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강호랑군 제2권(전3권)
지은이: 유소백
- 차 례 -
第一章 다락원(多樂院)
第二章 사라진 무공(武功)
第三章 천하도(天下圖)
第四章 기녀(妓女) 금화란(琴花蘭)
第五章 해동거사(海東居士)
第六章 탈출(脫出)
第七章 철영보(鐵英堡)
第八章 실명(失明)
第九章 밝혀진 음모(陰謀)
第十章 친구에게 내 눈을 주시오
第十一章 되찾은 기억과 잃어버린 기억
第十二章 불마성(佛魔城)
第一章 다락원(多樂院)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
예로부터 이 곳은 경관(景觀)이 수려할 뿐 아니라 문물(文物)과 해운(海運)의 요충지로도 유명하였다.
장강 이남에서는 이 항주성(杭州省)과 호남성 동정호(洞庭湖), 강소성(江蘇省) 금릉(金陵)을 가리켜 강남삼절경(江南三絶景)이라 불렀다.
아름다운 곳이니만큼 거리는 늘 풍류객(風流客)과 상인(商人)들로 북적거렸다. 그런 까닭에 주루(酒樓)나 기방(妓房)이 가장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항주의 명소(名所)로 알려진 곳이 있었으니…….
다락원(多樂院).
항주성 내에서도 가장 뛰어난 절경을 갖춘 거대한 장원이었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주루와 기방, 객잔의 형태를 모두 복합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기원(妓院)이었던 것이다.
천하의 미인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고, 시(詩)와 음률(音律)이 선음(仙音)처럼 흐르며, 온갖 산해진미(山海珍味)와 백과향주(百果香酒)가 산적해 있는 곳, 그야말로 천상(天上)과도 같은 곳이었다.
자연 수많은 영웅호걸(英雄豪傑)과 부호(富豪),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이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곳은 대가가 비싼 편이라, 가산(家産)을 탕진한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문 앞에는 다락원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로 항상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늦가을의 햇살이 따뜻하게 대지를 감싸는 사시경(巳時更).
두두두두-!
돌연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한 떼의 인마가 당당한 기세로 등장했다.
맨 선두에는 흡사 전국시대의 장비(張飛)를 연상케 하는 인물이 말을 몰고 있었다.
위맹스러워 보이는 용모에 유성추를 꿰차고 있는 사내.
그는 바로 비영신성(飛影神星) 위종출(偉鐘出)이었다.
하북성 청원에서부터 황금 오백 관을 호송해 온 비표표국의 총표두.
그의 뒤로는 팔두마차와 표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들의 행렬로 미루어, 연운에서 항주까지의 뱃길에는 아무런 일도 없은 듯했다.
이 때 팔두마차의 뒤편에서 말을 몰던 비표사웅 중 첫째인 비추섬영(飛追閃影) 곽영상(郭英相)이 위종출의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총표두! 풍운서생(風雲書生)과 백 총표두는 어디 가신 겁니까?"
"글쎄요? 하지만 그 분은 약속된 시각까지 반드시 돌아오실 거요."
"총표두께서는 풍운서생을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그의 질문에 위종출의 입가로 가벼운 미소가 스쳐 갔다.
"그는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소. 필시 유명한 고인의 제자라 생각되오."
"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겠소? 우리 임무는 어디까지나 이 물건을 무사히 목적지에 갖다 주기만 하면 되는 거요."
비추섬영 곽영상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지만… 그런데 어째서 이것을 다락원으로 운송하라고 하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그 말에 위종출 역시 동의를 표했다.
"그것은 본인도 마찬가지요. 하지만 곧 밝혀지겠지요."
"총표두께서는 혹 그의 내력에 짐작가는 것이 없습니까? 당금 무림에서 강북녹림맹주인 비도혈객(飛刀血客) 왕우극(王宇極)을 쓰러뜨릴 인물은 그리 흔치 않으니까요."
그러자 비영신성 위종출도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곽 표두는 어찌 생각하오?"
"본인이 보기엔 그의 정체가 광혈풍(狂血風), 아니면 탈혼사자(奪魂使者)라 생각됩니다."
위종출 역시 그렇게 짐작하고 있던 터라 덤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살(二殺) 중 하나라… 그 정도의 실력이면 그럴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니, 절대 발설치 마시오."
그 때 곽영상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드디어 다락원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저기를 보십시오."
위종출이 안력을 돋구어 바라보자, 한 채의 웅장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일순, 위종출의 목소리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이제 불과 오십여 장밖에 남지 않았다. 모두들 힘을 내라!"
"으랴랏-!"
