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九章 밝혀진 음모(陰謀) (21/35)

第九章 밝혀진 음모(陰謀)

두두두두-!

아름다운 은백색으로 물든 대지 위에 소란스런 말발굽 소리가 일었다.

이어 눈보라를 헤치며 나타난 세 필의 준마(俊馬)에는 이남일녀(二男一女)가 타고 있었다.

그들의 용모는 한결같이 수려하여 천계의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이 하강한 듯하였다.

다만 중앙의 사내가 병이 들었는지 안색이 창백해 보이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하지만 그의 비범한 이목구비는 그야말로 절세적이었다. 특히 부리부리한 한 쌍의 눈은 신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누구라도 그의 눈동자를 보게 되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우측에는 한 소녀가 붉은 상의에 피풍(披風)을 두르고 있었다.

십팔구 세 가량 돼 보이는 성숙한 여인, 그녀는 정녕 선녀(仙女)를 무색케 할 정도의 화사함을 지니고 있었다.

구름처럼 말아 올린 머리카락과 조화를 이룬 갸름한 얼굴,

초생달처럼 휘어진 눈썹, 샛별같이 맑은 눈망울, 멋진 선을 이룬 콧날 아래 자리한 붉은 입술, 학처럼 우아한 가녀린 목.

그 어느 곳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미를 소유한 여인.

그러나 지금 그 여인의 맑은 눈동자에는 짙은 우수(憂愁)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는 전체적으로 슬픈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청년.

그 역시 중앙에서 말을 모는 젊은이처럼 절세미남자였다.

그러나 그보다는 건강한 편이었고, 눈빛 또한 달랐다.

흑의경장을 한 그는 등에 검을 착용하고 있었고, 몸이 날렵해 보였다. 만일 중앙의 청년만 없었더라면 그의 인상은 더욱 돋보였으리라.

그들은 갈 길이 급한지 연속 말 엉덩이에 채찍을 가했다.

"이럇럇-!"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쏜살같이 치달리는 세 필의 준마.

이 때 돌연, 병색이 짙은 젊은이가 탄 흑마(黑馬)가 갑자기 앞발을 치켜들고 울부짖는 게 아닌가?

히잉- 히이잉-!

마상의 젊은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제는 한낱 미물마저 나를 우습게 보는군. 후후후……!"

냉소 어린 그의 말투에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고뇌가 담겨 있었다.

달려가던 흑의경장인과 절색의 여인이 다시 그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무슨 일이에요, 오빠?"

"웬일인지 이 놈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흑의경장을 한 청년이 의아한 듯 말발굽 쪽으로 시선을 던지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아앗! 저기……."

그의 경악성에 두 사람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들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아니, 웬 사람이……?"

거기에는 핏물을 전신에 뒤집어쓴 사람이 눈 속에 파묻혀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이미 죽은 듯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흑의경장인이 몸을 날려 눈 속에 쓰러진 혈인(血人) 곁으로 내려섰다.

찰나.

"허억! 누가 이렇게 잔인한 짓을……."

혈인의 눈에는 시퍼런 빛을 발하는 암기 두 개가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서 흘러내린 피가 그의 얼굴과 온몸을 시삘겋게 물들인 것이다.

흑의청년은 그 사람의 맥박을 짚어 봤다.

비록 미약하나마 아직 맥박이 뛰고 있었다.

그는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일남일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눈을 상했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습니다. 조부의 거처가 가까이 있으니 어서 데려가야겠습니다."

청년은 피투성이의 인물을 자신의 말에 실었다.

병색이 짙은 청년과 미모의 여인이 혈인을 보며 혀끝을 찼다.

"쯧쯧, 강호의 혈풍은 대체 언제나 가라앉을까?"

그들은 부지런히 말을 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들은 철목산의 입구에 당도하였다.

그들은 거기서 말을 버리고 각기 경공을 시전하여 산을 올랐다.

병중의 청년은 여인의 도움을 받았고, 혈인은 흑의청년이 옆구리에 끼운 채 몸을 날렸다.

반시진 가량 산을 올랐을까?

