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章 대살성(大殺星)
"흐흐흐… 마차를 놔 두고 여기서 모두 사라져라!"
우렁찬 굉음과 동시에 옷자락 날리는 소성이 울렸다.
다음 순간, 일행들의 면전으로 흑색 바탕에 금사(金絲)로 별을 수놓은 인물들이 날아 내렸다.
이들을 발견한 비영신성 위종출과 비표사웅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하였다.
'아니? 이들은 귀하보(鬼河堡)의 삼패주(三覇主)가 아닌가? 아무래도 금일의 국면은 득(得)보다도 실(失)이, 길(吉)보다도 흉(兇)이 많겠군.'
등장한 인물들은 세 명의 노인으로, 한결같이 냉막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그 중 중앙의 노인은 한쪽 귀가 절단된 짝귀였다.
짝귀노인은 비영신성 위종출에게 시선을 던지며 날카롭게 외쳤다.
"애송아! 네놈은 선배를 맞이하는 태도가 엉망이구나. 비화심표 위천진이 자식을 잘못 가르쳤군."
일순간 비영신성은 울화가 치밀었다.
'죽일 놈의 늙은이! 감히 부친에게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다니…….'
그러나 상대가 상대인지라 그는 일단 굽히고 들어갔다. 그는 얼른 말에서 뛰어내리며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그러자 다른 인물들도 말에서 내려 공손히 그들을 맞이했다.
"패주께서는 후배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은 귀중한 표물을 운반하는 책임을 맡은지라,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어 대접이 소홀했습니다."
귀중한 표물이라니?
물건을 강탈하려고 온 상대에게 물건의 중요성을 거듭 얘기하다니?
그러나 진유걸은 비영신성 위종출의 진의를 깨달았다.
'표물이 중요하니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가 담긴 말이 아닌가? 과연 총표두가 될 만한 인물이군. 배짱이 두둑하고 인내심도 강해.'
짝귀노인은 눈빛을 예리하게 번뜩이며 싸늘하게 웃었다.
"후후후… 네놈은 과연 듣던 대로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하지만 이번 일에는 본 강북의 맹주께서 몸소 나섰다는 걸 알아야 한다."
찰나, 비영신성 위종출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옛? 비도혈객 왕 대협이……."
그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비록 황금 오백 관이 대단한 액수라 할지라도, 어찌 강북녹림의 맹주가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그가 나설 정도면 상당히 비중 있는 일이어야 하지 않는가?
하나 짝귀노인의 태도로 미루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짝귀노인은 매우 여유 있는 모습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총표파자(總 把子)께서는 일단 행동하면 철저하게 이행하시지. 모두 잘 알고들 있겠지만……."
비영신성 위종출과 신주용검 백순혁은 마주 쳐다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목전의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진유걸이 앞으로 나섰다.
"일패주(日覇主)! 후배가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삼패주 중 일패주 마운천(馬雲天)이 눈썹을 찌푸리며 진유걸을 노려보았다.
"네놈은 누구이길래 함부로 나서느냐? 건방진 놈!"
진유걸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하고자 하는 말을 꺼냈다.
"좀 전에 말하기를, 왕 대협께서 모든 일에 철두철미하다고 들었는데… 광혈풍이 하남성의 객잔에서 그의 부하들을 죽인 사건은 어찌 되었소? 그가 광혈풍에게 복수를 했다는 소식은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소만……."
일순, 일패주 마운천은 흠칫 놀라며 좌우에 있는 월패주(月覇主) 신고(申高)와 성패주(星覇主) 전상묘(田相苗)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성패주 전상묘가 나서며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애송아, 함부로 아가리 놀리지 말거라. 자칫하다간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면치 못할 테니!"
진유걸은 코웃음을 쳤다.
"삼패주! 노선배님께서는 지금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외다."
월패주 신고는 진유걸이 자신들을 우롱한다고 생각하자, 노기가 살갗을 비집고 나올 지경이라 이빨을 우드득 갈아붙였다.
"이 놈! 뒈지고 싶으면 장강에 뛰어들던가, 태산 정봉에서 몸을 던지지… 뭐 때문에 나서는 거냐?"
그러나 진유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의 자신 있는 행동에 기이한 느낌을 받은 일패주 마운천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애송아! 방금 실수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그건 당신들이 이번 행로에 내가 속해 있음을 미처 계산하지 못했다는 것이오. 그 때문에 당신들은 황금을 실은 마차를 탈취 못할 뿐더러, 백 총표두와 위 총표두도 죽이지 못할 것이오."
