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八章 검존(劍尊) 사도천랑(司徒天娘) (9/35)

第八章 검존(劍尊) 사도천랑(司徒天娘)

1

이튿날.

진유걸은 위종출과 백순혁에게 몇 마디 당부를 남긴 후 길을 떠났다.

한 달 후, 항주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 것이다.

'금괴는 수로를 이용해 항주까지 도달하게 될 테니 별일 없겠지. 나는 그 동안 휘의 뒤를 추적해 봐야겠다. 일단 안휘성 만화장으로 가 보자.'

진유걸은 안휘성에 있는 만화장을 떠올리자 마음이 우울해졌다.

만화장.

주수연에게 역용을 시켜 준 죄목으로 참형을 당한 천면신옹(千面神翁)의 장원.

더구나 그 곳에는 천면신옹의 손녀인 월화신녀 전여정이 있지 않은가?

중조산의 길목에서 자신에게 독설을 퍼부으며 절규를 터뜨리던 전여정.

여러 가지 상념이 또다시 진유걸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며 스쳐 갔다.

'전매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단 한 분뿐인 조부를 잃고 얼마나 상심하고 있을까?'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강소성의 한 들판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살기!"

이것은 엄청난 내공을 지닌 고수만이 느낄 수 있는 직감이었다.

진유걸은 사부인 강남태을자가 정, 사, 양 파 고수들의 연합 공격으로 횡사한 후부터 고수들의 추적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그 동안 자신이 왜 쫓겨 다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도망다녀야만 했다. 다만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은, 반쪽의 옥경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고수들의 끈질긴 추적을 따돌리는 과정에서 점점 더 무학의 심오(深奧)한 뜻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 후론 오히려 추적자들이 그의 손에 하나하나 죽어 갔다.

그리하여 그는 강남의 살성(殺星) 광혈풍이라는 흉명(?)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탈혼사자 독고휘를 만나 무왕동부로 들어갔었고, 그 곳에서 많은 비학을 터득했다.

그 뒤 독고휘와 함께 나란히 출두하여 이살(二殺)이란 칭호를 받게 되고… 명예욕에 불타는 무림인들을 하나하나 징계해 나갔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수많은 무림인들의 표적이 되어야만 했다.

그로 인해 그의 감각은 동물의 본능을 능가할 정도로 발달되게 된 것이다.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냉큼 모습을 드러내시오!"

그러자 갈대숲에서 흡사 까마귀가 부르짖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흐흐흐… 풍운서생! 제법 큰소리를 치는구나. 하지만 상대를 잘못 택한 것 같다."

듣기 거북한 음성와 함께 전신을 흑의로 감싼 세 노인이 체구를 드러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삐쩍 말랐으며, 수중에는 투박해 보이는 귀두도(鬼頭刀)를 꼬나잡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들의 안면이 백랍처럼 창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모습은 마치 관을 뜯고 나온 송장의 형상 그대로였다.

더구나 그들의 흑의는 갈가리 찢겨진 상태여서 더욱 공포스러웠다.

"흑시삼수라(黑屍三修羅)!"

진유걸은 아연실색하며 진기를 쌍장에 주입시켰다.

'아니, 저들이 어떻게 나를 찾아왔을까?'

흑시삼수라는 차가운 안광을 줄기줄기 폭사하며 조소를 던졌다.

"흐흥! 노부들을 알아보는 걸로 미루어 막돼먹은 놈은 아니로로군. 네놈의 사문을 밝혀라!"

진유걸은 강남태을자에게 그들에 관한 말을 들은 적이 있는지라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흑시삼수라(黑屍三修羅).

이 갑자를 산 세 쌍둥이로, 무림을 종횡하며 악한 짓만 골라 하다 삼십 년 전 이들의 악행을 보다 못한 십대기인 중 반야선승(般若禪僧)과 검존(劍尊)이 그들을 무림에서 쫓아 내고 말았다.

그들은 서로 마음이 통하여, 싸울 때 상대방이 전혀 그들의 공격을 읽을 수가 없다. 

그들에게 걸린 이상, 그들의 악랄한 손속에 여지없이 죽게 된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저들은 세 쌍둥이로 서로 마음이 통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말까지 동시에 똑같이 하다니…….'

진유걸도 지지 않고 맞섰다.

"당신들은 오래 전 강호에서 쫓겨난 것으로 아는데, 그 동안 말버릇이 매우 고약해졌구려."

그가 흑시삼수라를 격동시키자, 그들의 안색이 더욱 싸늘하게 변해 갔다.

"애송이 놈! 네놈의 사부가 이 자리에 있다 해도 그토록 버릇 없이 날뛰지는 못했을 것이다. 겨우 비도혈객 왕가, 그 어린 놈을 처치하고 기고만장하다니… 죽일 놈!"

그들 셋은 발음 하나 들리지 않고 똑같이 격분하여 외쳤다.

"당신들이 누구의 명을 받고 내 생명을 노리는 것이오?"

그러나 흑시삼수라는 그의 말을 묵살한 채 갑자기 몸을 솟구쳤다.

