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三章 과거(過去) (4/35)

第三章 과거(過去)

1

쉬- 쉬잉- 위이잉-!

살점을 도려 낼 듯한 싸늘한 한파(寒波)가 무섭게 휘몰아치고 눈까지 펑펑 쏟아져 내렸다.

흡사 대지(大地)를 얼리려는 듯 칼날 같은 추위는 맹렬히 기승(氣勝)을 부려 댔다.

엄동설한(嚴冬雪寒).

천지간 어디를 살펴보나 매서운 바람과 냉기를 머금은 눈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살아 있는 것이라곤 없을 것 같은 깊은 겨울 밤.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낡은 관제묘(關帝廟).

얼마나 오래됐는지 잡초가 무성하고 깨진 기왓장이 나뒹굴며, 문짝은 아예 보이지 않고 한쪽 지붕은 폭삭 내려앉아 있었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관제묘는 오랜 풍상(風霜)을 겪었는지 몹시 을씨년스러웠다.

이 때.

"지독하게도 추운 날씨로군."

금시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관제묘 안에서 앳띤 음성이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분명 어린 소동(小童)의 목소리였다.

이어 또 다른 음성이 그 뒤를 따랐다.

"으, 추워… 벌써 삼 일째 내리 눈만 쏟아지니……."

그 역시 기운 없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웬일인가?

두 명의 소동이 어찌 눈보라 몰아치는 한겨울에 다 쓰러져 가는 관제묘에서 눈을 피하고 있단 말인가?

관제묘 안.

그 곳에는 두 명의 어린 거지가 몸을 덜덜 떨며 한쪽 구석에 잔뜩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이제 십여 세가 됨 직한 그들의 몰골은 보기가 딱할 정도로 비참하였다.

땟물이 흐르는 의복은 군데군데 찢겨져 나가 맨살이 드러나 보였고, 수세미처럼 헝클어진 두발(頭髮)은 흙 투성이였다.

뿐만 아니고 그들의 얼굴은 씻은 지가 언제였는지 새카만 때가 덕지덕지 끼여 있었다.

더구나 추위로 인해 그들의 손발은 쩍쩍 갈라져 나가 피가 엉켜 있었다.

보기만 해도 측은해 보이는 두 명의 거지 소년!

그 중 약간 몸집이 왜소한 소년이 다른 거지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그 동안 어디서 지냈니? 꽤나 추웠겠다?"

그러자 다른 거지 아이가 몹시 추운 듯 손에 입김을 후후 불어 대며 말했다.

"눈이 내리는 동안 줄곧 인가를 찾아 헤맸지만 아무도 나를 받아 주지 않았어. 그래서 무턱대고 눈 속을 걷다가 여기를 발견한 거야."

'그렇다면 이 폭설 속을 삼 일 간이나 헤매 다녔단 말인가? 정말 의지가 강한 애구나.'

먼저 물었던 거지 소년은 그 소년을 대견한 듯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고생이 심했겠구나. 이 곳도 춥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바깥보다는 조금 나을 거야."

이들의 대화로 미루어, 두 소년이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듯싶었다.

관제묘를 나중에 찾은 소년이 다른 소년에게 바짝 다가앉으며 물었다.

"너는 항상 이 곳에 사니?"

체구가 조금 작은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네 이름이 뭐야? 내 이름은 진유걸(陳儒傑)이라고 해."

"진유걸… 나는 독고휘(獨孤煇)라고 해."

그들은 서로 통성명을 하고는 마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진유걸이 궁금하다는 듯 문득 독고휘에게 물었다.

"너는 언제부터 이런 생활을 하게 된 거야?"

"응,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가 어느 부호에게 많은 빚을 지게 되었는데, 빚을 못 갚자 엄마를 잡아 갔어. 그 때문에 아버지는 술주정뱅이가 됐고, 하나뿐인 누이동생도 어디론가 가 버렸어."

독고휘는 어두운 집안 얘기를 하면서도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았다. 단지 원한이 가득 담긴 눈빛을 번뜩일 뿐이었다.

"나는 복수를 할 거야. 우리 집안을 망친 그 부호와 나를 경멸한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훌륭한 무인(武人)을 만나 그 사람의 제자가 될 거야. 그래서 최고의 고수(高手)가 되는 거야."

