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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章 탈출(脫出) (18/35)

第六章 탈출(脫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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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왕 주웅은 지금 거실(居室)에 마련된 안락한 의자에 몸을 반쯤 파묻고 있었다.

어떤 생각해 골몰해 있는 듯 그의 이마에 자리한 주름살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호피로 뒤덮인 팔선탁(八仙卓)에는 한 통의 서찰이 곱게 접혀 있어 눈길을 끌었다.

바로 이 때.

"왕야께 아뢰옵니다. 수연 군주님께서 시녀를 통하여 뵙기를 청해 오셨습니다."

내전시위가 낭랑한 목소리를 터뜨렸다.

태성왕은 벌떡 일어나며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그래? 흐음, 과연 해동거사는 환자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명의(名醫)임에 틀림없도다."

그는 즉시 침실을 나서서 주수연의 처소로 발길을 옮겼다.

내전시위는 그의 뒤를 보필(輔弼)하며 천천히 뒤따랐다.

이제 거실에는 세 명의 금위위사만이 경비를 서고 있을 뿐이었다.

이 때였다.

"수고들 하시는군요. 숙부님께서는 안에 계시나요?"

갑작스런 주수연의 출현에 금위위사들은 얼떨떨한 얼굴을 하였다.

"왕야께서는 방금 군주님을 만나기 위해 월하전(月河殿)으로 납시었는데……."

그러자 수연의 뒤에 서 있던 진유걸이 말했다.

"왕야와 길이 어긋난 모양입니다."

주수연은 상큼 눈썹을 치켜올리며 난처한 얼굴을 하였다.

"내 분명 시녀에게 일러 여기로 오겠다고 말했거늘, 그 애가 잘못 전한 모양이군요. 곧 오실 테니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겠어요."

그녀는 해동거사를 이끌고 태성왕의 거처로 들어섰다.

태성왕의 침실로 들어선 진유걸은 바쁘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넓은 공간 어디에 기관장치가 있단 말인가?'

진유걸은 여기저기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주수연은 밖의 동정을 살피며 진유걸의 행동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아, 공자님. 제발 빨리…….'

그녀는 내심 불안했으나 자신으로 인해 일을 그릇칠까 두려워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진유걸은 문득 팔선탁 위에 놓인 서찰을 발견했다.

그가 막 서찰을 펴 보려고 할 때 주수연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 왔다.

"앗! 공자님! 숙부님께서 돌아오시나 봐요."

진유걸이 주수연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기이한 장치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태성왕의 침상에 새겨진 용두(龍頭) 조각이었다.

명장(名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정교한 조각은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줄 정도였다.

"수연, 어서 이리로……."

진유걸은 팔선탁 위에 있던 서신을 재빨리 품속에 넣으며 그녀를 불렀다.

수연은 다급하게 서두는 바람에 그만 발을 헛딛어 바닥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어맛!"

우당탕-!

주수연의 거처에서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던 태성왕이 그 소리를 듣고는 황급히 금위무사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그의 목소리가 주수연에게는 염라사자(閻羅使者)의 귀곡성(鬼哭聲)처럼 들려 왔다.

진유걸은 그녀를 안고 재빨리 태성왕의 침상 쪽으로 달려갔다.

이 때, 막 들어서던 태성왕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고함을 내질렀다.

"저 놈을 잡아랏!"

그와 동시에 두 금의무사가 달려왔다.

진유걸은 침상 위의 용두를 꽉 움켜쥐고 빙글 돌렸다.

순간.

우르릉-!

커다란 굉음이 울리더니 침상이 뒤집혀지는 것이 아닌가?

"아앗!"

"어맛!"

진유걸과 주수연은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잠시 후, 두 사람은 지하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아앗!"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주수연은 발을 헛짚어 다리를 다치고 말았다.

"수연, 괜찮소?"

진유걸은 얼른 주수연을 부축하였다.

