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章 배신(背信)
1
순간, 진유걸은 풍운신마장과 귀응신군이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는 뒤에서 엄습하는 잠력에 기절초풍할 듯 놀라며 재빨리 신형을 빼낸 뒤 좌장을 후려쳤다.
펑-!
서로의 잠력이 중간에서 부딪쳐 무지막지한 굉음 소리를 내는 순간, 진유걸은 충격으로 뒤로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그 기회를 놓칠세라 소림삼현인이 그에게 나한권을 내뻗었다.
퍽-!
"으윽!"
진유걸은 정통으로 얻어맞고 비명을 내질렀으나, 다시 자세를 추스린 뒤 연검을 고쳐 잡고 종횡으로 난무했다.
스스슥- 사사삭-!
검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가자 소림삼현인을 비롯한 무당제자들과 흑의인들이 혼비백산하여 물러섰다.
그러나 진유걸의 천애고독검은 조금의 사정도 없이 공간을 갈랐다.
찰나.
"으으악……!"
"억!"
"으윽!"
끔찍한 단말마의 비명이 밤하늘을 울리며 멀리 퍼져 나갔다.
절단된 사지들이 분분히 날리며 혈육 덩어리들로 화한 흑의인들이 고꾸라졌다.
"이것은 이 자리에 없는 탈혼사자의 몫이다! 가거랏!"
진유걸은 입에서 가느다란 핏줄기를 흘러 내며 천애고독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위윙- 윙-!
사람의 고막을 후벼팔 듯한 파공음이 울리며 예리무비한 검기가 삼 장 안을 뒤덮었다.
중인들은 그의 입에서 탈혼사자의 명호가 튀어나오자, 모두 당황하여 침착성을 잃고 말았다.
그만큼 이살(二殺)의 위명은 공포스러웠던 것이다.
진유걸이 어찌 그런 기회를 놓칠 수 있겠는가?
그는 검에 십 성의 내력을 운집시키며 번개같이 후려쳐 갔다.
무당칠성 중 생명을 부지하고 있던 세 도인의 안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들은 진유걸의 임기응변이 그토록 신속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 세 도인은 이빨이 으스러져라 악물며 수중의 검으로 광혈풍의 연검을 막았다.
순간.
차차차창-!
시퍼런 불꽃이 작렬하며 무당도인들의 장검이 뭉텅뭉텅 잘려져 나갔다.
다음 순간.
"아아악……!"
"헉!"
"으윽!"
심장을 동결시킬 듯한 세 마디 비명이 무섭게 허공을 질타했다.
휑하니 뚫린 세 도인의 가슴에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실로 두 눈 뜨고는 보지 못할 처참한 모습이었다.
진유걸은 그 여세를 몰아 뒤에서 달려들던 풍운신마장과 귀응신군에게 살초를 전개했다.
"가거라!"
그는 그들의 천돌(天突), 기해(氣海), 장문(章門) 등의 요혈을 노렸다.
뜻밖의 기습을 받게 된 풍운신마장 우열과 귀응신군은 민첩하게 신법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것은 진유걸의 허초(虛招)에 불과했다. 그는 신속절묘하게 방위를 바꾸며 폭갈을 내질렀다.
"암풍비폭(暗風飛瀑)-!"
쇄쇄쇄ㅅ-!
천애고독검은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며 반대편에 있던 소림삼현인을 향해 쏘아 갔다.
"헉!"
소림삼현인은 동시에 기음을 토하며 재빨리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방에서 조여 오는 검기의 압박에 질식할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아, 이것은 점창파의 비폭유천 초식과 무당파의 암풍약영(暗風掠影)의 초식을 혼합한 것이 아닌가?'
그것을 깨닫는 순간, 소림삼현인은 장문혈(掌門穴)이 섬뜩해짐을 느끼며 황망히 비명을 토해 냈다.
"으윽!"
"헉!"
"허억!"
잠시 후, 그들 역시 피를 흥건하게 흘리며 쓰러져 갔다.
귀응신군은 초조해진 얼굴로 예리해 보이는 삼절편(三絶鞭)을 꺼내 들며 빙글빙글 돌렸다.
쉬잉- 쉬잉-!
공간을 가르는 삼절편의 예리한 파공음이 소름끼치게 터져 나왔다.