독고휘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보다 너는 어떻게 이런 생활을 하게 됐니?"

진유걸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난 내가 어떻게 이런 생활을 하게 됐는지 잘 모르겠어.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이렇게 살고 있었어. 그 전에는 내가 무얼 했는지, 어디서 살았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나. 전혀…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건 이 검에 새겨진 내 이름뿐이야."

그는 얼어서 펴지지도 않는 손으로 품안에서 네 치 가량 되는 단검을 꺼냈다.

검집은 연한 푸른색이었는데 장식도 조각도 없었다. 검날 역시 평범해 보였다.

다만 그 검날에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진유걸(陳儒傑)>

진유걸은 그 검이 무척 소중한 듯, 잠깐 보여 준 뒤 다시 품속에 고이 집어넣었다.

독고휘는 진유걸의 얼굴에 어리는 쓸쓸함을 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너도 나만큼이나 불행(不幸)하구나."

이 때.

쌔애앵-!

칼날같이 예리한 바람이 관제묘를 핥듯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기려는 듯 서로를 꼬옥 부둥켜안았다.

기이한 인연(因緣)으로 만나게 된 진유걸과 독고휘!

혹한(酷寒) 속에서 떨고 있는 이들이 장차 무림에 폭풍을 일으킬 주역(主役)이 될지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염없이 쏟아지는 폭설 속에 기나긴 겨울밤은 깊어만 갔다.

2

獨在異鄕爲異客

海逢佳節倍思親

遙知兄弟登高處

 揷茱萸少一人

머나먼 타향(他鄕) 땅에 홀로 떠돌면, 

명절(名節)이 올 때마다 간절한 부모 생각.

다정한 그 형제들 수유(茱萸) 꽂고 산에 올라,

어디에 내(我)가 있나 휘둥그레 찾아 보네.

어디선가 시를 읊는 청아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왕유(王維)의 시구가 흘러 나온 곳, 그 곳은 수목이 울창한 숲 속이었다.

달빛이 은은히 내려앉는 숲 속의 공터.

관옥 같은 용모를 가진 소년 한 명이 뒷짐을 진 채 오락가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비록 남루한 옷차림이었으나 그의 준수한 옥면(玉面)은 숨길 수가 없었다.

짙은 검미(劍眉)에 총기(聰氣)가 번뜩이는 성목(星目), 우뚝하게 솟은 콧날, 그 아래 의지(意志)를 담고 있는 뚜렷한 입술.

더구나 이 절세적인 용모의 소년에게는 사람들이 함부로 범할 수 없는 고고한 기상(氣象)이 엿보였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영준한 풍모를 지닌 남루한 소년!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는 그 소년의 입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했다.

바로 이 때.

"타앗-!"

그 소년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우렁찬 기합성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영준한 소년의 눈썹이 상큼 치켜 올라갔다. 

"또 시작이군. 하루 종일 피곤할 텐데……."

그는 중얼거리며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를 읊던 소년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남루한 의복을 입은 소년 한 명이 열심히 팔과 다리를 허공에 휘젓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무공을 연마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돌연.

"신룡출수(神龍出手)-!"

소년이 오른손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리며 좌우를 찍어 갔다.

휙- 휘익-!

어린아이의 여린 손이었으나 제법 싸늘한 한풍이 뒤따랐다.

하나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 소년이 전개한 초식에 있었다.

신룡출수!

그것은 소림사 칠십이 종 절예(絶藝) 중 나한권법(羅漢拳法)이 아닌가?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로 일컬어지는 소림의 절학을 한낱 어린 소년이 시전하다니…….

물론 그 소년이 십 성의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그 수법을 펼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대체 이것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달빛 아래 두 명의 소년이 각자 문무(文武)를 펼쳐 내고 있으니…….

실로 진귀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무공을 수련하는 소년.

그 소년 역시 송옥(宋玉)이나 반안(番安) 못지않은 미남이 아닌가?

쭉 뻗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봉황(鳳凰)의 눈동자,

정중앙에 우뚝 솟은 콧날과 신념(信念)이 담겨 있는 한 일자의 입술,

거기다가 백옥 같은 살결은 여인보다 더욱 희고 매끄러웠다.

다만 옥(玉)의 티라고나 할까?

