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章 철영보(鐵英堡)
1
얼마나 달렸을까?
진유걸이 탈진한 상태로 비를 맞으며 주수연과 쉬고 있을 때였다.
"여기다."
갑자기 숲 속에서 여인의 외침 소리가 들려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쌔액-!
누군가가 쏜 듯 화살이 날아오는 예리한 소리가 들렸다.
"위험해!"
진유걸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하며 주수연을 밀쳤다.
다음 순간, 진유걸은 허벅지에 극렬한 통증을 느끼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으윽!"
그의 다리에는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한 대가 깊이 박혀져 있었다.
"공자님, 공자님, 제발 정신차리세요. 정신을 잃으면 안 돼요. 으흐흑… 공자님……!"
주수연은 어깨를 들먹이며 미친 듯이 오열하였다.
사랑하는 정인(情人)의 아픔만큼 더 고통스러운 것이 어디 있으랴?
주수연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겨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 때였다. 한 사내가 풀숲에서 튀어나오더니 두려움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아앗! 아씨! 짐승이 아니라… 사람인데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는 여인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뭐라고? 사람? 내가 잡은 것이 사람이란 말이냐? 이런, 큰 실수를 저질렀구나."
쓰러진 진유걸의 머리 속으로 다시 여러 사람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주수연은 그를 결코 아무 곳에도 보내지 않겠다는 듯 그의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진유걸은 모든 힘을 다하여 주수연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주수연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2
쾅-!
탁자가 부서져 나가는 듯한 굉음이 실내를 무섭게 경직시켰다. 뒤이어 화가 극에 달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철없는 것! 잘못해서 그 사람이 죽기라도 했다면 너는 어쩔 뻔했느냐? 또 그 사람의 아내는 어쩌고?"
진노(震怒)한 음성을 터뜨리는 인물은 머리카락이 조금 희끗희끗한 중년인이었다.
그의 앞, 이제 갓 피어나는 꽃송이처럼 앳띠고 화사한 소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었다.
어찌 보면 성숙한 여인 쪽에 더 가까운 묘령(妙齡)의 소녀는 균형 잡힌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오밀조밀 자리한 이목구비, 갸름한 목덜미 선, 풍만한 가슴… 아름답게 흘러내린 허리 곡선과 팽팽하게 굴곡진 둔부는 철담간장(鐵膽肝臟)을 지닌 사내라도 뇌쇄시킬 듯 자극적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을 책망하는 중년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는 있었지만, 속으로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자식!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와 가지고는 나를 이렇게 괴롭히다니… 흥! 어디 두고 보라지.'
그녀는 생각할수록 괘씸한지 내심 분통을 터뜨렸다.
백화낭자(白花娘子) 철지연(鐵芝燕).
그녀는 금나수법으로 유명한 강남의 철영보(鐵英堡) 보주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었다.
그녀에게 꾸중을 늘어놓는 중년인, 그가 바로 철영보(鐵英堡) 보주인 철악거수(鐵嶽巨手) 철웅산(鐵雄山)이었다.
백화낭자 철지연은 우중(雨中)에 사냥을 나갔다가 진유걸을 동물로 오인하고는 화살을 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지금 부친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흑… 흐흑……!"
철지연이 마침내 설움에 겨운 듯 어깨를 들먹였다.
철웅산은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자 노여움 대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쯧쯧, 어미도 없이 자란 것이라… 휴!'
"이제 그만 들어가 보거라."
철악거수 철웅산도 그녀의 울음에는 약하였다.
철지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물러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언제 울었냐는 듯, 손가락 사이로 눈을 빠끔히 뜨며 얄밉게 중얼거렸다.
"피, 내가 그런 사소한 꾸중에 눈물을 흘릴 것 같애?"
그녀는 혀를 쏙 내밀더니 어디론가로 걸음을 옮겼다.
참으로 당돌하고 영악한 소녀가 아닐 수 없었다.
철지연이 가는 곳, 그 곳은 외곽에 떨어져 있는 별채 쪽이었다.
