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章 풍운서생(風雲書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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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성(河北省) 청원(淸苑).
강북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곳 청원은 번화한 거리와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들, 그리고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솟아 있는 각종 전각들과 눈에 띄게 화려한 경관(景觀)으로 하북성의 고진명읍(古鎭名邑) 중 첫손에 꼽힐 만한 성도(城都)였다.
이 곳 하북성 청원의 제일(第一) 부호(富豪) 강태위의 장원에 어느 날 한 인물이 찾아왔다.
나타난 인물은 백색 유생건(儒生巾)에 하얀 유삼(儒衫)을 산뜻하게 차려 입은 서생이었다.
나이는 약 이십여 세 가량 되었을까?
평범한 모습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비범한 기운이 느껴지는 젊은이였다.
그는 다름 아닌 인피면구를 쓰고 풍운서생이란 신분으로 변장한 광혈풍 진유걸이었다.
그는 장원을 경비하는 무사를 따라 외당(外堂)의 객관(客官)으로 안내되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구려. 곧 대인께서 납실 테니……!"
진유걸은 경비무사가 사라지자 객관 내부를 둘러보았다.
객관 안은 장방형(長方形)의 탁자와 몇 개의 의자들만이 놓여 있을 뿐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 흔한 화병이나 향로 하나 들여 놓지 않다니… 강태위란 자는 소문대로 지독한 인물인가 보군.'
객관에 먼저 자리해 있던 몇몇 사람들 역시 그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일견하기에도 강태위에게 청탁(請託) 때문에 몰려든 사람들로 보였다.
먼저 두 명의 중년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험상궂은 얼굴에 얄팍한 입술을 지니고 있어, 간사함과 흉악함을 같이 지니고 있는 듯했다.
이 두 중년인 곁에는 세 명의 화상들이 좌정한 채 눈을 꼭 감고 수중의 염주를 연신 굴려 대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한 쌍의 늙은 노부부가 보였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들은 온통 주름살 투성이였다.
그들 노부부는 주위의 이목도 아랑곳없이 서로 다정스럽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진유걸은 희미한 미소를 띄우다 말고 내심 경악성을 터뜨렸다.
'아니? 저것은……?'
진유걸이 보고 놀란 것은 노인이 들고 있는 퉁소 때문이었다.
벽옥(碧玉)을 깎아 만든 듯 푸르스름한 광채를 내뿜는 퉁소!
진유걸은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그 노부부를 다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들이 무엇을 노리고 여기에 나타났을까? 강태위의 부름을 받고 나타났다면 이런 객관에 머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
그는 노부부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 한동안 염두를 굴리다 이번에는 한 명의 꽃 같은 소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비록 절색의 미녀는 아니었지만 귀여운 용모를 하고 있는 소녀였다.
소녀의 옷차림은 몹시 남루하여 첫눈에 보아도 비천한 신분임을 알 수 있었다.
진유걸은 그녀를 끝으로 객관에 머물고 있는 인물들을 모두 훑어보았다.
'저 소녀만 빼고는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 자들이군. 그리고 저 노부부는 특히…….'
이 때 두 중년인 중 이마 위에 칼자국이 난 인물이 작게 속삭였다.
"범(梵) 형(兄)! 과연 강 대인이 이 물건을 구입할까요?"
범 형이라 불린 회의중년인이 조심스럽게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물론이지. 그는 명화(名畵)와 명장(名匠)들의 공예품을 소장하는 취미가 있으니 아마 이 물건을 보면 군침을 흘릴 거다."
진유걸은 그들의 말에 호기심을 느꼈다.
그 때 노부부도 궁금했는지 넌지시 물었다.
"이봐, 대체 무얼 가지고 그러는 게야? 좀 볼 수 없는가?"
회의중년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것은 은자 십만 냥 정도의 값어치가 있는 귀한 것이라 함부로 보여 줄 수가 없소."
일순 퉁소를 지니고 있던 노인의 눈빛이 기묘하게 변했다.
"이 놈아! 나이 든 노인이 좀 보자고 하면 냉큼 꺼내 놓을 것이지 웬 잔말이 그렇게 많으냐!"