찰나, 삼패주의 안색이 사색(死色)에 가깝도록 홱 변하는 게 아닌가?
이들의 태도를 본 비영신성 위종출과 신주용검 백순혁은 일시에 심장이 얼어붙는 듯 전율했다.
'그렇다면 저들은 표물을 탈취하는 것 외에도 우리들을 노렸단 말인가?'
'그래서 비도혈객이 손수 나섰구나.'
생각이 이에 미치자, 그들은 이 사실을 미리 눈치챈 풍운서생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또한 강북녹림맹주가 무슨 이유로 자신들을 노리는지에 대해서도 의혹이 일었다.
"일패주! 방금 풍운서생이 한 말이 사실인지요?"
다소 성미가 급한 신주용검 백순혁이 나서며 물었다.
그러나 일패주는 오히려 진유걸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에 더 흥미를 나타냈다.
"네놈이 그 사실을 어찌 알고 있는 게냐?"
"후후… 그거야 간단하오. 청원, 비표표국의 총표두를 노리지 않고서야 비도혈객이 어찌 직접 행동하겠소이까? 다른 이유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 그리 짐작할 밖에……."
일패주 마운천은 진유걸의 뛰어난 기지에 탄성을 토해 냈다.
이 때였다.
"푸후후후… 어린 놈이 제법 재간을 뛰어나구나. 그러나 본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지극히 냉랭한 음성과 함께 한 인영이 바람처럼 장내로 날아 들었다.
그는 칠 척에 달하는 거구에 비단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있었다.
살이 뒤룩뒤룩 찐 얼굴에 엄청나게 나온 배를 보면 흡사 거상(巨商)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귀화(鬼火)는 그가 절륜한 무인(武人)임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금시라도 사람을 질식시킬 듯한 안광을 대하자 장내에 있던 인물들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천지교주……."
천지교주라면 바로 강북녹림맹주인 비도혈객 왕우극이 아닌가?
진유걸은 그를 냉시하며 안하무인 격으로 소리쳤다.
"천지교주!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난다면 그 보잘것없는 생명을 구원받을 수도 있소."
일순, 비도혈객 왕우극의 안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뭣이?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감히 뉘 앞에서……."
그가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자, 삼패주가 일제히 병기를 꼬나 쥐었다.
삼패주의 손에는 각기 크기가 다른 세 자루의 검이 현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찰나, 진유걸의 몸에서 실로 가공스런 살기가 번져 나갔다.
"모두 사는 데 염증이 난 모양이구려."
그의 입에서 잔혹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자, 삼패주 모두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들은 전신으로 엄습하는 공포스런 살기에 일신을 무섭게 전율했다.
진유걸은 으시시한 살기를 뿜어 내며 삼패주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일패주! 태호(太湖)에서는 단지 한쪽 귀만 잃었지만, 금일은 하나뿐인 생명을 잃게 될 것이오!"
찰나지간 삼패주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들은 일제히 기겁을 하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다면 네놈이 바로……."
하지만 삼패주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진유걸이 다짜고짜 공세를 취해 왔기 때문이었다.
"혈폭영(血暴影)-!"
진유걸은 엄청난 대갈성을 터뜨리며 쌍수를 번갈아 후려쳤다.
슈슈슈슈-!
날카로운 파공음이 허공을 찢으며 수백 수천의 장영이 어지럽게 난무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비도혈객의 입에서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아앗! 위험하다!"
그러나 그의 이 외침은 이미 시기를 잃고 있었다.
삼패주는 미처 신형을 옮기기도 전에 묵직한 압박감을 느껴야만 했다.
'헉! 이… 게 무슨 장… 법이란 말… 인가?'
짧은 시간, 그들의 안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그들 역시 녹림의 일류고수가 아닌가?
삼패주는 이빨을 마주 악물며 수중의 검을 일제히 내뻗었다.
쇄애액-!
빛살 같은 세 가닥 검기(劍氣)가 섬전을 방불케 할 만큼 쏘아 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삼패주의 마지막 발악에 불과할 뿐이었다.
진유걸이 전개한 장영이 어느 틈에 삼패주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정녕 사람의 음성이라고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처절무비한 단말마의 비명이 허공을 쥐어뜯었다.
"끄으악……!"
"허억!"
"으아아악……!"