"출독룡토(出毒龍土)-!"
삼절편이 허공을 날자, 수백 수천의 편영(鞭影)이 진유걸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러자 풍운신마장 우열도 뒤질세라 장력을 후려쳤다.
일향.
웅- 우웅-!
태산을 붕괴시킬 듯한 경력이 편영과 어울려 무섭게 짓쳐들었다.
"흥! 기어코 죽기를 소원하는군."
진유걸은 냉랭한 코웃음을 터뜨리며 쾌속하게 연검을 날리며 좌장을 격렬하게 뿌려 냈다.
휘잉- 웅-!
진유걸이 뿌려 낸 장력과 검기가 사면팔방으로 폭사되었다.
순간.
파파팍- 펑-!
검과 삼절편이 부딪치고 장력과 장력이 정면으로 충돌을 일으키자 희뿌연 먼지가 눈앞을 가렸다.
'음, 과연 강남녹림의 맹주다운 실력이로군. 하지만…….'
진유걸은 이빨을 악물며 번개처럼 신형을 폭사했다.
"탈혼마영(奪魂魔影)-!"
일순 처절하리만치 예리한 파공음이 장내를 진동시키며 부챗살 같은 검기가 사면팔방으로 퍼져 나갔다.
슈슈슈슈슉-!
"앗! 탈혼사자의 탈혼마식(奪魂魔式)!"
풍운신마장 우렬은 외침을 터뜨리며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력묵혈장을 시전하기 위해 모든 진력을 쌍장에 주입시켰다.
찰나간 그의 두 손은 먹물을 칠한 듯 시커멓게 변해 갔다.
'탈혼마식은 가공할 도법이다. 한데 이 놈은 연검으로 그 패도적인 도법을 전개하다니… 과연 광혈풍답구나.'
풍운신마장은 염두를 굴리며 두 손바닥을 교묘하게 뻗어 냈다.
우르릉-!
은은한 뇌성이 울리며 엄청난 잠력이 천하를 붕괴시킬 듯 휘몰아쳤다.
그러자 귀응신군 역시 이에 질세라 수중의 삼절편을 떨치며 덮쳐 갔다.
"독룡광란(毒龍狂亂)-!"
휘리리릭-!
묘한 기음이 발출되며 삼절편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진유걸의 혈도를 집요하게 노렸다.
진유걸은 그들의 민활한 공수전환에 혀를 내두르며 폭갈을 내질렀다.
"탈혼마혈(奪魂魔血)-!"
이것은 탈혼마식 중 제삼식으로, 일단 전개되면 상대의 삼십육 대혈을 모조리 봉쇄하는 죽음의 도식이다.
이 탈혼마혈 아래 생명을 구한 인물은 여지껏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때문에 탈혼사자조차 한 번도 전개한 적이 없는 초식이었다.
그런 탈혼마혈이 진유걸에 의해 전개됐으니…….
풍운신마장 우열과 귀응신군의 안색이 사색(死色)이 되었다.
순간, 천애고독검의 검기가 섬전처럼 그들의 몸을 스쳤다.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검기의 물결이 매섭게 흘려 가는 순간.
"흐윽!"
"헉!"
짤막한 두 마디 신음성이 튀어나오며 진홍빛 선혈이 허공을 뒤덮었다.
잠시 후, 장내를 엄습했던 엄청난 살기가 씻은 듯 가라앉았다.
철탑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진유걸의 입에서 한 줄기 실낱 같은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것은 그의 내상이 얼마나 심한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풍운신마장과 귀응신군 역시 몹시 고통스런 모습이었다.
특히 귀응신군의 왼쪽 팔은 어깨에서 떨어져 나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떨어져 나간 자리는 지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뻘건 선혈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풍운신마장도 역시 허리 부근을 베인 듯 그 곳에서 피가 꾸역꾸역 밀려 나오고 있었다.
풍운신마장은 두 손으로 허리를 감싸안고는 진유걸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으으, 역… 시 대단한 놈이구나. 설마… 네놈이 탈… 혼마… 식까지 익… 혔을 줄이야……."
그는 옷섶은 물론이고 하반신까지도 핏물로 젖어 있어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진유걸은 비웃음을 날렸다.