"다리를 조금 삐었나 봐요. 그것보다 공자님, 정말 우리가 빠져 나온 건가요? 소녀는 믿어지지가 않아요."

"아직은 안심할 수 없소. 일단 태성왕부를 벗어나야 하오. 빨리 여기를 빠져 나갑시다."

그는 다리를 삔 수연을 부축하며 어두운 지하를 더듬어 나갔다.

얼마쯤 가자 천장에 박혀진 야명주가 빛을 뿌리는 길이 나타났다.

주위가 밝아지자 두 사람은 앞으로 나가기가 한결 용이해졌다.

주수연은 한쪽 발을 절룩거리며 미안한 얼굴을 하였다.

"소녀 때문에 더욱 지체되는군요. 이러다간 금위대에게 잡히겠어요."

"아직은 괜찮소. 침상에 있던 기관이 작동하려면 우리들이 이 통로를 벗어난 다음에야 가능하기 때문이오."

"왜요?"

"태성왕야가 그것을 설치했을 때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을 거요. 한데, 금세 적들이 뒤쫓게끔 만들었겠소?"

"그것도 그렇군요. 하지만 숙부께서는 통로의 끝 부분을 알고 계시니 필시 금위대를 동원했을 거예요."

진유걸은 신중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우려하는 것도 바로 그 점이오. 그것 때문에 이렇게 서두르는 거요."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동굴의 끝 부분이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그 곳에 도착하자, 동굴 끝은 단단한 석벽으로 막혀 있는 것이 아닌가?

주수연은 발을 동동 굴리며 안타까워했다.

"공자님! 이제 어쩌죠?"

진유걸은 석벽을 세밀히 훑어보았다.

"염려 마시오. 어딘가 기관장치가 되어 있을 거요."

그는 석벽 주위를 뒤지다 오른쪽 바닥에 돌출된 부분을 찾아 냈다.

"오, 여기로군."

진유걸이 그 곳을 잡아당기려는 찰나.

"공자님, 이쪽에도 있어요!"

주수연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토해졌다.

진유걸은 흠칫 놀라며 얼른 그녀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왼쪽 바닥에도 역시 오른쪽과 마찬가지로 돌출된 부분이 있지 않은가?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음, 태성왕야 주웅이 잔꾀를 부렸구나. 과연 어느 쪽이 진짜일까?'

진유걸은 염두를 굴렸으나 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거나 뽑을 수도 없지 않은가?

"공자님! 어쩌면 좋죠? 마냥 이러고만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진유걸은 문득 팔선탁에 있던 서신이 생각났다.

그는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식으로 그것을 꺼내 보았다.

<태성왕야!

본회는 하북의 양대표국을 쑥밭으로 만들고 새로운 분타(分舵)를 세웠습니다. 모두가 왕야께서 도움을 주신 덕이 아닐까 합니다.

금후로는 하북성 분타를 거점으로 장백무림의 동북(東北) 구(九) 성(省)을 견제코자 합니다. 이 또한 왕야의 뜻이니, 상세한 결과는 본인이 직접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골칫거리였던 광혈풍은 무공이 폐쇄되어 거의 폐인(廢人)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 동안 등장하지 않았던 삼대궁이 서서히 마각(馬脚)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방비가 마련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자세한 내막은 직접 만나 뵙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태명회(太命會) 회주(會主).>

진유걸은 큰 충격을 받았다.

서신에 의하면, 이미 하북성 청원표국과 비표표국이 와해(瓦解)됐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청원표국의 주인 강태위는 어찌 되었을까?

그리고 그의 누이동생인 강보연은?

또한 장백무림을 견제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태성왕은 무엇을 얻고자 태명회를 선두에 내세워 암암리에 세력을 구축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필시 중대한 사건(事件)이 연관되어 있으리라는 예감이 스쳐 갔다.

곁에서 보고 있던 주수연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석벽을 여는 데 조금도 보탬이 못 되는군요."