"혹 그들 부부가 내게 앙심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때 별채에서 사순 가량의 중년인이 걸어 나왔다.
얼굴이 반듯하고 풍채(風采)도 좋았으나, 어딘가 모르게 음침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다.
그는 철지연을 보더니 허리가 부러지도록 절을 했다.
"아가씨, 여기까지 어인 일이신지요?"
"오, 장(張) 의원(醫院)! 그래, 그 사람의 부상은 어느 정도예요?"
"화살을 맞은 부위가 염증(炎症)이 생기지 않도록 손을 써 놨으니 그리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그 외에 다른 상처들이 더 시일을 끌 것 같습니다."
"다른 상처라니?"
"예, 그 사람은 여러 곳에 부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특히 무릎 같은 곳은 상당히 심하게 다쳐, 여러 날을 치료해야 할 것 같더군요."
"치이, 정말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게 다 말썽이군."
그녀는 몸을 홱 돌리며 별채로 들어섰다.
방 안은 간단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다.
방 한쪽에 마련된 침상에는 한 사내가 누워 있었다.
평온한 얼굴이었으나 그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곁에는 젊은 여인이 애처로운 얼굴을 한 채 그의 식은땀을 닦아 주고 있었다.
광혈풍(狂血風) 진유걸(陳儒傑)과 해월영(海月影) 주수연(朱洙淵)!
바로 그들 두 연인(戀人)의 모습이었다.
철지연은 그들의 다정스런 모습을 보자 못 마땅하다는 듯 싸늘하게 외쳤다.
"당신네들은 정말 뻔뻔스럽군요. 치료를 해 주었으면 의당 고맙다는 사례를 하고 물러갈 것이지, 언제까지 눌러 있을 작정이에요?"
주수연은 그녀의 냉랭한 어투에 불안을 느꼈다.
"하지만 이 분의 몸이 성치 않은데… 어떻게?"
"아니? 그렇다면 몸이 완쾌될 때까지 이 곳에 머물 작정이란 말인가요?"
주수연은 철지연이 몹시 다그치자 내심 피눈물을 흘렸다.
당금 황제(皇帝)와 인척간인 군주의 신분에 있는 주수연!
그녀가 어찌 이런 수모(受侮)와 모욕(侮辱)을 당한 적이 있었던가?
그녀는 시선을 돌려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진유걸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 분을 위해서라면 내 어찌 지옥(地獄)이라도 마다할 수 있겠는가?'
주수연이 생각에 잠길 때 다시 철지연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 왔다.
"당신들은 비가 그렇게 쏟아지는데 거기서 대체 무얼하고 있었던 거죠?"
주수연은 거기에 대한 말을 미리 생각해 놓았는지라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 부부는 약초(藥草)를 캐서 그 날 그 날 살아가는 처지입니다. 한데 그 날은 짐승에게 쫓겨……."
철지연은 그 말에 우습다는 듯 깔깔거렸다.
"나는 짐승을 잡으러 갔는데, 당신네들은 짐승에게 쫓기다니정말 우습군요."
"그래요. 정말 우스운 일이었어요."
주수연은 처량한 마음이 들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철지연은 주수연의 심정도 모른 채 약간 기분이 유쾌해진 듯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들 집은 어디예요?"
주수연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없어요. 떠돌아다니며 아무 곳에나 자는 처지지요."
주수연의 말에 철지연의 얼굴로 일말의 동정심이 스쳐 갔다.
그녀가 막 말을 이으려는 순간.
"으음… 으음……!"
진유걸이 신음 소리를 뱉어 내며 슬며시 두 눈을 떴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주수연을 알아보고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수연은 그가 엉뚱한 말을 꺼낼까 두려워 얼른 철지연이 있음을 인식시켰다.
"아씨께서 납시어 계십니다."
진유걸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철지연 쪽으로 돌렸다.
순간.
"헉! 낭자는……?"
진유걸은 놀라다가 말고 입술을 꽉 깨물며 말을 끊었다.