"가거라!"

그들은 빛살 같은 속도로 덮쳐 들며 쥐고 있던 귀두도를 수직으로 그어 내렸다.

쉬쉬쉭-!

진유걸은 미리 경계를 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공세가 그토록 신속한 줄은 몰랐는지라 황급히 팔방풍영보를 전개했다.

파륵-!

기이한 음향과 동시에 진유걸의 옷소매가 싹뚝 잘려 나갔다.

'으으, 실로 가공할 쾌도법이군.'

그는 모골이 송연할 만큼 놀라며 경각심을 더욱 높였다.

"흐흐흐… 제법이로구나. 하지만 이번에는 약간 어려울걸."

그들은 살벌하게 내뱉으며 진유걸을 삼면에서 포위했다.

흑시삼수라는 마치 한 명이 움직이는 것처럼 세 사람이 동시에 민첩하게 움직였다.

"추혼수라(追魂修羅)-!"

그들의 입에서 대갈성이 터져 나오며 귀두도가 대기를 갈랐다.

쇄쇄쇄액-!

맹렬한 파공음이 돌출되며 싸늘한 도기(刀氣)가 노도와도 같이 몰아쳤다.

정녕 태산을 붕괴시키고 장강을 가를 듯 무시무시한 도법이었다.

진유걸은 천애독고검을 움켜쥔 채 마주 검식을 시전했다.

"직도황룡(直搗黃龍)- 추산진해(推山 海)-!"

그는 각 명문정파의 초식을 전개해 내며 그들의 귀두도를 휩쓸어 갔다.

눈부신 검기가 사면팔방으로 난사되며 신랄하게 쏘아 나갔다.

일순.

타타탕- 탕-!

검과 도가 마주치며 예리한 금속음을 쏟아 냈다.

진유걸은 그 순간, 손목이 저려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하였다.

'이 노귀(老鬼)들의 공력이 실로 심후하구나. 자칫하다간 당하겠는데…….'

그는 손잡이에 진기를 주입시키며 흑시삼수라를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흑시삼수라 역시 진유걸의 무공에 놀란 듯 눈살을 찌푸렸다.

"과연 소문대로 보통 놈이 아니구나. 하지만 노부들에게는 어림도 없지."

흑시삼수라는 수중의 귀두도를 바싹 움켜쥐고 각기 기묘한 자세를 취하며 진유걸의 주위를 맴돌았다.

'이들의 행동으로 미루어 이번에는 더욱 조심해야겠군.'

진유걸은 더욱 공력을 끌어올리며 흑시삼수라를 예리하게 관찰했다.

반짝-!

도광이 햇빛을 받아 빛을 발하는 순간.

"탈혼수라(奪魂修羅)-!"

전면에 있던 흑시삼수라 중 한 명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귀두도를 후려쳐 왔다.

위이잉-!

노한 해일과도 같은 도기가 무서운 폭풍처럼 휘몰아쳐 왔다.

일순, 주위가 도기의 소용돌이에 빠지며 면밀한 막을 형성했다.

진유걸 역시 폭갈을 터뜨리며 탈혼사자의 도법을 발출해 냈다.

"탈혼마혈(奪魂魔血)-!"

슈슈슈슈슈-!

천애고독검이 섬전처럼 뻗어 나오며 휘황찬란한 검기를 형성했다.

순간, 좌우에 있던 두 명의 흑시삼수라가 일시에 신형을 도약시켰다.

"가거라, 애송아!"

위위윙-!

화르륵- 화르륵-!

장내는 온통 무시무시한 도검에 휘감겨 버렸다.

진유걸은 그들의 엄청난 연합 공세에 자신이 밀림을 느꼈다.

순간, 그는 입술을 와락 깨물며 갑자기 검초를 변화시켰다.

"추혼수라-!"

아,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그것은 방금 흑시삼수라가 전개했던 절초가 아닌가?

그렇다. 그 초식은 틀림없이 흑시삼수라의 절세신초(絶世神招)였다.

진유걸, 그는 천하에 다시 찾아보기 힘든 개세기재(蓋世奇才)가 아닌가?

진유걸은 무공뿐 아니라 암기술(暗器術)이나 기지(奇智)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귀재(鬼才)였다.

그는 가공할 만한 기억력으로 흑시삼수라가 딱 한 번 시전한 추혼수라 초식을 그대로 전개해 낸 것이다.

"어헉!"

흑시삼수라는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경악하였다.

그들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하지만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진유걸의 검이 그들이 형성한 도막을 헤치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흑시삼수라는 이빨을 무섭게 악물며 그대로 도를 밀어넣었다.

찰나.

파파파파팍-!

새파란 불꽃 송이가 작렬하듯 퉁겨 나오며 섬뜩한 음향이 울려 퍼졌다.

이어 폐부를 움켜쥐는 듯한 단말마의 비명이 무섭게 허공에 울려 퍼졌다.

"끄으악……!"

핏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오르며 한 인영이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갔다.

2

쿵-!