그러나 진유걸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이 글은 태성왕야의 성격을 확실히 가르쳐 주었소. 때문에 판단하기가 쉬워졌소."

진유걸은 서신을 품안에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태성왕야가 태명회를 동원해 하북성 양대표국의 혈겁을 뒤에서 조종했다. 그런 자라면 분명히…….'

진유걸은 서슴없이 다가가 오른쪽의 돌출 부분을 잡아당겼다.

일순.

와르르릉-!

거대한 폭음이 일어나더니 엄청난 크기의 석벽이 좌우로 갈라지는 게 아닌가?

거기서부터는 천연동굴(天然洞窟)로 이어져 있었다.

진유걸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어디선가 화섭자를 찾아 내 불을 밝혔다.

진유걸이 동굴 안을 마치 안방처럼 걸어 다니며 원하는 것을 손에 넣자 주수연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석벽의 기관장치가 오른쪽 것인 줄 어떻게 알았으며, 또 화섭자는 어찌 찾아 냈습니까?"

진유걸은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매우 간단한 이치요. 태성왕야는 당신의 숙부이며 황실의 인척이긴 하지만 매우 교활한 사람이오. 그는 기관장치를 움직인 사람이라면 이 곳 담벽도 무사히 통과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술수를 쓴 거요. 보통 기관을 작동하는 것은 오른쪽에 있으니, 석벽은 왼쪽에 장치하기 마련이오. 그러나 태성왕야는 빠져 나가는 자를 교란시키기 위해 오른쪽에 해 놓았던 거요. 나는 그것을 파악한 것뿐이오."

"그랬었군요."

"서찰을 보니 태성왕야는 지금 거대한 음모(陰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소."

"그렇다면 숙부님이 모반(謀反)을 꾀하고 계시단 말씀입니까? 그럴 리가…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진유걸은 그녀가 더 이상 격동하지 않도록 화제를 바꾸었다.

"이제 곧 석벽이 닫힐 거요. 그러니 빨리 나갑시다."

두 사람이 어두운 동굴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한 가닥 차가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며 멀리 희미하게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진유걸과 주수연은 기쁨을 금치 못하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이 때였다.

우르르르릉-!

그들이 지나온 뒤편에서 요란한 굉음이 울려 왔다. 금위대 무사들이 뒤쫓아오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하여 동굴을 벗어났다.

그들이 막 출구를 나선 순간.

석양(夕陽)에 물든 웅장한 산이 눈앞에 나타났다.

너무도 신비롭고 장엄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금위위사들에게 쫓기는 진유걸과 주수연은 그 정경을 미처 음미(吟味)할 겨를도 없었다.

진유걸은 다리를 다친 주수연을 안은 채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저 숲으로 들어가면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것이오."

주수연은 그런 진유걸을 애틋한 눈길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공자님! 이러다가는 두 사람 다 잡히겠어요. 그러니 소녀를 버려 두고 어서 가세요."

그녀의 말에 진유걸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쳤다.

"수연! 당신이 죽으면 나 역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요. 한데, 내 앞에서 어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이오?"

"흐흐흑… 소녀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겠습니다."

주수연은 다시 한 번 그의 사랑을 확인하며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진유걸은 다시 그녀를 안고 힘겹게 산길을 올랐다.

"허헉……!"

공력을 상실한 그로서는 너무 벅찬 일이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호흡 소리가 점점 거칠어졌고 땀을 비 오듯 흘렸다.

진유걸은 금세라도 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강인한 정신력으로 버텨 나갔다.

약 한 식경을 그렇게 치달렸을까?

돌연.

"멈춰라!"

웅후한 폭갈이 터지며 멀리 뒤에서 누군가 그들을 쫓아왔다.

그는 바로 장백노마 금일송이었다.

그가 발견한 순간, 진유걸은 전신의 털이 모두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진유걸은 멈출 수 없었다. 자신들의 소망을 그렇게 쉽사리 포기하기에는 너무도 억울했던 것이다.

