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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章 미녀(美女)의 연정(戀情) (6/35)

第五章 미녀(美女)의 연정(戀情)

1

둥- 둥-!

초경(初更)을 알리는 경고(更鼓) 소리가 땅거미가 깃드는 대지 위로 울려 퍼졌다.

하북성 대부호 강태위의 장원.

초원(草原)처럼 드넓은 정원(庭園)에는 아름답게 꾸민 가산(假山)과 이름 모를 화초(花草)들이 추색(秋色)에 젖어들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 정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백의청년이 있었다.

건장한 체구에 귀티가 흐르는 문사 차림의 청년.

그는 바로 풍운서생으로 변장한 진유걸이었다.

'이 곳에 머문 지도 벌써 삼 일이 흘렀구나. 강 대인의 말로는 오늘 중으로 모든 것이 준비된다고 했는데…….'

그는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 채 허공으로 고개를 돌렸다.

밤하늘에는 미녀의 눈썹 같은 초생달이 엷은 휘광을 내뿜고 있었다.

문득 허공 위로 한 여인의 영상이 떠올랐다.

부드럽고 온화하며, 사람을 포근히 감싸 주는 여인!

그녀는 바로 강보연이었다.

지난 삼 일 간 그녀는 진유걸을 헌신적으로 간호해 주었다.

물론 그가 강태위의 생명을 구해 주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사랑을 느끼고 있는 한 여인의 순수한 감정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강보연의 마음을 진유걸이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마음을 애써 모른 체하고자 했다.

그는 주수연의 배신으로 인해 여인들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들은 모두 믿지 못할 존재들이다. 수연, 그녀는 나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그런데도 나를 배신했다. 여자들은 모두가 그런 존재들인 것이다.'

진유걸은 복받쳐 오르는 절규에 내심 입술을 와락 깨물었다.

이 때 돌연, 뒤에서 경미한 인기척이 들렸다.

'연 낭자가?'

이어 향긋한 사향내를 풍기며 강보연이 모습을 나타냈다.

"여기에 계실 줄 알았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계셨어요?"

그녀는 진유걸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공연히 마음이 뒤숭숭해서 나왔소. 한데, 낭자는 어인 일로 나왔소?"

강보연은 그를 향해 곱게 눈을 흘겼다.

"아이 참, 연매(蓮媒)라고 부르라고 했잖아요?"

"하하하… 낭자가 나를 공자라고 부르는데, 내 어찌 연매라고 부를 수가 있겠소?"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소녀가 먼저 바꾸도록 하겠어요."

강보연은 그를 바라보며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 더할 수 없이 다정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오빠……!"

진유걸은 그녀의 호칭에 가슴이 찡해 옴을 느꼈다.

"연매……!"

강보연은 그의 부름에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오빠의 목소리를 어디선가 꼭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오빠, 혹 광혈풍이란 사람을 아세요?"

순간 진유걸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의 명호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으나 한 번도 대면한 적은 없소."

강보연은 그에게서 무언가를 찾아 내려는 듯 눈빛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많은 무림인들이 그를 살인마라고 생각하지만 그 분은 결코 악인이 아니에요. 그 분과 가장 절친한 탈혼사자도 그렇고요."

일순, 진유걸의 눈가로 한 가닥 냉소가 스쳐 갔다.

"그렇지 않소!"

갑작스런 그의 강경한 어투에 강보연이 일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였다.

"아니, 오빠는 그들과 만난 적도 없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단정지을 수 있죠?"

진유걸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했음을 깨닫고는 얼른 마음을 진정했다.

"그건… 단지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오."

강보연은 그의 태도가 몹시 의아했으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저… 실은 오빠에게 드릴 말이 있어요."

"무슨 말이오?"

강보연은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한때 이살 중 광혈풍이란 분을 마음 속에 품은 적이 있었어요."

그녀는 예전 광혈풍을 찾아 천하를 떠돌며 갖은 고난을 당했던 일들을 얘기해 주었다.

