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章 마령신의(魔靈神醫)
1
철목산(鐵目山).
강소성 일대에 있는 산으로 양의 창자 같은 미로와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둘러싸인 고산(高山)이었다.
진유걸은 녹림 무리들의 추격을 피하느라 길을 재촉하다 보니, 으슥해진 후에야 철목산의 험로를 걷게 된 것이다.
그는 매우 먼 거리를 걸어온 듯, 전신이 온통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벌써 이틀이 지났구나. 그 동안 상세가 많이 호전되어 이제는 오 성 가량 진력이 회복된 것 같군."
진유걸은 중얼거리며 널찍한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상처에 약도 바를 겸, 좀 쉬었다 가야겠다."
진유걸은 남화룡이 준 화석단을 꺼냈다. 그는 이제껏 그 약을 복용하거나 찧어서 상처에 발라 왔던 것이다.
화석단을 대하자 문득 남화룡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 아우야, 너는 이 형의 남은 인생까지 대신 살아야 한다. 정의롭고 현명하게…….
이번에는 검존 사도천랑의 자애스런 모습이 떠올랐다.
- 얘야, 이 할미는 너와의 만남을 생애 중 가장 커다란 축복으로 여긴단다.
진유걸은 그들을 생각하자, 또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사도천랑과 남화룡은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진유걸에게는 평생을 사귄 사람들보다 더 깊이 정든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남화룡은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그를 살리지 않았던가?
두 사람을 생각하던 진유걸의 두 눈에는 어느 새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때.
"어마, 다 큰 사람이 눈물을 흘리다니……."
어디선가 향기가 뿜어질 듯한 여인의 교성이 들려 오는 게 아닌가?
진유걸은 흠칫 놀라며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당한 공력을 지닌 여인이군. 비록 일신의 내공을 완전히 되찾진 못했지만, 나의 청각을 벗어나다니… 혹 녹림 인물이 아닐까?'
"어느 분이 몰래 보고 있는 게요? 썩 나타나시오!"
그러자 이 장 가량 떨어진 암석 위에서 예의 그 아리따운 음성이 다시 흘러 나왔다.
"몰래 보다니요? 당신이야말로 남의 산에 양해도 들어오고서는……."
"그럼 이 산이 모두 당신 거란 말이오?"
"물론이에요. 당신은 이 상아(嫦娥)의 거처를 침범한 무뢰한이에요."
진유걸은 같이 대화를 나누고는 있었지만 조금 얼떨떨하였다.
'이 깊은 밤에 여인이 나타나 이 산이 자기 것이라고 어거지를 쓰다니… 실로 해괴한 일이로군.'
"당신은 너무 억지를 부리시는구려. 이 진모는 감당할 수가 없소이다."
"진모? 호호호… 당신 이름은 굉장히 우습군요. 진모라고?"
그녀의 엉뚱한 말에 진유걸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푸하하하… 낭자야말로 우습소이다. 내가 말한 뜻도 모르니 말이오."
그러자 암석 뒤에서 한 줄기 백영이 불쑥 치솟아 올랐다.
순간, 진유걸은 눈앞이 환해짐을 느꼈다.
그의 전면, 온통 하얀 백의로 차려 입은 소녀가 생긋 웃으며 나타난 것이다.
이제 십칠팔 세 정도 되었을까? 소녀는 이제 막 피어나는 꽃송이 같은 느낌을 주었다.
삼단 같은 머리채는 발끝까지 내려왔고, 발랄한 모습에는 건강미가 넘쳐흘렀다.
그녀는 중원의 미인들과는 달리 풋과일 같은 싱싱한 매력이 있었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걸치며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당신은 상아를 놀린 대가로 뺨을 한 대 맞게 될 거예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녀가 슬쩍 허리를 퉁겼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의 모습이 진유걸의 면전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아직 어린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절묘한 신법을 지녔구나.'
진유걸이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휙-!
일성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려 왔다.
"앗!"
진유걸은 얼떨결에 팔방풍영보를 신속히 전개했다.
비록 전력을 다할 수는 없었으나 원래 절륜한 신법이어서 그녀의 손속을 가볍게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묘령의 소녀는 진유걸의 예상보다 더욱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순식간에 진유걸의 뺨을 향해 날아왔다.