심장을 도려 내는 듯한 부르짖음이 토해지며 시뻘건 선혈이 허공으로 쫘악 뿌려졌다.
금시 비릿한 피 내음이 중인들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삼패주는 이미 생명이 끊긴 듯 옴짝달싹도 못한 채 처참한 몰골로 땅바닥에 쓰러져 핏덩이를 쏟아 내고 있었다.
목전의 상황을 지켜본 비영신성 위종출은 쇠뭉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얼떨떨하였다.
'이제 보니 풍운서생은 무서운 고수였군. 귀하보의 삼패주를 단 일 초에 격살하다니…….'
그는 등골에 소름이 오싹 끼침을 느끼며 몸서리를 쳤다.
이것은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강북녹림을 장악하고 있는 비도혈객 왕우극은 넋 나간 사람마냥 멍청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싸늘한 시체로 변해 버린 삼패주를 둘러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네… 네놈은 서… 서혈천왕과 어떤 관계냐?"
그는 진유걸이 사용한 장법이 서혈천왕의 장법임을 알아본 것이다.
"아니, 서혈천왕이라면 백여 년 전에 사라졌던 사대천왕 중의 일 인이 아닌가?"
비영신성 위종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한동안 이살의 행동이 잠잠하더니, 이제는 사대천왕이 혈풍을 몰고 등장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풍운서생은 그들의 전인?'
하나 진유걸은 중인들의 놀람과는 상관없이 태연한 얼굴이었다.
"서혈천왕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겠소."
"아……!"
그가 시인하자 중인들은 탄성을 불어 냈다.
비도혈객 왕우극의 안색이 참혹하게 변하였다.
"음, 본좌가 귀하의 내력을 모르고 결례를 범했음을 사과하겠소. 금일은 이대로 물러가겠소."
아, 이럴 수가?
강북녹림의 우두머리인 비도혈객 스스로가 물러나겠다고 선언하다니… 그것도 깍듯이 존칭까지 써 가며…….
이로 미루어 사대천왕의 위명이 어떠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할 수 있으리라.
비도혈객이 치욕을 감수하며 물러갈 뜻을 밝히자, 진유걸은 코웃음을 쳤다.
"흥! 오는 것은 당신 자유지만, 가는 것은 그렇게 마음대로 안 될 것이오."
그의 음성은 만년한설(萬年寒雪)보다 더 차가웠다.
"그 뜻은……?"
비도혈객은 간담이 서늘해짐을 의식하며 더듬거렸다.
"내 세 가지 질문에 답한다면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하겠소."
비도혈객은 그의 당돌한 어조에 내심 부아가 치밀었으나 억지로 자제했다.
"그것이 무엇이오?"
풍운서생 진유걸은 예의 싸늘한 한기를 발산하며 입술을 떼었다.
"천년신옹 전우의 죽음에 대해 소상히 밝히시오!"
이 말에 비도혈객은 뜻밖이라는 듯 두 눈을 동그렇게 떴다.
아니 비단 그뿐만 아니라 위종출과 비표사웅, 백순혁 등도 의혹을 나타냈다.
비도혈객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다음 물음을 던지라는 시늉을 했다.
진유걸은 그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하북성의 양대표국을 무너뜨리려는 의도가 무엇이며, 당신의 배후에는 누가 있소?"
칼날같이 예리한 질문이었다.
장내에 있던 일행들도 모두 그에게 시선을 못박았다.
순간, 비도혈객 왕우극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네놈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하는구나. 죽어랏!"
그가 갑자기 우수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핑- 핑- 핑-!
순간, 그의 손목에서 솜털처럼 가는 암기가 우박처럼 폭사돼 나왔다.
"비열한 자!"
진유걸은 상대의 악독한 수법에 혀를 내두르며 빙글 신형을 돌렸다.
비록 비도혈객이 녹림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는 맹주가 아닌가?
한데, 이토록 잔인한 암수를 사용하다니…….
한순간 진유걸의 눈가에 으시시한 살기가 뻗어 나왔다.
이 때 홀연.
"와아… 죽여랏!"
"와와… 꼼짝 마라!"
우렁찬 함성이 일어나며 숲으로부터 한 떼의 무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타난 자들은 흑의경장에 병기를 꼬나 쥔 천지교 인물들이었다.
위종출은 격전이 눈앞에 다가오자, 커다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양대표국의 표사들은 절대 당황하지 말고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라!"