그의 양 미간에는 은은한 살기가 희미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두 소년, 그들은 몇 년 전 관제묘에서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녹이던 진유걸과 독고휘였던 것이다.

이 때 홀연 독고휘가 숨을 몰아쉬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역시 소림파의 무공은 익히가 어려워. 벌써 석 달이나 지났는데 겨우 삼 성 가량밖에 터득하지 못했으니 언제나 천하제일의 무인(武人)이 되지?"

자조(自照) 섞인 독고휘의 말에 다가오던 진유걸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후후… 휘, 방금 네가 전개한 초식에는 네 가지 결점이 있어. 그것만 보안한다면 약 팔 성의 위력을 나타낼 수 있을 거야."

장담하는 듯한 그의 말에 독고휘는 어깨를 움찔했다.

"그게 정말이야?"

독고휘의 말투에는 진유걸의 명석한 두뇌를 인정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진유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자, 내가 하는 걸 잘 봐."

그는 말과 함께 좌측 발을 반 보 앞으로 내밀며 기묘한 자세를 취해 갔다. 

진유걸은 두 다리를 교묘하게 움직이며 신속하게 방위를 밟아 나갔다.

이어 그의 쌍수가 전후좌우로 난무하여 기합성이 불꽃처럼 튀었다.

"으헛-!"

아, 이럴 수가?

시를 읊던 서생 차림의 문약한 진유걸이 실로 놀랍게도 나한권법의 정수(精髓)를 거의 완벽하게 시전하는 것이 아닌가?

비록 체질이 강인하지 못하여 위력은 뛰어나 보이지 않았으나 그 정확성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만일 소림사 제자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대로 까무라치고 말았으리라.

진유걸의 몸놀림을 물끄러미 주시하던 독고휘의 눈초리가 기이하게 변했다.

'유걸(儒傑)… 진정 무서운 친구다. 소림 고승의 수법을 똑같이 보았는 데도 저토록 비슷하게 펼쳐 내다니… 더구나 나는 석 달 동안 꾸준히 수련했고 유걸이는 책만 읽지 않았던가? 만일 유걸이가 진짜로 무공을 배우겠다고 나선다면, 나는 천하 제이인자밖에는 못 되겠구나.'

그는 착잡한 심정을 금치 못하며 신들린 듯 무공을 펼쳐 내는 진유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얼마 후, 진유걸이 신형을 멈추며 독고휘를 돌아보았다.

"어때? 이제 너의 결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겠지?"

독고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분명히 네 군데 결점이 있었어. 발을 날릴 때, 좌측 손을 찌를 때, 그리고 허리를 퉁길 때와 고개를 숙일 때."

"맞아! 역시 너답구나. 단번에 그것을 파악하다니……."

진유걸은 유쾌히 말하며 흐뭇한 미소를 띄웠다.

'휘는 정말 영특해. 한 번 알려 주면 모든 것을 깨우치거든. 만약 휘가 희세의 기인을 사부로 모신다면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고도 남을 거야.'

그가 염두를 굴리고 있을 때.

"유걸아! 나는 지금 모종의 결심을 굳혔다. 이리 와 봐."

독고휘는 그 말과 함께 어디론가 총총히 걸음을 옮겨 갔다.

'내가 괜히 나서서 휘가 혹 기분이 상한 것이 아닐까?'

진유걸은 불안해 하며 그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잠시 후 그들이 도달한 곳은 한아름은 됨 직한 백송(白松) 아래였다.

독고휘는 백송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여기에 이름을 새기고 우정(友情)을 다진 지도 벌써 삼 년이 흘렀구나."

그의 말대로 거기에는 진유걸과 독고휘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진유걸은 그가 말하려는 의도를 비로소 짐작했다.

"이제는 네 뜻을 찾아 길을 떠나야겠다는 말이냐?"

"응. 어차피 우리는 서로의 갈 길이 다르니까."

"그래. 부디 성공(成功)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훗날을 기약하자."

독고휘는 그가 너무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놀란 얼굴을 하였다.

"유걸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어. 오 년 후면 너는 반드시 이름 있는 무림고수가 되어 있을 거야. 그 동안의 약속대로 오 년 후 오늘, 이 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자."

독고휘는 진유걸의 손을 와락 움켜잡았다.

