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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章 사라진 무공(武功) (14/35)

第二章 사라진 무공(武功)

1

얼마나 시각이 흘렀을까?

진유걸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사방이 온통 거울로 되어 있는 방에 누워 있었다.

'여기가 어딜까?'

그는 머리가 깨지는 고통과 함께 문득 중년미부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 수연 군주님은 공자님을 배신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지금 이 곳에 머물고 계십니다.

'수연이 나를 배신한 게 아니라고? 그리고 그녀가 이 곳에 있다니…….'

진유걸은 머리가 터져 나갈 것만 같아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수연… 수연… 수연……!"

그의 입에서 주수연을 부르는 외침이 절규처럼 터져 나왔다.

"수연, 말해 다오. 결코… 독고휘와 공모한 것이 아니라고!"

그 때였다.

"그래요, 소첩은 그와 공모한 일이 없어요."

부드러운 여인의 음성이 진유걸의 귓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한순간 진유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가 들려 온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의 바라본 곳, 그 곳에는 한 여인이 다소곳이 서 있는 게 아닌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 그녀는 뜻밖에도 아진의 시비 중 한 명인 향연이었다.

"그… 그대가 정녕 수연이란 말이오?"

"흐흑… 공자님! 소녀는 진정… 수연입니다."

순간, 진유걸은 엄청난 충격으로 머리가 빙 도는 것을 느꼈다.

"수연… 당신이 수연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려. 도대체 당신이 왜 여기에 있단 말이오? 그리고 시비의 신분으로 있다니… 도대체 어찌 된 거요? 어서 면사를 벗어 보오."

진유걸의 말이 끝나는 순간, 향연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를 벗겼다.

찰나, 아름답기 그지없는 주수연의 화용월태(花容月態)가 숨김없이 드러났다.

눈물로 범벅된 향연의 얼굴… 그 얼굴은 정말 주수연(朱洙淵)이 아닌가?

그 동안의 고초가 말이 아닌 듯 무척 여윈 모습이었다.

아, 얼마나 미워하면서도 그리워했던 그녀였던가?

그녀를 무섭게 증오해 온 그였지만 내심 또 얼마나 보고파 했던가?

그런데 그녀가 지금 그 모든 것이 오해라 하지 않는가?

"수연!"

진유걸은 실내가 무너져라 소리치며 주수연에게 달려갔다.

"공자님!"

그녀 역시 격동을 금치 못하며 진유걸의 품속으로 안겨들었다.

뜨거운 청춘을 가진 두 남녀는 또다시 떨어질세라 서로를 뜨겁게 끌어안았다.

주수연은 다시는 진유걸을 잃지 않겠다는 듯 그의 품속으로 깊숙이 파고들며 당시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 땐 탈혼사자의 눈을 속이느라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수연, 그만하오. 모든 것이 내 불찰이오. 수연을 믿었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내가 수연을 믿지 못했기에 생긴 일이었소. 그 동안 내가 수연을 오해해 더 미안할 뿐이오."

진유걸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토록 자신을 갈망하는 여인을 의심하고 원망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진유걸은 주수연을 너무도 사랑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얼마나 사랑했던 여인이었던가?

그녀를 되찾게 된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진유걸은 미친 듯이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맞닿은 입술.

진유걸의 체내에 잠재돼 있던 술기운이 그의 이성(理性)과 판단력을 마비시켰다.

진유걸은 입술을 떼며 그녀를 안아 들며 침상 위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주수연은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내맡긴 채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진유걸은 그녀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입술을 덮치며 옷을 벗겨 내렸다.

문득 수연의 옷을 벗겨 가던 진유걸의 손이 그녀의 가슴 위에서 멈춰졌다.

터질 듯이 부풀어오른 여인의 육봉, 진유걸은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그녀의 육봉을 움켜잡았다.

"으흑!"

수연은 아픔의 비명인지 쾌락(快樂)의 신음인지 알 수 없는 비음(鼻音)을 토했다.

그녀는 전신으로 엄습하는 전율을 참지 못하며 몸을 비비꼬았다.

진유걸은 몸을 가볍게 떨며 그녀를 조심스럽게 애무(愛撫)해 갔다.

"허억!"

수연은 황홀한 교성을 흘리며 진유걸의 목을 휘감아 안았다.

그녀 역시 서서히 몸이 달아오름을 느꼈던 것이다.

이윽고 수연은 한 조각의 헝겊도 걸치지 않은 나신(裸身)이 되고 말았다.