순간, 진유걸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끼며 뒤로 몸을 휙 꺾어 버렸다.
철판교법(鐵板橋法)!
이것은 무림인들이 금기로 여기는 수법이 아닌가?
더구나 진유걸은 천하를 진동시키던 광혈풍임에야…….
진유걸은 재빨리 신형을 바로잡으며 짓쳐들었던 소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노기와 수치로 인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소녀는 진유걸이 그토록 빠를 줄 몰랐다는 듯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낭패를 당한 진유걸로서는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낭자께서 이렇게 무분별한 행동을 하시니, 진모는 따끔한 교훈을 내려야겠소이다. 낭자께서 자초한 일이니 후회하지는 마시오."
그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신묘한 방위를 밟으며 쌍수를 찍듯이 날렸다.
휘익- 휙-!
이 금나술(擒拿術)은 강남에 자리한 소문파 철영보(鐵英堡)의 독문절예로 알려진 용호포박십이식(龍虎浦迫拾二式).
평상시의 반밖에 안 되는 진력으로 시전했으나 상당히 매서웠다.
"엇!"
소녀는 가벼운 외침을 터뜨리며 어깨를 좌우로 흔들었다.
순간, 진유걸은 소스라칠 듯 경악하고 말았다.
상아라는 소녀가 정확히 아홉 명으로 분리되는 게 아닌가?
정녕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묘한 신법이었다.
'앗! 이것은 삼백여 년 전 이미 실전된 환형분신대법(幻形分身大法)이 아닌가?'
진유걸은 상아라는 소녀가 펼치는 신법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아홉 개의 분신들은 진유걸을 조일 듯 사방에서 덤벼들었다.
진유걸은 그 때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가까스로 그녀의 공세를 피해 내야만 했다.
만일 그가 팔방풍영보를 터득하지 못했더라면 벌써 낭패를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반대로 그가 부상만 입지 않았다면, 소녀는 이미 진유걸의 금나수법에 걸려들고 말았으리라.
이들은 마치 철천지 원수들처럼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했다.
휘황한 월광 아래 신속히 몸을 날리는 이들 남녀는 얼핏 천계의 선남선녀가 널을 뛰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유걸은 실상(實像)과 허상(虛像)을 분별치 못하고 기력만 소모해 갔다.
얼마나 싸웠을까?
너무나 많은 진기를 소모한 진유걸은 어깨와 가슴이 찢겨져 나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체내의 기혈이 격탕되며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꼈다.
"허억!"
쿵-!
다음 순간, 그는 한 움큼의 핏덩어리를 쏟아 낸 채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잠시 후, 소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쓰러진 진유걸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상아는 진모라는 사람이 병에 걸린 줄은 정말 몰랐어."
그녀의 별빛같이 초롱초롱한 눈망울에는 금시 눈물이 고였다.
"진모! 당신이 깨어난다면 상아는 굉장히 기뻐할 거예요. 그리고 사과도 하겠어요."
상아는 문득 진유걸의 입가에 묻은 피를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기겁을 하였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피를 많이 흘리면 죽는다고 했는데… 이를 어쩌나?"
소녀는 얼른 진유걸을 안아 올렸다.
그 순간, 소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야릇한 감정으로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비록 진유걸을 안고 있었으나 그녀의 발길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상아의 친구라면 할아버지도 진모를 꼭 낫게 해 주실 거야."
그녀는 중얼거리며 몸을 날렸다.
휘익-!
옷자락 날리는 일진의 소성이 들린 후, 장내는 고요한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허공에 떠 있는 달빛만이 그들이 지나간 자취를 더듬으며 휘광(輝光)을 발하고 있었다.
2
진유걸은 어디선가 흘러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눈을 떴다.
그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자, 자신이 침상 위에 누워 있음을 알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실내는 정적이 감돌았으나 매우 우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바닥에 깔린 청색 융단과 중앙에 놓인 호피(虎皮) 가죽의 탁자,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청동 향로.
그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단 향내가 진유걸의 잠을 깨운 것이다.
