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四章 기녀(妓女) 금화란(琴花蘭) (16/35)

第四章 기녀(妓女) 금화란(琴花蘭)

1

호륵- 호르르룩-!

심금을 말끔히 씻어 내리는 아름다운 새 소리가 들려 왔다.

진유걸은 감미로운 새 소리에 무겁게 내리누르는 눈까풀을 밀어올렸다.

갈증이 극심했고 온몸은 탈진(脫盡) 상태였다.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여인이 기거하는 곳인 듯 우아하고 화려하게 치장된 방 안이었다.

방 안 구석구석에는 은은한 단 향내를 감돌고 있었으며, 창가에는 한 쌍의 새가 새장 속에서 다정하게 지저귀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난 청청각 무리들에게 당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진유걸은 당시의 일을 떠올리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청청각… 무공을 회복하여 반드시 전날의 수모를 갚아 주마! 열 배, 백 배, 아니 천 배로…….'

그는 누운 채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살기를 쏟아 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전여정의 음성이 귀에 울렸다.

- 당신은 무공 회복이 전혀 불가능해요.

그는 머리를 흔들며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야! 나는 할 수 있어. 다른 사람들은 불가능하더라도 나만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지금의 그는 무공을 회복시키는 방법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진유걸은 너무도 나약한 자신에 대해 내심 절규를 토했다.

그가 낙심해 하고 있을 때였다.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여인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바로 항주기루(杭州妓樓)의 제일미녀인 금화란(琴花蘭)이었다.

진유걸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잠든 척했다.

"아직도 혼수상태인 모양이군. 어쩌다가 이런 변을……."

금화란은 말을 잇다 말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본 것이다. 진유걸의 눈가에 선명히 그려진 두 줄기 눈물 자국을…….

금화란은 애틋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얼른 깨어나셔서 몸을 회복하셔야 할 텐데……."

그녀는 걱정 어린 말을 남기며 진유걸을 혼자 있게 해 주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금화란은 일류기녀이다. 그런 그녀가 어찌 사내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진유걸 역시 그런 금화란의 배려를 어찌 모르겠는가?

얼마 후 금화란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 진유걸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침상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화란 낭자……!'

그의 눈동자가 물결처럼 흔들리며 지나간 시절이 환상(幻想)처럼 떠올랐다.

탈혼사자(奪魂使者) 독고휘(獨孤煇)와 광혈풍(狂血風) 진유걸(陳儒傑)!

두 사람은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는 절정고수들로 중원을 종횡무진(縱橫無盡)하였다.

둘은 항상 같이 행동했으며, 잠시도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은 이 곳 항주기루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당시 금화란은 이들 둘을 몹시 따랐고, 그들도 그녀에게 잘 대해 주었다.

그러나 무림인들에게 쫓기던 두 사람은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어 훗날을 기약하고 금화란과 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금화란은 지금의 진유걸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무공을 잃은 데다 인피면구까지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사 그가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하더라도, 그녀가 어찌 천하의 광혈풍이 무림 소졸(小卒)에게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맞았다는 사실을 믿겠는가?

"상세가 좀 어떠세요?"

맑은 시냇물이 흐르듯 청아한 목소리였다.

"낭자 덕분에 살아난 것 같소. 변변치 않은 목숨을 구해 주어 정말 감사하오."

"변변치 않다니요? 사람의 생명만큼 중한 것은 없어요. 예전에 소녀도 신분 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제가 가장 따르던 두 분의 오빠가 그렇게 말씀해 주셨죠."

그녀는 옛날 일을 회상하며 두 사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신분이 천하거나 귀하거나, 사람은 모두 생명이 하나밖에 없어. 생명에 있어서는 누구나 평등(平等)한 거지. 때문에 어떤 사람의 생명이라도 고귀한 거야.

진유걸은 금화란의 말에 고소(苦笑)를 머금었다.

'그 말은 내가 해 주었던 것인데… 후후……!'

그는 내심 웃으며 일어나려다 말고 도로 눕고 말았다.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 돼요, 아직 일어나시면. 공자님이 살아난 건 기적이래요. 의원도 처음에는 가망성이 없다고 돌아갈 정도였으니까요."

"……."

"의원이 그러는데, 공자님은 참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대요. 필시 한이 깊은 사람일 거라고 그랬어요."