그들 앞으로 한 채의 모옥이 나타났다.

"할아버님! 상아야!"

흑의청년의 외침에 일순, 모옥 문이 열리며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과 예쁜 소녀가 뛰어나왔다.

"오빠!"

소녀는 숨이 넘어갈 듯 달려오다 말고 그에게 안겨 있는 피투성이의 인물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노인이 다가오자, 흑의청년이 무릎을 꿇으며 절을 했다.

"불초 남궁인이 조부님을 뵙습니다."

옥수준재(玉樹俊才) 남궁인(南宮仁).

그가 조부라고 부를 사람은 단 하나, 마형신의 남궁태협뿐일 것이다.

그렇다. 이 곳은 진유걸이 그토록 오고자 했던 마령신의의 모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흑의청년의 안내를 받고 온 남매(男妹)는 누구인가?

남궁인은 남궁태협에게 병색이 짙은 청년과 그 옆의 여인을 소개했다.

"이 분은 무림에 명성이 쟁쟁한 탈혼사자 독고휘라 합니다."

탈혼사자(奪魂使者) 독고휘(獨孤輝)!

신비한 눈빛에 병을 앓고 있는 이 인물이 바로 진유걸을 배신한 탈혼사자 독고휘란 말인가?

진유걸이 온 천하를 찾아 헤매던 인물!

독고휘, 바로 그 비열한 흉인(凶人)이 등장한 것이다.

찰나, 마령신의 남궁태협이 분노가 이글대는 눈빛을 하며 독고휘를 노려보았다.

"이 놈! 네가 정녕 탈혼사자란 말이냐?"

그의 목청이 어찌나 컸던지 철목산이 쩌렁쩌렁 울렸다.

탈혼사자 독고휘는 영문을 모른 채 깜짝 놀라며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옥수준재 남궁인은 갑자기 마령신의가 분기탱천(憤氣撑天)하여 고함을 지르자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니, 할아버지! 왜 그러시는지요?"

그러나 마령신의는 여전히 살기를 뿜어 내며 추상 같은 호통을 내질렀다.

"이번에는 무엇을 탐내고 누구를 모살(謀殺)하러 왔느냐?"

독고휘는 그가 무섭게 화를 내자,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노선배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노하시는 건지요?"

마령신의는 더욱 어이가 없다는 듯 외쳤다.

"이 놈! 너는 무왕동부에서 간악한 암수로 친구를 해하지 않았느냐?"

독고휘는 마령신의가 무왕동부를 알고 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내가 무왕동부에서 친구를 해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신지요?"

독고휘의 머릿속으로 불길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령신의는 그가 뻔한 사실을 숨기려 하자 더욱 화가 솟구쳤다.

"네놈이 진유걸에게 암습을 가해 절애 밑으로 떨어뜨려 놓고는 지금 발뺌을 하려는 게냐?"

순간.

"아니, 유걸이가… 절애에서 떨어지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탈혼사자 독고휘는 까무러칠 듯이 경악하며 신형을 휘청거렸다. 몹시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어찌 된 일인가?

지금의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전혀 그 때의 사건을 모르는 듯하지 않는가?

마령신의 남궁태협도 비로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지? 유걸이는 분명 독고휘에게 당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독고휘를 붙잡고 울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낭자가 수연 군주요?"

"아니에요! 소녀는 독고휘의 누이동생 도화마검(挑花魔劍) 독고영(獨孤英)이에요!"

그녀는 마령신의를 원망 어린 눈길로 보며 울먹였다.

"오빠는… 흐흐흑… 그 진 대협을 만나기 위해 온갖 고난을 물리치셨는데… 흐흐흑……!"

남궁태협은 어찌 된 영문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 남매를 바라보자, 옥수준재 남궁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독고 대협은 그 동안 다락원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 그를 구해 내 이리로 데려가라 말씀하셨습니다."

마령신의는 그 말을 듣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너희 사부께서 이리로 보내셨다면 필시 무슨 곡절이 있겠구나. 한데 이 사람은 누구냐?"