노인의 호통에 두 중년인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 때 진유걸이 얼른 나서며 세 사람을 말렸다.
"두 분은 혹 강서성 파양호( 陽湖)에서 명성을 드높이고 계신 파양쌍귀상인( 陽雙鬼商人)이 아니신지요?"
그러자 두 중년인은 움찔 놀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렇소. 나는 파양천귀( 陽天鬼) 범서(梵瑞)이고, 이쪽은 파양지귀( 陽地鬼) 방윤(方允)이오."
회의장삼을 걸치고 있던 중년인이 자신들을 소개했다.
"아, 대명이 쟁쟁하신 두 분 대협을 이렇게 만나다니… 실로 영광이외다."
진유걸의 아부 섞인 말에 파양쌍귀는 자못 의기양양해졌다.
"허허허… 이 곳 하북 땅에 우리 형제들을 알아주는 인물이 있다니… 감격할 따름이오."
진유걸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보아하니 두 분은 강 대인께 물건을 팔러 왔나 본데 좀 꺼내 보시구려. 보고 좋으면 강 대인에게 적극적으로 권할 수도 있지 않겠소?"
파양천귀 범서는 눈까풀을 몇 번 껌벅이다가 의심스런 눈초리를 하며 물었다.
"한데, 귀하는 뉘시오?"
"소생은 풍운서생(風雲書生)이라 하외다."
"풍운서생?"
파양쌍귀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풍운서생이라 자칭한 진유걸은 쑥스러운 듯 가볍게 웃었다.
"강호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생소할 것입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파양쌍귀 중 의형인 범서가 호기롭게 웃었다.
"풍운서생! 겸손한 것이 무척 마음에 드는군. 내 그럼 자네를 위해 이 물건을 보여 주도록 하지."
파양천귀 범서가 슬쩍 눈짓을 하자, 파양지귀 방윤이 품안에서 한 장의 두루마리를 꺼냈다.
범서는 두루마리를 탁자 위에다 조심스럽게 펼쳤다.
찰나.
"아……!"
"오오……!"
노부부와 진유걸의 입에서 경탄성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숨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넋을 잃고 말았다.
세 승려와 묘령의 소녀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미타불……!"
"어멋, 저럴 수가!"
중인들이 감탄을 금치 못하고 바라보는 두루마리.
그것은 한 여인의 초상화(肖像畵)였다.
여인의 반신상(半身像)이 그려진 한 폭의 초상화!
거기에는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칠흑 같은 머리는 구름처럼 말아 올렸고, 수려한 오관(五關)은 하나하나가 신(神)의 걸작품같이 아름답고 고왔다.
특히 그녀의 입가에 희미하게 떠도는 미소는 영원히 잊지 못할 만큼 신비스런 매혹을 안고 있었다.
그녀의 용모는 가히 천하제일이었다.
고고한 기품을 담고 오똑하게 솟은 콧날, 이슬을 머금은 듯 촉촉이 젖어 있는 붉은 앵두 입술, 백설같이 갸름한 목을 타고 흐르는 우윳빛 어깨, 팽팽하게 솟은 수밀도, 한 뼘도 안 될 것 같은 잘룩한 허리…….
그 어디 한 곳 흠잡을 데 없이 늘씬한 몸매였던 것이다.
중인들은 그 그림을 보며 저마다 꿈을 꾸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마치 금시라도 살아 그림 속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구나.'
진유걸은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정말로 천하절색(天下絶色)이로군. 누가 그렸는지 가히 신의 화필(畵筆)이로군."
그의 말소리에 중인들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렸다.
세 명의 화상 중 배가 나온 살찐 화상이 음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한 채 염불을 읊었다.
"아미타불… 이런 여인이 이 세상에 진짜로 존재할까?"
그 때 노부부 중 노파가 중얼거렸다.
"참으로 절세미녀이로군. 월궁의 항아(姮娥)라도 저렇지는 못하리라. 흡사 노신의 처녀 시절을 보는 것 같군."
온통 주름살 투성이인 노파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자 중인들은 저마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우후후후……!"