진유걸은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물었다.

"내가 쓰러진 지 얼마나 지났소?"

"한 열흘 가량 됐어요. 무척 시장하시죠? 이제 곧 음식을 가져올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동(女童) 하나가 탕기를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왔다.

금화란은 그것을 받아 들고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몸에서 심장을 녹일 듯한 달콤한 향내가 뿜어져 나왔다.

"낭자는 내 얼굴이 보기 괴롭지 않으시오?"

진유걸은 자신이 쓴 인피면구가 몹시 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조금 미안해 했다.

금화란은 미음을 떠서 그의 입에 넣어 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마음이 문제지 얼굴이 무슨 문제예요? 아무리 잘생긴 얼굴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못났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소녀는 용모에 대해 그리 신경 쓰는 편이 아니니 마음에 두지 마세요."

진유걸은 금화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화란 낭자는 수연이나 연매와는 다른 환경에 있었음에도 생각이 무척 바르구나.'

그 후 진유걸은 금화란의 극진한 간호(看護)를 받아 가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녀의 정성이 지극해서인지, 아니면 진유걸의 강인한 생명력 때문인지 그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지 꼭 보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웬만큼 거동을 하자 의원은 까무라칠 듯 놀라워했다.

"의원 생활을 삼십 년 넘도록 했지만 이런 사람은 평생 처음이오."

하지만 진유걸로서는 그렇게 놀랄 이유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동안 마영신의로부터 얻어 온 회신단(回神丹)을 꾸준히 복용했던 것이다.

이 영단은 그의 사부가 마령신의에게 얻었던 천령환단(天靈幻丹)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그래도 효력이 뛰어난 약이었다. 그로 인해 진유걸의 상세가 빠르게 치유된 것이었다.

진유걸은 거동이 자유스럽자 방 안에 있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 그가 답답한 마음에 바깥을 내다보고 있을 때였다.

문득 낯익은 얼굴 하나가 창가를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니, 저 녀석은……?"

창가를 스쳐 간 소년, 그는 바로 길거리에서 매를 맞던 그 소매치기 소년이 아닌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진유걸의 전낭을 훔쳐 간 녀석이었다.

진유걸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별채를 뛰쳐나와 그 소년의 뒤를 쫓았다.

소년은 항주기루 안에 있는 별채 쪽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진유걸은 예전에 이 곳에 머문 적이 있었던지라, 내부 지리를 잘 알고 있어 소년을 놓치지 않고 쫓아갈 수 있었다.

'저 놈이 객을 받아들이는 빈청(賓廳)으로 향하고 있군. 거기서 또 은자를 훔치려는 것이 아닐까?'

얼마쯤 가자 숲이 우거진 가산(假山)이 나타났고, 군데군데 누각(樓閣)이 세워져 있었다.

왜소한 체격의 소년은 한 누각 앞에서 멈춰 서더니 잠시 머뭇거린 후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익-!

소년은 휘파람을 분 뒤, 누구를 기다리는 듯 근처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저 녀석이 왜 저러고 있을까? 몰래 다가가서 잡아야겠군."

진유걸이 소년을 잡기 위해 가까이 접근했을 무렵.

돌연, 맞은편 누각으로부터 한 여인이 걸어 나오는 게 아닌가?

진유걸은 얼른 옆에 있는 바윗덩어리로 몸을 숨겼다.

나타난 여인은 몹시 반가운 듯 활짝 웃으며 소년을 불렀다.

"원영(袁詠)아!"

원영이라 불린 소년이 벌떡 일어나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누나!"

두 사람의 태도로 보아 그들은 친남매인 모양이었다.

여인은 보조개가 패어 있는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눈동자에 촉촉한 물기가 어려 있어 조금 측은하게 보였다.

"누나! 오늘은 재수가 좋았어. 마차를 네 대씩이나 닦고, 마음씨 좋은 손님을 만나서 은자를 세 냥이나 벌었어."

"어머, 그래? 원영이가 인덕(人德)이 많아서 훌륭한 어르신들을 많이 만났던 모양이구나. 하지만 어린 것이 그런 고생을 하다니……."

그녀는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원영이 울먹이며 그녀를 달랬다.

"누나, 울지 마. 누나가 그러면 나도 슬퍼진단 말야. 흑흑……!"