그는 목청껏 외치며 허리에 차고 있던 독문병기인 유성추를 뽑아 들었다. 일단 병기를 손아귀에 넣자 호기가 충천했다.
"비표사웅은 본인을 따르랏!"
그는 진유걸이 비도혈객 왕우극을 상대하는 것을 보며 재빨리 신형을 날렸다.
휘익- 휙-!
그 뒤로는 비표사웅이 수중에 병기가 든 채 뒤따랐다.
위종출은 천지교 수하 세 명을 그대로 후려쳐 갔다.
"가거라!"
그의 폭갈과 더불어 피를 갈구하는 유성추가 짓쳐들었다.
쇄- 쇄- 쇄액-!
모골이 송연할 정도의 파공음이 신랄하게 터지자, 천지교의 세 무사는 혼백이 산란할 지경이었다.
그들이 미처 방비할 사이도 없이 유성추는 허공을 갈랐다.
퍽- 퍼퍽-!
두개골이 빠개지는 듯한 둔탁한 기음이 작렬하며 처절한 인간의 부르짖음이 공기를 경직시켰다.
"으으으악……!"
"크악!"
"커억!"
핏덩어리가 분수처럼 뿜어져 오르며 혈육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세 무사는 허연 뇌수를 흥건하게 쏟아 내며 썩은 고목처럼 바닥에 나뒹굴었다.
비영신성 위종출은 흡사 상처받은 야수처럼 흉폭하게 날뛰었다.
"이얏! 가거라!"
그는 대성질타를 터뜨리며 날카로운 유성추를 종횡으로 날렸다.
쉬잉- 쉬잉-!
그 때마다 싸늘한 한풍이 휘몰아치며 맹렬한 기류가 사방팔방으로 휘몰아쳤다.
천지교 인물들은 그의 이 엄청난 기세에 혼비백산하여 이리저리 피하느라 아귀다툼을 벌였다.
하지만 위종출의 유성추는 어김없이 그들에게 작렬했다.
파르륵- 팍-!
그와 동시에 튀어나오는 처절무비한 단말마의 연속.
"으아악……!
"허억!"
"크으악……!"
짙은 피보라가 허공으로 치솟으며 뭉개진 살점 덩어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날았다.
폭우(暴雨)처럼 쏟아져 내리는 혈우와 으스러진 골육(骨肉)들!
정녕 끔찍한 정경이 아닐 수 없었다.
비표사웅 중 첫째인 비추섬영 곽영상은 월하편(月河鞭)이란 채찍을 사용하여 노련한 강호인답게 공수전환을 신속히 하며 적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비연수 곽구는 여러 명의 천지교 고수들을 상대로 약간 고전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그리 쉽게 패하지는 않을 듯 쾌속무비한 신법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들을 제외한 비천검객 곽항과 비화도 곽진원은 다소 불리한 상태에서 치열한 격전을 치르고 있었다.
이들은 각기 검과 도를 부여잡고 적이 이루어 놓은 검진 속에서 좌충우돌(左衝右突)하며 힘겨운 접전을 계속했다.
비표사웅은 과연 하북의 고수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죽음도 불사한 채 용감무쌍하게 상대를 무찔러 갔다.
이제 장내는 일대 혼전(混戰)이 야기되었다.
표물을 사수하려는 표사들과, 그것을 수중에 넣으려는 녹림 무리.
이들은 서로의 생사를 도외시한 채 무섭도록 살벌한 혈전(血戰)을 전개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풍운서생 진유설은 그들 표사의 기백을 보며 내심 용기백배했다.
"천지교주! 어떻게 죽고 싶소?"
그의 입에서 살얼음이 깔리는 듯한 냉음이 섬뜩하도록 흘렀다.
왕우극은 생애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으음, 강호의 모진 세파를 뚫고 오늘날 강북녹림을 좌우하는 용두대가(龍頭大哥)가 되었건만… 어찌 이 애송이에게 두려움을 느낀단 말인가?'
그는 애써 침작을 유지하며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본좌의 만산풍우(萬山風雨) 초식을 피해 내다니……."
비도혈객은 말과 함께 등 뒤에 삐죽이 나와 있던 한 자루의 유엽도(柳葉刀)를 꼬나잡았다.
진유걸은 그의 행동을 주시하며 여유 있게 물었다.
"한 번 더 묻겠소. 천면신웅 전우는 누구의 손에 죽음을 당했소?"