그는 그제서야 남궁인의 품속에 안긴 피투성이의 인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는 길에 눈 속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한 듯하니 좀 봐 주십시오."

마령신의는 축 늘어진 혈인의 맥을 짚어 보았다.

"상아야, 이 사람을 어서 방으로 옮기고 상처를 살펴보거라."

남궁상아는 십오 년 만에 상봉(相逢)한 남궁인과의 감격을 느끼기도 전에 분주히 움직여야만 했다.

"저 애가 상아라니… 세월 참 빠르군요."

옥수준재 남궁인이 물끄러미 남궁상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마령신의 역시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게다. 너도 그 동안 많이 성장했구나. 지난해 하산(下山)해서 봤을 때보다 또 틀리구나."

마령신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남궁인에게 지금까지의 일들을 물어 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탈혼사자가 다락원에 감금되어 있었느냐?"

"사실 다락원은 유아독녀궁(唯我獨女宮)의 본거지입니다."

유아독녀궁이라니?

그의 말에 따르자면 다락원이 바로 천년신비에 싸여 있는 삼대궁 중의 하나라는 말이 아닌가?

오직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방대한 조직의 문파!

"독고 대협은 유아독녀궁의 궁주인 귀염마녀(鬼焰魔女)의 채양보음지술(採陽補陰之術)에 당해……."

순간, 남궁태협은 뒤로 쓰러질 듯 경악하였다.

"뭣이? 귀염마녀의 악독한 사술(邪術)에 당했다고?"

그는 재빨리 탈혼사자의 맥을 짚어 보았다.

독고휘는 마령신의가 하는 대로 몸을 내맡긴 채 중얼거렸다.

"귀염마녀의 말대로 되다니… 유걸이가… 유걸이가……."

"귀염마녀가 유걸이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가?"

"광혈풍을 처리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그토록 쉽게 당할 줄이야……."

그가 비분강개한 어조로 눈물을 글썽이자, 마령신의는 아직도 그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무왕동부에서 자네로 변장하고 광혈풍에게 암수를 쓴 인물은 누구란 말인가?"

독고휘는 그 말을 듣자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누구냐? 대체 어떤 놈이 나로 변장해 유걸이를… 으윽!"

그는 엄청난 격동에 못 이겨 피를 울컥 토해 냈다.

"오빠!"

도화마검 독고영이 애처로운 얼굴로 그를 불렀다.

마령신의는 그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자, 진유걸에 대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하지만 염려 말게. 유걸이는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생명을 건졌다네."

"예? 그게 정말이십니까?"

"물론이네. 하지만 정말 문제는 자네 몸에 있네."

그 말에 장내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마령신의를 주시하였다.

남궁태협은 그들을 둘러보며 크게 탄식을 터뜨렸다.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실로 암담한 일이로다."

독고영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혹 오빠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이것은 비단 독고 공자 한 명에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오."

독고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마령신의와 독고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남궁인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유아독녀궁의 귀염마녀가 전설상의 방중비법(房中秘法)을 완전히 성공했다는 거야. 그것은 즉, 귀염마녀가 상대하는 모든 사내들의 진원(眞源)을 모조리 흡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리지."

"아… 아니?"

"아……!"

그 말을 들게 된 장내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사부님께서 독고 대협을 이 곳에 보내신 이유가……?"

"그렇다! 너희 사부도 그것이 염려되어 노부로 하여금 그를 진맥케 한 것이다."

독고휘는 이빨을 으스러져라 악물며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으흐흐흐… 그렇다면 나는 이제껏 그 마녀의 방중비법을 연마하는 도구로 쓰여졌다는 말이군. 으흐흐흐……!"

그러다 갑자기 그는 원귀 서린 폭갈을 내질렀다.

"그러나… 귀염마녀! 기다려라! 내 복수를 대신해 줄 광혈풍이 존재하고 있다!"

이 때였다. 모옥 안에 있던 남궁상아가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 소리를 내지르는 게 아닌가?

"아악! 할아버지! 진 오빠! 진 오빠예요!"

마령신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뭐… 뭐라고?"