"흐흐… 죽음을 자초한 결과다."
그의 말에 풍운신마장이 흉광을 번뜩였다.
"광혈풍! 본좌는 결코 금일의 은덕을 잊지 않겠다. 청산(靑山)이 변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귀응신군 합구범이 맞장구를 쳤다.
"천상에 일월(日月)이 건재하는 한 오늘의 이 원한을 기필코 갚고야 말겠다!"
그들의 눈동자는 복수심에 불타올라 금시라도 시뻘건 핏물을 뚝뚝 흘릴 것만 같았다.
진유걸은 조소가 가득 담긴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흐흣… 과연 그럴 기회가 있을까?"
"물론 반드시 그런 날은 오게 될 것이다."
풍운신마장과 귀응신군은 그를 냉혹하게 흘겨본 후,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제서야 목전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주수연이 후다닥 달려왔다.
"공자님……!"
그녀가 격정에 못 이긴 듯 진유걸을 끌어안는 순간.
"우욱!"
진유걸은 기어코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내고 말았다.
주수연의 하얀 의복이 진유걸의 피로 인해 진홍빛으로 물들여졌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없이 그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따사롭고 감미로운 느낌이 그녀의 손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수연, 미안하오."
주수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기가 일렁이는 눈빛을 한 채 그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진유걸은 가만히 팔을 내밀어 주수연을 끌어안았다.
"수연……."
다정한 그의 부름에 고개를 든 주수연의 해맑은 눈동자에서는 연정(戀情)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 때였다.
"더러운 년놈들! 죽어라!"
갑자기 어둠을 뚫고 여인의 차가운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한 줄기 검풍이 진유걸과 주수연을 향해 맹렬히 폭사되었다.
우웅- 웅-!
진유걸은 주수연을 끌어안은 채 급급히 신형을 피해 내며 동시에 연속 삼(三) 지(指)를 퉁겨 냈다.
파팍-!
챙그랑-!
찰나, 한 자루 소도(小刀)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나갔다.
진유걸은 이 뜻밖의 암습자에게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월화신녀 전여정.
아, 바로 그녀가 아닌가?
전여정은 질투와 분노가 어린 눈빛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인의 한(恨)은 오뉴월에도 서릿발이 내린다고 했던가?
그녀의 눈에서는 얼음장보다도 서늘한 한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있었다.
진유걸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름을 느꼈다.
'정매가 이리도 변할 줄이야… 이것이 모두… 나 때문이다.'
진유걸이 회한(悔恨)으로 가슴을 치고 있을 때.
월화신녀 전여정이 두 사람을 가로막은 채 앙칼지게 소리쳤다.
"못 가요! 나를 쓰러뜨리지 않는 한, 어디에도 갈 수 없어요!"
진유걸은 문득 천면신옹을 떠올렸다.
탈혼사자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교분을 맺었던 인물.
비록 나이 차이는 많았으나 그들은 서로 형제처럼 지냈었다.
안휘성 만화장은 그에게 얼마나 따스한 곳이었던가?
진유걸은 지난날의 추억으로 인해 심장이 도려 낸 듯 아파 왔다.
진유걸의 눈길이 핏덩어리가 된 천면신옹의 수급에 꽂혔다.
다음 순간, 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울부짖었다.
"전 대가! 모든 게 이 소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부디 이 유걸이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대가만은… 대가만은 이 유걸이의 마음을 알고 계실 것이외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월화신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의 눈 속으로 파고드는 하나의 수급!
"아악! 할… 아… 버… 으음……!"
비로소 수급을 발견한 월화신녀 전여정은 끝내 말도 잇지 못한 채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진유걸은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찌르르 아파 왔다.
'부모도 일찍 여의고 대가의 손에서 자란 정매가 나 때문에 이런 불행을 겪다니… 불쌍한 정매…….'
이 때 주수연이 그의 상념을 깨웠다.
"공자님! 잠시 후면 천우 공자 일행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어서 이 곳을 떠나야 해요."
진유걸은 그녀의 말에 경각심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는 떠나기 전, 천면신옹의 수급을 조심스럽게 묻어 준 뒤 비감 어린 음성으로 주검을 위로했다.