원영과 누이는 같이 끌어안은 채 복받치는 설움을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흐으… 흑흑……!"

"마(馬) 늙은이에게 스물일곱 냥 갖다 줬으니까, 이제 일흔세 냥만 더 벌면… 누나는 자유롭게 돼. 그럼 좋은 가문에 시집갈 수 있어."

"그만! 원영아, 제발 그만둬. 흑흑……!"

그들 남매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들을 주시하던 진유걸조차 가슴이 찡하고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랬었군. 기루에 팔린 누이를 구하기 위해서 그런 짓을…….'

일각 가량 지났을까?

두 남매는 그 동안의 일들을 서로 얘기한 뒤 아쉬운 얼굴로 작별 인사를 했다.

"원영아, 몸 건강히 잘 있어야 해."

"누나도 잘 있어."

두 사람은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서로 반대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원영이 저자거리로 다시 나가자 진유걸도 그 뒤를 쫓았다.

2

얼마를 갔을까?

그들의 맞은편에서 십여 명의 인물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걸어오고 있었다.

진유걸이 이들을 발견한 순간, 내심 기절초풍할 듯 놀라고 말았다.

'아니, 저들은 태성왕부 소속 금위대(金衛隊) 무사들과 금위대 총령(總令)인 장백노마(長白怒魔) 금일송(金日松)이 아닌가?'

진유걸은 몰려오는 인물 중 중앙의 험상궂은 괴인을 보며 몸서리를 쳤다.

그 괴인은 구(九) 척(尺)에 달하는 거대한 체구에 화가 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장백사마(長白四魔) 중 둘째인 장백노마 금일송!

그는 태성왕 주웅의 호위대라 할 수 있는 금위대의 총령으로, 무림에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고수였다.

하지만 태성왕같이 무림에 통달한 인물이 그에게 총령이란 요직을 하사(下賜)했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진유걸은 예전 그와 한 번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독고휘를 만나 무왕동부에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상당히 고전(苦戰)을 면치 못했다.

더구나 지금은 무공도 잃은 상태가 아닌가?

금위대 무사들은 마치 제 세상인 양 안하무인(眼下無人) 격으로 대로를 차지한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 때 그들 쪽으로 원영이 다가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진유걸은 순간, 원영이 그들의 물건을 훔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막 원영을 막기 위해 뛰어나가려 할 때였다.

"이 놈! 손이 어디로 들어오는 거냐?"

금위무사 중 한 명이 벼락 같은 호통을 내지르며 원영의 완맥을 바싹 움켜쥐었다.

원영이는 뼈마디가 산산이 부서져 나가는 듯한 고통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어린 놈이 손버릇이 고약하군."

그 광경을 목격한 진유걸이 어찌 가만 있겠는가?

그는 황급히 장내로 뛰어들며 그들을 막아 섰다.

"잠깐만, 나리들! 잠시만 고정해 주십시오. 제발 부탁……."

진유걸이 막 사정하려는 순간이었다.

"네놈도 한패거리인 모양이구나. 이얍!"

진유걸의 우측에서 대갈과 함께 예리한 권풍(拳風)이 일었다.

위잉- 윙-!

진유걸은 반사적으로 재빨리 팔방풍영보를 전개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공력을 상실한 몸이 아닌가?

퍽-!

금의무사의 주먹이 진유걸의 가슴을 세차게 강타했다.

"으헉!"

그는 가슴을 움켜잡으며 바닥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가슴뼈가 짓뭉개져 나가는 듯했으며, 전신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하지만 진유걸은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하며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원영의 완맥을 쥐고 있던 금위무사가 다시 일격을 가했다.

"이 놈! 죽어라!"

팍-!

이번에는 더욱 극심한 타격을 입은 듯 진유걸의 코에서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아니에요! 그 분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원영은 자기 대신 진유걸이 또 얻어맞자 안타까움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금의무사는 이미 진유걸을 죽이기로 작정한 듯 손을 멈추지 않았다.

"흐흐흐… 이렇게 추한 놈에게 손을 쓰면 우리 손만 더러워진다."

장백노마가 나서며 바닥에 쓰러진 진유걸의 가슴에 발을 올려놓았다.