둔탁한 소음과 함께 가슴을 싸안으며 흑시삼수라 중 한 명이 피를 쏟아 내며 나동그라졌다.

진유걸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그의 우측 어깨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던 것이다.

그는 통증과 함께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음, 이 노괴물들의 신력이 상상 외로 강하구나. 하지만 나 역시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진유걸은 상처를 지혈시키며 흑시삼수라 중 남아 있는 두 명을 주시하였다.

그들 둘 역시 가슴을 싸안은 채 이미 황천객이 된 한 명의 흑시수라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고통과 분노, 경악 등의 감정이 착잡하게 얽혀 있었다.

'쌍둥이들은 한 명이 아프면 다른 한 명도 아프다더니…….'

진유걸이 그들을 바라보며 염두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풍운… 서생이라… 했나? 대단… 하군!"

등 뒤에서 고통을 억지로 참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게 아닌가?

진유걸이 움찔 놀라며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시야로 시체처럼 널브러진 노파 한 명이 들어왔다.

노파의 전신은 피투성이였고, 머리카락도 군데군데 빠져 있었다. 더욱이 그 노파의 옆구리에는 세 치 길이의 비수 한 자루가 깊숙이 박혀 있는 게 아닌가?

노파가 꺼져 가는 듯한 눈길로 진유걸을 바라보았다.

"누가 할머니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까?"

진유걸은 노파의 처참한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격분을 터뜨렸다.

노파는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억지로 말을 이었다.

"젊은이, 한 번 본 초식을 그대로 따라 하다니… 정녕… 천하제일의 두뇌를 가졌구먼. 하지만 검을 사용할 때… 많은 허점이 보여."

진유걸은 죽음의 문턱에 오른 노파가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자 어리둥절하였다.

"검을 펼쳐… 낼 때 스물일곱 군데… 허점이… 있어. 만일… 그 중… 일곱 군데만 수정해도, 저 노괴물들의 마지막 초식을… 분쇄할 수… 있을… 걸세."

노파는 심한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유걸의 단점을 예리하게 짚어 냈다.

'검에 대해서 이토록 잘 알고 있다니… 검에 관해 가장 잘 아는 분이라면… 설마……?'

순간, 진유걸은 뒤통수를 호되게 강타당한 듯 경악하며 황급히 물었다.

"혹, 할머니께서 검존… 사도천랑……?"

순간, 노파가 일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그녀가 검존임을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검존(劍尊) 사도천랑(司徒天娘)!

십대기인 중 일 인으로, 흑백양도(黑白兩道)의 고수들이 저마다 외경하는 일세여협(一世女俠)이다.

그녀의 검술은 가히 신(神)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것은 그녀가 그만큼 노력했다는 증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여인의 몸으로 검존이란 칭호를 받을 수가 있겠는가?

이렇듯 쟁쟁한 명성을 휘날린 사도천랑이었건만, 여인으로서의 그녀의 삶은 불행하였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별로 말이 없는 여인이었다. 마치 벙어리처럼 하루에 한 마디도 입 밖에 내기를 꺼려했던 것이다.

때문에 사도천랑의 말을 세 마디 이상 들어 본 무림인은 아직 없었다.

한데 지금 검존 사도천랑이 진유걸에게 너무도 많은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만신창이가 된 상처 투성이의 몸으로…….

진유걸은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조심스럽게 얹어 주었다.

"고… 맙구나. 내게 친절을 베풀어 주… 어. 하지만 그보다… 더… 급한 것은, 저 노귀들을 상대하는 일… 이다."

진유걸은 그녀의 눈빛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외로움… 사도천랑 노선배는 외로움에 지쳐 있다. 이것은 내가 독고휘를 만나기 전에 지었던 눈빛이다.'

진유걸은 그녀가 겪었을 외로움에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노선배님! 후배의 결함을 더 지적해 주십시오."

사도천랑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에 저들은… 흉폭… 절륜한 무공을… 사용할 것이다. 너는 좀 전에… 저들이 시전한 탈혼… 수라를 펼쳐… 낼 수… 있겠느냐?"

"후배는 단지 추혼수라, 그 검식밖에는……."

"알… 겠지만, 나 역시… 저들에게 당했다. 그래서 끌려… 가던 중이었지. 어쨌든 네가 저… 들의 검초… 추혼수라만을 사용한다면, 동귀어진(同歸於盡)할… 가… 능성이 높다."

진유걸은 그녀의 말에 섬칫한 심정이 되었다.-

"일곱 군데의 결점을 고치는 데도 말입니까?"

"완전하게 수정… 할 만큼 여유가… 없어. 그러나 기적적으로 결점을… 노출… 시키지 않았다 해도… 중상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진유걸은 그녀가 마지막 기력을 다하여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쨌든 지적해 주십시오.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는 것 같으니……."

검존은 좌우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또 하… 나의 방… 책이 있어."

"예?"

"남은… 방법은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뜨는 거야. 저들이… 아직… 공격을 가하지… 않는… 것은, 형제의… 죽음으로 통증이 오기… 때문이야. 잠시 후면… 다시 달려들 거야. 그러니… 어서… 달아나… 게."