철지연은 그의 모습에 의혹을 느끼며 물었다.
"날 아나요?"
그녀의 물음에 진유걸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소생같이 무식한 놈이 어찌 귀하신 아가씨를 알 수 있겠습니까?"
진유걸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주수연이 얼른 나섰다.
"그는 소첩과 함께 이 산 저 산 헤매며 오직 약초만 찾아다닌 무지랭이입니다. 그런 그가 어찌 아씨를 알겠습니까?"
철지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야. 분명히 나를 아는 것 같은 표정이었어. 나를 어디서 보았는지 어서 대답하지 못해요?"
철지연이 몹시 화가 난 듯, 진유걸을 다그칠 때.
"규중처녀(閨中處女)의 목소리가 어찌 이리도 큰가?"
호통 소리와 함께 철악거수 철웅산이 등장했다.
철지연은 언제 소리를 질렀냐는 듯 금세 미소를 지으며 다소곳이 말했다.
"아버님, 소리를 지르다니요? 소녀는 단지 병문안을 왔을 뿐이에요."
"그래,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병문안을 하는 사람은 오십 평생 네가 처음이다!"
철지연은 철웅산의 꾸중에 도망치듯 방을 빠져 나갔다.
철웅산은 주수연을 돌아보며 미안해 했다.
"미천한 여식(女息) 때문에 이렇듯 불편을 끼쳐 드려 정말 죄송하오. 아비 된 입장에서 깊이 사죄드리겠소."
"아닙니다. 비가 오는 데 약초를 캐러 다닌 저희 부부 잘못이 더 큽니다."
"쯧쯧, 몸이 이렇게 되어 약초도 캘 수 없게 됐으니… 정말 미안하구려. 그런데 거처는 어디요? 연락을 해야 한다면 사람을 보내겠소."
"연락할 사람도, 마땅한 거처도 없이 떠돌아다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리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수연은 이런저런 말을 지어 내어 철웅산를 이해시켰다.
"그렇다면 본보에 기거하며 집안 일을 좀 맡아 주겠소? 보수는 섭섭치 않게 드리리다."
"그것은 이 분과 상의하여 결정하겠으니 말미를 좀 주십시오."
"알겠소. 그럼 시간이 나는 대로 다시 들리겠으니 불편한 점이 있으면 허물치 말고 알려 주시오."
철웅산은 말을 끝낸 뒤 총총히 사라졌다.
그제서야 진유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수연은 그에게 말 못할 무슨 사정이 있음을 짐작했다.
"공자님께서는 저들 부녀를 알고 계신지요?"
"철웅보주는 오늘 처음 만나긴 했지만, 그전부터 아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오."
그렇게 말하는 진유걸의 눈에는 살기가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지연 낭자는 예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소. 나는 그 때 휘와 어느 객잔에 머물고 있었는데 지연 낭자가 우리를 찾아왔었소."
"무슨 일로요?"
"후후… 우리 이살의 명성 때문이었소. 우리를 찾아오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했더니 그녀가 펄쩍펄쩍 뛰더군. 그 때나 지금이나 그녀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소."
"그랬었군요. 한데 철영보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으신 것 같던데……."
"그는 사실 사문(師門)의 원수요. 다시 만난 지연 낭자가 반갑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고……."
그의 안면에는 괴로운 표정이 역력했다.
사문의 철천지 원수를 목전(目前)에 두고도 복수(復讐)를 할 수 없는 처지가 아닌가?
'불쌍하신 분…….'
주수연은 그의 상처를 안아 주려는 듯 그를 끌어안았다.
"수연!"
"공자님……!"
잠시 후, 별채 문이 소리 없이 닫히고 타오르던 불빛도 사그러 들었다.
그리고 옷자락 매만지는 음향이 들리는 가운데 가을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3
백화낭자 철지연은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귀여움만 독차지하며 자라왔기에 모든 것이 제멋대로였다.
게다가 성격이 사내처럼 호방(豪放)하여 한 번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보 안의 하인들은 누구도 그녀의 비위를 거슬리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철지연의 실수로 부상을 당한 채 철영보로 들어온 사내만이 그녀의 말에 복종하지 않았다.
