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章 해동거사(海東居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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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건성(福建省) 청류(淸流).
이 곳은 절강성과 복건성을 통치하는 태성왕부(太聖王府)로 인해 유명해진 성도(城都)였다.
청류성(淸流城) 정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태성왕부.
그 곳을 모두 돌아보려면 말을 타고 반나절을 달려야 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다.
사위를 더듬던 햇살이 밀려가며 땅거미가 스며들 무렵.
홀연 태성왕부의 정문 앞으로 초라한 행색의 일노일소(一老一少)가 나타났다.
노인은 병에 걸린 듯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고, 그 옆의 소년은 십이삼 세나 되었을까?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연신 굴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민하고 재치(才致) 있는 소년 같았다.
노인은 옆의 소년을 돌아보며 탁한 음성으로 물었다.
"얘야, 너의 말대로 그 신통한 의원이 분명 이 곳에 청류에 살고 있으렷다?"
소년은 노인을 안심시키려는 듯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제가 할아버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데 거짓말을 할 리 있겠어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요."
두 사람이 태성왕부의 정문을 거의 지날 무렵이었다.
그들의 반대편에서 얼굴이 깨끗한 중년인 한 명이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 노소(老少)와 중년인이 금위무사가 지켜 선 왕부의 정문 앞에서 맞닥뜨렸다.
순간, 노인 옆에 서 있던 소년이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맞은편 중년인에게 허리를 굽혔다.
"아, 나리! 그렇지 않아도 지금 의원 나리를 뵈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중년인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하하하… 그래? 무슨 일로 나를 만나려고 했던 게냐?"
소년은 곁에 있는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할아버지께서 가슴을 앓고 계시대요. 평소에는 괜찮은데 음식물을 섭취하기만 하면 아프시대요."
그러자 노인은 중년인에게 허리를 굽신거리며 하소연을 하였다.
"의원님, 제발 좀 살려 주십시오. 저는 마부 노릇을 하고 있는 늙은이인데, 항주에서 여기까지 의원님을 찾아왔습니다요."
의원이라 불리운 중년인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자못 심각한 얼굴로 노인의 눈을 면밀히 살폈다.
잠시 후,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노인을 안심시켰다.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소. 이 자리에서 바로 고쳐 주리다."
"옛?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어서 빨리 좀 낫게 해 주십시오."
노인은 병에 오랫동안 시달려 왔는지 중년인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애원하였다.
한데, 노인보다 더욱 놀라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태성왕부의 정문을 경비하고 있던 금위무사들이었다.
그들은 호기심이 잔뜩 어린 눈으로 의원과 노인을 주시하였다.
"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어디 가까운 객잔으로 갑시다. 내 간단히 치료해 주리다."
중년인의 말에 노인과 소년이 따라나설 때였다.
"이보시오, 의원 나리!"
금위대 무사들 중 얼굴이 시커멓고 눈이 부리부리한 인물이 중년인을 불러 세웠다.
"부르셨소이까?"
금위무사는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방금 노인의 병을 이 자리에서 치료할 수 있다고 했소이까?"
"물론이오. 본인은 돌팔이 의원이 아니외다."
금위무사는 중년인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본 왕부의 객사(客舍)에서 그 노인을 치료하는 게 어떻겠소?"
중년의원은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어찌할까요, 노인장?"
마부노인이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년이 선뜻 나섰다.
"왕부의 어르신들께서 이토록 호의를 베푸시는데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더구나 근처에는 마땅한 객잔도 없는데 마침 잘되었습니다."
그러자 중년의원이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대꾸하였다.
"내가 기거하고 있는 곳으로 가도 된다."
"그 곳은 너무 멀지 않습니까? 기왕이면 가까운 곳에서……."
소년의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금위무사가 재촉했다.
"자, 싸우지들 말고 어서들 들어갑시다."
잠시 후, 그들은 금의무사에 의해 왕부 안쪽에 위치한 객사에 도착하였다.
두 명의 금위무사, 중년의원, 그리고 노인과 소년이었다.