진유걸은 사도천랑의 말에 한동안 어이가 없는 듯 한참 멍하니 있더니 돌연 광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노선배님께서는 후배를 비열한 놈으로 만드실 작정이십니까? 대살성으로 이름난 천하의 광혈풍을 말입니다."

"자네가… 광혈풍이라고……?"

사도천랑은 눈앞의 젊은이가 그 유명한 대살성 광혈풍이라는 사실에 매우 경악하였다.

"노선배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진유걸은 노파를 조심스럽게 눕힌 뒤, 진력을 끌어올리며 천애고독검을 힘껏 부여잡았다.

가물가물한 의식으로 진유걸의 당당한 모습을 바라본 사도천랑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대단한 고… 집이로군. 잘… 듣게. 검은 그 때 당시의 풍속(風速)과도 관련이… 있지. 검을 발출했을… 때의 위치와… 자네의 어깨는 그 움직……."

노파의 말이 끝나기도 전, 흑시삼수라가 짐승처럼 부르짖으며 다가들었다.

"으으,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멸혼수라(滅魂修羅)-!"

흑시삼수라의 입에서 엄청난 굉음이 튀어나오며 동시에 그들의 귀두도가 대기를 쪼갤 듯이 엄청난 기세로 폭사되었다.

슈슈슉- 슈슉-!

사면팔방이 무서운 도기에 휩싸이며 폭풍을 만난 초목처럼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도기가 빛살같이 번뜩이며 진유걸의 전신을 맹폭하게 압박해 왔다.

진유걸은 천애고독검을 쥔 손에 땀이 젖어듦을 느끼며 마주 신형을 날려 갔다.

"차앗-!"

그는 대갈일성을 토해 내며 그대로 추혼수라 초식을 떨쳐 냈다.

파르르륵-!

강맹한 검기가 은하수가 쏟아지듯 폭사되며 현란한 광채를 이루었다.

수백, 수천의 검화가 형성되며 쏘아 나가는 광경은 일대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빛 속에는 독사의 이빨 같은 흉흉한 살기가 감돌고 있었으니…….

순간.

크르르르-!

괴이한 음향이 돌출되며 검신(劍身)과 도신(刀身)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 짧은 시각, 진유걸은 가슴과 하반신이 갑자기 마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현기증과 함께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고통이 왔다.

이러한 현상은 흑시삼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윽!"

"허어억……!"

핏물이 폭우처럼 쏟아지며 세 사람의 신형이 그대로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휘잉-!

한 줄기 바람이 정적에 휩싸인 장내를 훑으며 스쳐 가자 비릿한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번져 나갔다.

"으음……!"

진유걸은 고통으로 신음 소리를 내며 두 눈을 반쯤 떴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는 억지로 상체를 일으켜 검존 사도천랑이 쓰러져 있는 곳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검존 사도천랑은 자꾸만 가물거려지는 의식 속으로 무엇인가 스치는 소리가 들리자, 눈을 떠 보았다.

순간, 사도천랑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지며 경악을 터뜨렸다.

"아니, 어… 떻… 게……?"

그녀는 진유걸이 죽은 줄 알았던 것이다.

"선배님… 덕택으로… 저들을 처지했습니다. 으음……!"

그는 그 말을 간신히 내뱉은 뒤, 검존 사도천랑 곁에 풀썩 쓰러졌다.

눈부신 햇살이 진유걸의 전신을 따사롭게 내리쬐었다.

"자네는 실… 로 천하에 다시없는 기재로군. 내… 가 알려… 준 것은 단지 두 군데에… 불과했… 는데……."

진유걸은 아픔을 참느라 간신히 말을 이었다.

"선배님의… 안목은 정녕… 천하제일입니다. 단 한… 번의 검초만 보고서도 결함을… 지적하다니……."

검존 사도천랑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천하… 기재로부터 그런 찬사… 를 들… 으니 더… 욱… 감회(感懷)가 깊… 군."

진유걸 역시 여유를 찾은 듯 미소를 피워 올렸다.

"후배의 기억으로는… 선배님은 무척 무뚝뚝하다고 들은… 것 같은… 데요."

"죽음이… 가까워서인지… 마음이… 약해져서 그래. 광혈풍도 듣던… 것과는 정반대… 군. 그러길래… 사람은 사귀어… 봐야 안다니까."

진유걸은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후배는 천애고아입니다. 물론 어딘가에 부모님이 살아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한데 선배님은 꼭 저의 할머니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이 말은 진유걸의 순수한 감정이었다.

만일 평소의 그라면 절대 이런 말은 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지금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인 상태가 아닌가?

인간이 가장 약해지기 쉬운 순간이었던 것이다.

진유걸의 말에 사도천랑이 충격을 받은 듯 일신을 가볍게 떨었다.

검존 사도천랑!

그녀는 일세를 풍미해 온 일대 여걸(女傑)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평범한 노파에 불과했다.

어느 틈에 사도천랑의 눈가에 한 맺힌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다. 형용할 수조차 없는 격동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래… 나 역시… 네가 친손자처럼 여겨지는구… 나."