아니, 그 사내는 철지연의 지시에 항상 순종(順從)하며 철저히 이행했다. 그것이 오히려 그 콧대 높은 철지연의 심사를 건드린 셈이 되었다.
그녀는 한 번 기회를 보아 그를 호되게 혼내 줄 결심이었다.
철지연, 그녀는 지금 자신의 방 안에 비스듬히 누워 한 여인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혜령(蕙玲)! 진소랑(陳昭郞)과 함께 본보에 있은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돼 가죠?"
시비 차림의 여인이 서가(書架)를 정리하다 말고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공손하게 대꾸하는 여인.
아, 그녀는 왕실의 핏줄을 가진 지체 높은 신분의 해월영 주수연이 아닌가?
그토록 고귀한 여인이 한낱 보의 시비로 전락하다니…….
그러나 지금 그녀는 행복에 가득 찬 얼굴이 아닌가?
그것으로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사랑은 신분을 뛰어넘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철지연은 거만하게 드러누운 채 계속해서 말문을 열었다.
"혜령은 다정하고 공손한데 어째서 진소랑은 그렇지 못한 거죠?"
혜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주수연은 시종일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 분은 원체 성격이 무뚝뚝한 분이에요. 그러니 아씨께서 이해해 주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근래 들어 부쩍 우울해 하는 진유걸을 생각했다.
진유걸은 무공을 회복하기 위해 길을 떠나야만 했지만, 주수연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아는 주수연이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 분을 언제까지나 내 곁에 묶어 둘 수만은 없어. 가급적이면 빠른 시일 내에 그 분을 보내 드려야 할 텐데…….'
이 때 철지연이 침상에서 발딱 일어나며 은근히 물었다.
"혜령은 진소랑을 사랑해요? 처음에 어떻게 만나게 됐어요?"
그녀의 당돌한 물음에 주수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처음에 우연히 만났어요. 아주 우연히……."
주수연은 철지연의 물음에 까마득히 지난날이 떠올랐다.
어느 화창한 봄날, 주수연은 춘정(春情)을 이기지 못하고 왕부를 나섰다.
그녀는 아름다운 가교(架橋)가 놓인 수양버들 옆에서 솟구치는 시흥(詩興)에 못 이겨 곱디고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柳色黃金嫩 梨花白雪香
玉樓巢翡翠 珠殿鎖鴛鴦
選妓隨雕輦 微歌出洞房
宮中誰第一 洙淵在照明
황금빛으로 버들 눈 트고, 백설 같은 배꽃의 향기!
구슬 같은 누각(樓閣)에는 비취(翡翠)가 살고, 진주(眞珠)의 전각(殿閣)에 원앙 깃드네.
기녀(妓)를 뽑아 조련(雕輦)을 따르게 하고, 안에서 가희(歌姬)를 불러 오시지.
궁중에서 그 누가 으뜸이냐고? 그야 소명전(昭明殿)의 수연(洙淵)이지요.
정녕 아름답기 그지없는 목청이었다.
혼백(魂魄)을 앗아 갈 듯 꾀꼬리 같은 그녀의 음성에 금위무사들은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한데, 주수연의 시에 화답이라도 하듯 어디선가 지극히 청아(淸雅)한 옥음(玉音)이 흘러 나오는 게 아닌가?
玉樹春歸日 金宮樂事多
春風開紫殿 天樂下珠樓
綠樹聞歌鳥 靑樓見舞人
昭明挑李月 羅綺自相親
나무에 봄빛이 들어오면, 금궁(金宮)에선 즐거운 일들이많네.
봄바람에 전각을 열어젖히니 하늘의 풍악(風樂)은 다락에 일어,
나무에서 새들이 노래하기에 청루(靑樓)에선 더덩실 춤이 벌어지고…….
도리(挑李)가 꽃필 적에 소명전(昭明殿)에서 엷은 비단의 옷을 입는다.