중년의원은 품안에서 한 알의 단약을 꺼내 노인에게 먹였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 노인의 맥을 짚었다.
약 차 한 잔 마실 시각이 흘렀을까?
돌연 중년의원은 노인의 단전(丹田)을 힘껏 눌렀다.
그 순간.
"우욱!"
마부노인은 오만상을 찡그리더니, 한 모금 검붉은 선혈을 토해 내는 것이 아닌가?
중년의원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노인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자아, 이제는 괜찮을 거요."
그러자 그 때까지 두 사람을 주시하던 한 금위무사가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노인장, 정말 괜찮소?"
두 사람의 금위무사는 생전 처음 보는 중년의원의 치료법이 아직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마부노인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글쎄요? 음식을 먹어 보면 단박 알 수 있을 텐데……."
그러자 금위무사 한 명이 달려 나가더니, 잠시 후 잘 삶아진 통닭 한 마리를 들고 왔다.
마부노인은 통닭을 찢어 한두 점 조심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중년의원을 비롯한 금위무사와 소년이 노인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마부노인은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먹더니, 나중에는 누가 뺏어 먹을세라 닭을 미친 듯이 먹어 대기 시작했다.
그는 순식간에 통닭 한 마리를 먹어치우고는 중년의원의 손목을 덥석 움켜잡았다.
"과연 신의(神醫)이십니다. 이제야 편안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습니다. 이 큰 은공을 어찌 갚아야 할지……."
마부노인은 감격한 듯 외치며 선망(羨望)이 담긴 눈빛으로 중년의원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이 곳에 들어올 것을 제의했던 금의무사 중 한 명이 경탄에 찬 목소리로 공손하게 말했다.
"정녕 대단한 솜씨외다. 의원님께서는 혹 저의 총령님과 동료들의 상세도 좀 봐 주시지 않겠습니까?"
"의원이란 환자를 돌보는 것이 의무(義務)이며 책임(責任)인데 어찌 마다할 수 있겠소이까?"
그러자 위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시다면 이 곳에 잠시만 머물러 주십시오. 내전(內殿)에 통보(通報)를 하고 오리다."
그가 가고 난 뒤, 다른 위사 한 명은 마부노인과 소년을 문 밖까지 안내해 주었다.
마부노인은 중년의원에게 사례를 하려고 했으나, 그는 끝내 노인을 그냥 돌려 보냈다.
약 일각 가량 지났을까?
중년의원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의원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금의무사가 나타나 정중하게 말하며 길을 안내했다.
태성왕부의 내부는 소문 그대로 방대한 규모를 이루고 있었다.
수십 채로 이어진 건물은 웅장한 기세를 유지하고 있었고, 밀림을 방불케 하는 숲과 여러 가지 건축물(建築物)이 상당히 조직적으로 세워져 있었다.
안휘성의 다락원이 여성적으로 섬세하고 미가 있는 건축물이라면, 이 곳 태성왕부는 남성적으로 패기 있고 힘있는 곳이었다.
왕부의 곳곳에는 병장기를 휴대한 금의무사들이 경비를 보고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는 모두 대단한 실력을 겸비하고 있는 듯, 태양혈(太陽穴)이 불끈 튀어나와 있었다.
금의무사는 중년의원과 내전으로 가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소생은 함현욱(咸現旭)이라 합니다. 의원님께서는 어떤 외호를 지니고 계십니까?"
중년인은 금의무사의 말에 스스럼없이 자신의 별호를 밝혔다.
"다른 이들은 나를 해동거사(海東居士)라 부르고 있소이다."
"아, 그렇군요. 해동거사께서는 금위대 총령님을 비롯한 금위무사들을 치료하게 되면 많은 사례품(謝禮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말에 해동거사는 소탈하게 웃었다.
"허허허… 이 해동은 이십여 년 간 의술(醫術)을 펼쳐 왔으나, 금품(金品)을 마음에 둔 적은 한 번도 없소이다. 만약 분에 넘치는 은자를 받게 되면 귀하에게 드리겠소."
그러자 함현욱이 펄쩍 뛰며 언성을 높였다.