뜨거운 감정의 물결이 서로의 손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서로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우정(友情)이 가득 넘치고 있었다.

'가거라, 친구여! 어서 넓은 곳으로 나가 네 뜻을 마음껏 펼치렴.'

진유걸과 독고휘는 입술을 깨물며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그 동안 함께 지내 오는 동안 쌓였던 추억들이 그들의 뇌리로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대망(大望)을 이루기 위해 서로의 길을 가려는 진유걸과 독고휘!

천하 무림에 그들의 존재가 부각될 날도 머지않았으리라!

천공에 걸린 달도 이들의 앞날을 축복하려는 듯 두 사람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3

오 년 후.

언제부터인가 한 준미(俊美)한 용모를 지닌 백의청년(白衣靑年)이 옷색깔처럼 흰 백송 아래 머물고 있었다.

불어 오는 미풍(微風)과 길게 드리워진 햇살을 받으며 백의청년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가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때였다.

휘이익-!

일진의 소성이 울리며 푸른색 경장을 차려 입은 청년이 등장했다. 그 역시 백의청년만큼이나 영준한 얼굴이었다.

백송 아래서 마주친 절세의 두 미청년(美靑年).

이들이 누구인가?

항주의 관제묘에서 운명처럼 만났던 진유걸과 독고휘가 아닌가?

숱한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으며 동고동락(同苦同樂)하던 그들.

이제 그 사이로 속절없는 세월이 흘러가 버린 것이다.

뒤늦게 나타난 독고휘는 감개가 무량한 듯 진유걸을 바라보며 외쳤다.

"유걸! 이게 얼마 만인가? 너무나 반갑네."

그러나 진유걸은 쓸쓸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오 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었지. 그 동안 풍문으로 소식을 듣고 있었네. 무림인의 혼백을 앗아 가는 탈혼사자(奪魂使者)!"

일순, 독고휘는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네가 어떻게 그 사실을……."

그는 진유걸이 자신을 비난하는 줄 알고 변명처럼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기실 처음 무림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살생을 가려 하리라 마음먹었지. 하지만 무림의 생리(生理)라는 게 그렇지 않더군. 그 세계는 나에게 항상 피를 요구했네. 자네에게는 정말 미안하네."

그러나 뜻밖에도 진유걸은 그의 말에 동조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바로 무림의 철저한 원칙이니까."

그의 말에 독고휘가 놀란 눈으로 진유걸을 바라보았다.

"아… 아니? 자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자네도 그 동안 많이 변했군."

진유걸은 멋쩍은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자네, 광혈풍(狂血風)이란 명호를 들어 본 적이 있나?"

돌연 독고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광혈풍이라면… 얼마 전 강남에 등장한 살성(殺星)이 아닌가?"

"그렇다네."

독고휘는 진유걸의 싸늘한 어투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반신반의(半信半疑)한 얼굴로 물었다.

"그… 그렇다면… 자네가 바로… 그 광혈풍이란 말인가?"

진유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럴 수가… 유걸! 자네가 어찌 그런 살성이 될 수 있는가?"

독고휘는 아직도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휘, 혹시 강남태을자(江南太乙子)라는 분을 아는가?"

"강남태을자라면 십대기인(十代奇人) 중 한 분이 아니신가? 일 년 전 원인 모르게 피살된……."

"그 분이 바로 나의 사부님이시네."

찰나지간 탈혼사자 독고휘의 안색이 변하더니 두 눈에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정망이 폭사되었다.

정기영안(精氣靈眼).

그의 눈에서는 사람의 심신을 분리시킬 듯한 광채가 줄기줄기 발산했다.

이 예측하지 못한 변화에 진유걸이 놀랄 사이도 없이.

"푸하하하… 하늘이 나 독고휘를 돕는구나."

탈혼사자 독고휘가 앙천광소를 터뜨리는 게 아닌가?

그는 계속해 얼떨떨한 얼굴로 있는 진유걸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자네는 강남태을자의 절기를 그대로 이어받았겠지? 그는 건축학(建築學)과 기관매복진(機關埋伏陣)에 관해서는 독보적인 기인이니까, 그 방면으로 말일세?"

진유걸은 영문을 모른 채 엉겹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전수받지는 못했으나 약 칠팔 할 가량은……."