"전 대가, 지금은 이렇게 떠나지만 다시 강호에 나오는 날 반드시 대가의 시신을 찾아 새로이 안장해 드리겠소. 그리고 대가의 원한도 기필코 풀어 주겠소. 그러니 부디 안심하고 좋은 곳으로 가시구려."
그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주위는 소림삼현인을 비롯한 무당칠성, 독랑구혈, 흑의인들의 시체로 참담한 정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 때, 장내의 끔찍한 광경을 덮으려는 듯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 쏴아아-!
암울한 대지(大地)는 조금씩 핏물에 젖어 갔다.
진유걸과 주수연은 비를 맞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마 후, 어둠에 휩싸인 장내는 비 내리는 소리만이 가득 찼다.
쏴- 쏴아-!
이 때 돌연, 시체들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원한에 가득 차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여인.
그녀는 바로 월화신녀 전여정이었다.
일순, 그녀는 하늘을 향해 소름이 오싹 끼칠 만큼 으스스한 목소리로 외쳤다.
"광혈풍! 기다려요! 당신은 결코 이 전여정의 수중을 벗어나지 못해요! 절대로… 절대로……!"
절규하듯 부르짖는 전여정의 외침이 빗속으로 잠겨들었다.
쏴- 쏴아-!
그칠 줄 모르는 폭우는 끊임없이 대지를 질타했다.
2
여명(黎明).
천하 세인(世人)들의 가슴에 희망을 안겨 주는 태양이 동녘 하늘을 물들이며 번져 오고 있었다.
비에 젖어 있던 초록(草綠)은 햇살을 받자, 더욱 싱그러움을 더해 갔다.
이 때 물결처럼 깔린 초원(草原) 위로 한 쌍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천하제일의 미남자와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녀.
그들은 천상(天上)에서나 볼 수 있는 신선풍의 남녀가 아닌가?
사내는 걸출한 체격에 고귀한 기품이 엿보이는 약관의 청년이었다.
관옥(冠玉) 같은 피부에 넓적한 이마,
지혜(知慧)가 넘치는 성목(星目),
태산준봉(泰山俊峯)처럼 우뚝 선 콧날,
그 아래는 강인한 의지(意志)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한 일자의 입술이 조화 있게 자리하고 있었다.
태산(泰山)의 정기(正氣)와 하늘의 영기(靈氣)를 모두 흡수한 듯한 인중지룡(人中之龍)!
과연 이 청년이 누구란 말인가?
광혈풍 진유걸!
그렇다. 그가 바로 무림인들에게는 공포적 존재이며, 또한 천하 여인들의 방심을 불태우는 이살(二殺) 중 일 인이었던 것이다.
또한 신분을 넘어선 사랑 때문에 도피 행각을 벌이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의 곁에 있는 여인은 바로 주수연이 아니겠는가?
싱그러운 풀잎같이 고아한 기품을 간직한 여인.
백옥 같은 살결에 그린 듯이 새겨진 봉황(鳳凰)의 아미(蛾眉),
당대의 명공(名工)이 상아를 다듬어 세운 듯한 콧날,
맑고 투명한 호수(湖水) 같은 눈동자,
앵두빛 입술…….
그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수려한 화용월태(花容月態)의 용모였다. 게다가 삼단 같은 머리채를 질끈 동여매고 있어 더욱더 앳되게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드러나는 유연한 곡선들은 그녀의 성숙미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주수연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물었다.
"공자님, 이제 얼마나 더 가면 되는지요?"
"이제 반나절 가량만 가면 되오. 다시 업히겠소?"
주수연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또요? 싫습니다. 어제는 밤이라서 그랬지만, 자칫 사람들의 눈에라도 띄이게 된다면… 그 무슨 망신입니까?"
"수연, 이렇게 걷다가 천우 공자 일행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더 큰 낭패가 아니오? 그러니 내 등에 업혀서 조금이라도 빨리 가는 것이 낫지 않겠소?"
그러자 주수연이 걱정스런 눈빛을 했다.
"공자님, 정말 중조산에 가면 무사할 수 있을까요?"
진유걸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물론이오. 그 때문에 우리들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그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소?"
주수연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이렇듯 진면목으로 가자니 왠지 두려워요."