눈부시도록 황홀한 여인의 나체(裸體).

진유걸은 그녀의 나신을 감상하며 뜨거운 입김을 토해 냈다.

"아아……!"

그도 재빨리 자신의 옷을 벗어 던졌다.

그들은 열기로 휩싸인 알몸뚱이로 서로 뜨겁게 감싸안았다.

살과 살이 맞닿자, 형용할 수 없는 전율이 두 사람을 뜨겁게 휘감았다.

진유걸은 터질 듯 부푼 그녀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손으로는 탄력 있는 허벅지를 더듬어 갔다.

"아아……!"

순간, 수연이 비음을 토하며 진유걸의 머리카락을 바싹 움켜쥐었다.

진유걸은 복받치는 정욕으로 수연의 자줏빛 유두를 질끈 깨물었다.

"아아……!"

수연은 금세라도 숨이 넘어갈 듯 가쁜 열기를 뿜어 내며 교태롭게 몸을 비비꼬았다.

"허헉!"

진유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수연의 전신을 격렬하게 애무해 나갔다.

그의 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수연은 악기 음률 같은 비음을 발했다.

"아아……!"

진유걸은 온몸을 태워 버릴 듯한 욕정에 불타며 자신을 천천히 수연의 몸 속으로 집어넣었다.

"아악!"

찰나, 수연은 고통과 환희가 뒤섞인 교성을 내질렀다.

두 사람은 그 끝을 향해 치달렸다.

수연은 금시라도 숨이 넘어갈 듯 쾌감에 전율했다.

"으흡!"

진유걸은 극적인 순간을 향해 보다 박차를 가했다.

삐거덕- 삐거덕-!

드디어 두 남녀의 요란한 방사(房事)에 못 이긴 침상이 기음을 토했다.

열풍(熱風)!

환희(歡喜)와 쾌감(快感)을 추구하려는 그들 남녀는 철저한 야수로 돌변해 있었다.

"아아……!"

"허헉……!"

원시적인 욕망에 휩싸여 몸부림치는 두 사람의 거친 숨결만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절정에 달한 두 마디 교성이 방 안을 울렸다.

"으음……!"

"아아……!"

잠시 후, 소용돌이치던 방 안의 열풍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을 밟는 듯한 뿌듯한 만족감으로 서로를 끌어안은 채 깊고 깊은 나락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 때였다. 진유걸은 문득 체내에 있던 힘이 어디론가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을 미처 알아차릴 사이도 없이 그는 잠 속으로 깊게 빠져들고 말았다.

진유걸은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서서히 의식을 회복했다.

사지백해가 나른하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마치 몇 해 동안 병석(病席)에 누워 있다 깨어난 사람 같았다.

그는 지난밤의 일들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급히 주수연을 찾았다.

주수연은 언제 일어났는지 잠에서 깨어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연……."

그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주수연을 불러 보았다.

"수연! 정말 꿈이 아니었구려. 난 어젯밤의 일이 꿈인 줄로만 알았소."

그의 손이 막 주수연의 어깨에 닿으려는 찰나.

팍-!

갑자기 주수연이 오른손으로 진유걸의 가슴팍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우욱!"

진유걸은 순간 신음을 내지르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밀랍처럼 창백하게 질려 갔다.

"수… 수연! 이게 무슨 짓이오?"

그의 입에서 한 줄기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주수연은 그를 내려다보며 차가운 얼굴로 냉소를 쳤다.

"흥! 당신은 지금부터 생명을 구걸해야만 할 거예요."

진유걸은 그제서야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뭣이? 이 더러운 계집!"

진유걸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재빨리 진기를 끌어올렸다.

하나, 진기가 전혀 모아지지 않는 게 아닌가?

"아니, 이… 이게……?"

그제서야 진유걸은 자신의 몸에 변화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이 요부! 어떤 암수를 썼는지… 당장 대지 못… 우욱!"

그는 분노로 전신을 부들부들 떨다 말고 울컥 한 움큼의 선혈을 뿜어 냈다.

"호호호호호호……!"

주수연의 웃음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진유걸의 가슴에 꽂혔다.

진유걸은 자조 섞인 중얼거림을 흘려 냈다.

"좀더 현명하게 사리를 판단해야만 했다. 정(情)에 눈이 어두어지고 사랑에 귀가 먹다니… 광혈풍이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았단 말인가?"

진유걸은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주수연을 노려보며 외쳤다.

"요부야! 네년은 대체 누구냐?"