"그들을 찾지 못하자 저는 죽음을 생각하기에 생각했어요. 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거죠."

진유걸은 그녀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자기를 찾아다닌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었지만, 설마 그녀가 죽음까지 생각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오."

"그래요. 참으로 우매한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바닷가 벼랑 위에서 그를 그리워하며 몸을 던지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때 누군가가 나타났어요."

"천만 다행이로군. 그 사람이 누구였소?"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 분은 남녀간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며… 내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올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그 분의 말씀대로 오빠가 온 거예요."

고백과도 같은 강보연의 말에 진유걸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 그건 안 되오."

그는 난색을 표하며 두 손을 좌우로 내저었다.

그러자 강보연은 그에게 한 발 더 다가서며 애원하듯 외쳤다.

"저는 오빠를 보는 순간 느꼈어요. 우리들은 같은 처지예요. 오빠도 상처를 안고 있고, 저도……."

"그만! 나에게는 그 한 번의 상처로 족하오. 만일 그 일이 다시 한 번 반복된다면… 아, 정녕 상상하기도 두려운 일이오."

"그런 일은 이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아요. 제가 오빠의 상처를 감싸주겠어요."

"아… 안 되오, 연매! 세상에는 나보다 더 나은 인물들이 얼마든지 많소."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강보연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제가 갈 길은 죽음밖에 없나 보군요?"

그녀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진유걸의 가슴을 찔렀다.

"나는 이미 버림받았던 여자예요. 그러니 오빠가 나를 싫어하는 게 당연해요."

눈물을 흘리며 처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진유걸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쓸데없는 소리! 누가 연매를 버렸단 말이오? 아무도 그럴 수 없소."

"오빠… 흐윽… 흑……!"

강보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진유걸의 가슴으로 안겨 왔다.

"연매, 그만 진정하구려. 사실 나도 연매가 싫지는 않소. 그러나… 흡!"

강보연이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더 이상 말하지 마세요. 그 말만으로도 충분해요. 오빠가 나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 나는 기다릴 수 있어요. 언제까지나……."

"그건 연매에게 너무 손해되는 일이 아니오?"

"그래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제가 가장 알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바로 오빠의 이름이에요."

풍운서생은 이제껏 감춰 왔던 본명(本名)을 밝히기가 거북한 듯 잠시 망설였다.

"어서요! 오빠의 이름도 모른다면 내가 너무 슬퍼지잖아요."

풍운서생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성(性)은 진(陳)이고, 이름은 유걸(儒傑)이라 하오."

강보연은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진… 유… 걸… 진유걸……."

진유걸은 그런 그녀가 왠지 사랑스러워 보였다.

진유걸을 향한 강보연의 마음처럼 가을 밤은 점점 더 깊어만 가고 있었다.

이튿날 강태위의 서재(書齋).

그 곳에는 모두 네 명의 인물들이 모여 대담(對談)을 나누고 있었다.

정면의 태사의에는 청수한 인품(人品)의 강태위가 자리했고, 그 곁에는 풍운서생으로 변장한 진유걸이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보통 체격에 푸른 장삼을 입은 매우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청년이 앉아 있었다.

부리부리한 두 눈은 장비(張飛) 같은 고리눈이었고, 입술은 강직한 기운을 풍겼다.

그의 허리에는 어린애 머리통만한 유성추(流星錘)가 매달려 있어 보기에도 매우 위엄이 있어 보였다.

비영신성(飛影神星) 위종출(偉鐘出).

하북성에서 청원표국과 함께 이대표국으로 이름난 비표표국의 국주 비화심표 위천진의 영식(令息)이다.

그는 이 년 전, 부친이 운영하던 비표표국의 총표두 자리를 물려받았다.

당시 그가 총표두 자리에 오르자 세인(世人)들은 비표표국이 끝장났다고 개탄해 하였다.

하지만 이 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그의 명성은 하북성 뿐만 아니라 인접한 산동성(山東省), 산서성(山西省)까지 퍼져 나갔다.