두두두두두-!
오랜 기간, 표물 호송에 시달린 표사들은 객잔을 보자 힘이 솟구쳤다.
잠시 후, 표사들은 황궁의 입구 같은 다락원 정문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그 곳에 몰려 있던 중인들은 때아닌 표물마차에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졌다.
"비표표국과 청원표국이라면 하북성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무척 멀리까지도 왔군."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키는 걸 보니 대단히 중요한 물품인가 보지?"
사람들이 표사들에 대해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
그그긍-!
다락원 정문에 그려진 아름다운 한 쌍의 봉황(鳳凰)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금방까지 웅성대던 중인들이 모두 입을 다문 채 흥분된 시선으로 정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들이 이렇게 모여 있단 말인가?'
비영신성 위종출은 의아한 얼굴로 정문 쪽을 주시하였다.
일순, 다락원 안에서 다섯 명의 아리따운 여인들이 걸어 나오는 게 아닌가?
마치 구름을 밟고 나오듯 가볍게 걸어 나오는 여인들은 매미 날개처럼 얇은 나삼(羅衫)을 입고 있어, 여인의 비경(秘景)을 가린 천 조각과 젖가리개가 보일 락 말 락했다.
정녕 사내들의 가슴에 불을 지를 만큼 농염하고 유혹적인 자태가 아닐 수 없었다.
사람의 혼백(魂魄)을 앗아 갈 듯한 교태로운 걸음걸이,
비단 물결처럼 굽이치는 매혹적인 몸매,
천상의 선녀(仙女)들을 방불케 하는 화용월태(花容月態).
모두가 하나같이 전설 속에 나오는 천상의 항아(姮娥) 같았다.
그 중 특히 중앙에 있는 여인은 파란 눈동자를 가진 늘씬한 팔등신(八等身)의 미녀였다. 더욱이 그녀의 머리카락은 붉은빛을 띠고 있어 더욱 이국적인 멋을 풍겼다.
다섯 여인은 군웅들이 모여 있는 공지 앞에 멈춰 섰다.
모여선 중인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다섯 여인들을 주시했다.
황금 마차를 호위해 온 표사 일행들도 깊은 호기심을 나타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비표사웅 중 비천검객(飛天劍客) 곽항(郭恒)이 물었다.
"형님, 대단한 미인들이군요. 그런데 저 여인들이 무엇 때문에 나온 걸까요?"
비연수(飛連手) 곽구(郭究) 역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글쎄, 두고 보면 자연 알게 되겠지."
이 때, 다락원을 나선 여인들 중 이국 미녀가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리고는 꾀꼬리가 지저귀는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다락원을 찾아 주신 빈객 여러분께 소녀 아홍(娥紅)을 비롯한 사군자(四君子)가 인사드리옵니다."
이로 미루어 중앙의 미녀는 다락원에서 대단한 신분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중앙의 미녀, 즉 아홍은 천천히 두루마리를 읽기 시작했다.
"하남성(河南省) 영주현(領州顯)에서 오신 금창연 외 세 분 일행!"
순간.
"와아… 됐다, 됐어!"
군웅들 중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네 중년인이 춤을 추듯 기뻐하며 한쪽으로 나섰다.
그들은 모두 살이 찌고 비단 의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름난 부호들인 듯했다.
"사천성(四川省) 무산협(巫山峽)의 도수인(屠手忍) 외 두 분 일행!"
계속해 아홍이란 미녀의 목소리가 흘러 나올 때마다 중인들은 환호를 지르는가 하면 한숨을 내쉬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아홍이란 여인은 지금 다락원으로 들어갈 인물들의 명단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위종출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내저었다.
'은자를 내는 데도 순서가 필요하다니… 이거 우리도 한참을 기다려야 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군.'
그가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아홍의 낭랑한 음성이 퍼져 울렸다.
"마지막으로 무림에서 영명을 떨치고 계시는 신주사걸(新州四傑) 일행! 이상입니다."
그녀의 외침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불평하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칫, 이번에도 틀렸군. 벌써 사흘짼데……."
"겨우 사흘 가지고… 저기 서 있는 친구는 한 달이 넘었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또 하루를 묵어야 하잖아?"
그러나 특이한 점은, 모두 불평만 늘어놓았지 정작 포기하고 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위종출의 눈으로 백의경장을 차려 입은 네 인물이 들어왔다.
하나같이 기골(氣骨)이 장대하고 웅후한 인상을 풍기는 청년들이었다.
그들의 옆구리에는 삼 척에 달하는 장검들이 걸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검술에 조예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신주사걸(新州四傑).