지그시 발을 조금만 누르기만 해도 뼈마디가 산산조각으로 으스러지고 내장이 튀어나올 것이다.

원영은 그 광경을 보며 미친 듯이 외쳤다.

"아니에요. 그 분은 아무 상관도 없단 말이에요!"

장백노마가 원영의 절규를 한 귀로 흘리며 막 진유걸을 짓밟으려는 순간.

"대협! 실로 오랜만에 뵙는군요. 한데, 어인 일이십니까?"

금화란이 화사한 미소를 뿌리며 사뿐사뿐 다가오는 게 아닌가?

장백노마는 금화란을 보자 엉거주춤한 자세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화란! 여전히 아름답구나."

금화란은 사람을 뇌쇄시킬 듯한 미소를 방긋 흘리며 박속 같은 치아를 드러냈다.

"대협! 소첩은 아니 찾으시고 여기서 무얼하고 계시는 겁니까? 어서 들어가시지요."

그녀는 교태로운 음성으로 말하며 장백노마의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버러지만도 못한 놈! 화란 때문에 살아난 줄 알아라."

장백노마는 진유걸에게 침을 퉤 뱉으며 못 이기는 척 금화란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가고 나자 진유걸은 가슴 가득 몰려드는 모멸감을 느끼며 이를 악문 채 천천히 신형을 일으켰다.

그는 얼마나 맞았는지 울컥 핏덩이를 쏟아 냈다.

"우욱!"

원영이 얼른 다가와 부축을 해 주었다.

"괜찮아요? 이게 모두 나 때문이에요."

진유걸은 원영의 부축을 받으며 금화란의 숙소(宿所)로 발길을 옮겼다.

"형님, 이제는 좀 어떠세요? 괜찮아요?"

"형님?"

진유걸은 원영의 넉살에 아픈 와중에도 어이가 없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형님이시죠. 형님, 정말 괜찮아요?"

"나는 괜찮다. 그보다 너는 어떠냐?"

"나는 말짱해요."

원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펄쩍펄쩍 뛰어 보였다.

약삭빠르게 보였던 원영이 천진난만(天眞爛漫)한 모습을 보이자 진유걸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너, 혹시 지난번에 가져간 내 전낭에서 둥그런 패를 보았느냐?"

원영은 잠시 침울한 얼굴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이미 처분한 것은 아니겠지? 그 패를 돌려 다오. 물론 은자는 네가 가져도 좋다."

원영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

"그 패는 내 보물 장소에다 숨겨 놨어요. 꼭 갖다 드릴께요."

그제서야 진유걸은 마음이 놓였다.

'하마터면 형님께 큰 불충을 저지를 뻔했는데… 천만 다행이군.'

"그런데 좀 전에 우리를 구해 준 그 누나 참 예쁘죠?"

"으… 응."

"항주에서는 최고로 이쁜 누나예요. 마음씨도 우리 누나처럼 비단결 같아요."

진유걸은 모르는 체하고 물었다.

"누나가 있니?"

"그럼요. 우리 누나는 정말 선녀처럼 아름답고 마음씨도 고와요."

원영은 누나 얘기가 나오자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너의 누이와 화란 낭자 중 누가 더 착하고 아름다우냐?"

"그야 뭐… 우리 누나가 더 낫지요."

원영은 머뭇거리다가 그렇게 대답했다.

진유걸은 원영이 갑자기 피부 깊숙이 와 닿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나이는 몇 살이고?"

"지원영(池袁詠)! 열두 살! 부모님은 하늘나라에 계시고… 음, 누나는… 어디 어디 살아요."

진유걸은 고개를 끄덕이며 원영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원영이는 참으로 착하구나. 그 착한 마음이 오래 갔으면 좋겠구나."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금화란의 별채에 도착했다.

지원영은 진유걸이 금화란의 별채로 들어가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형님, 여기서 살아요?"

"여기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거란다."

진유걸은 침상 위에 털썩 몸을 눕혔다.

지원영은 화려하게 꾸며진 방 안을 둘러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더니 불쑥 하는 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 화란 누나는 다락원에서도 데려가려고 애를 쓰는데… 형님 같은 분과 같이 살고 있다니……."

진유걸은 지원영의 말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락원에서 화란 낭자를……?"