한쪽 구석에 있는 서가에는 수많은 고서(古書)들이 빽빽한 수림처럼 들어차 있었고, 벽면에는 고상한 장식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중 한 곳을 본 진유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상로쌍검… 내가 지녔던 검을 저기에 걸어 놓다니…….'
그는 그제서야 산 속에서 만났던 소녀와 싸우다 자신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광혈풍이 야생녀 같은 소녀에게 패하다니… 이것을 누가 믿겠는가? 후후……!'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기이하게도 가슴과 어깨의 상처는 물로 씻어 내린 듯 말끔하였다.
다만 아랫배 단전(丹田) 부근이 가끔 따끔거릴 뿐이었다.
스르륵-!
이 때 방문이 열리며 노소(老少)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진유걸과 시비를 벌이던 백의소녀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가슴까지 내려오는 미염에 홍안(紅顔)이었으며 풍채가 좋았다.
한 쌍의 눈에서는 자애로운 빛이 흘렀고, 붉은 입술에는 윤기가 흘렀으며, 귀가 길게 늘어져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도감을 주었다.
노인은 진유걸을 보더니 무척 기뻐하였다.
"이제야 깨어났군, 젊은이!"
진유걸은 노인이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배가 미흡하여 고인의 선거(仙居)에 누를 끼쳤습니다."
노인은 활짝 웃으며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아닐세. 이게 다 내 손녀의 불찰이야. 그리고……."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진유걸의 얼굴을 심각하게 쳐다보았다.
진유걸이 의아한 얼굴을 하자, 노인은 의자에 앉으며 진유걸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젊은이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사실 자네의 체내에는 소혼산(消魂散)의 독성이 들어 있었네."
진유걸은 그의 뜻밖의 말에 기절초풍할 듯이 놀랐다.
"소혼산이라면 칠보단장(七寶斷腸), 일적봉후(一適封侯), 산혼수(散魂水) 등과 함께 손꼽히는 독약이 아닙니까?"
노인은 독에 대한 그의 지식에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걸 모르고 진기를 과다하게 낭비하여 그만 혼절하게 된 것이네. 그러나 체내의 독이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오장육보가 타 들어가 칠 일 내로 죽었을 걸세. 소혼산의 무서운 점은 거기에 있지."
"으음, 그럴… 리가……."
진유걸은 독에 중독당한 기억이 전혀 없었으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상아라는 소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진모는 할아버님의 말씀을 못 믿는 거예요?"
그 말에 노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소녀를 나무랐다.
"상아야! 너는 이 분에게 소협이라고 불러야 한다. 진 소협이라고……."
"진… 소… 협……?"
그녀는 나직하게 외워 본 후 진유걸을 한 번 바라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할아버지! 저는 진 소협의 약을 가져오겠어요."
진유걸은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내심 생각에 잠겼다.
'진정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소녀로군. 거기다 활발한 성격 하며… 마치 들에서 자란 한 떨기 백합 같은 소녀군.'
그가 상아에 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아직 철부지라오. 인가와 떨어져 살다 보니 제대로 예절도 배우지 못하고……."
노인의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 오자, 진유걸은 그제서야 실수를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
"노부가 보건대, 자네는 정파의 협사가 분명한 것 같군. 그런가?"
진유걸은 움찔 놀라며 어설픈 미소를 띄웠다.
"후배의 어떤 점을 보고 그렇게 느끼셨는지요?"
"두 가지지. 첫째는 자네의 몸에 난 도상일세."
"도상이오?"
"기실 소혼산의 독성은 도에 발려져 몸 속으로 침투했으니, 자네를 공격한 것은 분명 사파의 무리들이 분명하지 않겠나?"
그제서야 진유걸은 모든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아, 흑시삼수라의 귀두도에 소혼산이 발라져 있었구나. 그 때문에 진원이 제대로 모아지지 않았던 거군.'
"그렇군요.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인지요?"
"자네는 상아와 상대하면서도 검을 사용하지 않았네. 이런 것으로 미루어, 소협이 정파 인물임을 알 수 있었네."
진유걸은 문득 궁금한 듯 물었다.
"노선배님! 후배가 알기로는 소혼산에 중독될 경우 극히 위험하다고 하던데… 저는 아직 살아 있으니 어찌 된 건지요? 특히 공력을 무모하게 끌어올려 전신에 퍼진 상태에서는 아무도 살릴 수가 없다고 하던데……."