"후후… 천하의 광혈풍이 여기 있는데 무엇이 두렵단 말이오? 이미 정체가 밝혀졌으니 구태여 역용을 할 필요가 없어졌소."
"싸우지 않기 위해 역용을 했던 것인데, 이렇게 되면 또 피비린내 나는 혈전을 벌여야 되잖아요?"
진유걸은 그제서야 주수연이 걱정하는 의미를 깨닫고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수연! 어제의 상황은 불가피한 것이었소. 하지만 중조산에 무사히 도착한다면 그 후로는 절대 살생을 금하겠소! 다만……."
순간, 진유걸은 말꼬리를 흐리며 은은한 살기를 양 미간에 띄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 대가의 원한만은 반드시 풀고야 말 것이오."
주수연은 그의 싸늘한 어조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는 왕부의 명을 어긴 죄목으로 참형을 당했어요. 공자님은 누구에게 복수를 하실 건가요?"
"모르겠소. 그러나 그가 누구든 천면신옹을 죽인 자는 결코 이 광혈풍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오."
"만일… 숙부님이 그… 일을 지시한 거라… 면요?"
진유걸은 그 말에 흠칫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수연의 눈에 눈물 방울이 맺혀 있었다.
"어쩔 수 없소! 상대가 비록 수연의 숙부님이라 하더라도……!"
일순 주수연은 충격을 받은 듯 신형을 휘청였다.
"아……!"
진유걸은 그런 그녀를 부축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태성왕야는 그 일에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니 너무 심려 말고 업히구려."
그는 달래듯이 말하며 등을 내밀었다.
주수연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진유걸의 등에 업혔다.
"그렇지만 너무하셨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그 분은 저의 숙부님이자 황실과도 인척간인데……."
"수연을 무시하고 황실에 대역죄를 범하는 일이지요. 하나, 나는 의리(義理)를 저버리지 못하는 성격이오!"
주수연은 그의 강인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지라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살며시 진유걸의 널찍한 등에 고개를 파묻었다.
훈훈한 그의 체취가 그녀의 후각을 마비시킬 듯 풍겨 왔다.
진유걸은 자기의 어깨를 감싸는 따스한 주수연의 손길을 의식하며 신속히 몸을 날렸다.
휘익-!
등에 매달린 주수연의 귓가로 세찬 바람 소리가 윙윙거리며 스쳐 갔다.
그로부터 두 시진 후.
드디어 그들은 산서성(山西省) 남단의 중조산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진유걸은 그늘이 있는 거대한 수목 아래 주수연을 내려놓으며 감개무량한 듯 외쳤다.
"이제야 다 왔군. 수연, 그 동안 고초가 많았소."
주수연은 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진유걸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모든 난관을 물리쳤군요."
"수연! 우리들의 보금자리는 광혼곡(狂魂谷) 안에 있소. 그 곳에서 나의 유일한 친구, 탈혼사자 독고휘(獨孤煇)가 애타게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을 게요."
주수연은 그에게 친구가 있다는 말을 처음 들은 듯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탈혼사자 독고휘?"
진유걸은 독고휘를 생각하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그 친구가 바로 천하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탈혼사자요."
탈혼사자 독고휘!
광혈풍 진유걸과 함께 이살(二殺)로 불리우는 인물.
그의 탈혼마식은 무림인들에게 공포의 초식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전 도식을 펼친 적이 없었다. 그의 도법을 막을 만한 상대를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패도적인 독문수법을 사용하였고, 진유걸은 각 파의 초식을 본딴 독창적인 무학을 연성해 냈다.
이들 이살의 무공을 가지고 항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하지만 무공으로 그들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독특한 무공을 사용할 뿐더러, 서로 극진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주수연은 무림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에 단지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그분도 무공이 뛰어난가요?"
"물론이오. 그는 나보다 더 고명하오. 어제 풍운신마장과 귀응신군을 제압한 것도 그의 탈혼마식 때문이었소. 만일 그 때 독고휘가 그 절초를 사용했더라면 그들은 필시 까마귀밥이 되고 말았을 거요."
독고휘를 몹시 자랑스러워하는 진유걸을 보며 주수연은 웃음이 나왔다. 그가 이렇게 어린애처럼 흥분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분은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노출시키지 않는데, 그 분에 대해서만은 틀리구나. 그만큼 그 분을 좋아하신다는 거겠지.'