사도천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간신히 한쪽 손을 내밀었다.

진유걸도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아 갔다.

맞닿은 손, 따스한 감촉이 서로의 손끝을 타고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표현할 수 없을 만치 감미로운 전율이 두 노소(老少)의 전신으로 엄습했다.

"얘야… 이 할미는 광혈풍이란 외호만 알지 아직 손자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구나."

사도천랑은 진유걸의 따뜻함에 힘을 얻어 조금 기력을 회복하였다.

"진유걸이라 합니다."

"유걸이라… 좋다, 좋아. 유걸아, 이 할미는 죽기 전에… 검을 사용할 때… 나오는 너의 결점을 고쳐… 주고 싶다. 그렇게만 된다면… 너의 검술은 천하… 제일인이 될 것이다."

"할머니! 저는 그것보다 할머니와 더 오래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유걸아, 나도… 그러고 싶다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렇단다. 너도 이 할미의 검술… 조예가 이대로… 사라지기를 원하… 지는 않겠지? 이 할미는 검의… 출수와 회수, 몸놀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단지 그것으로 강호를… 종횡… 하며 십대기인으로… 추앙받게 됐으니……."

말을 끝낸 그녀는 몹시 숨이 찼던지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진유걸은 그녀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말에 순순히 순종했다.

"알겠습니다. 할머님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고통으로 물든 검존 사도천랑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검을 뽑아 들 때… 모두 아홉… 가지의 결점이… 보인다. 이것을 고치면… 무서운 쾌검을 펼칠 수가… 있다. 우욱!"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한 움큼의 핏덩어리를 쏟아 냈다.

진유걸은 깜짝 놀라며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헐머님! 왜 그러십니까?"

검존 사도천랑은 희미해지는 의식을 바로잡으려 애쓰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유걸아, 너는 이 할미가 일러 준…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졌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던 사도천랑은 안간힘을 다해 반시진을 버텨 냈다. 진유걸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 반시진은 진유걸에게 있어 무왕동부에서의 일 년보다 오히려 더 의미가 깊었다.

"부디… 각골… 명심하기… 바란다."

사도천랑은 말하는 중간에 계속 피를 토했다.

"할머니, 이제 제발 그만 쉬십시오. 저는 모두 깨우쳤습니다."

"영특한 놈… 이젠 죽… 어도 여한이 없다. 다만… 한 가지… 부탁… 이 있는데… 들… 어 주겠… 느냐?"

"부탁이라니요?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사도천랑이 잠시 망설이다 힘겹게 말을 꺼냈다.

"반… 야선승을 만… 나거던, 이 할미… 가 평생 후회… 속에 지… 냈다고 전해 다… 오."

순간, 진유걸은 고통을 잊을 정도로 경악하였다.

"옛?"

반야선승.

십대기인 중 첫째 가는 인물이며, 소림파의 제자로 일대 기승(奇僧)이 아닌가?

진유걸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복잡한 내력이 있음을 짐작하였다.

"그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요?"

그러나 검존 사도천랑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녀는 반야선승에 대한 말을 마지막으로 이미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진유걸의 눈가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할머님, 유걸이가 반드시 그 뜻을 받들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평안히 가십시오. 흐흐흑……!"

진유걸은 사도천랑의 죽음에 울다 지쳐 깊고 깊은 나락(奈落)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 곳은 이제와는 달리 조금의 고통도 느끼지 않은 편안한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중천에 뜬 태양이 하얗게 질려 가는 진유걸을 얼굴을 내리쬐었다.

죽음으로 빠져 들어가는 그를 깨우려는 듯…….

3

진유걸은 자신이 몸이 매우 흔들거림을 느끼며 두 눈을 살며시 떠 보았다.

깨끗한 백삼이 눈에 들어오며 자신이 한 사나이의 등에 업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를 반듯하게 묶은 사내의 등은 널찍하고 포근했다.

문득 진유걸은 자신의 유일한 친구였던 탈혼사자 독고휘를 떠올렸다.

언젠가 그가 다리를 다쳐 독고휘의 등에 업힌 채 의원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 때의 휘 등도 지금처럼 따스했었지.'

그러다 문득 무황동부에서의 일을 떠올리자 이빨을 부드득 갈아붙였다.

'아냐! 그 놈은 친구를 배신한 놈이다. 더구나 친구의 계집을 뺏어 간 놈이 아닌가?'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무섭게 끓어오르는 복수심으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제서야 사내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소협! 이제야 정신이 드셨소?"

진유걸은 치솟는 살기를 억지로 누르며 짐짓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하였다.

"누구신지 모르나 대협 덕분으로 살아난 것 같소이다. 정녕 고맙소이다."

"하하하… 소협께서 감사해야 할 분은 본인이 아니라, 십대기인 중 일 인이신 검존 사도천랑이시오."

"검존 사도천랑?"

"그렇소. 소협이 흑시삼수라에게 당한 것을 그 분께서 소협을 구해 주신 것이오. 검존은 끝내 흑시삼수라와 동귀어진을 했지만……."

