… '영봉이 진입하니 하늘이 열리도다!'라고 되어 있소. 알다시피 이 옥경의 뒷부분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소."

그는 옥경을 뒤집어 중인들에게 보였다.

거기에는 각각 용자(龍字)와 봉자(鳳字)가 새겨져 있었다.

귀응신군은 중인들을 훑어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이 옥경을 전해 줄 차례요. 모두 준비하시오."

그들은 먼젓번 식으로 몸을 허공에 띄워 이번에는 옥경을 장백노마에게 던져 주었다.

장백노마 금일송은 투덜거리며 옥경을 수중에 쥐었다.

"칫! 아무래도 오늘 일진이 안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그는 옥경을 하나로 맞추어 서서히 벌어진 바위 틈으로 밀어넣었다.

바로 그 때.

우르르르릉-!

갑자기 천상벽 전체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으억! 안 돼!"

벽에 붙어 있던 장백노마 금일송은 대경실색하여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천상벽의 흔들림은 더욱더 심해져 갔다.

우우웅- 우르릉-!

천상벽이 이리저리 갈라지며 바윗덩이가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밑에서 성의 입구가 열려지기만을 고대하던 중인들이 혼비백산하며 외쳤다.

"아앗! 어서 피해!"

"빨리 이 곳에서 벗어나. 어서!"

도망치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장백노마가 목이 찢어져라 외쳐 댔다.

"나 좀 구해 줘! 어서 빨리 나를 좀……."

하지만 저마다 살기에 급급한 중인들은 저마다 뺑소니를 치기에 바빴다.

우릉- 쩌억- 쩍-!

드디어 천상벽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더니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콰르릉- 쾅- 우르릉- 콰당탕-!

마치 천지(天地)가 개벽(開闢)하듯 엄청난 굉음과 함께 천상벽이 무너져 내렸다. 실로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파삭-!

돌연, 장백노마가 붙어 있던 석벽이 기음과 함께 부서져 버렸다.

"으아아아악……!"

금일송은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수백 장 단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퍼퍼퍽-!

"크으윽……!"

그의 몸은 떨어져 내리는 동안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암석 조각과 바윗덩어리들이 그를 후려친 것이다.

잠시 후, 그의 둔중한 육체는 갈가리 흩어져 혈육 덩어리만 난무했다.

정녕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끔찍한 종말(終末)이었다.

콰르릉- 콰앙-!

요란한 폭음은 계속 이어졌고, 바윗덩어리와 흙먼지만이 미친 듯이 난무(亂舞)했다.

천상벽 주위는 희뿌연 먼지와 휘날리는 초목(草木)으로 인하여 지옥의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밑에 있다가 멀찌감치 도주한 인물들은 이 광경을 보며 입을 딱 벌렸다.

천상벽이 갈라지고 무너져 내리는 정경은 진정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장관이었던 것이다.

우르르릉- 쩌억-!

화산(火山)이 폭발하고 용암(熔岩)이 분출되는 듯한 목전의 전경(前景).

그것은 그들의 가슴에 섬뜩한 전율(戰慄)을 안겨 주었다.

포달랍궁의 화천존인이 안타까운 듯 탄식을 내뱉었다.

"끝내 그 성은 세인(世人)의 발길을 거부하려는가? 허무(虛無)한 일이로군."

귀웅신군 역시 체념의 웃음을 흘리며 망연히 중얼거렸다.

"후후… 끝장났군. 모든 게 사라졌어."

이윽고 향 한 자루가 탈 시각이 지났을까?

지축(地軸)이 갈라지는 듯한 폭음도 어느덧 멈춰졌다.

광란하듯 소용돌이치던 기류(氣流)도 말끔히 사그러들었고, 가끔 흙먼지만이 바람에 휘날렸다.

무너져 내린 천상벽 앞에는 엄청난 바윗덩어리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 때문에 원래 천상벽 자리에는 무엇이 생겼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중인들은 서로 얼굴을 힐끔힐끔 살피며 신형을 비스듬히 날려 갔다.

휙- 휘익- 휙-!

그들이 돌무더기에 내려앉는 순간.

"아앗!"

"허억!"

"앗! 저럴 수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