"하지만 공자님만큼 뛰어나시지는 않겠죠? 공자님의 지혜와 기지(機智)는 천하가 알아주시잖아요? 게다가 기상(氣象)이 웅후하고 기품이 고고하여……."
진유걸은 주수연의 찬사를 손으로 막았다.
"수연, 휘는 나보다 훨씬 뛰어나오. 그는 비단 무공뿐 아니라 용모도 천하제일이오."
"하지만 그 분이 아무리 뛰어나도 천하에 그 누가 공자님과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소녀에게는 공자님이 가장 뛰어나신 분으로 보입니다."
진유걸은 빙그레 미소를 띄우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자, 그만 갑시다. 그 친구가 몹시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그는 주수연을 안은 채 두 발을 굴렀다.
휘익-!
잠시 후, 그들은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 양쪽으로 솟아 있는 계곡으로 진입했다.
그 곳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협소하여 나중에는 한 사람만이 간신히 통과할 수가 있었다.
진유걸과 주수연은 대낮임에도 음냉한 한기가 도는 구불구불한 미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이십여 장쯤 들어갔을까?
우거진 잡초와 널찍한 바위, 그리고 한 그루의 고목이 눈에 들어왔다.
흡사 폐허가 된 정원 같은 곳이었다.
순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주수연이 비명을 질렀다.
"아니? 이 곳은 절벽이잖아요?"
그녀의 발 앞, 그 곳은 천야만야한 낭떠러지였던 것이다.
진유걸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 곳이 바로 절애(絶崖)이고, 우리가 통과한 계곡이 광혼곡이오."
"그럼… 친구 분인 독고 공자님께서는 어디에 계시죠?"
진유걸은 그녀의 물음에 구멍이 뚫린 고목 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무언가를 만졌다.
순간.
그르릉-!
기음이 토해지는 것과 동시에 고목 좌측에 있던 바위가 진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찰나지간 바위가 서서히 벌어지며 그 밑으로 지하 계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뜻밖의 광경에 주수연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아, 이토록 주도면밀한 기관장치가 있을 줄이야!"
그녀가 지하 계단으로 급급히 발을 옮기려는 순간.
"수연, 멈춰요!"
진유걸은 황망히 소리치며 그녀 곁으로 몸을 날려 왔다.
"그 곳은 입구가 아니오. 모르는 인물이 자칫 들어서다간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오."
진유걸은 돌 하나를 주워 그 곳으로 던졌다.
툭-!
순간.
파르륵- 파팍-!
섬뜩한 기음이 터져 나오며 지하 계단의 사면에서 무시무시한 암기가 섬광처럼 폭사되었다.
아, 실로 끔찍한 수법.
만일 주수연이 조금만 더 아래로 내려갔더라면 실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을 것이다.
주수연은 얼이 빠진 듯 멍한 얼굴이 되었다.
"누가 장치한 것인지는 모르나 대단하군요."
"우연히 발견한 곳이라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오."
그는 주수연을 데리고 정면의 낭떠러지로 다가갔다.
"진짜 입구는 바로 이 단애의 상단에 위치하고 있소."
진유걸은 그녀를 덥석 안고는 다짜고짜 단애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의 이 돌연한 행동에 주수연은 기절초풍할 듯이 놀랐다.
"아악! 공자님!"
하지만 진유걸은 어느 틈에 널따란 금색 판 위로 내려서는 것이 아닌가?
금석판은 꼭대기에서 삼 장 가량 떨어진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진유걸은 바르르 떨고 있는 주수연을 다독거려 주었다.
"몹시 놀랐구려? 하지만 이젠 안심해요. 드디어 무왕동부(武王洞府)에 도달했으니……."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전면에 열려진 석문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동부의 입구는 의외로 넓었고, 천장에는 오리알만한 야명주가 일 장 간격으로 박혀 있었다.
바로 이 때.
"하하하… 유걸이! 어찌 이리도 늦었는가?"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청의를 입은 청년이 야명주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청색 유삼에 유생건을 단정히 쓴 약관의 청년!
나무랄 데 없이 수려한 이목구비(耳目口鼻)를 지닌 절세미남(絶世美男)이 아닌가?