비영신성 위종출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출충한 기지(奇智)와 담대한 용기로 총표두의 임무를 충분히 수행해 낸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하북성 제일부호인 강태위가 움직이는 청원표국과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모두 비영신성 위종출이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루어 놓은 개가(凱歌)였다.

위종출의 옆에는 청원표국 총표두인 신주용검(神州龍劍) 백순혁(白淳赫)이 앉아 있었다.

신주용검은 청원 출신으로 약간 마른 체격에 예리한 눈매를 지니고 있는 고희(古稀)의 노인이었으나, 무림에서 이름을 떨치는 화산파 제자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표국의 쟁자수(下人)로 일하며 입신양명(立身揚名)한 인물이었다.

그의 등에는 그와 함께 고락을 같이한 보검 용혈검(龍血劍)이 번쩍이고 있었다.

진유걸은 그들을 둘러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금괴를 호송하게 되면 필시 많은 인물들이 노리게 될 것이오. 그러니 모두 만전을 기해 주시오."

"그렇다면 이 곳에서 연운(連雲)까지는 육로(陸路)를 이용하고, 거기부터 항주까지는 선박(船舶)을 이용하는 게 어떻습니까?"

비영신성 위종출의 말에 신주용검 백순혁이 무릎을 탁 쳤다.

"그게 좋겠소이다. 시일도 훨씬 줄일 수 있을 뿐더러, 표물을 노리는 자들도 따돌릴 수 있으니……."

강태위는 동의를 구하는 뜻으로 진유걸을 힐끗 바라보았다.

진유걸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그럼 저희들은 준비 때문에 이만 물러가겠소이다."

비영신성 위종출과 신주용검(神州龍劍) 백순혁(白淳赫)이 물러가자, 강태위가 궁금하다는 듯 진유걸에게 물었다.

"그런데 오백 관이나 되는 금을 어디다 쓰려고 하는 건지요?"

"그건 다음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보다 원양벽뢰쌍기가 왜 대인을 노렸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까?"

강태위는 고개를 내저었다.

"글쎄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몸을 보중하도록 하십시오. 그들에게 청탁을 한 인물이 또 다른 살수를 부를 수도 있으니까요."

"공자의 조언, 깊이 새겨 두겠소이다. 그리고 이것은 제가 준비한 것입니다."

강태위는 탁자 밑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진유걸은 그것을 보자 가벼운 탄성을 토했다.

"아니, 그건 파양쌍귀상인이 가져온 미인도가 아닙니까?"

"그렇소이다. 공자에게 마땅히 드릴 선물도 없고 해서, 약소하나마 이것을 준비했소이다."

진유걸은 움찔 놀라며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나는 이런 물건을 받을 자격도 없거니와, 내게 필요치도 않습니다. 그러니 대인께서는 거두어 주십시오."

진유걸은 강경한 어조로 그의 호의를 뿌리쳤다.

그러나 이 일로 말미암아 호북제일부호 강태위가 싸늘한 시체로 변하게 될 줄이야…….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세상 일이 아닌가?

2

다음 날.

휘황찬란한 태양(太陽)이 천지를 포용하는 진시경(辰時更).

강태위의 웅장한 장원으로부터 한 떼의 인마(人馬)가 쏟아져 나왔다.

선두에는 백의경장을 차려 입은 비표표국 총표두 비영신성 위종출이 전장(戰場)에 나가는 맹장(猛將) 같은 자세로 말을 몰고 있었다.

그 뒤로는 네 필의 말이 따르고 있었다.

마상에는 청색 경장에 <비표(飛豹)>라는 글자를 새긴 중년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태양혈이 불쑥 돌출되어 있어, 내외공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암시했다.

비표사웅(飛豹四雄)!

비추섬영(飛追閃影) 곽영상(郭英相),

비연수(飛連手) 곽구(郭究),

비천검객(飛天劍客) 곽항(郭恒),

비화도(飛華道) 곽진원(郭眞元).