그의 추측은 엉터리였지만 진유걸은 구태여 밝히지 않았다.

'후후… 이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당금 무림에서 흑시삼수라를 상대할 인물은 손으로 꼽을 정도니…….'

진유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사내가 다시 물었다.

"소협은 어쩌다 사파의 고수들과 원한을 맺게 되었소?"

"본인도 잘 모르오. 그보다 은공의 존성대명(尊姓大名)이 어떻게 되는지요?"

사내는 숨길 게 없다는 듯 자신의 내력을 밝혔다.

"남들은 나를 가리켜 강호운룡(江湖雲龍)이라 부르고 있소."

진유걸은 그의 신분을 알자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심을 느꼈다.

강호운룡(江湖雲龍) 남화룡(南華龍)!

그는 바로 당금 무림맹주가 아닌가?

장강을 맹점으로 강남(江南) 육(六) 성(省)과 강북(江北) 칠(七) 성(省), 도합 십삼 개 성을 통설하는 지고무상한 신분.

남화룡은 어린 나이에 무림에 투신하여 일대 풍운(風雲)을 일으켰다.

그는 십이 세에 무림의 흉적인 색혈구흉(色血九兇)을 모조리 지옥으로 떨어뜨리고… 뒤를 이어 탕산거마(湯山巨魔), 악귀도검(惡鬼刀劍), 독혈대(毒血隊) 등 강호에서 악명(惡名)이 자자한 인물들과 문파를 거침없이 토벌해 나갔다.

그의 협행(俠行)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 강호무림을 종횡하며 협의도(俠義道)를 행하였다.

그리하여 강호인들은 그에게 강호운룡이란 외호를 붙여 주었다.

강호운룡 남화룡은 그 뒤로도 혼신의 힘을 다해 무림 일에 앞장 섰다.

그의 이 헌신적인 행위에 정파 무림인들은 한결같이 경외심을 품고 존경했다.

특히 정파무림의 대명사 격인 구파일방(九派一幇)은 그를 태산처럼 믿고 의지했다.

남화룡은 그러한 정대문파와 믿음을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배신한 적이 없었다.

그러자 구파일방의 수뇌들은 여러 날을 숙의한 끝에 그에게 무림맹주라는 직위를 바치게 되었다.

무림맹주(武林盟主) 강호운룡(江湖雲龍) 남화룡(南華龍)!

그는 무림 유사 이래 최초의 맹주가 된 것이다.

"이런! 맹주를 몰라뵙고 후배가 경망되게 굴었습니다."

진유걸이 정중한 어조로 사과하자 남화룡이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괜찮소이다. 그보다 소협의 외호는 어찌 되오?"

"후배는 풍운서생이라 부르는 무림말학입니다."

남화룡은 아직 그의 외호를 들어 보지 못한 듯했다.

"소협은 삼 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소. 한데, 그 와중에서도 할머니를 무척 많이 불렀소. 할머니를 무척 따랐나 보오?"

진유걸은 검존 사도천랑을 머리에 그리며 슬픈 심정이 되었다.

'불쌍하신 분……!'

진유걸은 우울한 마음을 지우기 위해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무림맹주께서 이런 곳에 웬일이신지요?"

"사실 본 맹주는 어떤 자들을 뒤쫓아 근 한 달 간을 헤매고 다니는 중이오."

진유걸은 맹주가 추적하는 인물이 누군지 무척 궁금하였다.

"그들이 누굽니까?"

남화룡은 멀리 산봉우리에 시선을 던지며 주저없이 말했다.

"그들은 바로… 이살(二殺)이오."

순간, 진유걸은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를 참기 위해 억지로 어금니를 깨물어야만 했다.

'분명 구파일방의 종용을 받고 찾아 나선 것이로구나.'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들은 장강 남북의 대살성들이오. 무림의 공적이니만큼 필히 제거해야만 하오."

남화룡의 말에 진유걸은 섬뜩한 심정이 되었다.

'다른 인물들이라면 몰라도, 무림맹주가 직접 나섰으니…….'

진유걸은 그의 등에 업힌 채 가만히 공력을 끌어올려 보았다.

일향.

"으윽!"

그는 가슴이 온통 찢겨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그러자 남화룡은 얼른 발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소협?"

"괜찮습니다. 단지 가슴 부위에 경련이 와서… 그랬습니다."

남화룡은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소협은 그래도 본 맹주가 화석단(化石丹)을 지니고 있을 때 만나 운이 좋았소. 이것은 효험이 아주 뛰어나긴 하지만, 그래도 소협의 상처는 칠 일 이상 치료해야 할 것이오."

그제서야 진유걸은 자신의 어깨와 가슴에 하얀 헝겊이 정성스럽게 감겨져 있다는 걸 알았다.

"화석단을 으깨어 싸매 놨으니 상처가 많이 아물었을 거요."

진유걸은 그의 정성에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고 콧등이 시큰해져 옴을 느꼈다.

그는 물밀듯이 밀려드는 감정의 격류를 애써 억누르며 물었다.