왕우극은 이마를 찌푸리며 유엽도를 천천히 치켜올렸다.
"본좌도 묻겠다! 본맹의 수하인 삼패주는 누가 살해했느냐?"
일순 진유걸의 얼굴에 서릿발 같은 기운이 어렸다.
"후후후… 바로 나요!"
그는 잔인한 웃음을 뿌리며 유삼에 가려져 있던 연검을 쫙 뽑았다.
천애고독검(天涯孤獨劍)!
이 연검은 광혈풍의 명성을 천하에 휘날리게 한 명검(名劍)이 아니던가?
비도혈객 왕우극의 안면이 창졸간에 무참히 일그러졌다.
"으윽! 광… 혈… 풍……!"
그는 너무나 경악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상대는 그 명성을 천하에 떨치고 있는 대살성 광혈풍이니 그럴 수밖에.
광혈풍 진유걸은 차디찬 냉소를 입가에 지었다.
"감히 나를 우롱하다니… 죽어 마땅하리라."
그는 천애고독검을 서서히 가슴 앞으로 추켜세웠다.
심장이 얼어붙을 정도로 섬칫한 살기가 왕우극의 일신으로 엄습했다.
'끝장이로구나. 저 놈은 강남녹림맹주 풍운신마장 우열과 귀웅신군 합구범, 소림삼현인, 독랑구혈 등의 연합공격도 막아 냈다는데…….'
그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며 자신의 유엽도에 혼신의 힘을 가했다.
이 때.
"맹주님! 그런 햇병아리는 속하들에게 맡겨 주십시오."
네 명의 천지교 수하들이 멋모르고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들이 어찌 광혈풍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겠는가?
만약 그의 진정한 신분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근처에는 얼씬하지 않았으리라.
천지교 수하들은 수중의 대두도(大頭刀)를 일제히 떨치며 진유걸에게로 달려들었다.
"뒈져라!"
그들의 폭갈과 더불어 으시시한 도기(刀氣)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슈슈슈슝-!
광혈풍 진유걸은 가소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수중의 천애고독검을 민첩하게 날렸다.
"탈혼마섬(奪魂魔閃)-!"
츠츠츠츠츠-!
고막을 들쑤시는 파공성과 함께 시퍼런 불꽃 송이가 작렬했다.
그 순간, 네 무사들은 수중의 대두도가 산산조각으로 파열돼 나감을 느꼈다.
하지만 잠시 후, 불에 덴 듯 화끈한 감각이 찾아왔다.
엄청난 고통이 그들의 배를 파고든 것이다.
네 무사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으악!"
"끄윽!"
"허억!"
"아아악……!"
그들의 배에서 시뻘건 창자가 뭉클 쏟아져 나왔다.
모골이 송연하고 등골에 식은땀이 날 만큼 잔인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으으, 이 무지막지한 살인광(殺人狂)!"
왕우극은 목전에 전개된 참상에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진유걸은 추호의 동요도 없이 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단지 그의 미간에는 붉은색 덩어리가 은은히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살괴(殺塊)!
무시무시한 살기가 뭉쳐 하나의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이것은 천여 년 전, 일세의 마인 천살성(天殺星) 사마기(司馬奇)가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천하는 이 대살성 사마기에 의해 온통 불안과 공포의 전율 속으로 빠졌다.
그는 천하을 주유하며 무수한 사람들을 학살(虐殺)하고 마음껏 흉명을 드날린 악마(惡魔)의 화신(化身)이었다.
천살성 사마기의 살생은 누구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正)과 사(邪), 선(善)과 악(惡)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한 혈겁을 자행했다.
그러다 어느 날, 천살성 사마기는 천하 세인(世人)들의 면전에서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의 종적이 묘연해지자 천하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불어 내는 한편 그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 그가 지녔던 통천가공(通天可恐)할 만한 무학(武學)을 얻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그의 흔적은 발견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실종과 더불어 스러져 간 삼대궁에 대한 풍운(風雲)만이 가슴 떨리게 들려질 뿐…….
혈궁(血宮),
포달랍궁(包達拉宮),
유아독녀궁(唯我獨女宮).
그렇다. 당시 무림을 지배하다시피 한 이 삼대궁이 사마기와 함께 동시에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흐르는 하나의 신비(神秘)였다.
살괴를 가진 천살성 사마기와 삼대궁에 얽힌 수수께끼.
이 엄청난 의문은 천여 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내려온 것이었으니…….