"됐네, 됐어. 그런데 자네가 살성이 된 것은 그 분과 무슨 연관이 있나?"

"사부님께서는 반쪽의 옥경(玉鏡)을 지니고 계셨지. 그 때문에 정사(正邪) 양 파의 연합 공격을 받아 돌아가시고 말았네. 그래서 그 복수를 하기 위해……."

"옥경?"

"왜? 그 옥경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

"소문으로 대강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네."

"그런데 자네는 왜 내가 강남태을자의 제자라는 걸 알고는 그렇게 기뻐했는가?"

독고휘는 다시 희열(喜悅)에 들뜬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얼마 전 우연히 무왕동부(武王洞府)를 찾는 비도(秘圖)를 수중에 넣었다네. 그 곳은 신기한 기관장치로 되어 있어 도무지 입구를 찾을 수가 없었네. 하지만 이제 자네가 있으니 문제없을 걸세."

무왕동부.

삼백여 년 전, 무림에는 스스로 무왕(武王)이라 자칭하는 괴걸(怪傑)이 등장했다.

그는 주로 각 문파의 절기를 습득 연구하여 그 방면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게다가 그는 병기 모으기를 좋아하여 무수한 신고기병(神古奇兵)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자 수많은 무림인들이 그가 이루어 놓은 각 파의 절기와 기병(奇兵)을 노리기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무왕은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의 종적은 묘연했으나 무림인들은 결코 그를 단념하지 않았다.

당시 무림에는 이러한 말이 떠돌 정도였다.

- 무왕동부를 찾으려거든, 그 곳의 비도를 먼저 습득하라!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러한 일화도 한낱 전설(傳說)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나, 그 비도가 지금 탈혼사자 독고휘의 수중에 있다는 게 아닌가?

"자, 가지."

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쾌속절륜하게 신형을 날렸다.

휙- 휘익-!

탈혼사자 독고휘와 광혈풍 진유걸.

두 사람은 무왕동부를 찾아 그 곳에서 발견한 무왕무록(武王武錄)으로 일 년 동안 각 파의 무학을 연성하였다.

그리고 무왕동부에서 발견한 병기 중 광혈풍은 천애고독검을, 탈혼사자는 마령살도(魔靈煞刀)를 각각 취했다.

두 사람이 무왕동부를 나오자 중원이 발칵 뒤집혀졌다.

당금 무림계에 두 사람의 무공을 꺾을 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 후, 그들을 꺾고 명성을 얻고자 하는 무림인들로 인해 두 사람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죽음의 피 냄새가 따랐다.

그래서 무림인들은 이들을 가리켜 이대살성(二大殺星)이라 칭하며 두려워했다.

4

"으음……!"

진유걸은 무거운 신음을 토해 내며 힘겹게 눈까풀을 밀어올렸다.

어둠,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암흑이 주위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여기가 어딜까? 죽어 저승에 온 걸까? 안 돼! 난 아직 죽을 수 없어! 아직 할 일이 많아. 이대로 죽을 순 없어!'

그는 내심 절규를 토하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으윽!"

독고휘에게 찔린 아랫배와 장력을 맞은 가슴에 무서운 통증이 왔다. 동시에 잠시 잊어버렸던 원염의 불꽃이 무섭게 타올랐다.

아름다웠던 기억, 즐거웠던 추억들…….

그러나 이제는 뼈를 깎고 살을 에이는 고통만이 진유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을 뿐이었다.

"휘… 이 나쁜 놈! 죽인다! 기필코 네놈을 죽이고 말 것이다. 그리고 수연! 결코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나는 속았다! 너희 두 사람에게 철저하게 우롱당하고 말았어! 으흐흑… 으흑……!"

진유걸이 폭발할 것 같은 분노로 절규를 터뜨릴 때였다.

"애송아! 당장 울음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지극히 싸늘한 음성이 진유걸의 고막을 날카롭게 후벼팠다.

순간, 진유걸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는 주위에 사람이 있으리라곤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누구요?"

그러자 예의 냉정한 목소리가 다시 흘러들었다.

"어린 놈이 예의범절(禮儀凡節)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구나. 생명을 구해 준 은인도 몰라보고……."