남궁상아의 부르짖음에 모두가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남궁상아는 진유걸의 머리맡에서 발을 동동 굴리며 울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침상에 누워 있는 인물을 살펴보았다.

핏물로 절은 그의 얼굴은 어느 새 말끔히 씻겨 있었다.

찰나 독고휘의 눈이 튀어나올 듯 무섭게 휩떠지며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유… 걸… 아……!"

광혈풍 진유걸과 탈혼사자 독고휘!

이들의 운명(運命)은 정녕 불행(不幸)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다음 순간, 독고휘의 안면이 경직되며 입에서 피가 토해졌다.

"허윽! 유걸아! 정신차려라, 유걸아!"

그는 사력을 다해 부르짖으며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아앗! 오빠!"

독고영의 놀란 외침이 독고휘의 귓가에 아련히 들려 왔다.

독고휘는 그 소리를 끝으로 암담한 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남궁인은 혼절한 그를 다른 침상에 눕힌 뒤 마령신의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이 사람이 이살 중 한 명인 그 광혈풍이란 말입니까?"

"그렇다. 이 사람이 바로 할아버지의 의제인 강남태을자의 제자이며, 강남살성이라 불리우던 광혈풍이다."

"그런데 대체 어찌 된 일일까요? 광혈풍 같은 인물이 이렇게 처참하게 당하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걸이는 공력을 모두 상실한 것 같구나. 더구나 실명(失命)까지 했으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아, 운제를 볼 면목이 없구나."

마령신의는 내심 탄식을 내쉬었다.

그 때.

"아니? 할아버지, 여기 좀 보십시오!"

남궁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광혈풍의 미간을 가리켰다.

순간, 그것을 본 마령신의도 흠칫 놀랐다.

"아니, 이건 살괴(殺魁)! 이것은 천여 년 전 무림을 뒤흔들었던 공포의 살인마 천살성 사마기의 이마에 나타났던 것인데……."

"어쩌면… 이 사람만이 앞으로 전개될 엄청난 혈겁(血劫)을 방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떨리듯 흘러 나온 남궁인의 목소리가 실내를 조용히 휘감았다.

만휘군상(萬輝群象)이 잠든 시각.

철목산의 깊은 계곡에 위치한 모옥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실내의 한쪽에 위치한 침상에는 명재경각(命在頃刻)에 달한 진유걸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중앙에 놓인 단목(檀木)으로 만든 탁자 주위에는 다섯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빈 찻잔이 놓여 있어,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보여 주었다.

남궁태협에게 모든 얘기를 들은 듯 다섯 사람 모두의 눈에는 저마다 이슬방울이 맺혀 있었다.

독고휘가 문득 정적을 깨며 입을 열었다.

"그랬었군요… 나는 유걸이가 가짜에게 당하고 있을 때 그를 만나기 위해 중조산으로 가던 중 위험에 빠진 여인을 구해 주고 있었습니다."

"함정에 빠진 게로군. 평소 안면이 있는 여인이었는가?"

남궁태협의 물음에 독고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하북성 팽가문(彭家門)의 옥봉여협(玉鳳女俠) 팽소미(彭小美)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옥수준재 남궁인이 의아한 듯 물었다.

"아니? 팽소미라면 이살을 애타게 찾아다니던 여인 중 한 명이 아닙니까?"

"그래서 방심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내게 느닷없이 암습을 가해 왔습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낯선 방 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귀염마녀의 정실이었군요?"

문득 독고휘가 궁금하다는 듯 남궁태협에게 물었다.

"노선배님께서는 유아독녀궁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듯한데, 귀염마녀에 대해 자세히 좀 말씀해 주십시오."

"귀염마녀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탕녀(蕩女)일세. 그녀는 백 년 전에 와해된 사천방(四天幇) 사대천왕(四大天王)의 여인이었지. 그녀 역시 사대천왕와 함께 잠적하고 말았었네."

이번에는 옥수준재 남궁인이 나섰다.