각기 문파를 달리하고 있는 이들이 만난 것은 이 년 남짓.
정파무림의 후기지수(後起之秀)들로 개개인 모두 특출난 재간을 지니고 있었다.
공명서생(孔明書生) 제갈후(諸葛厚).
그는 늘 자신을 제갈량(諸葛亮)의 후손이라 내세운다. 그만큼 그의 두뇌는 탁월하고 판단력이 빠르며 기지가 영민하다.
신주사걸 중 중심 인물로, 모든 행동은 그에 의해 결정된다.
침착한 성격의 제갈후는 소림파 속가제자이며 칠십이 종 절예 중 사 할 가량을 터득한 영재(英才)이다.
매화절검(梅花絶劍) 용호표(龍虎豹).
소문파 매화보(梅花堡)의 소보주인 그는 호탈한 성품(性品)에 의기가(義氣)가 넘치며, 절강성에서 벌어진 한 비무대회(比武大會)에서 우승을 석권한 바 있다.
그의 독문절기인 매화칠식(梅花七式)은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검초이다.
무영객(無影客) 황보성휘(皇甫星輝).
화산파(華山派) 제자로 과묵하고 냉혹한 인물로 특히 그의 경공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주로 타파의 신법에 관해 관심을 많으며, 본문(本門) 무공도 상당한 경지에 이른 고수이다.
철웅거한(鐵雄巨漢) 백궁(白弓).
곤륜파(崑崙派) 출신으로 장력에 대한 조예가 상당히 깊다.
보통 때는 유순하고 느긋하지만 일단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으로, 신력(神力)이 항우(項羽)를 능가한다.
특히 그의 철웅뢰전장(鐵雄雷電掌)은 소문이 날 정도로 그 위력이 대단하다.
위종출이 신주사걸에게 눈길을 주고 있을 때, 호명을 당한 이십여 명의 인물이 아홍의 뒤를 따라 다락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 때 돌연.
"멈추시오!"
커다란 외침과 함께 두 필의 말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뽀얀 황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마상에는 각기 노인과 청년이 앉아 있었다.
신주용검(神州龍劍) 백순혁(白淳赫)과 풍운서생으로 역용한 진유걸(陳儒傑)이었다.
그는 안휘성 만화장을 떠난 후 곧바로 항주로 와서 비표표국과 청원표국 일행들을 만난 후, 다락원으로 갈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은 청원표국의 총표두 신주용검 백순혁과 동행하여 어디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는 중인들 틈을 헤치며 아홍이란 여인 앞으로 다가갔다.
"빈객께서는 소녀에게 어떤 용무가 있으신지요?"
진유걸은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가서 원주에게 전하시오. 하룻밤의 사랑을 위해 황금 오백 관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있다고."
순간.
"옛?"
"아니, 그럴 수가?"
"저 사람이 완전히 돌았군."
아홍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기절할 듯 놀라 경악을 터뜨렸다.
하룻밤의 사랑을 위하여 황금 오백 관을 내다니?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진유걸의 광언(?)에 표사 일행도 까무라칠 듯 놀랐다.
설마 그가 황금을 이런 곳에 탕진하려 할 줄이야?
그것도 단 하룻밤의 잠자리를 위해서.
군웅들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본 공자의 말을 의심하는 거요? 그렇다면 좋소!"
진유걸은 말과 함께 몸을 돌렸다.
그러자 아홍이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그게 아닙니다, 공자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렇다면 어서 원주에게 이르시오."
아홍은 봄날처럼 부드럽고 은은한 웃음을 흘리며 호명을 당한 이십여 명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 사죄의 말씀를 드려야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죄송하지만 다음 기회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흑의에 동추(銅鎚)를 찬 험상궂게 생긴 장한 하나가 나서며 진유걸에게 욕설을 퍼부어 댔다.
"이 놈아! 본좌는 양자강 일대를 주름잡고 계시는 장강악살(長江惡殺)이란 어르신이다. 네놈은 아무리 어리기로서니, 경우도 모른단 말이냐?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게 눈에 보이지도 않느냐?"
그가 거칠게 나오자 위종출과 백순혁은내심 긴장하였다.
그들은 진유걸의 가공스런 무학을 직접 목격한 바 있지 않은가?
그러나 진유걸의 태도는 그들의 상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 말았다.
"형장! 정녕 죄송스럽게 됐소이다. 만약 형장께서 이해해 주신다면 소생으로 인하여 피해 보시는 분에게 모두 배상을 해 드리도록 하겠소이다."
이 때, 신주사걸 중 첫째인 공명서생 제갈후가 나섰다.