그 소리에 진유걸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후배는 무림말학 진유걸이라 합니다. 고인(高人)을 못 알아보고 경거망동한 점 백 배 사죄드리겠습니다."

"흐흐흐… 임기응변이 몹시 빠른 놈이구나. 거기다 강인한 체력과 심후한 내공을 지녔으니 무림에서 명성깨나 날렸겠군."

진유걸은 상대의 뛰어난 안력에 몹시 놀랐다.

'음, 목소리로 보아선 노인임에 분명한데… 관찰력이 몹시 예리하군.'

괴노인이 그의 염두를 깨며 다시 말을 이었다.

"노부는 실로 너 같은 놈은 보다 처음이다. 가슴뼈가 다 부서지고 내장이 튀어나올 지경인데도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했으니… 기적이라고 볼 수밖에."

진유걸은 자신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음을 알고는 하늘에 감사했다.

"그런데 노선배님! 여기가 어디인지요?"

"후후후… 이 곳은 망담수(亡潭水)라 하는 곳이다. 머리카락도 가라앉는다는 침수(沈水)라, 여기서 빠져 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은… 빠져 나갈 수 있는 방법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괴노인은 진유걸의 기지에 몹시 놀라고 말았다.

"친구에게 여자를 뺏긴 놈이 머리는 지혜롭구나."

찰나, 진유걸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그걸… 선배님이 어떻게……?"

"네놈이 잠꼬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더냐?"

그는 괴노인의 모습을 보기 위해 어둠을 더듬었다.

잠시 후,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어렴풋이 노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사람의 심장을 꿰뚫을 듯한 귀기(鬼氣) 서린 안광이었다.

노인은 땅까지 끌리는 백발를 기르고 있었으며, 이미 삭을 대로 삭은 의복은 차라리 안 걸치는 게 더 나을 지경이었고… 드러난 맨살은 온통 주름살 투성이였다. 게다가 키는 겨우 삼 척에 불과하였다.

진유걸은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두려움을 느껴 본 적이 없었지만, 목전의 노인에게만은 말할 수 없이 엄청난 위압감을 느껴야만 했다.

"후후… 네놈은 복수를 하고 싶겠지?"

괴노인의 섬칫한 목소리가 진유걸의 가슴으로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진유걸은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못하고 크게 외쳤다.

"그렇소이다. 후배는 정리(情理)를 배신한 그들에게 처절한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괴노인은 흉광을 무섭게 폭사하며 억양 없는 어조로 말했다.

"노부는 너의 뜻을 이루어 줄 수 있다. 그러나……."

진유걸은 다급히 그의 말꼬리를 붙잡고 나섰다.

"그러나 뭡니까? 무슨 조건인지요?"

"어린 놈이 세상 물정을 너무도 빨리 배웠군. 그런 대꾸를 듣기 위해 노부가 네놈을 보름 간 치료해 주었는 줄 아느냐?"

일순 진유걸은 자신이 흥분했음을 깨닫고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험난한 세파에 시달리다 보니……."

"듣기 싫다. 노부는 이해 관계가 밝은 놈을 좋아한다. 그러니 사과할 필요 없다."

진유걸은 노인의 테도에 다소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괴팍한 노인이군. 무림에서 활동하였을 당시, 필시 살성으로 불리워졌을 거야.'

그는 염두를 굴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선배님께서는 저의 생명을 구해 주셨습니다. 그 고마움을 어찌 잊어버리겠습니까? 어떤 조건이든지 말해 주십시오. 다만……."

"다만 무엇이냐?"

"선배님의 조건이 제 생각에 합당해야만 합니다."

괴노인은 음산하게 웃어제꼈다.

"으흐흐흐… 네놈은 꼴에 정인군자(正人君子)처럼 행동하려고 하는군. 그러니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여자도 뺏겼지."

순간, 진유걸은 심한 모욕을 느끼는 동시에 은근히 노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래도 무림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지니고 있는 자신이 아니었던가?

"선배님, 그만하십시오! 이 광혈풍을 우롱한다면 누구도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그 누구도!"

괴노인은 그의 불 같은 성격에 움찔 놀라는 듯하다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그 놈 성미 한 번 고약하군. 흡사 나 서혈천왕(西血天王) 혈영광군(血影狂君)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보는 듯하구나!"