"아이, 누구긴 누구예요? 당신의 수연이지."

주수연은 은근한 어조로 그를 희롱하였다.

진유걸은 모멸감으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네년은 결코 수연이 아니다. 수연은 무공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의 머릿속으로 문득 한 여인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여정(汝庭)… 너는 여정이지?"

수연은 순간 쓰고 있던 인피면구를 벗었다.

아, 월하신녀(月花神女) 전여정(田汝庭).

광혈풍 진유걸을 사모했던 여인.

여인이 있는 사내를 사랑했기에 비운(悲運)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불행한 여인.

그녀가 지금 진유걸의 목전에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한 것이다.

전여정은 비웃음이 가득 담긴 눈길을 진유걸에게 던졌다.

"이제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시는군요. 그토록 명석하시던 분이 내 꾀에 속아 넘어가다니… 정말 안됐군요."

진유걸은 단 한 번의 실수가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은 몰랐는지라 몹시 가슴이 아팠다.

"정매, 만화장에서의 너는 순진하고 꿈이 많은 소녀였는데……."

"그리고 광혈풍이란 사람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소녀이기도 했죠."

그녀는 싸늘한 음성으로 비아냥거렸다.

진유걸은 괴로운 심정을 가누지 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정매. 전 대가께서도 정매가 이러는 걸 바라시지 않으실 거야."

월화신녀 전여정은 공허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나는 할아버지의 참혹한 죽음을 잊지 못해요. 분명 할아버지께서도 당신의 한을 풀어 주길 원하실 거예요. 이 모든 게 바로… 당신 때문이에요."

"그 일에 대해선 나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전여정은 날카로운 음성으로 그의 말을 잘랐다.

"그만!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아요. 난 반드시 할아버지와 나의 한을 갚고야 말겠어요."

그 음성이 어찌나 차갑던지 진유걸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정매, 정녕 나를 용서할 수 없겠느냐?"

"용서요? 호호호…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당신 앞의 전여정은 예전의 전여정이 아니란 말이에요."

일순, 진유걸은 지난밤에 벌였던 정사(情事)가 떠올라 마음이 착잡했다.

어찌 됐건 그는 그녀를 범하지 않았는가?

이미 세상을 등진 천면신옹 전우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나를 어쩔 작정이냐?"

"당신을 가장 처참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 후 처리하겠어요."

여인의 한(恨)은 오뉴월에도 서릿발이 내린다고 했던가?

진유걸은 가슴이 섬칫해짐을 느꼈다.

다음 순간, 전여정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흘러 나왔다.

"이미 느끼고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당신의 모든 무공은 폐쇄됐어요."

무공(武功) 폐쇄(閉鎖)!

그것은 진유걸이 지닌 진원(眞原)이 모두 상실됐을 뿐 아니라, 더 이상 무학을 연성할 수 없다는 몸이 됐다는 말이 아닌가?

무림인에게서 무공을 폐쇄시킨다는 것은 생명을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진유걸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천지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구나."

그는 너무도 엄청난 충격으로 신형을 휘청거렸다.

방 안에는 일순 침묵이 감돌았다.

"그래서… 정매는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졌느냐?"

한참 만에 그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전여정은 무섭도록 침착한 그의 태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과연 천하를 뒤흔들 만한 광혈풍답군요.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해요."

"나는 이미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다."

그가 이토록 쉽게 생명을 포기하자, 전여정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당신은 무공을 잃은 후에 살아갈 일이 두려운 모양이군요?"

진유걸은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 냈다.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아."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죽기를 자처하는 거죠?"

진유걸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처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때때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으니까. 그리고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는 것이 더 힘든 법이니까."

"그렇다면… 당신을 더욱 괴롭히기 위해서 당신을 이대로 놓아 주는 게 가장 좋겠네요."

너무도 비정한 전여정의 말에 진유걸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호호호… 당신을 놓아 주기 전에 한 가지 좋은 소식을 들려 드리죠."

"좋은 소식? 무공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도 있단 말이냐?"

"무공을 회복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해요. 천하에 그 해약이 없다는 산공분(散功粉)에 당했으니까."

"산공분?"

"그것은 묘강(苗疆) 지역에서 생산된 것으로, 복용한 후 여인과 관계를 맺게 되면 체내의 진원(眞原)이 유실돼 버리죠."

"그만!"

진유걸이 고함을 지르자 시뻘건 핏덩어리가 울컥 쏟아졌다.