"우리가 양보하는 게 나을 것 같소이다. 상대는 다락원을 통째로 살 수도 있는 보화를 가지고 온 인물. 어찌 그런 사람과 상대가 되겠소? 여지껏 기다려 왔는데, 하루쯤 더 못 기다릴 것도 없소."
그가 담담히 말하며 물러서자, 신주사걸의 나머지 세 명도 그 뒤를 쫓았다.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는 그들이 아무 말 없이 물러나자, 호명을 당한 이십여 명 역시 억울하기는 했으나 더 이상 나설 수 없어 모두 분분히 흩어져 갔다.
잠시 후, 진유걸 일행은 아홍의 안내를 받으며 다락원 안으로 들어섰다.
일순, 안으로 들어선 일행은 마치 선경(仙境)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받았다.
정성스럽게 가꾸어진 정원(庭園)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늘에는 여러 종류의 새들이 쉬지 않고 지저귀며 날아다녔고, 가지각색의 화초(花草)들은 향기를 물씬물씬 풍겨 내고 있었다.
실로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황홀경의 극치(極致)이며, 경탄성이 절로 흘러 나오는 절경(絶景)이 아닌가?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구중궁궐(九重宮闕)처럼 화려한 고대광실(高臺廣室) 같은 누각(樓閣)이 즐비하다는 것이었다.
금빛 찬란한 전각(殿閣)과 누각들이 벽돌색의 기와를 구름처럼 늘어뜨린 채 그 위용을 자랑하였다.
별천지(別天地).
정녕 다락원은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다.
진유걸은 갈림길에서 표사 일행들과 헤어졌다. 그들은 사군자라 불린 여인들을 쫓아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아홍은 진유걸을 누각으로 데리고 갔다.
연못 중앙에 형성된 백화난만(百花爛漫)의 가산(假山) 위에 세워진 누각은 정녕 신비스러울 정도로 화려했다.
누각으로 가는 원형의 교각(橋脚)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은은한 비취색을 띠고 있었고, 교각 하나하나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 아래 맑은 연못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평화롭게 노닐고 있었다.
진유걸은 교각을 건넌 후 곧바로 누각 안으로 들어섰다.
"공자께서는 이 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원주께서 곧 이리로 납실 겁니다."
아홍은 공손히 고개를 숙인 후 총총히 물러갔다.
누각 안은 지극히 화려했다. 바닥은 하늘색 융단이 깔려 있었고, 장방형의 탁자 위에는 화병이 놓여 있었다.
진유걸은 의자에 몸을 묻으며 생각에 잠겼다.
'과연 이 곳 원주가 서혈천왕(西血天王) 혈영광군(血影狂君)이 찾고자 하는 여인과 북귀천왕(北鬼天王) 귀독요후(鬼毒妖侯)의 거처를 알고 있을까? 원주의 정체가 점점 더 궁금해지는군.'
그는 문득 중조산 절애 아래 위치한 망담수(亡潭水)에서 비참한 생을 영위하던 서혈천왕(西血天王) 혈영광군(血影狂君) 마우성(馬宇星)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분은 지금도 내가 세 가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시겠지? 그 분을 위해서라도 어떻게 하든지 성공해야만 한다."
진유걸이 독백을 하듯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무엇인지 몰라도 각오가 대단하시군요, 공자!"
옥쟁반에 은구슬이 구르는 듯한 교성이 들려 왔다.
진유걸이 고개를 돌린 순간, 세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세 여인 모두 화려한 궁장 차림에 면사(面絲)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중앙에 있던 여인이 향기를 뿜어 낼 듯한 황홀한 옥음을 발했다.
"저는 다락원의 원주 아진(我眞)이라 하옵고, 이쪽은 시녀(侍女)들인 향연(香燕)과 향옥(香玉)이라 합니다."
"원주를 뵙게 되어 무척 영광이외다."
진유걸이 일어서며 인사를 하는 순간, 원주 옆에 서 있던 향연이라는 여인이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는 게 아닌가?
하지만 다들 인사를 나누느라 그녀의 변화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진유걸은 향연과 향옥을 물리친 후 다락원주 아진에게 물었다.
"혹 원주께서는 사대천왕에 관한 것을 알고 계시오?"
아진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소녀는 그 일에 관해서는 잘 모릅니다. 공자님께서는 그 일 때문에 오신 것입니까?"
"그렇소! 본인은 그것을 묻고자 불원천리(不遠千理) 달려온 것이오!"
"그렇다면 전대 원주님이 알고 계실지 모르니 그 분을 만나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아진은 시비를 불러 지시를 내렸다.