"아니, 거사님! 소생을 어찌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요? 이 함현욱이는 그래도 뼈대 있는 집안의 무인(武人)이오. 청렴결백(淸廉潔白)을 신조(信條)로 삼는 집안이란 말입니다!"
"허, 이 해동이 그만 실수를 했나 보구려. 모두 금전이라면 사죽을 못 쓰는 판이라… 정녕 할 말이 없소."
그제서야 함현욱은 노기를 풀며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해동거사는 그런 함현욱에게 이상할 정도로 친근감을 느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날렵한 몸매, 부리부리한 눈에서는 신광이 쏟아졌고, 반듯한 코는 높은 기상(氣象)이 엿보였다. 그리고 굳게 다문 입에서는 사나이의 굳센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해동거사는 함현욱을 뜯어 보며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까운 인물이 오물(汚物) 속에서 썩고 있군.'
그가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돌연.
쉐애액-!
예리한 파공성과 더불어 날이 시퍼런 단검이 해동거사의 목줄기를 향해 날아들었다.
"어이쿠!"
단검은 그의 목 두 치 부근에서 우뚝 멈췄으나, 해동거사는 너무 놀라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두려움으로 몸을 부르르 떨며 식은땀까지 흘렸다.
그러자 함현욱이 얼른 그를 부축하며 안심시켜 주었다.
"죄송합니다, 거사님! 저 친구가 장난을 친 모양입니다."
해동거사는 황급히 단검이 날아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한 금위무사가 기분 나쁜 괴소를 흘리며 서 있었다.
"휴, 십 년 감수했군."
해동거사는 몹시 놀란 듯 몸을 떨며 다시 함현욱의 뒤를 따랐다.
'후후… 장난이라? 내가 무공을 지닌 인물인지 아닌지 시험해 본 거겠지.'
해동거사는 내심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후, 해동거사는 함현욱의 안내로 내전 좌측의 거대한 건물로 들어섰다.
건물 내부는 굉장한 정성을 들인 듯 화려하고 웅후한 느낌을 주었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닦여진 바닥과 몇 아름씩 되는 하얀 대리석, 통로 양쪽으로 정교하게 새겨진 조각물(彫刻物), 그리고 아름다운 색채로 이루어진 휘장 등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화려한 옷차림에 어여쁜 미소를 담고 오가는 시녀(侍女)들의 모습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시녀들은 저마다 함현욱과 해동거사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지나쳤다.
해동거사는 그 광경을 보고는 은근히 함현욱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보아하니, 귀하는 왕부의 많은 시녀들에게 인기가 있는 모양이구려."
그의 말에 함현욱은 얼굴이 시뻘개졌다.
"아닙니다. 이 곳 왕부에는 소생 말고도 기라성(綺羅星) 같은 인물들이 수두룩합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당신만큼 멋진 청년은 보이지 않소."
"놀리지 마십시오."
그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한쪽에 자리잡은 정실(庭室)로 향했다.
문간을 지켜 섰던 두 위사가 함현욱을 알아보고는 안에 대고 소리쳤다.
"총령님, 함 위사와 의원님이 당도하였습니다."
잠시 후, 한 명의 위사가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였다.
해동거사는 약간 긴장의 빛을 띄우며 함현욱을 따라 들어갔다.
정실은 상당히 넓고 아늑했다. 바닥에는 붉은색 융단이 깔려 있었고, 정면으로는 태사의가 놓여 있었다.
태사의에는 한 인물이 우거지상을 한 채 정좌해 있었고, 좌우로는 금의무사들이 시립해 있었다.
그들 위사의 숫자는 모두 십이 명에 달했다.
함현욱이 해동거사에게 태사의에 앉아 있는 인물을 소개했다.
"본 왕부의 금위대 총령님이십니다."
해동거사는 얼른 허리를 굽히며 예를 취했다.
"해동거사가 높으신 존안(尊顔)을 뵙습니다."
태사의에 깊숙이 앉아 있는 인물, 그는 바로 장백노마 금일송이었다.