그러나 단 두 사람, 노부부만은 정색을 한 채 웃고 있는 중인들을 노려보았다.
"네놈들이 비웃는 것을 보니 노신의 말을 못 믿는 모양이구나. 염감, 영감이 얘기해 주구려!"
노파의 음성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노인이 침을 튀겨 가며 말했다.
"할망구의 말은 모두 사실이다. 할망구가 젊었을 때 미색이 천하제일이었지. 그래서 할망구를 차지하기 위해 천하각처에서 영웅준걸(英雄俊傑)들이 구름 떼같이 몰려들었다. 한데, 당당히도 노부가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할망구를 차지하게 되었지. 할망구는 노부를 처음 보던 순간 오금을……."
그의 말이 계속 이어지려는 순간.
"그만해요!"
노파의 듣기 거북한 목청이 실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영감은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자 노인도 지지 않고 외쳤다.
"아니, 이 할망구가 돌았나?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방금까지만 해도 너무나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던 노부부가 순식간에 원수로 돌변하여 서로를 잡아 죽일 듯이 싸우는 게 아닌가?
중인들이 갑자기 돌변한 두 노부부의 태도에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 때였다.
덜컹-!
객관 문이 열리며 다섯 사람이 들어왔다.
그 바람에 노부부의 싸움도 일단 중지되었다.
객관으로 들어선 다섯 사람 중 네 명은 금의를 입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넓이가 한 뼘쯤 되어 보이는 금도(金刀)를 차고 있어 매우 위용 있어 보였다.
그에 비해 중앙의 인물은 수수한 차림에 값싼 백우선(白羽扇)을 들고 있었다.
네 금의인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난 중년문사.
그렇다! 그가 바로 하북성 제일의 부호로 알려진 강태위였다.
강태위의 집안은 대대로 부유하게 지내 왔으며, 그의 대에 이르러 최고조로 달하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 그의 출중한 장사 수완과 검소한 생활 신조(信條) 덕분이었다.
기실 그는 하북성뿐만 아니라 하남(河南), 섬서(陝西), 산동(山東) 등 강북지역에서도 손꼽히는 부호였다.
그는 광업(鑛業), 상업(商業), 수산업(水産業), 농업(農業) 등 모든 곳에 손을 대고 있었으며… 특히 상업 방면에 있어서의 수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운(運)도 좋아 한 번 시도한 일에 대해서는 실패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자연 그에게는 재화(財貨)가 산더미처럼 쌓이게 된 것이다.
진유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강태위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옷차림을 보니 문지기와 흡사하군. 한데, 이 자가 정말 그 많은 금전(金錢)을 내놓을까?'
강태위는 백우선을 흔들며 주위를 훑어보며 물었다.
"어느 분이 제일 먼저 찾아오셨소?"
그의 말투에는 오만한 기색이 없었다.
진유걸은 그의 말투에서 겸허한 그의 인격(人格)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였다. 진유걸은 어디선가 살기가 뻗쳐 나옴을 느꼈다.
그것은 그가 수많은 격전을 치러 오는 동안 익힌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그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 속으로 차갑게 강태위를 노려보고 있는 노부부의 모습이 들어왔다.
찰나지간.
"죽어라!"
살벌하기 이를 데 없는 외침이 실내의 공기를 경직시키며 터져 나왔다.
이어 두 줄기 인영이 섬전처럼 폭사되었다.
휘익- 휙-!
순간, 강태위를 호위하고 있던 금의무사들이 쾌속하게 금도(金刀)를 뽑아 들었다.
"이 놈들!"
그들의 솜씨도 신속했지만 강태위를 덮친 노부부는 그들보다 몇 배나 더 민첩했다.
"흐흐흐……!"
음산한 웃음이 실내를 진동시키는 가운데.
퍽- 퍽-!
둔탁한 기음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아악!"
"으어억……!"
처절한 절규와 함께 붉디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치며 으깨진 뇌수가 주르륵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찰나지간 금의무사들의 머리통이 박살나 나뒹굴자 강태위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허억! 누구……?"