그의 앞섶은 금시 붉은 피로 물들여져 보기에 끔찍하였다.

전여정은 그러한 진유걸을 냉혹한 시선으로 쏘아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모든 게 수연 군주 덕분이에요. 만약 당신이 수연 군주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와 관계를 가지지도 않았을 테고… 무공을 잃지도 않았을 테니까."

"……."

진유걸은 침묵을 지킨 채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었다.

'그토록 선량하던 정매가 마치 나찰(羅刹)처럼 변했다. 이것은 다 내 잘못이다. 나는 입이 열 개 있어도 할 말이 없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뜻밖의 말이 들려 왔다.

"한 가지 좋은 소식이란… 수연 군주가 진짜로 당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정매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에요. 그녀는 지금 태성왕부(太成王府)에서 예전처럼 생활하고 있어요. 당신을 그리워하며……."

그녀의 말은 진유걸의 가슴을 묘하게 자극했다.

"그럴 리 없다. 어제는 경황 중에 당했지만, 그녀는 탈혼사자와 함께 잠적했다. 나를 더 이상 속이지 마라."

"당신은 참으로 어리석군요. 내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들 무슨 이득이 있겠어요? 탈혼사자는 그녀를 태성왕야에게 돌려 보낸 뒤 막대한 금품(金品)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물론 남창왕부(南昌王府)의 천우 공자에게도 받고……."

"그럼 수연은 지금 태성왕야 주웅에게 있단 말이냐?"

"그래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당신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 하더군요. 그 정도면 탈혼사자에게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일순, 진유걸의 전신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전여정은 진유걸이 무공을 펼칠 수 없는 상태이기에 주수연의 얘기를 들려 준 것이다.

그리하여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애태우는 두 사람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며 즐거워하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무왕동부(武王洞府)에서 수연은 휘와 웃음을 주고받았었다. 이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나?'

그가 의문을 잠겨 있는 동안 전여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나는 당신을 풀어 주겠어요."

"그것보다 내가 부탁한 일은 어찌 된 거냐? 황금을 오백 관씩이나 주었는데……."

전여정은 그의 얼굴을 딱하는 듯이 바라보며 혀를 찼다.

"어리석기는… 이미 사부님의 마음은 다른 곳으로 기울어졌어요."

"기울다니? 누구에게 말이냐?"

"당신은 혈영광군의 부탁을 받고 왔지요?"

찰나, 진유걸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래."

"하지만 사부께서는 북귀천왕(北鬼天王) 귀독요후(鬼毒妖侯)와 협정을 맺었어요. 보다 큰일을 위해서……."

진유걸은 그제서야 사건의 내막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정매는 멋진 복수를 하는군."

"그래요. 하지만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난 반드시 당신에게 복수했을 거예요."

진유걸은 그녀의 눈빛에 섬뜩함을 느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럼 황금 오백 관과 표사들은 돌려 다오!"

"황금과 표사들을 강태위(姜太衛)에게 다시 돌려 보낸다 해도 어차피 우리 수중에 들어오게 돼 있어요."

"다락원의 전대원주를 만나게 해 다오. 전대원주가 무슨 마음으로 이런 짓을 하는지 따져야겠다."

순간, 전여정의 소맷자락이 펄럭임과 거의 동시.

"입 닥쳐!"

짝-!

"우욱!"

진유걸은 뺨을 호되게 얻어맞고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는 입에서 피를 뿜어 내면서도 전여정을 원망하지 않았다.

이 때.

"과연 대단한 놈이로구나. 혈영광군이 그래서 네놈을 보냈겠지만……."

낭랑한 음성과 함께 전대원주인 중년미부가 들어섰다.

그녀는 싸늘한 눈초리로 진유걸을 응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여정이 밉지 않느냐?"

"정매가 이렇게 변한 것은 모두 내 책임이오. 나는 정매를 나무랄 수 없소!"

순간, 중년미부의 눈가로 기이한 빛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이살의 명성이 천하를 뒤흔든 데에는 역시 이유가 있었군.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게 끝장이다. 그것이 모두 여정 때문인 데도 네놈은 증오가 안 생긴단 말이냐?"

진유걸은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소매로 닦아 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일 뿐이오."

"알기는 아는군."

전여정은 차갑게 내뱉고는 말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전여정이 사라진 뒤, 중년미부가 몸을 교태롭게 움직이며 진유걸에게로 다가왔다.

"무공을 잃었는 데도 매우 의연하군. 어디 진면목이 어떤지 한 번 볼까?"