"그렇다네. 그렇게 된 상태라면 누구도 살리기가 힘들지."
진유걸은 노인의 말에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혹 선배님께서는 십대기인 중 한 분이신 마령신의(魔靈神醫) 남궁 노선배님이 아니신지요?"
순간.
"아니? 소협이 어떻게 노부를 알아보는가?"
그가 마령신의 남궁태협임을 시인하자, 진유걸은 벌떡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희열과 놀라움, 비통함 등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후배 진유걸이 사백님을 뵙습니다."
순간, 남궁태협은 영문을 모른 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협? 갑자기 왜 이러는가?"
진유걸은 울음을 참느라 입술을 세게 깨물며 울먹이듯 말했다.
"저의 사부님은 강남태을자이십니다."
그 말이 끝나자.
"뭣이? 강남태을자가 진정 자네의 사부란 말인가?"
그의 음성이 어찌나 컸던지 모옥이 흔들거릴 지경이었다.
"그렇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늘 사백님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아아, 운제(雲弟)! 자네의 제자가 이토록 성장하여 이 우형을 찾아왔구먼."
마령신의는 마치 강남태을자에게 얘기하듯 중얼거렸다.
그 때 남궁상아(南宮嫦娥)가 약그릇을 들고 들어섰다.
"무슨 얘기들을 그토록 재미있게 하세요?"
진유걸은 새삼 남궁상아를 다정한 눈길로 보며 호탈하게 웃었다.
"하하하… 사백님, 그럼 상아 낭자는 저의 사매(師媒)가 되겠군요? 이제부터 아매(娥妹)라고 불러야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상아도 이제 진 소협에게 오빠라고 부르도록 해라."
마령신의가 이렇게 말하자, 남궁상아가 환하게 웃었다.
"진 오빠?"
진유걸은 오랜만에 포근한 기분에 휩싸이며 남궁상아가 갖다 준 약그릇을 비웠다.
마령신의가 그런 그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켜보며 말했다.
"앞으로 한 닷새 가량 더 이 약을 먹어야 하네. 그래야만 독성을 완전하게 몰아낼 수 있어."
마령신의의 말에 진유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궁상아가 원망에 찬 눈길을 진유걸에게 던졌다.
"진 오빠는 그럼 오 일만 있다가 가야 하나요?"
마령신의는 그녀의 실망하는 표정을 보자, 마음이 아파 왔다.
인적이라곤 거의 볼 수 없는 산 속에 오랜만에 찾아온 사람인데, 그 섭섭함이 오죽하겠는가?
"걸아! 너는 칠 년 만에 이 모옥을 찾은 귀빈이다. 이 사백이 너에게 몇 가지 전수해 줄 것도 있고 하니, 한두 달 더 머물다 가는 게 어떻겠느냐?"
진유걸로서는 더없이 기쁜 제의였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위종출과 백순혁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사백님, 그렇게 하고 싶긴 하지만 제자는 미리 약속이 되어 있어 그렇게 오래는 머물지 못합니다. 하지만 보름까지는 여유는 있습니다."
그가 반 달 가량 묵겠다고 하자 남궁상아가 뛸 듯이 기뻐하였다.
친구도 한 명 없이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외롭게 지내 왔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 날 밤, 진유걸은 마령신의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사백께서는 무슨 일로 이런 산중에 은거하고 계시는지요?"
마령신의는 그의 물음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 사백은 천하제일의 영단(靈丹)을 제조(製造)하는 중일세."
"어떤 효험이 있는 영단이길래, 세속과 인연까지 끊어 가면서 만들고 계신지요?"
"상아의 나이 세 살 적에 들어왔으니 벌써 십오 년이 넘었구먼."
진유걸은 마령신의의 수심에 찬 얼굴을 보며 그에게 뭔가 말 못할 고충이 있음을 알았다.
"자네, 성령용골신단(聖靈龍骨神丹)이란 영단에 관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후배는 금시초문입니다."
"그럴 테지. 그 영단에는 세인들이 혈안이 되어 찾아다니는 만년설과(萬年雪果), 천년영지초(千年英之草), 운빙정유(雲氷晶乳) 등이 혼합되어 있지. 다시 말해, 고금제일(古今第一)의 영약(靈藥)인 셈이지!"