진유걸은 혼신(渾身)의 힘을 다해 달렸다.

일순, 서두른 그는 풀뿌리에 걸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아앗!"

진유걸이 쓰러지며 안고 있던 주수연을 놓치고 말았다.

"으음……!"

안 그래도 다리의 고통을 참고 있던 주수연은 아픔을 참지 못해 그만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수연! 수연! 정신차리시오!"

그 역시 넘어지면서 몹시 다쳤지만, 자신의 상세에는 아랑곳없이 다시 주수연을 안고 달렸다.

바로 그 때였다.

"흐흐흐… 네놈이 뛰어봐야 손바닥 안이지."

삼십여 장 밖에서 장백노마의 음흉한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게 아닌가?

'정녕 여기서 생애(生涯)를 끝내야 하는가?'

진유걸은 절망을 느꼈다. 그러나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죽을 때 죽더라도 계속 주수연을 안고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기암괴석(奇岩怪石) 사이를 달리던 그는 순간, 심장이 튀어나올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한 명의 사나이가 그의 앞을 가로막은 채 앉아 있었던 것이다.

마치 금방 무덤 속을 뛰쳐나온 것 같은 시체처럼 냉막한 안색의 중년인.

그의 전신에서는 으시시한 한기(寒氣)가 뿜어지고 있었다.

진유걸이 놀란 것은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차가운 기운과 독사의 눈빛 같은 안광(眼光) 때문이었다.

진유걸은 문득 그 자를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음을 기억해 냈다.

연운항의 운몽루(雲夢樓)에서 불륜(不倫)을 저지르는 아내를 찾아왔던 중년인.

그는 단 한 초에 녹림쌍신 중 한 명인 귀혼신겸 나한목을 격살하지 않았던가?

천(千) 도부(屠斧)!

그의 옆에는 마대가 놓여져 있었다.

운몽루에 왔을 때 무풍채(武風寨) 수하들의 수급을 담아 왔던 그 마대였다.

진유걸은 지금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천 도부의 손길에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때.

"흐흐흐…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군."

장백노마의 잔인한 음성이 뒤에서 소름끼치게 들려 왔다.

진유걸은 기절초풍할 듯이 놀라며 뒤로 고개를 돌리자, 금일송이 형형한 안광을 내뿜으며 진유걸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유걸은 그를 피하느라 조금씩 조금씩 걸음을 옮기다 보니 천 도부 옆에까지 오고 말았다.

"광혈풍! 이제 순순히 노부를 따라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나는 당신을 따라갈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닥쳐라!"

금일송은 울화가 치밀어 살갗이 뒤집혀질 지경이었다.

여태까지 해동거사인 줄 알고 대했던 자가 광혈풍이었다니?

자신이 광혈풍에게 감쪽같이 속았다는 사실이 그렇게 수치스러울 수 없었다.

"왕야의 명이 아니셨더라면 네놈을 이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 죽였을 것이다."

진유걸은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장백노마!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로 보이느냐?"

"푸후후후… 공력도 없는 놈이 큰소리는……."

"아니, 그 사실을 어떻게……?"

진유걸이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을 때.

휘익- 휙-!

옷자락 나부끼는 소성과 함께 금위무사들이 대거 등장했다.

그들 중 한 인물이 서슴없이 나서며 외쳤다.

"해동거사! 감히 군주님을 납치하여 도주를 감행하다니… 스스로 무덤을 파는군."

그러자 장백노마가 음흉하게 웃으며 그의 말을 수정했다.

"그 놈은 해동거사가 아니라 광혈풍 진유걸이다."

찰나, 금위대 고수들을 일제히 경악하고 말았다.

"옛?"

"허억! 광… 혈… 풍!"

"하지만 저 놈은 이빨 빠진 호랑이야. 공력을 상실했기에 여기까지밖에 도주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금일송의 말에 그제서야 금위대 무사들이 주춤주춤 진유걸에게로 접근해 갔다.