비표표국의 표두( 頭) 중 가장 뛰어난 고수들이었다.

이들의 등장으로 미루어 비표표국이 이번 일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었는지 알 수 있었다.

비표사웅의 뒤로는 다시 십여 명이 도검(刀劍)을 착용한 채 따르고 있었다.

또 그들 뒤로는 여덟 필의 준마가 한 대의 마차를 끌고 있었다.

이 팔두마차에는 무거운 물건이 실린 듯, 마차를 끄는 말들이 무척 힘겨워 보였다.

역시 그 마차의 좌우에는 표사들이 호위를 하고 있었고, 후미에도 많은 고수들이 따르고 있었다.

뒤편에는 청원표국의 표사들이 따랐고, 총표두인 신주용검 백순혁도 보였다.

그리고 백순혁의 옆에는 청삼을 산뜻하게 입은 진유걸이 유유히 말을 몰고 있었다.

광혈풍 진유걸!

그는 가슴에 너무도 깊은 한(恨)을 지니고 있었으나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경치를 구경 나온 풍류공자처럼 담담해 보였다.

"백 총표두! 연운까지의 행로는 순탄하겠습니까?"

진유걸의 물음에 백순혁이 투명스럽게 대답했다.

"글쎄올시다."

백순혁은 내심 진유걸을 불쾌하게 여겼다.

'어린 놈이 건방지기 짝이 없군. 강 대인은 저 자가 뛰어난 고수라 했지만, 실력을 보기 전에 어떻게 믿어? 언제고 기회를 보아 단단히 골탕을 먹여 주겠다.'

진유걸은 애써 모른 척하며 다시 물었다.

"백 총표두는 연운항(連雲港)에 자주 가 보셨겠구려?"

신주용검 백순혁은 심기가 뒤틀렸으나, 꾹 참고 대꾸했다.

"그렇소.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가 보았소."

"그렇다면 연운항에 위치한 동평객잔에 대해 잘 아시겠구려?"

백순혁은 순간 의아한 얼굴로 진유걸을 주시하였다.

"물론 잘 알고 말고요. 아니, 그런데 공자가 어떻게 동평객잔을? 혹, 그 객잔에서 나를 본 적이라도 있소?"

진유걸의 얼굴이 순간, 차갑게 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팔 년 전에 우연히……."

신주용검은 갑작스런 그의 냉막한 태도에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팔 년 전이라면 꽤 오래됐군요. 동평객잔은 연운항까지 표물을 운송할 때마다 자주 이용하던 곳이었소. 한데, 공자는 기억력도 좋으시군요."

"내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당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은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쌀쌀하였다.

백순혁은 그 때의 일이 잘 생각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글쎄요. 하도 오래된 일이라 그 때의 전혀 떠오르지 않는군요."

"당신은 아마 잊었는지 모르지만, 짐승처럼 학대받던 두 점소이는 그 때 그 일을 결코 잊지 못하고 있을 게요."

그는 말을 끝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주시하던 신주용검 백순혁이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하나의 사건을 기억해 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설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팔 년 전.

신주용검 백순혁은 중요한 표물을 운송하느라 신경이 몹시 예민해져 있었다.

더구나 그 때는 청원표국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표물 운송 중에 녹림무리들이 끊임없이 공격을 가해 오곤 하던 때여서 더욱 신경이 날카로와 있을 때였다.

신주용검 일행은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간신히 연운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 임무가 끝나자 마음이 해이해진 표사들은 기분 전환을 위해 동평객잔을 찾았다.

그런데 일은 거기서 터지고 만 것이다.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신 표사 한 명이 그 곳에서 일하는 점소이를 놀린 것이다.

"이 놈아! 네 아비는 네 어미를 팔아먹었다지? 그러면 너도 네 누이를 팔아먹지 그랬느냐? 그랬으면 이 고생을 하지 않을 게 아니냐?"

"와하하하……!"

그의 말에 다른 표사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당사자인 점소이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바로 그 점소이가 훗날 대살성으로 불리워지는 탈혼사자 독고휘였으니…….