특히나 그의 서글서글한 눈에서 쏟아지는 광채는 사람의 혼백을 그대로 앗아 갈 듯 뇌쇄적이었다.
탈혼사자 독고휘, 바로 그였다.
진유걸은 주수연을 내려놓으며 마주 웃었다.
"휘! 하마터면 자네도 만나지 못하고 황천객이 될 뻔했네그려."
그는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그대로 독고휘를 끌어안았다.
독고휘 역시 진유걸을 마주 안아 갔다.
그 때였다.
번쩍-!
두 사람이 서로를 껴안는 순간, 탈혼사자 독고휘의 눈빛이 으시시한 안광을 발하는 게 아닌가?
그것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살기 띤 눈빛이었다.
우연히 그의 눈빛을 보게 된 주수연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니, 독고 공자님의 눈빛이 어찌 저리도 소름끼치게 보인단 말인가?'
그러나 독고휘를 만난 진유걸은 반가운 마음에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하하… 휘! 너무도 반갑………."
진유걸이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독고휘가 그를 향해 다짜고짜 우장을 내뻗는 것이 아닌가?
팍-!
날카로운 음향이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진유걸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허억!"
그는 이 돌연한 사태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독고휘가 공격한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 곳에는 날이 시퍼런 비수 하나가 깊숙이 박혀져 있는 것이 아닌가?
진유걸은 두 손으로 아랫배를 감싸며 뒤편으로 휘청휘청 물러섰다.
시뻘건 선혈이 주르륵 그의 옷깃을 타고 흘러내리며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으으, 휘! 네가 나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미… 믿을 수가 없구나."
진유걸은 독고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배신감과 분노로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독고휘는 그런 그를 조소하듯 바라보며 득의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흐흐흣… 진유걸! 너는 역시 우정이 깊은 놈이로구나. 나를 위해 이런 절세가녀(絶世佳女)를 모셔 오는 호의를 베풀다니 말이다."
진유걸은 전신으로 엄습하는 뼛골 시린 냉기에 입술을 와락 깨물었다.
"죽일… 놈!"
그러나 독고휘는 여전히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리석은 유걸! 우리 두 사람, 결코 너의 호의를 잊지 않으마."
"안 돼… 수연만은……."
진유걸은 자신보다 주수연이 더 걱정되었다.
그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주수연을 바라본 순간.
아아, 이럴 수가 있는가?
진유걸은 순간, 둔탁한 쇠뭉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엄청난 충격을 받고 말았다.
주수연이 독고휘를 향해 간장이 녹아 내릴 듯한 교소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미소는 매우 친숙한 사람에게나 지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진유걸은 천지가 무너지고 자신의 몸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겨 나가는 듯한 아픔에 휩싸였다.
"이…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진유걸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 광경에 미친 사람마냥 중얼거렸다.
방금 전만 해도 진유걸이 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하던 주수연이 아니었던가?
그런 주수연이 독고휘에게 은밀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니…….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 했던가?
잠시 후, 모든 것을 인정한 진유걸은 금시라도 핏물이 뚝뚝 흘러내릴 듯한 눈빛으로 독고휘와 주수연을 번갈아 쏘아보았다.
짙은 원한이 그의 눈에서 이글이글 뿜어져 나왔다.
이 때 돌연.
"죽어랏!"
진유걸은 피를 토하듯 외치며 독고휘를 향해 사력을 다해 짓쳐들었다.
하지만 이미 깊은 중상을 입은 그의 공세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푸후후… 그래도 그 불 같은 성질은 여전하군. 하지만 오늘로모든 게 끝장이야. 잘 가게, 친구!"
독고휘는 진유걸의 공세를 여유 있게 피해 내며 마주 일 장을 후려갈겼다.
펑-!
웅후한 장력이 진유걸의 가슴을 맹타하는 순간.
"으아악……!"
진유걸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끝없는 절애 밑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광혈풍 진유걸.
그는 불타오르는 복수심을 안고 끝없이 추락(墜落)하고 말았다.
지옥(地獄)의 끝과 같은 깊이 모를 단애(斷崖) 아래로…….
진유걸, 그는 과연 친구의 배신으로 천참만륙(千斬萬戮)의 분시(分屍)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