찌이익-!

말과 동시에 진유걸이 쓰고 있던 인피면구를 뜯어 냈다.

일순,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는 진유걸의 눈부신 진면목이 드러났다.

지혜와 예지(銳智)가 가득 담긴 부리부리한 두 눈,

얼굴의 정중앙에 우뚝 자리잡은 반듯한 콧날, 그 아래 사내의 정열과 의지를 담고 있는 조화 있는 입술.

정녕 조물주의 완벽한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용모가 아닌가?

중년미부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금세 음탕(淫蕩)한 눈빛이 되었다.

"아아, 이살(二殺)의 인물이 개세적이라 하더니… 탈혼사자보다 더 영준한 것 같군."

진유걸은 그녀의 입에서 탈혼사자라는 말이 나오자 가볍게 전율했다.

"탈혼사자를 본 적이 있소? 언제, 어디서……?"

중년미부는 음욕에 가득 찬 눈빛을 빛내며 은밀히 말했다.

"그에 관해서 알고 싶으냐? 그렇다면 조건이 있어."

"조건이라니요?"

"너는 잠시 후 남문(南門)으로 내보내지게 될 거야. 거기서 오 리쯤 떨어진 곳에 보원암(報元庵)이란 곳이 있는데, 거기서 기다리도록 해."

"좋소. 거기서 기다리겠소. 한데 조건이 뭐요? 본 공자는 지금 무공이 폐쇄된 상태라 원주의 조건을 들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소."

중년미부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약속 장소에서 밝히겠다. 이 말은 누구에게도 누설해선 안 돼. 혹 본 원주의 기분이 좋아지면 폐쇄된 무공을 치유할 수 있는 길도 알려 줄 수 있을지도 있어."

일순, 진유걸의 가슴이 커다란 기복을 일으켰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무공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가 희망에 차 있을 때, 누군가가 들어왔다.

시비 차림의 여인이었다.

"공자께서는 소녀를 따라오십시오."

진유걸은 나가면서 중년미부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의미 있는 웃음을 그에게 보냈다.

콰당-!

문을 닫아 거는 거친 소리가 무공이 폐쇄된 진유걸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였다.

밖은 어느 새 밤이었다. 

진유걸은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매! 내가 무공을 잃음으로써 너의 증오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면… 결코 너를 원망하지 않으마."

진유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어둠 속을 걸었다.

'그나저나 서혈천왕 혈영광군 노선배님을 무슨 면목으로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난감하군.'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다락원은 태성왕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분명해. 아, 혹시 원앙벽뢰쌍기(鴛鴦霹雷雙奇)를 보낸 곳은 바로 다락원이 아닐까? 그리고 강북녹림맹주인 비도혈객(飛刀血客) 왕우극(王宇極), 풍운신마장(風雲神魔掌) 우열(于熱), 동정어옹(洞庭魚翁) 천육(千六), 흑시삼수라(黑屍三修羅) 등도 다락원과 관련이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정매가 말하기를, 강태위에게 황금과 표사들을 돌려 줘도 결국 자신들의 수중에 들어온다고 하지 않

던가?'

진유걸은 염두를 굴리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태성왕부… 다락원… 태명회… 분명 뭔가 있다!"

이 때 돌연.

뎅- 뎅- 뎅-!

장엄한 종 소리가 밤하늘의 정적을 깨며 멀리멀리 울려 퍼졌다.

그는 문득 전대원주와의 약속이 떠올렸다.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늦기 전에 어서 보원암으로 가야겠다. 방금 종 소리가 들려 온 곳이 보원암이겠지?"

진유걸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공을 상실한 진유걸로서는 무척 걷기 힘든 길이었다.

약 반시진 가량 걸었을까?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걷던 그의 시야로 환하게 불을 밝힌 사찰이 들어왔다.

"이 곳이 보원암인 모양이군."

탕- 탕-탕-!

진유걸이 사찰 문을 두들기자 잠시 후 누군가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뉘시오?"

늙수그레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회색 가사를 걸친 노화상이 나왔다.

"이 곳이 보원암입니까?"

"보원암은 정 반대편에 있소이다. 이 곳은 망정암(忘情庵)이외다."

그 말을 들은 진유걸은 전신의 맥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한밤중에 종은 왜 치셨습니까?"

노화상은 졸음이 오는지 하품을 크게 하며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소이다. 소승은 다만 주지스님께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외다."