독고휘는 그 표사의 말에 설움이 복받쳐 그대로 울분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누구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소! 그런 말을 하는 자는 내 손에 모두 죽을 거요! 당신 역시 마찬가지요!"

독고휘는 말과 함께 그 표사의 천돌혈(天突穴)을 후려쳐 갔다.

표사는 재빨리 허리를 젖히며 피하느라 피했지만, 술에 취해 동작이 너무 느렸고 반면 독고휘의 출수는 너무 빨랐다.

퍽-!

독고휘의 주먹이 표사의 천돌혈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고.

"으웩!"

표사는 음식물을 토해 내며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 광경을 목격한 나머지 표사들이 분분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독고휘에게 달려들었다.

"네놈이 오늘 살기가 싫은 모양이구나."

그러나 표사들은 모두 술에 취해 있어 행동이 느렸기에, 독고휘는 민첩하게 몸을 움직여 그들의 공격을 피해 냈다.

이 때 신주용검 백순혁은 독고휘의 신법을 보고는 기겁할 듯 놀라고 말았다.

'아니? 저 애가 시전하는 것은 무당파 신법과 소림파의 백보신권(百步神拳)이 아닌가? 이… 이럴 수가……?'

아니나 다를까? 

"으악!"

"허윽!"

잠시 후, 두 명의 표사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 놈의 자식! 잡히기만 하면 단단히 버릇을 고쳐 주마."

칠 척 거구의 텁석부리 거한이 거칠게 외치며 탁자를 발로 걷어찼다.

우지끈-!

탁자가 부서져 나가며 독고휘를 향해 날아갔다.

"어헉!"

독고휘는 다급히 비명을 쏟아 내며 물러났지만, 그만 한 명의 표사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흐흐흐… 요놈! 잘도 도망쳤겠다? 어디 맛 좀 봐라!"

잔뜩 약이 오른 장한의 솥뚜껑만한 주먹이 허공으로 치켜올려졌다.

만일 그대로 내리친다면 독고휘의 안면은 그야말로 피곤죽을 면치 못할 순간이었다.

이 때 돌연.

"멈춰요!"

앙칼진 대갈일성과 함께 누군가 몸을 날려 장한의 가슴을 걷어차 버리는 게 아닌가?

퍽-!

"으윽!"

비명 소리와 함께 독고휘를 내리치려던 장한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독고휘 곁에 가볍게 내려선 소년, 그는 바로 진유걸이었다.

그는 만면에 살기를 띄운 채 주위를 둘러싼 표사들을 싸늘하게 훑어보았다.

"여러분들은 의기가 충천한 무림인들로 아는데, 어찌하여 휘를 괴롭히십니까? 더구나 지각(知覺) 있는 어른들이 한 명의 어린애를 상대로 싸우시다니요?"

진유걸의 따가운 일침에 신주용검 백순혁은 내심 찔끔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북성에서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청원표국의 표사들이 아닌가?

무림인도 아닌 일개 점소이에게 봉변을 당하고 물러간다면, 그야말로 하루 아침에 웃음거리가 될 일이었다.

무림인들에게는 명예가 목숨보다 더 소중하지 않은가?

'낭패로구나. 이 일을 어찌 수습해야 한단 말인가?'

신주용검 백순혁의 고민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이미 술기운이 뻗친 표사들이 진유걸과 독고휘를 향해 무작정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놈들! 뒈져랏!"

진유걸은 덮쳐 온 표사의 공격을 피해 내며 그의 옆구리를 걷어차 버렸다.

퍼억-!

둔중한 음향과 함께 고통스런 신음이 흘렀다.

"으으윽……!"

찰나, 신주용검 백순혁은 자지러질 듯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으헉! 지금 저 소년이 시전한 것은… 화산파의 절초!'

그는 그제서야 이 시비가 간단히 마무리되지 않을 것임을 간파했다.