주수연은 자지러질 듯이 놀라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그 사람이 바로 이살 중의 일 인으로 명성으로 드높이던 광혈풍 진유걸이었던 것이다.
"왜 내 물음에는 대답을 안 하죠?"
홀연, 주수연은 철지연의 뾰로통한 음성에 긴 회상(回想)에서 깨어났다.
"우리는 처음 산에서 만났어요. 그 때도 약초를 캐다가… 그 분은 저를 무척 아껴 주세요."
철지연은 재미있다는 듯 방긋 미소를 머금었다.
"그처럼 무뚝뚝하고 멋없는 사람에게도 그런 면이 있었나요?"
"아가씨께서는 좋아하는 분이 안 계신가요?"
백화낭자 철지연은 묘한 얼굴을 하며 방 안을 오락가락했다.
그녀의 모습에서 주수연은 사내 같은 그녀에게도 사모(思慕)하는 정랑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도 정녕 잊지 못할 분이 한 명 있어요. 그 분은 정말 사내다운 분이셨죠. 천하의 모든 여인들이 추종하는……."
주수연은 언젠가 진유걸이 한 말을 떠올리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도대체 그 분이 누구시길래, 우리 아가씨처럼 고고한 분의 방심을 빼앗아 갔을까요?"
"혜령은 모를 거예요. 그 분은 무림에서도 명성이 대단하신 분이셨죠. 강호인들은 그를 가리켜 광혈풍이라고 부르죠."
순간, 주수연은 마음 속의 불안감이 현실로 나타나자 아찔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광혈풍 진유걸을 그리워하고 있다니…….
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낭군(郞君)이 되지 않았는가?
더구나 철지연의 부친은 진유걸의 스승인 강남태을자를 살해한 흉수 중 한 명인데…….
주수연의 안색이 핼쓱해지자 철지연이 의아한 듯 물었다.
"혜령, 어디 아파요?"
"아니, 머리가 좀 어지러워서… 일이 조금 힘들었나 봅니다. 잠시 쉬면 괜찮을 겁니다."
주수연은 몸이 아픈 것을 핑계로 방을 빠져 나왔다.
주수연은 별채로 가는 도중, 진유걸을 치료해 준 장 의원을 만났다.
장 의원은 원래 떠돌이 의원이었는데, 철웅산의 배려로 이 곳에 기거하게 된 것이다.
주수연은 언제부터인가 그가 이상한 눈초리로 자신을 주시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의식적으로 그를 경계해 오고 있던 터였다.
"안녕하시오, 부인. 이제 제법 날씨가 쌀쌀하죠?"
주수연은 모르는 척 그냥 지나려 했으나 그가 말을 건네 오자 마지못해 대꾸해 주었다.
"그렇군요. 저는 바빠서 이만……."
그녀는 그가 더 이상 말을 붙일 수 없도록 차갑게 대꾸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장 의원은 멀어져 가는 주수연의 뒷모습을 음침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혜령… 이 장건수(張建秀)가 모험(冒險)을 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 계집이야. 후후후……!"
그는 음흉하게 웃으며 언제까지고 주수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날 밤 초경(初更) 무렵.
진유걸과 주수연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상공! 소첩은 이미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하루라도 빨리 길을 떠나십시오."
"수연……!"
모든 것을 각오한 듯한 주수연의 말에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소첩의 생각으로는 마령신의라는 분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나을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 하지만 당신을 두고 어찌……."
진유걸은 안타까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철영보에서의 두 달은 그들에게 있어 얼마나 달콤하고 꿈결 같은 세월이었던가?
물론 원수의 집에 머물고 있다고는 하나, 어쨌든 두 사람이 처음으로 살림을 차린 곳이었다.
사랑하는 남녀가 함께 있는데 하루하루가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진유걸은 그러는 동안에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게 있었다.
자신의 야망(野望), 얽혀 있는 은원(恩怨), 과거(過去)에 대한 집념(執念)들…….