"맹주께서는 반드시 이살을 죽여야만 하는지요?"

강호운룡은 단호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물론이오. 본 맹주는 피보라를 일으키고 다니는 그들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소."

그의 음성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진유걸의 가슴을 찔러 왔다.

'비록 내가 중상의 몸이지만 암수를 쓴다면 충분히 맹주를 처치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금수만도 못한 비열한 짓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은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물가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강호운룡 남화룡은 조심스럽게 진유걸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진유걸은 남화룡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햇빛에 알맞게 그을린 각진 얼굴은 강직한 기상과 위엄을 풍겼으며… 시원스럽게 생긴 두 눈과 큼직한 코, 한 일자의 두툼한 입술은 영웅(英雄)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정녕 대장부다운 풍모를 지닌 중년인이었다.

더구나 그의 허리에는 양쪽으로 그리 길지 않은 두 자루의 검이 걸려 있어, 그의 기백을 한층 더 빛내 주고 있었다.

상로쌍검(霜露雙劍)!

상고시대(上古時代)의 기병(奇兵)인 이 두 자루 보검으로 인해 십여 년 전, 한 성(城)이 피바다에 잠긴 적이 있었다.

무림인들이 상로쌍검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끝내 강호운룡이 차지하게 되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수많은 무림인들이 생명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진유검이 물끄러미 상로쌍검을 응시하자 남화룡이 빙그레 웃었다.

"소협도 이 검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구려. 하지만 절대 양보할 수 없소. 또다시 무림에 파란이 일 테니까 말이오."

진유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보검은 덕이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남화룡은 그의 말에 정색하였다.

"소협은 덕이 없다 생각하시오? 그건 잘못된 생각이오. 하늘은 사람을 가려서 낳지 않는 법이오."

그의 뒷말이 진유걸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다.

"하늘은 사람을 가려서 낳지 않는다고요?"

"그렇소. 소협에게도 언젠가는 반드시 행운(幸運)이 따를 것이오."

진유걸은 눈앞의 남화룡이 태산처럼 듬직해 보였다.

"맹주께서는 비단 위엄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척 다감하신 분이군요?"

남화룡의 입가에 흡족한 웃음이 떠올랐다.

"하하하… 그렇게 보였소? 아마도 소협에게 호감이 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오."

"후배에게요?"

"흐흠, 끈질긴 생명력! 살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 이런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소. 그리고 또……."

그는 말을 하려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돌려 허공을 응시하는 남화룡의 눈동자에 왠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감이 어려 있었다.

'음, 맹주라는 지고무상의 위치에 있는 그에게도 복잡한 사연이 있는 것일까?'

진유걸이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남화룡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상처에다 약을 발라야겠소."

그는 진유걸의 상처를 싸맨 헝겊을 풀어 가루가 된 화석단을 다시 발라 주었다.

"내게도 아우가 한 명 있었소. 그는 나와 달리 무척 착한 놈이었소. 항상 내게 당하면서도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는, 속이 무척 깊은 아이였다오."

그는 가슴이 메어 오는 듯 잠시 눈을 껌벅였다.

"어느 날 나는 지나가던 무림인의 머리를 돌멩이로 때리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소."

진유걸은 그의 얘기에 호기심을 느끼고 귀를 기울였다.

"겁에 질린 나는 그 잘못을 아우에게 전가시키고 말았소. 그것은… 정녕 범해선… 안 될… 과오였소. 돌멩이를 맞은 그 무림인은 그만 화가 나서……."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와락 깨물었다.

"아우를… 죽였군요?"

진유걸의 물음에 남화룡이 슬픔을 참느라 입술을 악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가? 아이에게 돌멩이를 맞았다고 사람을 죽이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진유걸이 격분해서 외쳤으나 남화룡은 이미 침착을 되찾은 듯 무심한 얼굴로 진유걸의 상처를 싸맸다.

"자, 어서 업히시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내가 잘 아는 장원이 나올 거요. 그 곳에서 좀 쉬면 나을 것이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아우님께 출수한 인물이 누구였습니까? 그는 이미 죽었습니까?"

남화룡은 쓸쓸한 얼굴로 허공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는 정파 인물이오. 물론 지금도 생존하고 있고……."

일순, 진유걸은 벼락을 맞은 듯 전신을 부르르 전율했다.

그 사건의 원흉이 정파 인물이고, 이제껏 생존해 있다니?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 어서 갑시다."

멍하니 있는 그의 귓가로 남화룡의 재촉이 들려 왔다.

진유걸이 그의 등에 업히려는 순간.

"흐흐흐… 겨우 이 곳에서 꾸물거리고 있었군."

어디선가 살기가 철철 넘치는 음성이 들려 오는 게 아닌가?

뒤이어 장내에 세 인영이 화살이 내리꽂히듯 등장하였다.

두 노인과 한 명의 중년인!

특히 백발이 성성한 두 노인은 각기 형색이 달라 눈길을 끌었다.

한 노인은 회의에 별을 수놓은 장포를 있었고, 손에는 두 자 가량의 판관필(判官筆)을 들고 있었다.