"지금 곧 전대 원주님께 황금 오백 관의 주인이 만나 뵙잔다고 전하거라."
시비가 나간 뒤 아진은 진유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무림인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그 중 한 명에게 특히 더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진유걸은 그녀의 말에 호기심을 느꼈다.
"원주 같은 분의 이목을 끄는 영웅준걸(英雄俊傑)이 누군지 궁금하외다."
"호호… 너무도 유명하신 분이라 공자님도 잘 아실 거예요."
"……."
"그 사람은 바로 왕실(王室)의 수연 군주님과 애정 도피를 한 천하의 대살성 광혈풍입니다!"
순간, 진유걸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설마 그녀의 입에서 자신의 별호가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라 몹시 당황했던 것이다.
"그… 그래요?"
아진의 얼굴은 면사로 가려져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소녀는 비록 그가 살성이라 할지라도 존경하고 흠모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니까요."
진유걸은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지 어떤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 여인이 혹 나의 정체를 간파한 것은 아닐까? 태명회(太命會)와 다락원이 무슨 관계를 맺고 있기라도……?'
아진은 진유걸의 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
"소녀는 자격도 없으면서 그런 분과 감히 자리를 함께하는 꿈을 가끔씩 꾸곤 한답니다."
그 때 밖에 나갔던 시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원주님! 대주(大主)님께서 찾으십니다."
아진과 진유걸은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분이 곧 나오실 겁니다."
"알겠소이다."
아진은 고개를 숙여 보이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진유걸은 주수연(朱洙淵)과의 일이 떠올라 우울해졌다. 그 때 진유걸의 마음을 읽은 듯 향옥이 주안상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몹시 시장하던 참이었는데… 잘 됐소."
"제가 잠시 공자님의 벗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향옥은 그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술잔에 백화주를 그득 따라 바쳤다.
코를 찌르는 향기에 진유걸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말았다.
"커어! 정녕 향기로운 미주(美酒)로다. 내 비록 술은 즐기지 않지만 이토록 향긋하다면야……."
그는 가슴에 어린 핏빛 살기를 잊으려는 듯 또다시 술잔을 내밀었다.
향옥은 안주를 한 움큼 집어 진유걸의 입에 넣어 주며 다시 술을 따라 주었다.
한 잔, 두 잔…….
어느덧 진유걸은 한 병의 술을 모두 비우고 말았다.
"그런데… 원주가 왜 여태 안 오는 거지?"
진유걸은 은근히 취기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 때 홀연.
"공자님을 이토록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정녕 송구스럽소이다."
나긋나긋한 음성과 함께 궁장 차림의 중년미부가 들어섰다.
풍만한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삼십대 여인.
갸름한 얼굴에 초생달처럼 새초롬한 눈썹, 그 밑으로 요염한 기운이 담긴 반짝이는 눈동자, 시원스럽게 솟은 콧날, 사람을 뇌쇄시킬 듯한 붉은 입술…….
그 아래 이어진 목덜미 선은 불룩한 젖가슴과 함께 육감적으로 보였으며, 움직일 때마다 미묘하게 흔들리는 둔부는 보는 이를 질식시킬 듯했다.
교태가 극에 달한 요부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중년미부가 바로 전대 원주인 듯했다.
진유걸은 그녀의 요염한 눈길을 의식적으로 피하며 입을 열었다.
"참으로 뵙기 힘들군요. 황금을 오백 관씩이나 가져왔는 데도 말이오."
중년미부는 사람을 뇌쇄시킬 듯한 미소를 머금으며 향옥에게 물러가라는 눈짓을 했다.
향옥이 물러간 뒤, 중년미부는 의자에 걸터앉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혈영광군의 부탁을 받고 오셨는지요?"
진유걸은 섬광 같은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의 짤막한 대답에 중년미부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공자님께 먼저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진유걸은 그녀의 태도에 의혹을 느꼈다.
"무슨 말이오?"
중년미부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잔잔히 깔렸다.
"수연 군주님은 공자님을 배신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지금 이 곳에 머물고 계십니다."
순간, 진유걸은 커다란 쇠뭉치로 머리를 맞은 듯 정신이 아찔하였다.
그는 어찌나 경악했던지 벌떡 몸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그… 그럴 리가?"
그 바람에 체내의 한 구석에 몰아 두었던 백화주의 취기가 한꺼번에 폭발하고 말았다.
금세 정신이 몽롱해지고 천지가 빙글빙글 도는 듯한 느낌과 함께 진유걸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태워 버릴 듯 후끈거렸다.
진유걸은 지면이 폭삭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