진유걸은 진퇴양난(進退兩難)에 처한 채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위기일발(危機一髮)의 순간.

"으흐흐흐… 광혈풍! 당신도 그 여인를 끔찍이 사랑하는 모양이구려? 나도 내 아내를 너무도 사랑했지.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소."

일순, 진유걸을 비롯한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집중됐다.

진유걸의 머릿속으로 운몽루의 사건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운몽루의 주인과 간통(姦通)했던 천 도부의 아내.

그렇다면 그의 아내는 스스로 자결을 하고 말았단 말인가?

천 도부는 잠시 후 소름끼치는 미소를 흘리며 마대 속에 손을 집어넣어 두 자루 도끼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핏물로 뒤엉켜져 보기에도 섬뜩하였다.

천 도부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 사랑은 이미 끝났지만, 저들의 사랑은 이제 시작이다. 내 어찌 저들을 구해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앞으로 나서자 금일송의 안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찢어 죽일 놈! 감히 본 왕부의 일에 참견을 하려 하다니… 뒈지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군."

그가 금위무사들에게 눈짓을 보내자, 금위무사 두 명이 장검을 꼬나 잡고 천 도부에게로 다가갔다.

"가거라!"

천 도부의 쌍도끼가 허공에 빛을 번쩍이며 공간을 갈랐다.

쇄애액- 쇄액-!

날카로운 파공성이 무섭게 작렬하며 악마의 독아(毒牙)와도 같은 쌍도끼가 금위무사의 두개골을 내리찍어 왔다.

그 수법이 어찌나 기민하고 흉폭했던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두 금의무사는 혼비백산하여 쾌속절륜한 보법을 전개했다.

그 순간, 덮쳐 오던 도끼가 중간에서 변화를 일으키며 그들의 천돌혈(天突穴)을 비스듬히 후려쳐 갔다.

파팍-!

끔찍한 음향이 튀어오르며 핏줄기가 허공으로 쫙 치솟아 올랐다. 동시에 모발이 곤두설 듯한 단말마의 비명이 끔찍하게 울려 퍼졌다.

"아아악……!"

"으악!"

천 도부는 그들을 단숨에 처치하고는 훌쩍 몸을 날려 금위무사들을 향해 짓쳐들었다.

"우하하하… 모두 통쾌하게 죽여 주마!"

그는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수중의 쌍도끼를 난무하기 시작했다.

위이잉- 위잉-!

살을 에이는 듯한 도끼 바람이 일며 무서운 살기가 휘몰아쳐 갔다.

"에잇! 죽어라!"

금위무사들은 수중의 검을 종횡으로 날리며 천 도부의 전신을 베어 갔다.

쉬쉬쉭- 쉬쉭-!

천지를 양단낼 듯한 검기가 폭사하며 주위 이 장 내가 온통 검빛으로 물들여졌다.

하지만 천 도부는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법을 전개했다.

그는 비단 괴이한 초식을 사용할 뿐 아니라 귀신 같은 신법을 전개해 냈다.

그 때문에 공력을 취하던 금의무사들은 번번이 허탕을 치고 말았다.

천 도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중의 쌍도끼를 비스듬히 후려쳐 갔다.

"뒈져라!"

그의 입에서 대갈일성이 터져 나오며 신출귀몰(神出鬼沒)한 동작이 연속적으로 펼쳐졌다.

파르르르륵-!

새파란 불꽃이 터져 오르며 징그러운 기음이 연속적으로 발출됐다.

천 도부는 흉칙한 이빨을 드러내며 소름끼치게 웃어 댔다.

"으하하하……!"

그의 긴 괴소가 멈춰지는 순간.

퍽- 퍽- 퍽-!

둔탁하고 소름끼치는 음향이 터지며 처절한 비명 소리가 아수라의 절규와도 같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악……!"

"우으으으……!"

"크아악……!"