진유걸은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마령신의가 말한 그것들 하나하나는 사람들이 평생을 찾아도 수중에 넣지 못하는 귀물들이 아닌가?
더구나 그 모두에는 얼마나 뛰어난 영험이 있는가?
하나만 취하더라도 숨이 끊어진 사람을 살려 놓을 뿐만 아니라, 공력도 일(一) 갑자(甲子) 이상 증진시키는 효력이 있었다.
그러한 절세의 영물(靈物)들만을 모아 만든 성령용골신단이니얼마나 어마어마한 효력이 있겠는가?
또한 이것을 복용할 선택받은 인물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진유걸은 궁금증을 찾지 못하고 서둘러 물었다.
"과연 성령용골신단은 천하에 둘도 없는 영약이겠군요. 사백님께서 그렇게 긴 기간을 희생하며 만든 것이니, 필시 그만한 내력이 있을 듯합니다만……."
마령신의 남궁태협의 얼굴에 또다시 어두운 기색이 어렸다.
"자네는 옥수준재(玉樹俊才) 남궁인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옥수준재 남궁인.
진유걸은 그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대면한 적은 없었으나 무림인들은 자신과 옥수준재 남궁인을 두고 종종 비교하지 않았던가?
- 그들은 당금 최고의 귀공자(貴公子), 옥수준재(玉樹俊才) 남궁인(南宮仁)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
진유걸은 강호에 떠돌던 소문을 들은 대로 말했다.
"그는 무림세가(武林世家) 중의 하나인 남궁세가의 공자로, 문무(文武)가 탁월할 뿐 아니라 용모 또한 출중한 장부(丈夫) 중의 대장부(大丈夫)라 알고 있습니다만……."
"그 애가 바로 이 사백의 손자이네. 또한 상아의 오라비이기도 하고……."
진유걸은 이 뜻밖의 사실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그럴 수가? 후배는 그 사실을 지금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 얘기가 무림에 전해지지 않았는지요?"
"그 동안의 사연을 얘기하자면 몹시 길다네. 하지만 자네이니, 들려 주겠네."
남궁태협은 잠시 지난 일을 떠올리는 듯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얘기를 들려 주기 시작했다.
부모님들의 성화로 남궁태협은 일찍 성혼을 하게 되었지만 방랑기가 있어 얼마 후 가문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집을 나온 남궁태협은 천하를 유랑하다 춘추시대에 그 명성을 천하에 떨친 바 있는 화타(華陀)의 자손인 천수화타(千手華陀)라는 이인(異人)을 만나게 되었다.
남궁태협은 그와 인연을 맺고 의술(醫術)을 전수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심오한 무학까지 전수받게 되었다.
그는 각고(刻苦)의 노력 끝에 천수화타의 모든 진전을 깨닫고 천하각처를 종횡하며 의술을 베풀기 시작했다.
무림에서 남궁태협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 갔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외롭기만 했다.
이 때, 그는 강남태을자를 만나 형제의 의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남궁태협은 가끔 집이 그리워 집을 찾아가긴 했지만, 이미 축출당한 후라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문 앞만 배회하다 올 뿐이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아내가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열 살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남궁태협의 아들은 아름다운 부인을 맞아들였고, 남궁태협의 부친은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의 부친은 임종 때야 비로소 남궁태협을 용서해 주었다.
남궁태협은 모든 일을 떨쳐 버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무림인들이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그 일을 극비에 붙인 것이다.
마령신의의 얘기를 다 들은 후, 진유걸은 한 가지 알지 못할 의혹에 휩싸였다.
"그런데… 어찌 또 무림에 나와 계시는 것입니까?"
그의 질문에 마령신의가 착잡한 얼굴을 하였다.
"인이 때문이네."
"옛? 옥수준재 남궁인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그 녀석은 사실 불치병을 앓고 있다네."
남궁태협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진유걸은 놀란 얼굴로 다급히 물었다.
"아니, 불치병이라니… 대체 무슨 병이길래……."
"오음절맥(五陰絶脈)이라네!"