진유걸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평소에는 그 시간에 종을 치지 않는단 말씀입니까?"

"그렇소이다."

노화상은 자꾸 꼬치꼬치 따지는 진유걸이 자못 귀찮다는 투였다.

진유걸은 노화상의 말에 이상한 점이 많음을 느꼈으나, 다락원 전대원주와의 약속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보원암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노화상은 반대쪽을 가리켰다.

"보원암은 저리로 쭉 가야 합니다만, 여승(女僧)들만 기거하는 곳이라 시주를 받아 주지는 않을 게요."

"어쨌든 약속을 했으니 가야겠소이다."

진유걸이 몸을 돌리자 노화상이 그를 배웅하며 말했다.

"시주, 조심해서 다녀오시구려."

노화상의 말에 진유걸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보원암까지 갔다가 왜 다시 돌아온단 말인가? 이상한 스님이로군."

진유걸은 다시 오던 길을 밟아 더듬더듬 산길을 내려갔다.

2

보원암.

모두가 잠든 듯 사찰은 고요한 정적에 빠져 있었다.

이 때 돌연.

휘익-!

일진의 옷자락 스치는 소성과 함께 한 인영이 뜰에 사뿐히 내려섰다.

전신에서 요사스런 기운이 뻗치는 궁장여인.

그녀는 바로 진유걸과 이 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다락원 전대원주였다.

"누구 없느냐?"

내공이 실린 그녀의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지붕 위의 기왓장이 와르르 쏟아져 내릴 지경이었다.

잠시 후, 몇몇 여승이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쫓아 나왔다.

그 중 나이가 제일 들어 보이는 여승이 이 한밤에 나타난 불청객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미타불… 부인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납셨는지요?"

중년미부는 그 여승을 주시하며 싸늘하게 외쳤다.

"여기에 한 청년이 오지 않았느냐?"

"부인이 누구를 찾아오셨는지 알 수 없으나, 이 곳은 비구니들만이 기거하는 성지(聖地)입니다. 청년이라니요? 당치도 않으십니다."

중년미부는 냉소를 흘렸다.

"흥! 그와 분명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이 시각이라면 여기에 오고도 남을 시각이야."

늙은 여승은 만면에 곤혹스런 빛을 떠올렸다.

"부인의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그를 숨겨 놓았다는 말씀입니까?"

"이제야 바른 말을 하는군. 앙큼 떨지 말고 그 자를 어서 내놓아라."

여승들은 그녀의 어거지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일인가?

이번에는 제법 용기 있는 젊은 여승이 나섰다.

"부인께서는 그 사람을 잘못 찾아온 듯싶습니다. 이 곳에 어찌 외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여인이 아닌 남자가……."

그러나 이미 음심(淫心)으로 탕기(蕩氣)가 넘쳐흐르는 중년미부의 귀에 그런 소리가 들려 올 리 만무했다.

"안 되겠다. 내가 직접 이 안을 샅샅이 살펴봐야겠다."

중년미부는 몸을 돌려 법당(法堂)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여승들이 화들짝 놀라며 우르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 됩니다. 신성한 법당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중년미부의 눈썹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네년들은 모두 죽고 싶단 말이냐? 냉큼 비키거라!"

그녀의 살벌한 목소리에 여승들은 머리끝이 쭈뼛 서는 공포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여승들이 아니었다.

"아미타불… 절대로 물러설 수가 없소이다. 부인은… 아악!"

늙은 여승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중년미부에게 일 장을 얻어맞고 시뻘건 피를 쏟아 내며 삼 장 밖으로 날아가 곤두박질쳤다.

"아앗!"

"엇! 주… 지… 스님!"

여승들은 크게 부르짖으며 주지스님에게로 몰려갔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피를 꾸역꾸역 쏟아 내는 그녀의 몰골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여승들이 그녀의 시신을 붙잡고 통곡할 때, 중년미부는 법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법당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다만 정중앙에 놓여 있는 부처가 자비로운 미소를 띄운 채 그녀를 주시하고 있을 뿐.

중년미부는 불상(佛像)을 힐끔 살피며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어리석은 것들! 저 따위를 믿고 본 원주에게 대항하다니……."

중년미부는 진유걸을 찾지 못하자 내심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녀는 주지스님을 에워싼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승들을 보자 더욱 화가 솟구쳤다.

"이얏-!"

그녀의 쌍장에서 무서운 기류가 쏟아졌다.

슈우웅-!

마치 우레가 치는 듯한 음향이 울리며 태산 같은 경기가 휘몰아쳤다.