두개골이 쪼개진 채 세 명의 금위무사가 피를 분수처럼 쏟으며 곤두박질쳤다.

십여 명의 금위무사들 중 벌써 다섯 명이 염라문(閻羅門)으로 들어선 것이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금일송은 혈맥이 터질 듯 분개(憤慨)하였다.

"이 놈! 네놈은 무명소졸이 아니로구나. 네놈의 명호를 밝혀라!"

"애송이 놈! 그토록 뒈지는 것이 소원이라면……."

천 도부는 쌍도끼를 빙글빙글 돌리며 장백노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장백노마는 그를 마주 대하자 일신에 무서운 압력을 느꼈다.

"멈춰! 본 총령은 네놈의……."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천 도부가 몸을 날리며 수중의 쌍도끼를 후려쳐 온 것이다.

장백노마는 대경실색하여 신속하게 몸을 빼내는 동시에 재빨리 수비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천 도부의 공세는 허초에 불과했고, 실초는 좌측에 몰려 있던 금위무사들에게 전개되었다.

우위위윙-!

바람을 가르는 쌍도끼의 음향이 머리끝을 쭈뼛하게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이어 모골이 송연한 둔탁음이 불꽃처럼 튀어올랐다.

파파파팍-!

끔찍스런 소음.

그 뒤에는 폐부를 온통 짓이기는 듯한 단말마가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아아아악……!"

"으아악……!"

"크으으으윽……!"

피가 폭우(暴雨)처럼 쏟아져 내리며 절단된 팔다리가 사면팔방으로 휘날렸다.

장백노마는 그 무참한 광경에 이빨을 갈았다.

"우두둑! 네놈를 통째로 씹어먹고야 말겠다!"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기이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천 도부는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시선을 진유걸에게 던졌다.

"당신은 어째서 그 곳에 서 있는 거요? 지금 고수들이 오고 있으니 어서 여기를 떠나시오."

진유걸은 그에게 감사의 표시로 머리를 숙여 보인 뒤 걸음을 옮겼다.

'고수들이 오는 소리를 알아들을 정도라면 그는 무사히 위험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있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짐이 될 뿐이다. 한데, 무림에서 저토록 쌍도끼를 절륜하게 사용하는 인물이 있었던가? 있다면 단 한 명… 귀수도부(鬼手屠符) 모용비(毛容琵)뿐인데… 그렇다면 설마 그 자가……?'

그는 의혹 어린 눈으로 귀수도부를 힐끔 한 번 쳐다본 뒤 장내를 떠나갔다.

금일송과 금위대 무사들은 천 도부가 길을 꽉 막고 있어, 두 눈 멀겋게 뜬 채 진유걸을 놓치고 말았다.

장백노마는 쌍장에 공력을 잔뜩 주입시키며 고함을 버럭 내질렀다.

"경천마광(驚天魔光)-!"

우우웅- 우우웅-!

태산을 무너뜨리고 장강을 가를 듯한 장력이 신랄하게 뻗쳐지는 순간, 엄청난 경력의 소용돌이가 천 도부의 전신을 뒤덮을 듯 몰아쳤다.

찰나.

"뒈져라!"

천 도부는 일갈을 터뜨리며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와 동시에 빙글 몸을 회전시키며 장백노마를 노리고 빛살처럼 쏘아 갔다.

부우웅-!

그의 쌍도끼가 허공에서 살풍을 일으키며 잔인한 광채를 발산했다.

그의 이 초식은 비단 쾌속할 뿐 아니라, 경공의 교묘함과 절륜한 공세를 바탕으로 한 신속절묘한 초식이었다.

"어헉!"

장백노마는 허파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토하며 재빨리 몸을 피했다.

하지만 천 도부의 공세는 그리 만만하지가 않았다.

그는 허공에서 허리를 틀며 계속 장백노마를 노리고 쏘아들었다.

그러나 장백노마 역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이빨을 마주 악물며 신형을 도약시켰다.