"네가 마부노인의 병을 단시간에 고쳤다고?"
해동거사는 그의 오만한 말투에 비위가 상했으나 내색치 않고 공손히 말했다.
"노인의 상세가 깊지 않은지라 간단히 완치됐습니다."
"한데, 그 노인의 병은 음식만 먹으면 가슴이 아픈 병이라고 했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호흡 중에 불순물이 쌓이거나, 혹은 독성이 있는 음식물을 먹거나, 피로가 누적(累積)된 데서 온 것입니다. 또는 과음(過飮)을 했을 때도 그런 증세가 나타나지요."
"으음……!"
금일송은 신음을 삼키며 곁의 수하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무언의 지시를 받은 금위무사가 정실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다시 들어온 그의 뒤에는 시녀 차림의 여인이 따라 들어왔다.
약간 꺼칠한 얼굴이었으나 비교적 건강하게 보이는 여인이었다.
금일송이 그 여인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애에게 어떤 병이 있는지 알아봐 주겠는가?"
해동거사는 여인의 팔목에 손을 얹어 진맥(診脈)을 해 보았다.
잠시 후, 진맥을 마친 해동거사는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양음(陽陰)이 제대로 화합하여 태(胎)를 이루고 기(氣)를 주입시키니, 활같이 흐른 날이 어언 육십 일이 넘었구나. 생명체(生命體)는 나날이 달라지고 입덧도_극(極)에 달하니 신 음식이 좋더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엑… 욱… 우욱……!"
시녀는 헛구역질을 하며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녀는 아이를 가진 여인이었던 것이다.
금일송은 시녀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장백노마는 그제서야 비로소 믿음이 가는 듯한 눈빛으로 해동거사를 바라보았다.
"노부 역시 음식을 먹으면 가슴이 아픈데 치료를 해 주게나."
"일단 진맥을 해 보아야 정확한 증상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는 장백노마의 여윈 팔목을 손으로 짚었다.
고개를 몇 번 갸우뚱거리던 해동거사가 약 반각 만에 입을 열었다.
"총령님은 아까 그 마부노인과 유사한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노인처럼 그리 간단치는 않을 듯합니다. 다시 말해, 그 노인보다 더 악화된 상태인데… 워낙 무공이 높으신 까닭에 그것을 억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장백노마 금일송은 얼굴을 찡그린 채 물었다.
"그럼 어찌해야 좋단 말이냐?"
"한 칠 일 간 소생이 지은 약재(藥材)를 달여 드시면 나을 듯합니다만……."
해동거사의 말에 장백노마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렇다면 노부와 금위위사들을 치료할 동안 이 곳에서 머무는 게 어떻겠느냐?"
그러자 해동거사가 만면에 곤혹스런 빛을 띠었다.
"하지만 어찌……."
금일송은 그의 말을 듣지도 않고 금위무사들을 향해 성급히 외쳤다.
"해동거사에게 조용한 방을 하나 내주고, 시녀도 두어 명 안배하여 불편이 없도록 해 주어라."
그의 지시에 금의무사 한 명이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일순, 함현욱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던 해동거사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려졌다.
하지만 이들이 띄우고 있는 미소의 의미(意味)는 각각 다른 것이었으니…….
2
그 후, 해동거사는 태성왕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 해동거사라는 의원이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총령님과 금위무사 세 명을 보름 만에 치유시켰다더군.
- 그뿐인가? 그는 여러 가지 방면에서도 박학다식(博學多識)하여 모르는 게 없다는구먼.
- 게다가 인품(人品) 또한 고매하여 왕부의 여인들이 흠모(欽慕)의 정을 금치 못한다더군.
발 없는 말이 천(千) 리(里)를 간다던가?
이제 태성왕부에서 해동거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함현욱이 싱글벙글 웃으며 해동거사를 찾아왔다.
"거사님! 좋은 일이 있습니다."
"좋은 일이라니?"
"왕야(王爺)께서 거사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순간, 해동거사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고 말고요. 소생이 어찌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어서 내전으로 갈 준비를 하십시오."