위이이잉-!
그가 미처 말을 내뱉기도 전 예리한 장력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강태위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무섭게 엄습함을 느끼며 질끈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이 때 돌연.
파팍-!
누군가 강태위를 잡아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죽음 직전의 강태위를 살려 준 것은 다름 아닌 진유걸이었다.
그는 강태위를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내려 준 뒤 노부부 쪽을 싸늘하게 돌아보았다.
강태위는 자신이 살아났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는 천신처럼 우뚝 선 채 그를 지켜 주고 있는 진유걸을 돌아보며 고마움을 표했다.
"아, 귀하가 나를 살려 주었구려. 그런데 누가 대체 나를 죽이려 한 것이오?"
강태위는 자기에게 살수를 가한 인물들을 바라보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들은 바로 평범해 보이던 한 쌍의 노부부가 아닌가?
노부부는 복잡한 감정이 엉켜 있는 눈빛을 한 채 진유걸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눈앞에 전개된 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 놈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실로 대단한 인물이로다.'
그들은 내심 일말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진유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앙벽뢰쌍기(鴛鴦霹雷雙奇)!"
순간, 두 노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2
십대기인.
반야선승(般若禪僧),
귀수도부(鬼手屠斧) 모용비(毛容琵),
마령신의(魔靈神醫) 남궁태협(南宮太俠),
검존(劍尊) 사도천랑(司徒天娘),
무당마인(武當魔人) 표한우(瓢漢宇),
원앙벽뢰쌍기(鴛鴦霹雷雙奇) 벽파(霹婆)와 뇌옹(雷翁),
광혼객(狂魂客) 악령산(惡靈山),
강남태을자(江南太乙子) 양우헌(亮雨獻),
동정어옹(洞庭魚翁) 천육(千六).
이들 십 인을 가리켜 무림인들은 십대기인이라 불렀다.
이들은 주로 정파의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중에는 정(正)과 사(邪)를 가리지 않는 고수들도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원앙벽뢰쌍기였다.
이들 부부는 금슬이 좋다가도 금시 서로 으르렁대는 괴팍한 부부였다. 그 때문에 그들은 원앙벽뢰쌍기라 불리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의 신분은 중원무림에서도 첫손 꼽는 살수(殺手), 즉 자객(刺客)이었다. 이제껏 그들이 노려 생명을 부지한 고수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이들을 비롯한 십대기인은 은거한 지가 이미 이십 년이나 지났다. 한데 이십 성상이나 지난 지금에야 그들이 갑자기 출현했으니…….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중인들의 놀라움은 당연했다.
이 때.
"애송아! 네놈의 진면목을 냉큼 밝혀라!"
벽파가 독 오른 살쾡이처럼 소리쳤다.
그러자 진유걸이 유들유들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에 이미 밝혔지 않소이까? 풍운서생이라고……."
뇌웅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네놈의 목을 비틀어 주마!"
그러자 진유걸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잠깐만! 선배님께서는 혹 이런 시구를 들어 보셨는지요?"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시를 읊었다.
太乙應悔倫戀情
碧海靑天夜夜心
태을은 어찌하다 순정(純情)을 훔쳤는가?
밤마다 파란 하늘에서 가슴을 치며 치며 지새우노라.
일순 백파와 뇌웅이 대경실색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까지 핼쓱해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파양쌍귀상인과 세 화상, 그리고 묘령의 소녀 역시 의혹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극히 평범한 시 구절인데 왜 저렇게 당황하지?'
벽파는 만감이 교차되는 얼굴을 진유걸에게 던졌다.
"그와 너는 어떤 사이냐?"
그답지 않게 몹시 힘없는 목소리였다.
"후배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금일의 일은 이 후배를 위하여 양보해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뇌웅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어림없는 소리! 만일 이대로 우리가 물러선다면 길가의 돌멩이도 우리를 비웃을 것이다."
뇌웅은 다짜고짜 좌장을 후려갈겼다.
"뒈져라!"
우웅-!
순간, 태산을 뒤엎을 만한 장력이 전광석화처럼 밀려 나왔다.