주수연은 이제 진유걸의 부인으로 그에 대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진유걸을 떠나 보내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주수연은 터지려는 울음을 억지로 삼키며 말했다.
"가셨다가 빨리 오시면 되잖아요? 저는 이 곳에 있는 한 안전해요. 그리고 숙부님의 음모를 꼭 파헤쳐 주세요. 만일 숙부님이 진짜로 황실에 대한 반역(反逆)을 꾀한다면… 아아… 상상도 하기 싫어요!"
그녀는 그 뒤로 벌어질 사태를 생각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일은 확실히 중대한 일이니 내 꼭 진실을 밝히겠소. 더구나 태성왕야는……."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이어 밖에서 우노이(牛老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진소랑! 잠깐 나와 보게. 장 의원께서 부르시네."
장 의원이란 말에 주수연은 불길한 예감이 스쳐 갔다. 그의 징그러운 눈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상공! 아무래도 예감(豫感)이 좋지 않아요. 피곤하다고 말하고 가지 마세요."
진유걸은 그녀의 말을 일축했다.
"별일 아닐 것이오. 금시 돌아오리다."
그는 주수연을 안심시킨 뒤 밖으로 나왔다.
아, 인간이란 정녕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이 일로 인해 이들 두 부부는 혹독한 시련(試鍊)과 온갖 우여곡절(迂餘曲折)를 겪게 되니…….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장 의원은 어디 계신가? 뭐 때문에 나를 찾는다 하던가?"
진유걸은 우두커니 서 있는 우노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객당(客堂)에서 일하는 하인으로, 광대뻐가 불쑥 튀어나오고 하관(下觀)이 빠른 인물이었다.
우노이는 그의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어둠 속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기다리고 계시네. 어서 걷게나."
진유걸은 의아한 얼굴을 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우노이의 뒤를 따르며 앞으로의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진유걸과 우노이는 후원(後園)에 세워진 가산(假山)에 도달하였다.
춘하시절(春夏時節)에는 녹림(綠林)을 자랑했건만, 지금은 앙상한 가지만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서 있었다.
사위를 점한 어둠 속에서 희끗희끗 드러난 기암괴석(奇岩怪石)은 밤이라서 그런지 으시시하게 보였다.
"잠시만 기다리게. 내 장 의원을 찾아 볼 테니……."
우노이는 진유걸만 그 곳에 남겨 둔 채 총총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여보게."
진유걸은 그를 불렀지만 금세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묘연했다.
금시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으시시한 느낌이 들어 진유걸을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험, 험!"
그러나 사방은 여전히 어두컴컴했고 암울한 정적(靜寂)만이 감돌았다.
이 때 홀연.
"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흘러 나오는 한숨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 오는 게 아닌가?
진유걸은 머리끝이 쭈뼛 서도록 놀라며 소리가 난 곳으로 다가갔다.
'대체 누가 얼마나 힘든 일이 있기에 이런 야밤에 이런 곳에서 한숨을 내쉬고 있단 말인가? 장 의원인가?'
가산 입구의 연못가.
청의소녀 한 명이 우두커니 선 채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순, 진유걸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을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아니, 저 사람은 지연 낭자가 아닌가? 그녀가 이 야밤에 어인 일이란 말인가?'
철지연은 마치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아, 당신은 어째서 소녀의 가슴을 이리도 몰라 주십니까?"
무척이나 괴로운 듯한 모습이었다.
진유걸은 그녀의 이런 행동을 처음 보는지라 어안이 벙벙하였다.
'사내 같은 성격의 지연 낭자도 역시 여자임에는 틀림없군.'
철지연의 서글픈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광혈풍! 당신은 소녀의 마음을 이토록 뒤흔들어 놓고 정녕 나타나시지 않을 작정이신가요?"
그녀의 말에 진유걸이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아니, 지연 낭자가 나를……?"
진유걸은 그녀의 내심을 알게 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가 그토록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단 한 번의 마주침이 그녀에게 그토록 절실한 것이었을 줄이야 그가 어찌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오만과 괄괄한 성격 속에 저토록 여린 내면이 감추어져 있을 줄이야…….