함현욱의 말에 해동거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의관(衣冠)을 갖추었다.
과연 얼마 후, 내전시위(內殿侍衛)가 그를 찾아왔다.
해동거사는 함현욱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내전시위를 따라갔다.
해동거사는 매일 멀리서만 보던 내전으로 직접 들어서자 감정을 억제치 못하고 흥분된 기색을 하였다.
내전시위는 그를 궁전(宮殿) 깊숙이 안내했다. 그 곳은 외부보다 고요했으나 치장은 더욱 화려하였다.
이 순간, 해동거사는 침착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후!"
그가 크게 심호흡을 하자 내전시위가 그의 심중을 이해한다는 듯 말을 걸었다.
"왕야를 뵙게 되어 흥분하시는 모양이구려."
해동거사는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보오."
얼마 후, 두 사람은 태성왕 주웅(朱雄)이 거처하는 곳에 이르렀다.
황홀한 실내.
눈부신 가구와 조각, 야명주(夜明珠)로 꾸며진 방 안은 일대 장관(壯觀)이었다.
오색으로 수놓은 봉황(鳳凰)이 깔린 바닥 중앙에는 수정(水晶)으로 만든 듯한 원탁(圓卓)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단향의 향긋한 내음이 풍기는 청동 향로와 그것을 받치는 옥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주위로 푹신하고 안락해 보이는 의자가 널려 있었고, 뒤편에는 화사한 원색(原色)의 휘장이 펼쳐져 눈을 현란케 했다.
내전시위는 휘장 안쪽에 대고 지극히 공손한 어조로.
"왕야의 부르심을 받고 해동거사께서 납시었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묵직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오, 그래?"
잠시 후, 휘장이 젖혀지며 비대한 체구의 인물이 걸어 나왔다.
곤룡포(袞龍袍)를 입은 그는 바로 태성왕 주웅이었다.
길다란 얼굴에 차가운 눈매를 한 태성왕은 전체적으로 쌀쌀한 인상을 주는 인물이었다.
그가 나온 뒤편으로 안색이 창백한 여인이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비록 병약한 모습이었으나 타고난 아름다운 용모를 숨길 수는 없었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를 소유하고 있는 여인!
아아, 이 여인은 바로 주수연이 아닌가?
그녀를 본 순간, 해동거사는 전신의 혈맥이 모두 경직(硬直)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내심 너무도 처절한 절규(絶叫)를 토하고 있었다.
'수연… 내가 왔소! 이 유걸이가… 수연… 당신을 찾아왔단 말이오!'
아, 광혈풍 진유걸.
해동거사는 바로 진유걸의 변신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 곳 태성왕부에 잠입하기 위해 면밀한 계책(計策)을 세웠던 것이다.
그가 항주기루에서 만든 즙은 늦게야 독성이 발작되는 약물이었다.
그는 원영에게 시켜 그 액체를 마부노인에게도 먹이게 한 뒤 연극을 하도록 시킨 것이었다.
하나 지금 이 순간, 진유걸의 가슴은 터질 듯한 격정에 휘말리고 있었다.
주수연, 그녀가 지금 자기 앞에 있지 않는가?
아, 얼마나 그리워했던 그녀였던가?
그 얼마나 기다려 왔던 만남이었던가?
오직 그녀를 만나기 위하여 생사(生死)가 걸린 모험(冒險)을 감행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진유걸은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을 참느라 무던히도 애썼다.
그가 애써 격정을 누르고 있을 때 태성왕 주웅이 입을 열었다.
"거사를 청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조카 때문이오. 웬일인지 통 음식을 먹지 못하니… 걱정이 돼서……."
진유걸은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왕야께서는 참으로 자애로우십니다. 소생이 최선을 다하여 군주님을 쾌차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끝맺기 무섭게 침상으로 다가갔다.
진유걸은 수척해진 주수연의 얼굴을 착잡한 심정으로 들여다보았다.
'아, 수연… 기운을 내시구려. 당신의 그 아름다운 눈동자… 항상 희망을 담고 있던 그 눈빛을 내게 보여 주구려.'