진유걸은 상대의 엄청난 기세에 섬뜩한 심정이 되었다.
'과연 십대기인이라 다르군.'
그가 염두를 굴리며 막 반격을 하려는 순간.
"멈춰요!"
벽파가 나서며 뇌웅의 장력을 다른 쪽으로 돌려 버렸다.
슈우웅-!
그러나 공교롭게도 장풍이 휘몰아쳐 간 곳은 묘령의 소녀가 서 있는 곳이었다.
"아앗! 저런!"
다급한 비명과 동시에 진유걸은 그대로 신형을 폭사시켜 소녀를 밀어냈다.
소녀가 일 장 밖으로 나뒹구는 순간.
펑-!
둔탁한 소리에 이어 짧은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억!"
진유걸이 장력에 격중되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쿵-!
"앗! 공자!"
강태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진유걸이 떨어져 내린 곳으로 달려갔다.
하나, 놀랍게도 진유걸은 비틀거리며 신형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닌가?
"헉! 저럴 수가?"
그 광경을 주시하던 벽파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 장풍에는 능히 만 근 거석이라 하더라도 박살낼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뇌웅 역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단한 놈이군. 저런 놈이 중원무림에 존재할 줄이야…….'
진유걸은 입에서 피를 흘리며 간신히 신형을 일으켜 세운 뒤 먼저 소녀의 상세부터 물었다.
소녀 역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소?"
진유걸은 억지로 고통을 참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공… 자… 님!"
소녀는 비천한 자기를 진유걸이 목숨을 바쳐 가며 구해 주었다고 생각하자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솟았다.
"흐흐흑… 어찌하여 소녀같이 못난 계집을 위해 보옥(寶玉)보다 귀중한 몸을 희생하신단 말씀입니까? 흐흐흑……!"
진유걸은 자신의 부상에는 아랑곳없이 소녀를 위로해 주었다.
"무슨 소리요? 사람의 생명은 다 똑같은 것이오. 거기에 어찌 귀천(貴賤)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생명에 있어서는 황궁의 인물이나 시정(市井)의 거지나 다 똑같이 귀한 것이오."
그의 조리 있고 당당한 어조에 장내의 중인들은 모두 감복하고 말았다.
소녀는 말할 것도 없고, 금전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파양쌍귀상인조차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벽파는 뇌웅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영감, 우리는 너무 늙었구려. 그만 돌아가야겠어요."
뇌웅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 낸다고… 젊은이, 후에 다시 대면케 될 날이 있을 걸세."
그들은 말을 마치기가 장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진유걸은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자, 그제서야 안심이 된 듯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공자! 공자!"
자신을 부르는 강태위의 음성이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 오는 듯 느껴졌다.
그리고 끝이었다.
진유걸은 깊은 나락 속으로 한없이 빠져 들어간 것이다.
이 때, 세 명의 화상 중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인물이 진유걸을 유심히 지켜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 중원에도 저런 영걸(英傑)이 있었구나."
그 때 그의 귓속으로 지극히 경미한 전음이 파고들었다. 사제 화각존인(和覺尊人)의 음성이었다.
"사형! 저 젊은이의 용태(容態)가 어떻습니까?"
"심한 중상을 입은 것 같네. 여지껏 저런 몸으로 서 있었다는 것조차 놀랍네. 정녕 중원에서 처음 본 강인한 인물이군."
"소제가 보기에는 그보다 더 무서운 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사형께서는 신광(神光)으로 그의 미간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나이 든 화상은 화각존인의 말대로 쓰러져 있는 진유걸의 미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니, 저것은… 살괴(殺塊)!'
화상은 내심 소스라치게 놀랐다.
화각존인이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어떻습니까? 역시 범상치 않은 인물이지요?"
"정말 뜻밖이군. 저런 살기를 지닌 채 웃을 수 있는 자가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네."
화각존인은 곁에 선 다른 화상에게 물었다.
"화평(和平)! 자네는 저 풍운서생을 어찌 보는가?"
화평이라 불리운 화상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제가 보기에 개세준걸(蓋世俊傑)임이 분명하외다. 일찌감치 제거함이 좋을 듯하오이다."