'안 되겠군. 이러다간 본 표국이 망신만 당하겠어. 저 아이들의 내력이 어찌 되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상황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백순혁은 생각을 끝내며 진유걸의 가슴을 힘껏 후려쳐 갔다.

휘익-!

진유걸은 서둘러 몸을 빼냈다.

하지만 이번 공세는 백순혁의 허초에 불과했다. 그는 민활하게 손을 회수하며 독고휘의 옆구리를 그대로 후려쳐 갔던 것이다.

파팍-!

독고휘는 백순혁의 속임수에 피할 사이도 없이 얻어맞고 말았다.

"으으윽……!"

그는 비명을 내지르며 썩은 나무 토막처럼 고꾸라졌다.

그러자 표사들이 독고휘를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에이, 괘씸한 놈!"

"아주 못된 놈이야! 그냥 둬서는 안 돼!"

그들은 한꺼번에 달려들어 쓰러진 독고휘에게 뭇매를 가했다.

이 광경을 본 진유걸은 미친 듯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안 돼! 안 돼!"

그는 객잔 안이 떠나가라 부르짖으며 자신의 몸으로 독고휘의 몸을 감쌌다.

참으로 눈물겨운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미 이성을 상실한 표사들에게 두 사람의 우정 어린 모습이 보일 리가 없었다.

술에 취한 그들은 진유걸과 독고휘를 무자비하게 짓밟고 말았다.

퍼퍽-!

"아악!"

"으윽!"

그 때마다 터져 나오는 처절한 두 소년의 비명 소리!

"헉!"

일순, 신주용검 백순혁은 짤막한 신음을 터뜨리며 현실로 돌아왔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그 이튿날 우리는 그 곳을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그 날의 일이 강호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설마 풍운서생 그 자가……?"

신주용검 백순혁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며 진저리를 쳤다.

사흘 후.

진유걸 일행은 하북 땅을 지나 산동성(山東省)으로 접어들었다.

어느 순간, 대열의 선두에서 지휘하던 비영신성 위종출이 번쩍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멈춰라!"

그의 고함 소리에 그의 뒤를 따르던 비표사웅이 민첩하게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둘째인 비연수 곽구가 물었다.

"총표두, 무슨 일이십니까?"

비영신성 위종출이 앞을 가리켰다.

"저기를 좀 보게나."

비표사웅의 고개가 모두 그가 가리킨 곳을 향했다.

그 곳에는 새들이 하늘을 빙빙 맴돌고 있었다.

"저 새들이 자신의 둥지로 들어가지 않고 빙글빙글 도는 것으로 미루어, 전면 숲 속에 적이 매복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큰 짐승이 버티고 있겠군요?"

비표사웅 중 첫째인 비추섬영(飛追閃影) 곽영상(郭英相)의 말에 비영신성 위종출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역시 오래된 생강이 맵다더니, 곽 표두의 안목이 실로 놀랍소이다."

그 때 그들 사이로 진유걸이 끼여들며 말했다.

"조직력도 있고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걸로 보아, 예사 도적들이 아닌 것 같소."

진유걸의 이 뚱딴지 같은 소리에 비영신성 위종출을 비롯한 비표사웅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공자께서 그런 사실을 어찌 아시오?"

비영신성 위종출과 비표사웅은 진유걸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저들은 우리에 대한 정보를 사전(事前)에 미리 입수하고 우리가 오기 전부터 매복하고 있었을 거요. 우리가 누구라는 걸 알면서도 매복해 있다는 것은, 저들의 기세가 그만큼 방대하다는 뜻이 아니겠소?"

일순 비영신성 위종출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하나는 풍운서생의 그 절묘한 판단력에 놀랐고, 다른 하나는 표물을 노리는 인물들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아, 이 친구의 지혜는 정녕 대단하구나. 만일 이 사람이 악인이 된다면 그야말로 이살에 버금 가는 살성이 될 것이다. 한데, 우리를 노리는 저 자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돌연 살염이 철철 넘쳐흐르는 괴성이 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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