진유걸은 그 동안 철지연에게 당했던 수모(受侮)가 물거품처럼 사라져 감을 느꼈다.
그 때였다.
투툭- 툭-!
어디선가 돌멩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 소리는 밤이라 아주 크게 들린 데다, 진유걸이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났기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미처 몸을 돌리기도 전.
"웬 놈이냐?"
일성대갈과 함께 철지연이 바람처럼 진유걸의 면전으로 내려섰다. 그 빠르기는 실로 빛살과도 같았다.
진유걸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그가 막 그녀에게 해명을 하려는 순간.
"네놈이 이 야밤에 무슨 흑심을 품고 내 뒤를 밟았단 말이냐?"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철지연의 손이 치켜져 올라갔다.
찰싹- 찰싹-!
진유걸은 철지연에게 호되게 뺨을 얻어맞고는 나직하게 신음을 토해 냈다.
"으음……!"
공력을 잃은 진유걸로서는 매서운 그녀의 손매를 견뎌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철지연은 가슴에 감추고 있던 비밀이 발각된 데 대한 분노감과 수치심으로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진소랑! 네놈이 결국 내 울화통을 터뜨리고 마는구나. 당장 그 대가를 치러 주마."
진유걸은 사내도 아닌 여인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자 분통이 터졌다.
'내가 이제는 한낱 계집에게조차 희롱을 당하다니…….'
그가 내심 탄식을 터뜨릴 때, 철지연은 쓰러진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비록 부친께서는 너를 옹호해 주고 계시지만 나에게는 어림없다!"
그녀의 행동에 진유걸은 온 전신이 마비될 만큼 분노하고 말았다.
"내 몸에 손대지 말고 저리 비켜!"
그는 고함을 내지르며 철지연을 사정없이 밀어 버렸다.
"어머!"
다음 순간, 철지연이 대경실색하였다.
그가 철지연을 미는 순간,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에 살짝 닿았던 것이다.
그녀는 귀밑까지 시뻘개지며 무섭게 이를 갈았다.
"이 추잡한 놈! 감히 어디다 손을 대는 거냐?"
찰싹- 찰싹-!
철지연은 노기등등하게 외치며 다시 진유걸의 뺨을 연거푸 후려쳤다.
진유걸은 이를 악물며 신음을 삼켰다.
육체의 고통은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정신적인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유걸은 그렇게 당할수록 더욱더 집념이 솟구쳐 오름을 느꼈다.
이윽고 철지연은 약간 분을 가라앉히며 때리던 손을 멈추었다.
"미리 경고해 두겠지만 이런 일이 또다시 발생한다면 혜령과 네놈을 본보에서 당장 쫓아 내고 말겠다. 네놈이 오늘 살아난 것은 혜령 때문인 줄 알아라!"
철지연은 싸늘하게 외친 뒤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진유걸은 피를 흘리며 멀어져 가는 철지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빨을 부드득 갈아붙였다.
'으으, 철지연! 이 수모와 모욕을 몇 배로 갚아 줄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진유걸은 이 모든 것이 철지연의 음모(陰謀)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철지연은 사사건건 그에게 트집을 잡아 그를 괴롭혀 왔기 때문이었다.
살심이 극도에 달하자 그의 눈에서는 시퍼런 귀화(鬼火)가 무섭게 폭사했다.
마치 피에 굶주린 악마(惡魔)의 눈길처럼…….
더구나 그의 미간으로 시뻘건 기운이 무섭게 운집하고 있었다.
살괴(殺魁)!
천여 년 전 등장했던 일세의 대마인(大魔人) 천살성(天殺星) 사마기(邪魔祁).
그의 미간에 어려 있던 것으로 전해지는 살괴가 지금 진유걸의 이마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인피면구에 의해 가려져 있었지만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이 때였다. 어둠 속에서 언뜻 그림자가 스치는 순간.
따끔-!
진유걸은 누군가가 자신의 혼혈(昏穴)을 제압하는 것을 느끼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