지원영이 고개를 끄덕일 때 금화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 안에만 계시지 않고… 큰 봉변을 당하셨잖아요? 이번에는 정말 큰일날 뻔했어요!"

그녀는 다시 지원영을 돌아보며 나무랬다.

"원영아, 네가 남의 돈을 훔치다니… 누이가 네 얘기를 들으면 얼마나 실망하겠니?"

그 말에 지원영은 고개를 떨구며 모기 소리만 하게 말했다.

"안… 돼요. 누나가 알면 큰일나요. 그러니 제발 누나에게 말하지 마세요."

"화란 낭자! 원영은 착한 애요. 모르고 한 행동이니 이해해 주구려. 원영의 누이에게도 비밀로 해 주고."

금화란은 간절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문득 진유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못생긴 얼굴이다. 거무스름한 얼굴은 곰보 투성이였고, 이목구비(耳目口鼻)도 제멋대로였다.

그야말로 추남(醜男)이란 말이 제대로 들어맞는 용모.

하지만 그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점이 많이 있었다.

우선 느껴지는 것은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고고함과 태산 같은 위압감이었다.

금화란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진유걸이 문득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자들은 지금 어디 있소?"

금화란은 그가 묻는 사람들이 태성왕부의 금위대 일행임을 짐작하였다.

"그들은 지금 상청(上廳)에 마련된 누각(樓閣)에 있습니다만……."

"그래요? 음, 그럼 미안하지만… 화란 낭자, 내게 은자 한 냥만 주지 않겠소?"

금화란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 은자 한 냥이 아니라 열 냥을 꺼내 주었다.

"고맙소."

진유걸은 그녀의 마음 씀씀이를 느끼며 은자를 모두 건네 받았다.

진유걸은 곧이어 물품 이름을 적은 종이와 은자 두 냥을 지원영에게 쥐어 주며 말했다.

"이 한 냥으로는 약방에 가서 이 종이에 적힌 것을 사 오고, 나머지 한 냥은 네가 갖도록 하여라."

지원영은 은자를 벌게 된 기쁨에 신바람이 나서 뛰어나갔다.

지원영이 나가자 진유걸은 금화란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화란 낭자! 그 동안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구려. 정녕 잊지 않으리다."

금화란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어렸다.

"소협께서 공명(功名)을 높이시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면 꼭 한 번 이 화란을 찾아 주십시오."

"허허허… 나에게 그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구려."

"분명히 올 것입니다."

그녀의 믿음 있는 대답에 진유걸은 서글픔을 금치 못했다.

"내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부탁이라니요?"

진유걸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성아가 사 오는 약초를 배합하여 즙을 낼 것이니, 그것을 금위대 무사들이 먹는 음식에 뿌려 주겠소?"

순간, 금화란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진유걸을 응시하였다.

"이것은 독약(毒藥)이 아니오. 절대로 화란 낭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소."

금화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 뜻대로 하겠어요. 하지만 나 자신도 내가 이해되지 않는군요. 이런 일을 선뜻 수락하다니……."

잠시 후, 진유걸은 지원영이 사 온 여러 가지 약초를 배합하기 시작했다.

"형님, 지금 뭘 만드시는 거예요?"

"이 형을 괴롭힌 자들을 골탕먹이는 약을 만드는 거야."

지원영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하였다.

"이런 나무 뿌리들이 어떤 효력이 있길래요?"

"이제 두고 보면 안다. 원영이가 나의 말만 잘 듣는다면 은자 백 냥을 벌게 해 주마."

일순, 지원영은 환호성을 질러 댔다.

"이야! 신난다. 형님 말이라면 뭐든지 들을게요."

은자 백 냥!

그것만 있으면 자신의 누이를 기루에서 빼낼 수 있지 않은가?

지원영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형님, 어디서 이런 방법을 배웠어요?"

진유걸은 십대기인 중 일 인인 마령신의 남궁태협을 머릿속에 그리며 대답했다.

"사백에게서……."

"어? 그렇다면 형님에게도 사문(師門)이 있었어요?"

자원영은 의외로 무림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한데, 원영이는 무림에 관해 많은 걸 아는 모양이구나?"

"물론이죠. 나는 커서 훌륭한 무인(武人)이 될 거예요. 무림맹주 강호운룡처럼……."