동시에 허리를 퉁기며 등 뒤의 대두도(大頭刀)를 뽑아 들었다.

그 역시 장백무림의 고수답게 신속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각기 흉흉한 기세로 마주 부딪쳐 나갔다.

파르르르-!

대두도와 쌍도끼가 허공 중에서 충돌을 일으키며 섬칫한 파공성을 일으켰다.

그러나 천 도부는 미끄러지듯이 떨어지며 몇 명 남지 않은 금위대 무사들을 덮쳐 갔다.

"뒈져라!"

악마의 울부짖음과 같은 괴성이 뿜어지며 쌍도끼의 폭풍(暴風)이 휘몰아쳤다.

금위대 무사들은 기겁할 듯이 놀라며 급급히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천 도부의 쌍도끼는 섬전처럼 그들의 몸을 파고들었다.

순간, 금위무사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휩떠지며 입이 쩍 벌어졌다.

"으윽!"

"허아악……!"

"우으으악……!"

비명 소리와 함께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절단된 사지(四肢)가 분분히 휘날렸다.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

금일송은 삽시간에 수하들을 모두 잃게 되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 놈! 결코 그냥 두지 않겠다! 이 금일송이 어수룩한 인물이었다면 아예 중원 땅을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냉막하게 외치며 수중의 대두도를 공중으로 치켜올렸다.

천 도부는 으시시한 미소를 입가에 지으며 형형한 안광을 발했다.

금일송이 이빨을 무섭게 갈아붙이며 그에게 공격을 가하려는 순간.

"두 분은 잠깐 격전을 멈추시오!"

내력이 깃든 음성과 함께 두 인영이 사뿐히 장내에 내려섰다.

머리카락이 백설(白雪)같이 하얗게 센 한 쌍의 노부부(老夫婦).

아, 이들 두 사람은 바로 원앙벽뢰쌍기(鴛鴦霹雷雙奇)가 아닌가?

하북성에서 강태위를 노렸으나, 진유걸에 의해 실패하고 물러갔던 벽파(霹婆)와 뇌옹(雷翁).

그들이 갑자기 이 곳에 등장하다니…….

벽파가 금일송과 천 도부를 번갈아 바라보며 나직이 혀를 찼다.

"쯧쯧, 같은 동료들끼리 칼을 겨누다니!"

이 말에 금일송이 움찔 놀랐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벽파는 천 도부에게 눈길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저 사람은 태명회에서 초청(招請)한 인물이오."

일순 금일송이 흠칫 놀라며 반문했다.

"저 자가 누구길래… 태명회에서 불러들인단 말이오?"

이제껏 잠자코 있던 뇌옹이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귀수도부(鬼手屠斧)!"

순간, 장백노마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귀수도부(鬼手屠斧) 모용비(毛容琵).

그는 십대기인 중 가장 잔인한 인물로 알려진 절정고수가 아닌가?

천 도부는 사실 일개 도부(屠夫)가 아니라 무림의 명망 있는 기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어느 날, 사랑하는 여인을 만난 뒤 무림에서 모습을 감춘 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장백노마는 그의 명호를 듣자 가슴이 무섭게 격탕되었다.

"으음, 본 총령의 눈이 어두워 모 대협 같으신 분을 미처 알아뵙지 못하였소이다."

귀수도부 모용비는 음산한 미소를 흘렸다.

"나 역시 태명회와 태성왕부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소이다."

말은 비록 그렇게 했으나 그는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태도였다.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은 놈!'

금일송은 내심 욕설을 퍼부으며 마지못해 대두도를 거두어들였다.

천 도부, 아니 귀수도부 모용비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의 생사부(生死斧)가 대두도에 밀릴 것인지 정말 궁금했는데……."

금일송은 그의 비아냥거림에 마주 대꾸해 주었다.

"훗날… 언젠가 꼭 모 대협의 가르침을 받을 날이 있을 게요."