"기실 저의 사부님께서는 은거 기인이십니다. 그 분은 항상 삼대궁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에 대해 걱정하고 계셨지요. 그러던 중 다락원이 수상하다는 것을 아시고는 그 근처에 조그만 암자를 하나 세워 그 동안 다락원을 주의깊게 살펴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독고영이 놀라며 아는 척을 했다.

"아니, 그렇다면 망정암(忘情庵)의 노스님이 바로 그 분이시란 말씀입니까?"

"아니? 낭자가 그걸 어찌 아시오?"

마령신의가 어리둥절해 하자 남궁인이 나서며 의문를 풀어 주었다.

"사실 독고 낭자는 다락원의 원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뭐라고?"

마령신의는 뜻밖이라는 듯 크게 놀랐다.

옥수준재 남궁인이 다시 해명을 해 주었다.

"원래 원주는 살시나찰(殺屍羅刹)이었는데, 그녀의 얼굴이 하도 알려져 있는지라… 그녀를 알아보는 전대 고수들이 있을지 몰라 귀염마녀가 아직 순결한 독고 낭자를 원주로 기명했던 것입니다."

"아, 그렇게 된 거로군."

마령신의는 탄성을 터뜨렸다.

"오빠와는 정녕 뜻밖의 해후를 하게 되었구려. 그래,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았소?"

"아주 우연히 향옥이란 시녀를 통해 오빠의 내력을 듣게 되었어요. 그래서 몰래 만나 보았더니… 뜻밖에도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저의 오빠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향옥이란 시녀가 바로 팽소미라는 여인이었겠군요?"

남궁상아의 직감에 모두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문득 독고영이 궁금하다는 듯 남궁인에게 물었다.

"한데 남궁 공자 사부님의 귀성대명(貴姓大名)이 어찌 되시는지요?"

"그 분은 십대기인 중 한 분이신 반야선승이십니다!"

독고휘와 독고영은 남궁인의 사부가 반야선승라는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반야선승(般若禪僧)이라면 십대기인 중 최고로 손꼽히는 절정고수가 아닌가?

그는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인 소림파(少林派)의 속가제자(俗家弟子)로, 지혜가 출충하고 기지가 절륜하여 수많은 고승(高僧)들의 총애(寵愛)를 한몸에 받았다.

더구나 그는 소림(少林) 칠십이(七十二) 종(種) 절예(絶藝) 중 반수 이상을 터득한 인물로도 유명했다.

그것은 소림파 창건 이래 단 세 명만이 이룬 경지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천문지리(天文地理)에도 능통하여 앞날을 예견(豫見)하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정한(情恨)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스스로 삭발하고 불도에 귀의하였다.

하지만 그가 무림에 이루어 놓은 공적(功績)은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의 얘기를 듣던 중 조금씩 그 동안의 의문들이 풀어짐을 느꼈다.

우선 광혈풍 진유걸이 무왕동부에서 가짜 탈혼사자에 의해 암습을 당할 때, 진짜 독고휘는 팽소미의 함정에 빠져 다락원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또한 진유걸을 두 번씩이나 사지에서 건져 준 것은, 천기(天氣)를 내다볼 줄 하는 망정암의 주지스님 반야선승의 도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원암을 피로 물들인 다락원 전대원주의 진면목은 바로 살시나찰이었던 것이다.

남궁인은 침상에 누워 있는 진유걸을 한 번 쳐다본 뒤 신중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제자에게 이르시기를, 천살성 사마기 같은 살괴를 지닌 인물만이 앞으로 닥쳐 올 협겁(血劫)을 방지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진 형에게서 살괴가 나타나다니……."

"반야선승 같은 일세의 기인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면 반드시 그럴 것이오."

마령신의 역시 독고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반야선승은 결코 헛된 말씀을 하실 분이 아냐. 어떻게든 유걸이를 살려 내야만 해."

"그런데 유걸이는 어떻게 해서 무공을 잃었을까요?"

"당시 그는 풍운서생으로 역용하여 다락원으로 갔네. 서혈천왕 혈영광군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때만 해도 노부는 다락원이 유아독녀궁인 줄 몰랐었네."