진유걸은 애타는 심정을 억누르며 그녀의 맥을 짚었다.
순간, 손끝이 떨려 왔다.
백옥보다도 하얗고 솜털보다도 포근한 그녀의 살결이 처음이 아니건만, 진유걸의 심장은 요란하게 고동쳤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일으켜 세워 달콤하고 감미로운 입맞춤을 하고 싶었다.
그녀의 나긋한 허리를 왈칵 껴안고 지나간 괴로움을 속삭이고 싶었다.
그녀와 둘이서 속박의 굴레를 벗어나 푸른 하늘, 맑은 초원(草原)을 마음껏 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가 그의 생각뿐이었다. 목전(目前)의 상황은 절대 그의 꿈을 용납치 않았다.
진유걸은 그녀의 여린 손목에서 팔을 떼며 말했다.
"왕야! 무릇 만병에는 저마다 원인(原因)이 있습니다. 의술의 처방(處方)은 그 원인을 분석하고 알아 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백약(百藥)이 무효입니다."
태성왕야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래, 병명이 무엇이오?"
"군주님께는 지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충(苦衷)이 있으신 듯합니다. 그것이 군주님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병이 생기게 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빨리 해소(解消)시켜 주지 않으면 식욕(食慾)이 떨어지고, 기력(氣力)이 쇠약(衰弱)해져 끝내는……."
태성왕의 안색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고칠 수 있는 방도(方途)가 없겠소?"
진유걸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터이라 얼른 대답했다.
"군주님같이 마음의 병을 앓는 환자에게는 의원이 같이 있으면서 얘기 상대가 되어 주어야만 합니다. 대화를 통해 환자의 불만(不滿)을 들어 주고, 치료 쪽으로 유도(誘導)하는 것이지요."
태성왕야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맛을 다셨다.
"거사의 말뜻은, 수연과 단둘이 말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이오?"
"바로 그러합니다. 인간은 항시 대화를 통하여 난제(難題)를 해결해 왔으니까요."
태성왕야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 애를 고치는 일이라면 쾌히 허락하겠소."
그는 곧 내전시위를 데리고 주수연의 방을 빠져 나갔다.
이제는 진유걸과 주수연만이 방에 남게 된 것이다.
진유걸의 가슴은 폭풍우 속을 헤쳐 나가는 일엽편주(一葉片舟)가 된 심정이었다.
그는 수연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대며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수… 연……!"
진유걸의 음성을 듣는 순간, 침상에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주수연이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누군가를 찾는 듯 미친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중년인의 모습뿐이었다.
그녀는 가슴 밑바닥에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실망감을 맛보았다.
다시 좌절(挫折)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던 주수연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 냈다.
만화장에서 천면신옹에게 받은 몇 장의 인피면구!
그것을 기억해 낸 순간, 주수연은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온몸에 극심한 경련(痙攣)을 일으켰다.
"오, 공자님……!"
찰나, 진유걸은 그녀를 와락 껴안으며 오열을 터뜨렸다.
"수연! 아아, 수연… 수연을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수연 역시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이것이 설마… 꿈은 아니겠지요. 아니, 꿈이라도 좋아요. 다만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꿈이라면……."
두 사람은 이제서야 그 오랜 애정(愛情)의 갈등(葛藤)에서 풀려 났다.
그들은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간절히 빌었다.
진유걸과 주수연은 천하의 그 어떤 연인(戀人)들보다도 더 뜨겁게 상봉(相逢)했다.
진유걸은 주수연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문득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의문을 떠올렸다.
"수연! 말해 주시오! 무왕동부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음 순간, 그는 그 질문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깨달았다.
수연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자신과의 만남을 감사해 하고 있지 않은가?
굳이 이런 자리에서 그것을 물을 필요가 있을까?
진유걸이 망설일 때, 수연이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들며 울먹였다.
"소녀는 공자님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어요. 꼭 살아 계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을 굳게 믿고서……."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훔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공자님께서 탈혼사자의 암습을 받았을 때, 소녀는 순간적으로 나라도 살아나 공주님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음을 보였던 거예요. 그런데 공자님이 절벽 아래로 떨어진 후, 그는 소녀의 혈도를 짚었어요. 얼마 후, 정신을 차려 보니… 천우 공자의 마차 안이었어요."