혹 살괴를 지닌 진유걸이 천살성 사마기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진유걸은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냉기 어린 눈길로 왕우극을 쏘아보았다.
왕우극은 그 눈빛에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는 원래 진유걸이 자신의 수하들을 상대할 동안 도망치려고 했었다.
한데, 그는 탈혼사자의 쾌도법으로 단 일 초에 수하들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게 아닌가?
그 바람에 왕우극은 절호의 기회를 잃고 만 것이다.
"으… 죽어라!"
비도혈객은 공포에 못 이겨 먼저 선수를 쳤다.
그는 강룡과하(强龍過河), 야화소천(野火燒天)의 초식을 잇따라 펼쳐 냈다.
위이잉-!
강맹한 도풍(刀風)이 진유걸의 유근(乳根), 기해(氣海), 중극(中極) 등의 요혈을 노리고 섬전처럼 폭사되었다.
정녕 강북녹림의 절정고수다운 쾌속절륜한 수법이었다.
진유걸은 진기를 짧게 들이마시며 절세의 신법을 구사했다.
"팔방풍영보(八方風影步)-!"
이 보법은 사대천왕이 전성기 때 사용하던 잘묘한 신법이었다.
일단 이것이 전개되면 어떠한 공격이라도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고 피해 낼 수 있는 기공이초(奇功異招)였다.
기실 진유걸은 중조산 절애 아래 위치한 망당수에서 서혈천왕 마우성으로부터 몇 가지 절학을 전수받고 나왔던 것이다.
지금 사용한 보법 팔방풍영보 외에도 삼패주를 격살한 장법 혈폭영과 검법, 지법(指法) 등이 있었다.
비도혈객 마우성은 눈앞이 번쩍 하는 순간 진유걸이 모습을 감추자 몹시 당황하였다.
"허억! 아니, 어떻게 된 거지?"
그가 등골이 시리도록 경악하고 있을 때, 진유걸의 천애고독검이 여지없이 공간을 갈랐다.
쇄애액-!
혼(魂)을 부르는 악마의 소성(笑聲)처럼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고막을 찔렀다.
순간, 비도혈객 왕우극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목줄기로 빛살처럼 폭사되어 오는 가공스런 검기(劍氣)를.
하지만 순순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왕우극은 본능적으로 유엽도를 힘껏 움켜쥐며 비스듬히 치켜올렸다.
그는 이 방어에 자신의 생명을 건 듯 이빨을 무섭게 악물었다.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이 금시라도 튀어나올 듯 부릅떠진 걸로 보아, 비도혈객 왕우극이 혼신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 가장자리에는 이미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땅거미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파팍-!
찰나, 기묘한 음향과 동시에 폐부를 씹어 삼키는 듯한 처절한 비명 소리가 허공을 쥐어뜯었다.
"크으으악……!"
그의 머리통은 몸체와 분리되어 삼 장 밖으로 날아갔다.
절단된 복부 위에서 시뻘건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며 끔찍스런 피비린내를 풍겼다.
정녕 눈 뜨고는 보지 못할 참혹한 광경이었다.
일세를 풍미하던 강북녹림의 총표파자 비도혈객 왕우극!
말년에 이른 그의 죽음은 이토록 비참한 것이었다.
광혈풍 진유걸은 그를 제거하자, 성난 야수처럼 격전장으로 몸을 날렸다.
"푸하하하… 가거라! 녹림의 졸개들아!"
그는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수중의 연검을 종횡으로 난무시켰다.
위위윙-!
사람의 혼백을 앗아 갈 듯한 기음이 발출되며 위맹한 검기가 부챗살처럼 퍼져 나갔다.
천지교 무사들은 대경실색하며 서둘러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유걸의 손속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검빛은 마치 흐르는 유성처럼 그들의 요혈 속으로 파고들었다.
파르르르륵-!
이 때마다 솟구치는 처절한 단말마의 행렬.
"으악!"
"허억!"
"으윽!"
내장을 훑어 내는 듯한 비명 소리가 어둠이 깔리는 관도 위를 뒤흔들었다.
진유걸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혈채를 털어 버리려는 듯, 무섭도록 잔인하게 검을 난사했다.
슈슈슈슝-!
악귀의 부르짖음과도 같은 천애고독검의 파공성이 진홍빛 선혈을 요구하며 공간을 갈랐다.
천지교 무사들은 신출귀몰한 진유걸의 손 아래 썩은 고목처럼 나뒹굴었다.