그는 말에 여운을 남기며 노화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늙은 화상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글쎄, 노납이 생각하기에는 살려 두는 게 나을 것 같네. 자네들도 알겠지만 저 자는 극히 정교한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있네. 그것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싶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것이 뜻하는 바가 뭐겠나?"
세 화상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들을 전음으로 서로 주고받았다.
그 때 진유걸로부터 구원을 받은 소녀는 주위의 이목에는 아랑곳없이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다.
그녀는 우연히 강태위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받고자 왔다가 우연히 이런 봉변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자님! 흐윽… 천녀(賤女) 지청란(池淸蘭)은 결코… 공자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 지고하신 인품(人品)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으흐흑……!"
강태위는 파양쌍귀상인을 돌아보며 구원을 요청했다.
"좀 도와 주시오. 공자를 내당으로 모셔 가야겠소이다."
파양쌍귀상인은 서로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인 뒤 즉시 진유걸을 양쪽에서 들어올렸다.
"자아, 어서 이리로……."
강태위는 서둘러 길을 안내했고, 파양쌍귀상인은 그 뒤를 따랐다.
세 명의 화상도 의미심장한 눈길을 서로 주고받으며 객관을 나섰다.
이제 객관에는 지청란만이 홀로 남아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내고 있을 뿐이었다.
3
정실(正室).
황궁의 내실만큼이나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방이다.
바닥에는 주홍색의 융단이 깔려 있었고, 벽면의 서가(書架)에는 수십 종류의 서적이 꽂혀 있었으며, 중앙에 놓여 있는 팔선탁 위에는 갖가지 꽃들이 화병에 담긴 채 향기를 뿜어 내고 있었다.
비단 휘장으로 가려진 침상.
지금 그 침상 위에는 한 청년이 깊은 잠 속에 빠진 듯 누워 있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그는 바로 풍운서생으로 변장한 진유걸이었다.
이 때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울리며 문사 차림의 강태위와 한 여인이 들어섰다.
여인은 평범한 옷차림의 강태위와는 달리 매우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옷차림만큼이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린 듯이 고운 아미(蛾眉), 마늘쪽같이 반듯한 콧날, 가을 햇살처럼 영롱한 빛을 머금은 검은 눈망울,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도톰한 입술, 학(鶴)처럼 희고 긴 목덜미…….
정녕 나무랄 곳이 한 군데도 없는 완벽한 미의 소유자였다.
하북월색(河北月色) 강보연(姜寶蓮).
그녀는 강태위의 하나뿐인 누이동생이자, 하북성 제일의 미녀로 뭇 젊은이들의 우상(偶像)이 되는 여인이었다.
강보연은 비단 얼굴만 아름다울 뿐 아니라, 몸매도 상당히 뛰어나 마치 활짝 핀 백합 같았다.
풍만하게 부풀어오른 젖가슴, 호리호리한 허리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으며, 유연한 언덕을 이룬 둔부는 매혹의 도를 넘어 뇌쇄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에게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미소였다.
강보연의 입가에 머물고 있는 웃음은 그녀의 품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온화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다정다감(多情多感)함.
그녀는 침상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진유걸을 보고는 안쓰러운 듯 바라보았다.
"오빠께서 말씀하신 분이 바로 이 분이군요?"
강태위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풍운서생이란 무림협사(武林俠士)이시다. 무척 당당한 기개를 지닌 공자더구나. 난 이살(二殺)을 아직 만나 보진 못했지만, 네가 원하던 이살(二殺)보다 더 뛰어난 젊은이 같더구나."
그의 말에 강보연은 찬서리를 맞은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지나간 일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일 년 전 낙양의 관도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두 청년, 광혈풍과 탈혼사자.
강보연은 두 사람과 오십 리 길을 같이 가는 동안 두 사람 중 한 사람에게 연정(戀情)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우연히 두 사람의 정체가 중원에서 이름을 날리는 살인마인 이살(二殺)임을 안 그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보연은 가슴에 깊이 새겨진 그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살을 찾아 중원 곳곳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하나, 무림인들의 추적을 받고 있는 광혈풍과 탈혼사자가 어찌 한 곳에만 머물고 있겠는가?