순간, 다락원에서 아진이라는 이름으로 원주 노릇을 했던 도화마검 독고영이 깜짝 놀라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풍운서생이 바로 광혈풍이라고요?"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 남궁인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물었다.

"혹 유아독녀궁이 진 형의 공력 상실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오?"

독고영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난처한 듯 대답했다.

"맞아요. 그는 향연이란 시비에 의해 무공이 폐쇄됐어요. 향연은 산공분이란 독을 사용했다더군요."

"산공분!"

마령신의의 안색이 순식간에 침중하게 변해 갔다.

"왜요? 유걸이를 구할 수가 없습니까?"

"노부도 거기에 대한 해약은 없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중인들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살괴를 지닌 광혈풍 진유걸!

그를 정녕 포기해야만 한단 말인가?

"우선 가장 큰 문제는 폐쇄된 무공보다 진 공자님의 눈이에요. 그 분의 시력은 회복될 수 있나요?"

독고영의 물음에 마령신의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유걸이는 사천당가의 독보적 암기 금절침(金絶針)에 의해 완전히 두 눈을 잃었소. 회복은 불가능하오."

순간, 독고휘가 눈빛을 빛내며 다급하게 물었다.

"노선배님! 제 생명은 이제 얼마 남았습니까? 조금도 속이지 마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진유걸에 관한 얘기 도중 갑자기 그가 이런 말을 꺼내자 모두 어리둥절해 했다.

"안타까운 일이네만 귀염마녀가 시전한 방중술은 천여 년 전에 발견된 음양회천경(陰陽回天經)에 있는 수법일세. 이것의 가공스러운 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네. 자네가 귀염마녀에게 모든 진원을 흡취당한 지가 오십여 일이 지났다고 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불과 십 일 정도뿐일세."

그러자 독고영은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독고휘를 쳐다보았다.

"으흐흑… 오빠!"

그러나 독고휘는 이미 생을 단념한 듯 초연한 자세였다.

얼마 만인가?

그 얼마 만에 만난 혈육(血肉)이던가?

독고휘 때문에 사문까지 떨쳐 버리고 그의 뒤를 따라왔던 도화마검 독고영이 아닌가?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마령신의를 응시했다.

"정녕 오빠를 구할 방도는 없는 것인가요?"

마령신의는 한숨을 길게 토해 내며 고개를 내저었다.

"매듭은 묶은 자만이 풀 수 있다고 했소. 이것은 귀염마녀만이 해독할 수……."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 별안간 독고휘가 광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중원천하를 뒤흔들던 이살(二殺)이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이란 말이냐? 한 명은 사경(死境)을 헤매고, 다른 한 명은 시한부(時限附) 인생이라니……!"

그의 목소리에는 처절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독고휘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마령신의를 바라보았다.

"제 눈… 천녀정랑(千女情郞)이란 호칭을 받을 수 있었던 제 눈을 유걸이에게 주십시오."

찰나, 중인들은 그의 이 뜻밖의 선언(宣言)에 모두 기절초풍할 듯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잠시 후, 그의 얘기는 벅찬 감격과 더불어 회의를 일으켰다.

타인(他人)에게 눈을 이식한다는 것은 금시초문(今時初聞)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독고휘의 눈을 진유걸의 눈에 옮길 수가 있단 말인가?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령신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협의 의기는 충분히 알 만하오. 하지만 그것은 전례(前例)가 없던 일이오. 절대 불가능……."

그 때였다. 다소곳이 앉아 있던 남궁상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할아버지! 해야 해요! 어떻게 하든지 진 오빠를 구해야만 해요!"

그러자 독고영도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분의 몸에 남아 있는 산공분은 사부님으로부터 약간 배운 바가 있으니 소녀가 해독해 보겠어요. 그렇게 되면 그 분은 다시 무공을 익힐 수가 있게 돼요."

그러나 마령신의는 그들의 열의에도 불구하고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불어 냈다.

"휴, 그러나 그의 눈을 치료하기 위해선 당장 공력을 주입시켜야만 하는데, 지금 그는 외인의 공력을 전혀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오."