지원영의 말에 진유걸은 흠칫 놀라며 남화룡이 준 맹주 신물을 떠올렸다.

"참, 전에 말한 그 패는 가지고 왔느냐?"

지원영은 그제서야 생각난 듯 품안에서 맹령정패를 꺼내 진유걸에게 넘겨 주었다.

"묵직한 것이 금부처 같았으나, 형님 같은 분이 금을 지니고 다닐 리는 없고… 그래서 일단 숨겨 놨었어요."

지원영은 전낭을 훔친 사실이 미안한 듯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딴청을 부렸다.

'녀석, 이 맹령정패가 은자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값어치가 나간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원영아! 은자 훔치는 법은 누구에게서 배웠느냐?"

"그냥 혼자서……."

문득 진유걸은 약초 뿌리를 배합하던 일을 멈추고 지원영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약간 마른 듯한 체구에 반듯한 이마, 그 밑으로 자리잡은 수려한 이목구비는 아직 앳되고 귀엽게 보였다.

또한 눈동자는 영재(英才)임을 나타내듯 반짝반짝 빛이 났으며, 근골(筋骨)도 상당히 뛰어난 편에 속했다.

'으음, 사부께서는 나를 동평객잔에서 거두어 주셨지. 나도 이 애에게 몇 가지 무공을 전해 줘야겠군.'

진유걸은 약초를 배합하여 액체로 만든 뒤, 지원영을 시켜 금화란에게 갖다 주라고 일렀다.

지원영이 나간 뒤 진유걸은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금화란의 의복으로 보이는 진분홍 치마를 발견했다.

진유걸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그녀의 치마폭에 일필휘지(一筆揮之)를 휘갈겼다.

我來竟何事 高臥沙丘城

城邊有古樹 日夕運秋聲

魯酒不可醉 齊歌空復情

思君若汶水 浩蕩寄南征

나는 왜 여기 왔던가? 공연히 사구성(沙丘城)에 누워 지내네.

성 가의 고목(古木)에선 낮과 밤으로 들려 오는 가을 소리… 아, 가을 소리!

노주(魯酒)로야 어디 취하기나 하는가? 제가(齊歌)는 허전하기만… 허전하기만 하네.

그대를 그리는 정(情), 문수(汶水) 같거니… 남쪽으로 가는 물에 이 글 부치네.

용이 승천(昇天)하고 봉황(鳳凰)이 나래를 펴는 듯한 웅휘한 문체(文體)!

당대의 명필가(名筆家)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필법이었다.

이 시는 사구성하기두보(沙丘城下寄杜甫)를 원제(原題)로 하고 있었다.

진유걸이 문우(文友)에 대한 정리(情理)를 그린 이백(李白)의 시를 인용한 까닭은, 금화란을 한 여인으로 보기보다 친구로서 대하고자 함이었다.

그는 붓을 놓은 채 망연한 상념에 잠겨 들었다.

그 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 갔다.

항주기녀 금화란!

그녀는 그에게 얼마나 순정적이며 희생적이었는가?

그와 함께 자신이 알고 있던 여인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 해월영(海月影) 주수연(朱洙淵).

그리고 호북성 제일부호 강태위의 누이동생 하북월색(河北月色) 강보연(姜寶蓮).

무조건 자신을 좋아해 주던 마령신의의 손녀 야생여걸(野生女傑) 남궁상아(南宮嫦娥).

또한 자신에게 처절한 한을 지닌 월화신녀(月花神女) 전여정(田汝庭)…….

"휴……!"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여러 가지 은원(恩怨)이 그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기억도 하지 못하고 있는 어린 시절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절실한 것은 그가 공력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유걸은 이 부분에 대해 몇 가지 희망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천하 명의인 마령신의에 대한 믿음이었다.

자신의 사백이며 천하제일의 신의인만큼, 공력을 회복하는 묘책을 갖고 있을지도 몰랐다.

두 번째,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망정암의 주지스님이었다.

그 사람 역시 무공을 회복하는 방책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진유걸이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지원영이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 들어왔다.

"그들이 약을 뿌린 음식을 먹었어요. 하지만 아무 이상이 없던데요?"

"하하하… 여기서 그들의 몸에 이상이 생긴다면 화란 낭자는 물론이고, 항주기루는 망하란 말이냐?"

"옛?"

진유걸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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