그녀는 두 사람을 찾지 못하자, 너무도 깊은 사모의 정 때문에 절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택한 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하지만 목숨을 버리기 직전, 우연히 만난 한 여인에 의해 마음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강보연은 희미한 과거에서 깨어나며 자신을 끔찍이도 아끼는 강태위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빠, 소녀는 이제 그 분들을 잊었습니다. 다시는 그 분들 얘기를 제 앞에서 하지 않았으면 해요."
강태위는 누이의 아픈 곳을 찌른 듯하여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나는 그저 이 공자가 하도 비범한 것 같아서……."
강보연은 그가 무안하지 않도록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이 공자님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구해 줬다는 소녀는 어디 있어요?"
"글쎄, 내가 정신없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어디론가 울면서 가 버렸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아까 세 명의 스님들과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오래하셨어요?"
순간, 강태위가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얼른 말을 얼버무렸다.
"아무것도 아니니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강보연은 그가 뭔가를 숨기는 듯했으나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이 때 돌연.
"으윽! 안 돼! 그래서는 안 돼!"
누워 있던 진유걸이 손을 내저으며 잠꼬대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악몽(惡夢)이라도 꾸는가 봐요. 어휴, 이 땀 좀 봐."
강보연은 애처롭다는 듯 혀끝을 차며 진유걸의 땀을 닦아 주었다.
강태위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의미 있는 미소를 짓더니 조용히 방을 빠져 나갔다.
그가 나간 직후.
"으윽! 수연……!"
진유걸이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뜨는 것이 아닌가?
강보연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방을 나가려는 찰나.
갑자기 진유걸의 억센 손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챘다.
"어머!"
강보연은 짤막한 비명을 토하며 진유걸이 잡아끄는 대로 침상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수연!"
진유걸은 여전히 몽롱한 눈빛을 한 채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강보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강보연은 두려움으로 전신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안 돼요, 공자님! 제발 이러지 마세요!"
강보연은 애써 그의 품에서 빠져 나가려 했으나 그것은 마음뿐이었다.
도저히 약한 여인의 몸으로 진유걸의 힘을 이겨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강보연이 발버둥을 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진유걸의 바싹 마른 입술이 강보연의 입술을 덮쳐 오는 게 아닌가?
"으음……!"
강보연은 갑자기 덮쳐 온 그의 입술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너무도 얼떨결에 이루어진 입맞춤!
강보연으로서는 생애 처음의 입맞춤이었다.
강보연이 아직도 입술을 빼앗긴 충격이 가시기도 전.
"에잇! 나쁜 계집!"
이번에는 진유걸이 강보연의 몸을 사납게 밀쳐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앗! 공자님!"
그 바람에 강보연은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강보연은 아직도 정신이 얼떨떨하였다.
문득 진유걸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녀를 보더니 움찔 놀라며 물었다.
"낭… 자는 뉘… 시오?"
진유걸의 정신이 비로소 돌아온 듯했다.
강보연은 수치심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아, 그렇다면 조금 전 일들이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런! 내가 큰 실수를…….'
진유걸은 무의식중에 벌인 실수를 깨닫고는 황급히 강보연을 일으켜 주었다.
"낭자! 제가 대단한 실수를 범했소이다. 부디 용서해 주구려."
강보연은 그가 무의식중에 한 행동임을 알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보다 빨리 침상에 눕기나 하십시오. 상처가 더 도지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기가 중상임을 잠시 잊고 있던 진유걸이 신형을 휘청거렸다.
"어서 소녀에게 기대십시오."
강보연은 사과빛으로 볼을 물들이며 진유걸을 부축했다.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가 자신의 귀에까지 들려 올 지경이었다.
그제서야 진유걸은 그녀의 얼굴이 몹시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이제 보니 이 여인은… 강 낭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여기가 바로 강 낭자의 장원이란 말인가?'