그것은 정녕 엄청난 해일(海溢)을 동반한 폭풍(暴風)이었다.

무공을 모르는 여승들이 어찌 그 무시무시한 장력을 피할 수 있겠는가?

파파팍-!

고막을 찢어 놓을 듯한 굉음이 터지는 순간, 단말마의 절규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아악……!"

"으악!"

"으아아악……!"

여승들은 피분수처럼 내뿜으며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갈가리 찢겨져 휘날리는 여승들의 옷자락에는 혈육(血肉)이 묻어 있어 보기에도 끔찍하였다.

중년미부의 독수를 간신히 벗어난 여승들은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며 염불을 외웠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러나 일단 마수를 뻗친 중년미부는 손속에 인정을 두지 않았다.

"에잇! 가거라!"

그녀는 대성일갈을 터뜨리며 연신 장력을 사납게 휘몰아쳤다.

여승들은 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으윽!"

"아악!"

불문의 성역(聖域)인 보원암은 금세 지옥(地獄)의 혈육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피 냄새가 역겹게 코를 찔렀고, 절단된 팔다리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정녕 공포스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삽시간에 여승들을 죽음 속으로 몰아넣은 중년미부는 아무 느낌도 없는 듯 중얼거렸다.

"그 놈이 뭔가 눈치를 챈 게 아닐까? 실컷 즐긴 뒤 죽이려고 했는데…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군. 궁주님이 눈치채기 전에 어서 돌아가야겠다."

그녀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몸을 날려 사라졌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참상은 실로 끔찍하였다.

너무도 잔인한 광경에 놀랐는지 달빛조차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보원암 앞으로 한 인영이 나타났다.

"휴, 이제야 겨우 도착했군. 원주가 그 새 왔다가 돌아가지나 않았는지……."

진유걸은 걱정이 되어 급하게 문을 두들겼다.

쾅- 쾅- 쾅-!

그러나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열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가볍게 담을 넘어갔을 텐데……."

주위를 휘휘 둘러보자 암자 옆에 한 그루 고목나무가 서 있었다.

진유걸은 잠시 망설이다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보원암은 바늘이 떨어져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에 싸여 있었다.

"모두 잠이 들었나 보군."

그는 보원암 안으로 내려선 뒤 조심스럽게 법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때, 진유걸의 발에 무언가가 밟히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뿌드득-!

"이게 뭐지?"

진유걸은 발에 밟힌 것이 뭔지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순간.

"으악!"

그는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와 함께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피로 얼룩진 팔!

그것은 분명 절단된 사람의 팔이 아닌가?

진유걸은 그제서야 사찰 내에 피 냄새가 진동함을 느꼈다.

"대체… 누가… 이토록 끔찍한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진유걸은 벌떡 일어서며 주변의 장내를 훑어보았다.

아, 처절무비한 참상!

사찰 안은 피를 쏟은 채 죽어 간 여승들의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진유걸은 이 믿지 못할 사실에 넋을 잃고 말았다.

이 때.

"으음……!"

시체들 속에서 미약한 신음 소리가 들려 오는 게 아닌가?

진유걸은 얼른 그쪽으로 다가갔다.

한 명의 여승이 피투성이가 된 채 신음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진유걸은 얼른 그녀의 머리를 부축하여 물었다.

"스님!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여승은 꺼져 가는 눈동자를 간신히 뜨며 들릴 듯 말 듯 희미하게 말했다.

"중년… 여… 인이… 젊은 분을 찾… 아 와서……."

"그 젊은이가 바로 나요. 내가 그 여인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소."

"그 여… 인은 공… 자와 관… 계를 맺은 뒤 죽이… 려고… 했다고… 말했… 어요. 그런… 데 공자가 없어… 수포로 돌아갔다고… 으헉!"

그녀는 끝내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일순, 진유걸은 뒤통수를 호되게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망정암의 종 소리… 그 종 소리가 나를 살렸구나. 종을 치도록 지시한 망정암의 주지스님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예측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어. 그 분이 누굴까? 그 분이 누구이건간에 분명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뇌리 속에는 노화상이 했던 말이 스쳐 갔다.

- 시주, 조심해서 다녀오시구려.

진유걸은 벌떡 일어서며 망정암이 있는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진유걸이 망정암을 향해 힘을 다해 달리고 있을 때.

삘리리리릴리- 삘리릴리-!

어디선가 구성진 피리 소리가 흘러 나왔다.