그 때 생각에 잠겨 있던 남궁인이 문득 방법이 생각난 듯 벌떡 신형을 일으켰다.

"할아버지! 성령용골신단(聖靈龍骨神丹)이 있지 않습니까?"

순간, 남궁태협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성령용골신단?"

"하지만 그건 너를 살리기 위해 만들어 온 영단이 아니냐?"

"진 형은 천하를 구할 분이십니다. 그러니 일단 그 분을 구하는 게 우선입니다."

굳은 의지가 담긴 남궁인의 말에 마령신의의 노안(老眼)에 축축한 물기가 어려졌다.

오음절맥(五陰絶脈)인 남궁인을 살리기 위해 몇십 년을 제조해 온 성령용골신단이 아닌가?

그런데 자신의 목숨은 아랑곳없이 그 귀한 성령용골신단을 미련없이 남에게 주겠다니?

남궁태협은 남궁인의 그 같은 마음씨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솟아올랐다.

그는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네 젊은이를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이남이녀(二男二女).

지금 그들의 가슴에 담고 있는 것, 그것은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겠다는 희생(犧牲)이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자신을 바칠 결심을 하였는가?

우정(友情) 때문에?

아니면 분홍빛 연정(戀情)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피끓는 의기(義氣) 때문인가?

남궁태협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단호하게 외쳤다.

"좋다! 해 보자.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그를 살려 내도록 하자."

찰나지간, 장내에 있던 젊은이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물기 어린 미소가 흘렀다.

마령신의는 앞으로의 일들을 의논하였다.

그들은 진유걸을 격동시키지 않기 위해 당분간 모든 일을 비밀리에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마령신의는 첫 번째로 일을 행할 독고영을 바라보았다.

"낭자는 결심이 되어 있소?"

"네. 하지만… 너무 떨려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독고휘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독고휘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유걸이는 멋진 친구다. 결코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이 아냐. 이후, 그는 나를 대신하여 너를 행복하게 해 줄 거야."

"흐흐흑… 오빠!"

독고영은 독고휘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마령신의는 힐끔 남궁상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눈치 못 챈 듯, 남궁인과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고 있었다.

'휴, 오늘 이후로 저 애는 이루지 못할 사랑에 얼마나 애태우며 가슴 아파할 것인가?'

마령신의가 내심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남궁상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남궁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성령용골신단을 복용하지 않는다면 오빠는 어떻게 돼?"

남궁인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글쎄, 하지만 그는 무림을 위해 꼭 살아야 할 사람이니까."

"하지만… 오빠는?"

남궁상아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울기는… 나는 괜찮아. 예로부터 사람이란 보다 큰 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어."

남궁상아는 그의 말을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다만 성령용골신단을 남궁인이 복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그러나 누구보다 더 가슴 아픈 사람은 마령신의 남궁태협이었다.

손자의 병을 치유키 위하여 얼마나 모진 고생을 해 왔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가까스로 완성된 영단을 진유걸에게 복용시켜야 하다니…….

하지만 마음이 아프기는 했지만 결코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령신의는 남궁인과 남궁상아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상아야! 비록 오빠가 성령용골신단을 복용치 않는다 해도 살아날 다른 방법이 또 있단다."

그의 말에 두 사람이 놀란 얼굴로 마령신의를 주시하였다.

"정말이십니까,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 말씀이 진정이세요?"

"물론이지. 삼 년 안으로 성령용골신단을 복용한 사람의 피를 조금만 섭취하면 그 절증을 고칠 수가 있다. 다만 한 가지……."

"한 가지… 그게 무엇입니까?"

"그 방법으로 고치게 되면 무공을 펼칠 수가 없게 된다. 즉, 공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지."

"제가 천하를 구하지 못할 바에야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양보하는 게 지당합니다."

남궁태협은 손자의 희생에 눈물이 나왔지만 입술을 악문 채 참아 냈다.

모두의 희생으로 과연 진유걸은 살아날 수 있을까?

각자 나름대로의 생각이 깊어져 가는 동안 가을밤도 깊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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