강보연은 진유걸이 인피면구를 쓰고 있어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강보연은 진유걸을 침상 위에 눕힌 뒤 정식으로 자기를 소개했다.
"소녀는 이 곳 주인의 누이인 강보연이라 하옵니다. 공자님께서 저희 오라버님을 구해 주신 것에 대해 뭐라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천만의 말씀이오.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오. 그러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시오."
"하지만 한낱 미물도 은혜를 알건만, 어찌 사람으로서 보은(報恩)을 모르오리까?"
"낭자의 말이 옳소. 하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법이오."
순간, 그렇게 말하는 그의 두 눈에서 한이 맺힌 듯한 분노의 불꽃이 잠깐 피어 올랐다.
"그런데 공자님께서는 좀 전 수연이란 이름을 여러 번 부르셨는데… 그녀와는 어떤 관계이신지요?"
"으음……!"
진유걸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 녀는 내가 사랑… 했던 여인이었소."
강보연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나 막상 그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자 왠지 실망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녀는 나를 배… 신하고 다른 사내와 함… 께 떠나 버렸소."
"아, 그럴 수가……?"
강보연은 쓸쓸한 그의 모습에서 연민(憐憫)의 정을 느꼈다.
"제가 괜한 말을 물어 본 것 같군요. 소녀는 이만 나가서 오빠께 공자님이 깨어났다고 알려야겠어요."
강보연은 그 말을 남기고 황급히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녀가 나가자 진유걸은 침상에 누워 객관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십대기인이 중원에서 은거한 지 벌써 이십여 년. 그런데 어째서 원앙벽뢰쌍기가 갑자기 나타나 강 대인의 목숨을 노렸을까? 이상한 일이로군.'
그 때 강태위가 평범한 의복에 백우선을 흔들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하하… 깨어나셨구려. 의원의 말로는 약 보름 간 정양해야 한다고 했는데……."
진유걸은 얼른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대인의 덕분으로 많이 회복된 것 같소이다. 내일쯤 떠날까 하외다."
그 소리에 강태위가 펄쩍 뛰었다.
"안 됩니다. 적어도 열흘 이상은 있어야 합니다."
강태위의 강경한 어조에 진유걸은 난색을 표했다.
"저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대답하며 품안에서 자색 죽패를 꺼내 보였다.
세 치 길이의 죽패에는 네 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사천패령(四天覇令)>
찰나, 그 죽패를 본 강태위가 기절초풍할 듯 놀랐다.
"아니, 사천패령이……."
진유걸은 강태위에게 사천패령을 건네 주었다.
"강 대인께서 이 영패(令牌)를 알아보시니, 더 이상 긴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황금으로 오백 관만 준비해 주십시오."
황금 오백 관이라니?
붉은색을 띤 죽패의 가치가 그토록 엄청나단 말인가?
만일 누군가 그 소리를 들었더라면 진유걸을 가리켜 실성했다고 했으리라.
한데, 강태위는 두말 하지 않고 선뜻 응낙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금을 모으려면 적어도 닷새 간의 말미를 주셔야 합니다."
"어쨌든 최대한으로 빨리 준비해 주십시오. 그리고 대인께서 운영하고 계신 청원표국(淸苑 局)과 비화심표(飛和心豹) 위천진(偉天眞)이 세운 비표표국(飛豹 局)의 총표두(總 頭)들을 빠른 시일 내에 불러들이도록 하십시오."
강태위는 그가 하북성의 양대표국을 들먹이자 놀라움을 드러냈다.
"공자님의 분부대로 하겠소이다. 그리고 이 영패는 염치없지만 제가 보관을……."
"그렇게 하십시오."
진유걸의 말을 들은 강태위는 죽패를 소중히 품속에 간직한 뒤, 방을 나갔다.
그가 가고 난 뒤, 진유걸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세 화상은 분명 무공을 하는 자들인 것 같았는데, 무슨 목적으로 강 대인을 찾아온 것일까? 혹 그들과 강 대인의 목숨을 노린 원앙벽뢰쌍기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 내 일이 바빠 그 문제를 미처 묻지 못했는데… 나중에 알아봐야겠군.'
진유걸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