마치 서로를 깊이 사모(思慕)하는 정인(情人)들이 이별(離別)을 서러워하는 듯,

혹은 피를 나눈 부모형제(父母兄弟)의 죽음을 슬퍼하는 듯한 곡(曲)이기도 했다.

'이상한 일이군. 이 깊은 산중, 야심한 시각에 웬 피리 소리란 말인가?'

피리 소리는 망정암을 향해 가까이 갈수록 더욱더 가깝게 들려 왔다.

얼마를 더 갔을까?

마침내 피리를 불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빛 바랜 잿빛 장삼을 걸친 사순 가량의 중년인.

각을 이룬 얼굴에 칼날 같은 눈썹, 음침하게 자리잡은 독사 같은 눈…….

전체적인 인상이 대체로 험악해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진유걸은 인적이 드문 산중, 그것도 깊은 밤중에 그런 인물을 대하자 조금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중년인은 피리 부는 일에 열중할 뿐, 진유걸이 지나가도 아무런 시비도 걸지 않았다.

진유걸은 간신히 망정암에 도착한 뒤 숨을 몰아쉬었다.

"스님, 계십니까?"

진유걸이 문을 미는 순간,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아까는 잠겨져 있더니… 내가 올 줄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인가?'

"스님, 주지스님!"

"어휴, 오늘은 왜 이리들 귀찮게 군다지?"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까 봤던 노승이 걸어 나왔다.

노승은 진유걸을 보더니, 아는 척을 하였다.

"역시 시주였구려. 과연 주지스님의 선견지명은 알아주셔야 한다니까."

"주지스님께선 어디 계십니까?"

늙은 노승은 안타깝다는 듯 혀끝을 찼다.

"쯧쯧, 조금 늦으셨구려. 주지스님은 방금 전 어디론가 떠나셨소이다. 걸음이 원체 느리신 분이니 빨리 따라가면 만날 수 있을 것이오."

진유걸은 한숨을 내쉬며 주지스님이 내려간 곳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라지는 진유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노승의 얼굴에는 웬일인지 짙은 번민(煩悶)이 깔려 있었다.

진유걸이 가고 얼마나 지났을까?

노승이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스님, 죄송하오만 이쪽으로 온 젊은이 한 명을 보지 못했습니까?"

어둠 속에서 갑자기 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노승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언제 나타났는지 잿빛 장삼에 죽적(竹笛)을 든 중년인 한 명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쩐 일인지 살기가 내비치고 있었다.

늙은 화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시주께서는 어인 일로 이 야밤에 그 젊은이를 찾으시는지요?"

"그 놈은 살인마(殺人魔)요. 방금 내가 보원암에서 오는 길인데, 보원암 여승들이 모두 그 놈에게 참변을 당한 뒤였소. 그러니 지체 말고 그 놈이 어디 갔는지 알려 주시오."

그는 매우 격분한 듯 움켜쥔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늙은 화상은 너무 놀라 입을 딱 벌렸다.

"헉! 그… 그럴 수가? 그 젊은이가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아미타불… 부처님의 은덕으로 이 늙은 목숨이 간신히 살아났군."

"어서 그 살인광(殺人狂)이 간 곳을 알려 주시오."

중년인의 재촉에 늙은 화상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바로 저 길로 갔소이다."

그가 가리킨 곳, 그 곳은 진유걸이 간 곳과는 정반대 방향이 아닌가?

도저히 그 노승의 심중을 알 길이 없었다.

중년인은 싸늘한 웃음을 흘리며 노승이 가리킨 곳을 향해 훌쩍 몸을 날렸다.

"기다려라, 살인마! 본 광혼객(狂魂客)이 네놈을 응징하러 가마."

광혼객(狂魂客)!

그는 십대기인 중 한 명으로 잔인하고 냉혹하기로 소문나 있는 고수가 아닌가?

또한 그는 십대기인 중에서도 귀수도부(鬼手屠符) 모용비(毛容琵)와 더불어 젊은 편에 속했다.

노승은 사라지는 광혼객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인간은 정해진 운명(運命)의 길을 걷는 법. 업보(業報)와 윤회(輪廻)는 인간사의 법칙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니, 어찌 작은 소견(所見)으로 이 이치(理致)를 깰 것인가? 아미타불… 그나저나 광혼객은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군."

광혼객을 알고 있는 이 평범해 보이는 노승.

도대체 이 노승은 누구란 말인가?

진정 알 수 없는 노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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