오음절맥.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병으로, 십오 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천형(天刑)의 병이었다.
반면, 이 절증을 가진 사람의 두뇌는 상상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진유걸은 침울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남궁 공자는 십오 세를 넘겼을 뿐 아니라, 무공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들었는데……."
"노부의 침술로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다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노부의 공력이 일 갑자나 소모됐지만… 덕분에 그 녀석은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활동하고 있다네."
진유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 역시 마령신의의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군. 오음절맥을 고칠 수가 있다니…….'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다시 마령신의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야. 그애를 치료키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용골신단이 꼭 필요하네. 한데, 노부가 이 영단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외부로 흘러 나가게 된다면 그 땐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네. 그래서 그 일을 비밀로 하기 위해 이렇게 숨어 살고 있는 거라네. 그 때문에 상아만 불쌍하게 됐지만 말일세."
그제서야 진유걸은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모든 의문이 풀어졌다.
마령신의는 문득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한데 운제(雲弟)는 어떻게 죽음을 당했느냐? 그리고 너는 어떻게 지내 왔고?"
진유걸은 잠시 고민한 뒤 진면목을 가리고 있던 인피면구를 벗었다.
"이것이 제자의 진면목입니다. 남들은 저를 가리켜 광혈풍이라 부르지요."
찰나, 남궁태협은 기절초풍할 듯이 놀라워했다.
"네가… 이살 중의 일 인인 광혈풍이라고……?"
그는 무척이나 놀란 듯 일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강남의 대살성이라 일컫는 그가 자신의 현질이라니… 어찌 경악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에게 성령용골신단의 비밀까지 말하지 않았는가?
진유걸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이살에 관한 소문을 들으셨군요? 하지만 여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사부님의 죽음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고요. 한데, 사백님은 은거하고 계시면서도 강호의 동정에 밝으시군요?"
그제서야 남궁태협은 그에게 무슨 말하지 못할 내막이 있음을 깨닫고는 표정을 바꾸었다.
"사백은 일 년에 한 번씩 친우(親友)들과 모임이 있네. 그 자리에서 들은 거라네.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말해 줄 수 없겠나?"
진유걸은 그 동안의 얘기를 하려 하자,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혈한(血恨)!
그의 가슴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핏빛 복수심이 아닌가?
정사 양 파의 합공을 받아 운명(殞命)한 사부 강남태을자.
철저하게 자신을 기만한 탈혼사자 독고휘와 해월영 주수연.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끈질기게 노리고 있는 신비 방파.
검존 사도천랑과 강호운룡 남화룡의 죽음.
진유걸은 이러한 것들을 다시 가슴에 새기려 하자 불 같은 분노가 치솟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지나간 얘기를 서서히 털어놓았다.
점점 더 깊어 가는 밤과 함께 그의 피 맺힌 과거가 흘러 나왔다.
어둠처럼 깊고 깊은…….
3
이튿날.
진유걸은 밤새도록 마령신의와 얘기를 나누느라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게 되었다.
그가 잠 속에 빠져 있을 때 남궁상아가 몰래 들어와 침상으로 다가왔다.
순간.
"어? 진 오빠의 얼굴이 바뀌었네?"
인피면구를 벗은 진유걸의 얼굴을 보며 남궁상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가슴과 어깨 상처를 보면 분명 진 오빠가 맞는데… 한데, 얼굴이 왜 다르지?"
남궁상아는 진유걸의 얼굴을 더듬어 봤다.
반듯한 이마, 까맣게 뒤덮인 눈썹, 우뚝하게 솟아오른 콧날…….
그 때였다. 갑자기 진유걸이 남궁상아의 손목을 가볍게 잡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남궁상아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짜릿한 감정에 휩싸였다.
진유걸은 꿈을 꾸는 듯 행복한 미소를 머금으며 중얼거렸다.
"수… 연……!"
진유걸은 주수연을 부르며 남궁상아를 품속으로 잡아당겼다.
"어머, 오빠?"
남궁상아는 진유걸의 널찍한 가슴 위로 엎어지고 말았다.
포근하였다. 남자의 가슴이 이렇게 포근할 줄 그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얼굴이 달아오르며 공연히 볼도 화끈거리고, 숨소리도 높아졌다.