찰나, 진유걸은 더할 수 없이 경악하며 괴노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 서혈천왕(西血天王) 혈영광군(血影狂君)이라면… 바로 사대천왕 중 일 인이 아닌가?'

사대천왕!

동마천왕(東魔天王) 마혼살군(魔魂煞君) 손포(孫砲),

서혈천왕(西血天王) 혈영광군(血影狂君) 마우성(馬宇星),

남악천왕(南惡天王) 악심골제(惡心骨帝) 남궁인후(南宮仁厚),

북귀천왕(北鬼天王) 귀독요후(鬼毒妖侯) 장태무(張太武).

이들은 백 년 전, 무림을 통째로 손아귀에 넣었던 일세의 대마두들이다.

사천방(四天幇).

이것이 그들 사 인이 군림하던 문파였다.

당시 사천방의 기세는 구파일방을 능가하여 그 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무림을 이끌어 나간다는 구파일방이 이러하니 다른 방파는 오죽하겠는가?

의기(義氣)가 꺾인 정파의 인물들은 전전긍긍하며 불안의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자 사천방의 무리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짓을 서슴없이 자행했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항시 피가 뒤따랐고, 억울하게 죽어 간 혼령(魂靈)들의 수가 극에 달했다.

그들은 이유 불문하고 사람을 마구 잔혹하게 죽이는가 하면, 양가의 부녀자들을 백주(白晝)에 납치하여 욕(辱)을 보이고, 약탈(掠奪)과 방화(放火)를 서슴없이 자행하는 악의 화신들이었다.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무리들, 이들이 행한 엄청난 만행(蠻行)은 일일이 열거조차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중원을 공포로 물들였던 사천방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 버리고 만 것이다.

아아, 정녕 믿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무림인들은 그 믿지 못할 사태에 넋을 잃고 말았다.

천하의 사천방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리다니…….

이 사건은 당시 강호를 온통 흥분과 경악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이것을 두고 중원 무림인들은 구구한 억측을 불러일으켰다.

- 사천방이 와해된 것은 사대천왕의 세력 다툼에 의해서일 거야!

- 그들은 한 권의 신비한 비급으로 쟁탈전을 벌이다 서로 양패구상(兩敗俱傷)을 당한 것이다!

- 사대천왕은 천하도(天下圖)를 놓고 일대 혈전을 전개했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단지 소문에 불과할 뿐 확인된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구도 사천방이 멸망하게 된 원인을 몰랐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 사대천왕이 서로 반목(反目)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말들이 퍼질 수 있겠는가?

하나, 사대천왕의 종적이 묘연했으므로 그것을 증명할 길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무정한 세월은 흐르는 물처럼 덧없이 지나갔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사건은 지금까지도 무림인들의 화제를 오르내리는 수수께끼가 되어 있었다.

한데, 지금 진유걸의 목전에 사천방의 네 방주 중 서혈천왕 마우성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

"노선배님이 진정 사천방의 서방방주(西方幇主)란 말씀입니까?"

진유걸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다. 사천방을 알다니 역시 뛰어난 놈이군. 후후후… 애송아! 우리의 거래는 이루어질 수 있을 게다. 그러니 너무 심려 마라."

진유걸은 그의 날카로운 안력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서혈천왕이라면 사대천왕 중에서도 가장 심기(心機)가 깊고 천문지학(天文之學)에도 능통한 인물이 아닌가?'

그가 염두를 굴리고 있을 때 서혈천왕의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노부는 너를 살려 준 대가로 세 가지 일을 의뢰하려고 한다. 첫째는 한 사람의 수급을 가져와야 한다."

"그가 누굽니까?"

"북귀천왕 장태무!"

북귀천왕이라면 사대천왕 중의 제일 막내가 아닌가?

사천방의 북방방주 장태무의 이름이 나오자, 진유걸은 암울한 표정을 띠었다.

"후배가 그를 상대하기에 너무 벅차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서혈천왕 마우성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점에 대해선 염려 마라. 미리 안배해 놓은 것이 있으니. 그보다 너는 노부가 그 일을 지시한 데 대해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으니 내가 더 놀랍구나."