진유걸은 그녀의 말을 믿었다. 아니,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지혜가 뛰어나고 사리판단(事理判斷)이 빠른 주수연으로서는 그 당시 능히 그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었군. 그 당시 나는 휘의 배반으로 분별력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때 주수연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공자님, 어서 소녀를 데리고 가 주세요. 오늘이 지나면 소녀는……."
"수연, 무슨 일이오?"
"내일 천우 공자가 소녀를 데리러 올 거예요."
진유걸은 심장이 오그라들 듯이 놀라고 말았다.
"그런 법이 어디 있소? 아니, 혼인식도 하지 않고 그대를 데려간단 말이오?"
"어차피 소녀는 숙부님의 눈에서 벗어난 몸.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러니 어서 저를 데리고 이 곳을 빠져 나가요."
주수연이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자 진유걸은 눈물이 핑 돌았다.
무공을 잃은 자신이 지금 무슨 힘으로 이 철통 같은 경비망을 뚫고 나갈 것인가?
날짜라도 여유가 있다면 어찌해 볼 수도 있겠지만 이제 겨우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가?
"수연!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오. 나는 무공을… 상실했소."
"그… 그럴 수가……?"
수연은 까무러칠 듯 놀랐으나 곧 침착을 되찾았다.
'무공을 잃으신 후 공자님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입장보다 진유걸을 먼저 생각했다.
"그랬었군요. 하지만 실망하기에는 아직 일러요. 이 수연의 생명이 아직까지 붙어 있으니까요."
진유걸은 그녀를 와악 껴안았다.
"그렇소! 당신이 있기에 나는 죽지도 못했소."
"소녀 역시 공자님이 계시기에… 죽을 수 없었어요."
그녀에게서 떨어져 내린 눈물이 진유걸의 옷깃을 적셨다.
"소녀는 절대로 천우 공자에게 가지 않겠어요. 공자님도 허락치 않겠지만 소녀 역시… 소녀에게는 오직 공자님밖에 없어요."
진유걸은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수연, 어찌하면 좋겠소?"
수연의 눈가에 알 듯 말 듯한 미소가 스쳐 갔다.
"이제 수연은 당장 죽어도 여한(餘恨)이 없는 몸. 무엇이 두렵겠어요?"
진유걸은 입술을 와락 깨물었다.
"나도 그렇소. 당신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한 약속을 아직 잊지 못하오."
수연은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하지만 공자님께서는 아직 할 일이 많으신 분이에요. 소녀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시면 안 돼요."
진유걸은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과 내가 함께 살 길은 없겠소?"
"있어요. 다시 한 번 도주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전에 세웠던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거예요."
"그러나 그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오. 지금 나는 무공을 잃은 몸이오."
"소녀는 공자님의 지혜를 믿어요."
진유걸은 자신이 너무도 무능력하다는 생각에 미칠 것만 같았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수연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것은 내 생명을 끊는 것과 같아.'
진유걸과 주수연은 왕부를 벗어날 방법에 대해 고심(苦心)하였다.
얼마 후, 주수연은 태성왕의 거처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방법이 하나 있어요. 숙부님의 거처에 비밀 통로가 하나 있는데, 그리로 도망가면 될 거예요."
순간, 진유걸은 귀가 번쩍 뜨였다.
"비밀 통로라니? 그렇다면 외부로 통하는 출구(出口)가 있단 말이오?"
"그러나 특수한 기관장치로 되어 있어 어려울지도 몰라요."
그녀는 부정적으로 말했으나 진유걸에게는 희망이 생겼다.
기관매복진(機關埋伏陣)과 건축기학(建築奇學)에 관해서라면 사부인 강남태을자에게 귀가 따갑도록 배워 온 그였다.
"거기에 대해 집중적으로 계획을 짜 봅시다."
진유걸의 입에서 희망에 찬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