남궁상아는 천천히 진유걸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끝을 타고 말할 수 없이 짜릿한 감정이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진유걸은 여전히 깊은 꿈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윽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보아 황홀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수연, 이제 우리는… 하나요."
진유걸은 다시 남궁상아의 손을 다시 잡아 왔다.
"진… 오… 빠……."
남궁상아는 본능적으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댔다.
그 때 기다렸다는 듯 진유걸도 마주 입술을 포개 왔다.
순간, 영원히 잊지 못할 감촉이 그녀의 전신을 바르르 떨게 했다.
"으음……!"
남궁상아는 짜릿한 전율에 비음을 터뜨리며 진유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진유걸은 문득 이상한 느낌에 정신을 차리자, 자신의 품안에 남궁상아가 안겨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너무 놀라 자기도 모르게 남궁상아를 밀쳐 내고 말았다.
"아매! 이게 무슨 짓이오?"
남궁상아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며 다시 진유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오빠! 상아는… 상아는……."
진유걸은 그녀를 껴안으며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아매가 왜 이러지? 도대체 여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는 남궁상아의 애틋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저 등을 토닥거려 줄 뿐이었다.
진유걸은 그 동안 남궁태협에게 간단한 의술을 배웠고, 그의 독문신법이라 할 수 있는 환형분신대법도 터득하였다.
진유걸이 환형분신대법을 단 열흘 만에 완벽하게 시전하자 남궁태협은 혀를 내둘렀다.
"허, 과연 다르군. 소문대로 천하의 기재임에 틀림없어."
"하하하… 모두 사백님과 아매 덕택입니다. 독상도 완치되고, 이제는 하늘도 날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네 혹, 영약을 복용한 적이 있는가?"
진유걸은 잠깐 생각해 본 뒤 대답했다.
"영약은 복용한 적이 없지만 사부님께서 언젠가 금빛 나는 세 알의 영단을 주신 적은 있습니다."
"아, 그것이라면 언젠가 내가 아우에게 준 천령환단(天靈幻丹)이겠군. 반 갑자의 공력을 증진시킨다는 소림사의 대환단(大還丹)과 같은 효과가 있지.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네."
그가 잠시 말을 멈추자, 진유걸과 남궁상아가 의아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주시하였다.
"자네 체내에는 기이하게도 한 가닥 암경(暗勁)이 흐르고 있어. 다시 말해, 영약의 복용으로 이루어진 진원(眞元)인 셈이지. 이것은 잠재되어 있는 힘인지라 자네가 바쁘지만 않다면 그것을 모두 진기화시킬 수가 있을 텐데… 정녕 아쉽군."
"제자 역시 그러고 싶지만… 이미 약속이 있는지라… 훗날, 반드시 돌아와 사백님의 도움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요? 제자는 영약을 먹은 기억이 없는데……."
"혹시 어렸을 적에 복용한 것이 아닐까?"
진유걸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려 했으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마령신의는 진유걸이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들었는지라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자아, 너희들은 여기서 무공을 연마하고 있거라. 노부는 성령용골신단 때문에 약실(藥室)에 들어가 봐야겠다."
마령신의가 사라지자, 남궁상아가 어리광을 피우듯 진유걸의 팔목을 붙잡고 껑충껑충 뛰며 졸랐다.
"오빠! 저번에 오빠가 하던 신법을 가르쳐 주세요."
진유걸은 발랄한 남궁상아를 보자 조금은 응어리진 마음이 풀리는 듯했다. 그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띄웠다.
"그건 팔방풍영보라 하는 신법이야. 건(乾), 곤(坤), 진(震), 감(坎), 간(艮), 손(巽), 리(離), 태(兌)… 즉 팔괘(八卦)를 이용한 신법이지."
진유걸은 서혈천왕으로부터 배운 바 있는 팔방풍영보를 그녀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 밖에도 자신이 알고 있는 각 파의 절초들을 모두 조금씩 가르쳐 주었다.
그러는 동안 보름은 순식간에 흘러가 버렸다.
진유걸은 떨어지지 않으려는 남궁상아를 억지로 떼어 놓고 간신히 천목산을 내려갈 수 있었다.
훗날의 만남을 기약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