시산혈해(屍山血海).
이지를 상실한 육신들은 한낱 고깃덩어리로 화한 채 지면을 굴렀고, 징그러운 피는 바닥을 적시며 흘렀다.
아아, 참상(慘狀)!
여기가 곧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이 아니고 뭐겠는가?
천지교 무사들은 자신들을 지휘하던 비도혈객 왕우극과 삼패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들은 오직 도주할 길을 찾으며 정신없이 허둥댔다.
침착함을 잃은 무림인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
그 때문에 그들은 더욱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얼마 후, 그토록 치열하게 전개되던 혈전도 서서히 그 막을 내렸다.
그제서야 광혈풍 진유걸은 어느 정도 흥분을 가라앉히며 천애고독검에 주입시켰던 진기를 회수했다.
이 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풍운서생! 본인은 실로 오늘에서야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음을 깨달았소이다."
진유걸은 싱긋 미소를 머금으며 신형을 돌렸다.
그의 전면에는 핏물을 뒤집어쓴 듯한 비영신성 위종출이 감격에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신주용검 백순혁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휴! 내가 표국에 발을 들여놓은 지 오십 년이 돼 가지만, 금일처럼 처절한 혈전은 처음이오. 도주한 천지교 인물들은 겨우 십여 명에 불과하오. 이게 모두 풍운서생 덕분이오."
진유걸은 쑥스러운 듯 화제를 돌렸다.
"자아,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대열을 정비하여 다음 숙소까지 가도록 합시다."
"예."
위종출과 백순혁은 신기(神技)에 가까운 진유걸의 솜씨에 놀랐던지 고분고분해졌다.
그 때였다. 돌연 앞서 가던 진유걸의 눈가에 기이한 살기가 번개처럼 스쳐 갔다.
'누굴까? 당금 무림에서 이토록 절묘한 신법을 지닌 지가 있다니… 어느 틈에 오 장까지 접근했구나.'
그는 숲이 우거진 곳을 직시하였다. 그리고 낭랑한 음성으로 숲 속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느 고인이 왕림하셨소?"
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일진의 옷자락 스치는 소성이 일었다.
휘익- 휙-!
옷자락을 바람에 나풀거리며 등장한 인영들.
그들은 바로 강태위의 객관에서 상면한 바 있는 세 화상들이 아닌가?
홍색 가사를 걸친 그들은 묵묵히 진유걸을 주시하며 염주알을 굴렸다.
광혈풍은 이미 그들의 내력이 심상치 않음을 짐작하고 있던 터이라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 세 분 고승이셨군요.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참으로 반갑소이다."
그들 중 나이가 가장 들어 보이는 노화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소협의 무공은 실로 경이할 만하오. 노납은 화천존인(和天尊人)이라 불리우는 서장인(西藏人)이오. 이쪽은 사제들인 화각과 화평이오."
진유걸은 그들에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이미들 아시겠지만, 후배는 풍운서생이란 무림말학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들이 떳떳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다니… 기이한 일이군.'
화천존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노납 일행은 강 대인을 찾았다가 우연히 공자가 강 대인을 구하는 모습을 보고 흠모를 금치 못했소. 늦게나마 이렇게 찾아온 것은, 소협과 긴요히 의논할 말이 있어서요."
진유걸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연매의 말로 미루어, 강 대인도 이 자들과 오랫동안 숙의를 했다고 하던데… 어떤 내용이었을까?'
그는 이리저리 염두를 굴린 뒤 대답했다.
"지금은 곤란하고… 앞으로 며칠 후 이 표물이 연운항에 닿는 날, 그 곳 동평객잔에서 대면키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화천존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소협의 의향에 따르리다. 그럼 나중에 만납시다."
그는 간략하게 대꾸한 뒤 사제들을 이끌고 총총히 사라져 갔다.
광혈풍 진유걸은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문득 중얼거렸다.
"저들의 정체가 확실치는 않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들이 고수라는 점이다. 그것도… 중원에서 몇 안 되는 일급고수만이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그는 멀리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느 틈엔가 어둠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공자! 모든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이제 출발하지요."
준비를 끝낸 비표사웅 중 셋째 비표검객 곽항이 재촉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 올라타는 진유걸의 얼굴로 잠깐 알 수 없는 고뇌의 빛이 머물다 사라졌다.
"이럇!"
그는 괴로움을 이기려는 듯, 준마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