그는 눈이 몹시 작고 입술이 얄팍하여 첫눈에 보기에도 악독해 보였다.

그에 비해 다른 노인은 점잖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수중에 있는 긴 죽간이 호기심을 끌었다.

그 노인의 용모는 준수한 편이었고 행도에도 절도가 있었다.

중년인은 부리부리한 호목을 지니고 있었고, 금의에 섭선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섭선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벽록색 광채를 뿜어 내며 눈을 현란케 했다.

이들을 대하자 강호운룡 남화룡뿐만 아니라, 진유걸 역시 섬칫할 정도로 놀랐다.

남화룡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강남녹림의 총표파자와 귀하보의 보주께서 몸소 왕림하시다니……."

그러자 그들 삼 인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아니? 무림맹주 강호운룡!"

귀하보 보주이며 녹림쌍신 중 일 인인 성하신필 나한욱이 비로소 그를 알아보며 부르짖었다.

풍운신마 우열이 음침한 눈빛을 남화룡에게 던지며 냉랭하게 물었다.

"남 맹주께서는 그를 어쩌시려는 것이오?"

남화룡은 의아한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며 반문했다.

"그를 어쩌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성하신필 나한욱은 시치미 떼지 말라는 듯 언성을 높였다.

"당신 옆에 있는 그 자는 천하의 대살성이오! 남 맹주께서 그 자를 감싸는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들은 결코 묵과할 수 없소!"

그제서야 남화룡은 무언가를 느낀 듯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진유걸을 바라보았다.

진유걸은 그에게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쓰고 있던 인피면구를 벗었다.

찰나, 수려하기 비할 데 없는 옥면(玉面)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 이럴 수가……?"

강호운룡 남화룡은 예상치 못했던 눈앞의 사실에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후배는… 광혈풍 진유걸이라 합니다. 본의 아니게 맹주를 기만한 죄, 용서해 주십시오."

말을 마친 뒤 진유걸은 우렬에게 고개를 돌리며 짐짓 반가운 척했다.

"중조산 근교의 원곡(垣曲)에서 뵌 후, 무척 오랜간만에 보는구려."

우열은 진유걸의 상처를 훑어보며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흥, 그 날 당한 것까지 이 자리에서 계산해 주마."

"합가와 함께 꽁지가 빠져라 도주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오히려 나를 핍박하다니… 간덩이가 그 동안 많이 부운 모양이구려."

"뭣이 어쩌고 어째?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풍운신마장은 진유걸의 태도에 온 전신의 피가 역류하고 살갗이 뒤집어질 듯한 분노를 느꼈다.

"마력묵혈장-!"

그는 추상 같은 호통과 동시에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진유걸은 그가 손을 쓸 것이라는 예상은 했으나 방비할 도리가 없었다. 다만 부릅뜬 눈으로 덮쳐 오는 우열을 무섭게 노려볼 뿐.

그러나 풍운신마장은 추호의 인정도 두지 않고 수중의 섭선을 찍어 왔다.

쉬이익-!

진유걸의 안면이 참혹하게 찢겨져 나갈 일촉즉발의 순간.

"멈춰라!"

우웅-!

웅후한 폭갈과 더불어 한 줄기 반탄강기가 우열의 섭선을 밀어 냈다. 남화룡이 우열의 공격을 막아 낸 것이다.

풍운신마장 우열은 그의 막강한 힘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으, 과연 굉장한 공력이군. 섭선을 쥔 손아귀가 찢겨져 나가는 것 같다.'

그는 일말의 두려움을 느끼며 자신을 막아 선 남화룡을 쏘아보았다.

"남 맹주! 끝까지 그를 감싸고 돌 거요? 그는 정파 무림인들을 수없이 살상했소. 더구나 절강성과 복건성 일대를 통치하는 태성왕야의 질녀인 수연 군주를 납치한 죄인이기도 하오!"

"닥쳐라! 이 죽일… 허억!"

진유걸은 살갗을 뒤집고 튀어나올 듯한 분노에 그만 핏덩이를 울컥 쏟아 내고야 말았다.

그 때 성하신필 나한욱이 나서며 외쳤다.

"광혈풍! 네놈은 원곡에서 소림삼현인, 무당칠성 등 정파 인물을 격살하고… 또 풍운서생으로 가장하여 본 보주의 수하들인 삼패주와 강북녹림맹의 총표파자 비도혈객 왕 대협을 살해했겠다?"

진유걸은 살기 어린 눈길로 그를 주시하며 싸늘한 음성을 터뜨렸다.

"그렇소!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밝혀 둡시다. 그 어느 싸움도 내가 먼저 일으키지는 않았소."

성하신필은 정파 인물들의 죽음으로 남화룡을 격동시키려 했으나,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킨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시끄럽다. 그렇다면 왜 운몽루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느냐? 아우인 무풍채주를 죽인 것도 네놈의 짓이렷다?"

진유걸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푸후후… 그렇소. 모두 내가 한 일이오. 그러니 어서 손을 쓰시오!"

그는 말과 함께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 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