진유걸은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사천방이 멸망하게 된 동기가 동상이몽(同床異夢)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미루어 짐작컨대, 노선배님께서는 당시의 일로 인해 이런 암굴 속에서 생활하시게 된 것일 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모종의 계획이 숨어 있겠지만……."

사혈천왕은 진유걸의 예리한 판단력에 내심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후후후… 너의 말이 모두 맞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모종의 계획이란 것은 없다. 노부는 이 곳에서 무공을 연마하다 주화입마(走禍入魔)를 입어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그래서 이 곳을 빠져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서혈천왕은 씁쓸한 얼굴로 자신의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운기조식을 하듯 틀고 있는 그의 하반신.

그 하체는 완전히 마비된 듯 시퍼런 기운을 띠고 있었다.

"아, 그랬었군요."

그제서야 진유걸은 서혈천왕의 키가 어째서 그토록 작은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선배님께서 이렇게 된 원인이 바로 북귀천왕 때문이란 말씀입니까?"

"그렇다. 하지만 너는 이 일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마라. 단지 노부의 지시만 따르면 된다."

"그렇다면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한 가지 물건을 찾아와야 한다."

"어떤 물건인지 소상히 설명해 주십시오."

"그것은 허름한 반쪽의 옥경(玉鏡)이다."

순간, 진유걸은 만면에 경악의 표정을 지으며 소스라치게 외쳤다.

"옥경… 혹 그것의 뒷면에 봉(鳳)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습니까?"

"아니? 그걸 네놈이 어떻게 아느냐?"

진유걸은 사부인 강남태을자가 그 옥경 때문에 정사 양 파의 연합공격을 받게 되었던 당시의 상황을 간단히 들려 주었다.

"저는 사부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그들에게 복수하고 그 옥경을 찾기 위해 전 강호를 헤매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 옥경은 끝내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한데, 대체 그 반쪽의 옥경에는 어떠한 비밀이 있는 겁니까?"

"그것은 자네가 그 옥경을 찾아오는 날 밝혀 주겠네."

진유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물었다.

"그렇다면 어디 가서 북귀천왕을 만나고, 또 반쪽 옥경을 찾는단 말입니까?"

서혈천왕 마우성은 문제없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 점은 염려 말거라. 항주(杭州)의 다락원(多樂院)을 찾아가면 모든 의문이 풀어질 테니……."

"다락원이라면 중원 최대의 기방(妓房)이 아닙니까?"

진유걸은 의혹이 가득 담긴 눈길로 서혈천왕을 주시하였다.

"그렇다. 모든 사건의 열쇠는 그 다락원주가 쥐고 있다. 그 원주에게 한 여인의 소식을 알아오너라. 그것이 세 번째 일이다."

"노선배님의 말대로라면, 다락원주가 그 세 가지 일을 모두 알려 준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물론. 하나, 원주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얘야, 너라면 충분히 그 일을 해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말하는 서혈천왕은 희세의 대마두가 아닌 평범한 노인 같았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말하는 투가 아닌가?

진유걸은 정이란 것을 모르고 자라 정에 무척 약한 편이었다.

'비록 이 분이 석년의 대마두라 할지라도 지금은 고통 속에서 겨우 생을 영위하는 참혹한 분이 아니신가? 이 곳에서 혼자 얼마나 외로웠을까?'

진유걸은 사혈천왕에게 연민을 느꼈다.

"후배가 기필코 노선배님의 숙원을 이루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다. 노부는 이런 날을 기원하며 모든 일에 만전을 기해 왔다. 앞으로 열흘 정도면 너의 몸이 완전하게 치유될 테니 그 후에 일을 시작하도록 해라. 그것보다 배가 고플 테니 잠시 기다려라. 먹을 것을 가져올 테니……."

서혈천왕은 말을 마치는 순간 그대로 허공에 뜬 채 사라져 갔다.

그 광경을 목격한 진유걸은 혼비백산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저… 저럴 수가… 저것은 최상승의 경공수법이 아닌가? 과연 전대의 대마두답구나!'

그는 마우성이 사라진 뒤, 다시 독고휘와 주수연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배신이었다.

독고휘와 주수연!

두 사람은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던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그들에게만큼은 언제나 따뜻한 애정을 지니고 있던 진유걸이었건만, 이제 그의 가슴은 두 사람에 대한 핏빛 복수심으로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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