그러자 모용비의 눈 가장자리로 무서운 살기가 스쳐 갔다.

벽파와 뇌옹은 그들을 주시하며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2

우르릉- 꽝-!

쏴쏴아- 쏴쏴-!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울리며 엄청난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폭우(暴雨)!

줄기차게 퍼붓는 빗줄기는 문자(文字) 그대로 폭우였던 것이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는 천지(天地)를 무섭게 질타했다.

가을 날씨답지 않은 자연(自然)의 심술궂은 변덕이었다.

이 때 홀연, 세찬 빗줄기를 뚫고 걷고 있는 두 인영이 있었다.

일남일녀(一男一女).

의복은 가시덤불에 걸려 찢어질 대로 찢어졌고, 전신은 상처 투성이였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엔가 쫓기듯 허겁지겁 산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문득 몹시 지친 얼굴을 한 여인의 목소리가 빗속을 뚫고 들려 왔다.

"공자님! 이쪽에도 인가(人家)가 없는 것 같아요."

그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주수연이었다.

진유걸과 주수연, 이들은 밤새도록 도주하여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음, 비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군."

진유걸은 눈앞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 때.

커엉- 컹-!

워- 워- 워-!

갑자기 포악한 개들의 울부짖음이 사방팔방에서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마치 성난 야수의 포효(咆哮)와도 같이 터져 나오는 개의 울음소리.

진유걸과 주수연의 안색은 삽시간에 새파랗게 질려 갔다.

"공자님! 이제 끝장인가 봅니다. 저 개 떼는 분명 왕부에서 조련(調練)한 맹견(猛犬) 무리가 분명합니다."

흉폭하기가 늑대에 버금간다는 이 개들의 크기는 작은 송아지만 했다.

더욱이 그것들은 몸이 날렵하고 후각(嗅覺)이 발달되어 있어 사냥이나 죄인(罪人)을 쫓는 데 이용되었다.

진유걸은 당혹감을 금치 못하며 더욱 주수연을 꽉 붙잡았다.

"하지만 수연! 이렇듯 심하게 비가 쏟아지니 맹견들도 쉽게 냄새를 맡지 못할 것이오."

그는 침착하게 수연을 위로하며 품안에서 인피면구를 꺼냈다.

"어쨌든 이 곳에서 역용을 합시다."

잠시 후, 그들의 용모는 평범한 남녀로 바뀌어졌다.

수연은 진유걸을 바라보며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공자님의 모습이 영낙없이 그… 뭐더라?"

진유걸은 자신의 몰골을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개방제자들을 말하려는 게요?"

수연은 두려움을 잊은 듯 화사하게 웃었다.

"그래요. 바로 그 개방이란 방파의 사람 같아요. 호호호……!"

진유걸은 그녀가 불안을 잊기 위해 일부러 크게 웃는다는 것을 알고는 가슴이 찡해 왔다.

그는 다시 주수연을 업고는 세차게 내리퍼붓는 빗속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한 치 앞도 분간되지 않았다.

"비가 쏟아지는 것을 원망했는데, 그 때문에 맹견의 후각을 마비시켜 벗어날 수 있다니… 정녕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사(世上事)로군요."

"그렇소. 하지만 지금도 안심할 수는 없소."

"그러나 수연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겠어요. 공자님이 제 곁에 계시는 이상 말이에요."

그녀의 얼굴에는 굳은 집념의 빛이 어려졌다.

그 때 돌연.

커엉- 컹-!

맹견 울음소리가 바로 그들의 뒤에서 들려 오는 게 아닌가?

"헉!"

소스라치게 놀란 진유걸은 주수연을 업은 채 무작정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맹견의 부르짖음이 고막을 찢어 놓을 듯 울려 퍼졌다.

으르릉- 커엉-!

크릉- 크르릉-!

맹견의 포효로 산 전체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진유걸은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공포감으로 정신없이 앞으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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