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5화 (235/235)

에필로그

천기자가 죽었다.

모르는 이들에게는 지나가는 소식으로, 아는 이들에게는 충격으로.

중원을 뒤흔든 폭풍의 끝이었다.

그리고 이젠 남은 이들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천산으로 돌아간다. 피해를 수습하고 세력을 정비하겠다."

"그 뒤는 어떻게 되는 거죠?"

"마도의 의지는 언제나 하나다. 암약하던 적을 제거했으니 다시 나아갈 시간이겠지."

"언젠가 중원 한복판에서 싸울 날이 올 수도 있겠군요."

"두려운가?"

"아뇨.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천마는 천마였다.

그는 지나간 폭풍에 안주하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들을 추슬러 천산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꾸렸다.

그가 다시 천산을 벗어나는 날.

중원은 단단히 긴장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는 네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다음은 아니다. 저기 저 건강하기만 한 아버지를 먼저 쓰러뜨리고 네놈에게 도전하겠다."

"흥. 순서를 지켜라, 파운. 신교를 먹어치우고 소백에게 도전하는 건 내가 먼저다."

"하! 여기서 서열을 정리해 볼까, 강유?"

"얼마든지!"

으르렁거리는 파운과 강유.

입장은 서로 달라도 느끼는 건 같았다.

현시점에서 명한에게 닿지 못한다는 사실.

보통 사람이라면 주눅 들고 포기할 만하지만, 둘은 아니었다.

되레 의욕을 불태우며 후일을 도모했다.

"두 사람이 싸워서 되겠어? 힘을 합쳐서 날 타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웃기지 마! 널 쓰러뜨리는 건 나 혼자면 충분하다!"

"흥. 마찬가지야. 남의 도움을 받아서 널 상대하는 건 의미가 없어.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라. 반드시 널 쓰러뜨리러 올 거니까."

"기다리지."

저 둘은 강해질 것이다.

명한은 예언과 같은 예감을 느꼈다.

"우리도 돌아가지. 너무 오랜 시간을 밖에서 낭비했어."

"화무천. 신교…… 아니, 천마와는 이걸로 된 겁니까?"

"하하. 우리 핏줄에 그런 솜털 같은 감정은 필요 없다. 저놈도 건재하고 너도 건재하니 그것으로 충분하겠지. 난 이대로 은거하여 여생을 즐기마."

"군 장군이나 구검선녀도 같이 가는 건가요?"

"오래된 자들은 이제 퇴장할 시간이지. 우리는 역사의 뒤안길이면 충분하다."

"아직 멀쩡해 보이시는데. 뭐, 늦둥이로 촌수만 곤란하게 안 하면 족합니다."

"하하. 그리 말하니 한번 노력해 보마. 너도…… 저 두 아가씨를 하릴없이 기다리게 하지 말고 어서 날짜나 잡거라."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

명한이 쓰게 웃으며 화무천과도 작별했다.

"태사, 청청 소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벌레에 대한 건가? 어떻지?"

"모두 소멸을 확인했습니다. 부작용은 남아 있지만, 그래도 다들 무사하다고 하더군요."

"한시름 덜었군. 먼저 가서 상황을 정리해 둬라."

"네. 그럼 태사님은……?"

함께가 아니라는 말에 이월이 살짝 의아하게 바라봤다.

이에 명한은 조금은 지친 듯한 시선으로 주변을 보며 답했다.

"가볍게 유람이나 하고 돌아갈 생각이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먼저 가 있거라."

"네, 태사.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남은 이들도 전부 보냈다.

이제 곁에 남은 건 향아와 은소소가 전부.

둘은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명한을 보고 있었다.

"……가는 거지?"

"응. 아무리 속이려 해도 너희 둘은 어렵네."

"곁에서 지낸 시간이 있습니다, 도련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어요."

"그래, 그래."

다 몰라도 둘은 알 수밖에 없는 진실.

"세상이 모두 순리에 맞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말은 내 존재 역시 그에 맞춰진다는 의미."

"……불공평해. 그렇게 노력했잖아. 꼭 그래야만 하는 거야?"

"하늘이 예외를 두는 존재는 아니잖아. 세상이 순리를 찾는다면 내 존재는 오점일 뿐이야."

애초에 소백의 몸으로 명한이 들어온 건 황제의 바람이 불러온 일종의 기적.

천기가 순리대로 흐르고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모든 어긋남이 사라지고 순리가 돌아온 이상 그 역시 이곳에 머물 수는 없었다.

눈물을 머금은 두 사람을 품으로 안았다.

흐느낌은 조금……

아니, 많이 서글펐다.

"도련님. 전 여기에서 도련님이 돌아오시길 기다릴게요."

"향아야."

"고집이라고 말해도 좋아요. 전 도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절대로 벗어나지 않을 거예요. 제가 아는 도련님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돌아올 거거든요."

"그래! 나도 여기서 같이 기다릴 거다! 치사하게 혼자 다 끝난 것처럼 돌아가고 끝이 아니야! 그렇게 가는 법은 없어! 돌아올 때까지 흰머리가 되든 늙어 죽든 여기서 기다릴 거야!"

"……하. 하하."

고집불통 두 여인을 보며 명한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다 포기한 자신과 다르게 둘은 여전했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강한 건 이 둘이 아닐까.

둘을 품에 꼭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꼭 돌아올게. 정 안 되면 하늘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서라도 올게. 그러니 이기적이더라도 기다려 줘."

"제대로 돌아오기나 해."

"여기서 기다릴게요."

그렇게 약속을 남기고……

무림에서 ‘소백’이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

길게 늘어선 줄.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하게 틀어진 조명.

화려하게 장식된 입간판과 사방에서 전달된 화환들.

유명 작가의 사인회장이었다.

"자, 다음 분 오세요."

장내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서 한 명씩 차례대로 진입했다.

이번에는 아직 앳된 기색을 다 지우지 못한 여고생.

커버도 뜯지 않은 책을 앞으로 내밀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작가님 진짜로 팬이에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하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저야말로 이렇게 만나서 기쁘네요. 성함이?"

"윤아요, 윤아. 서윤아. 이번에 수능 보거든요. 잘 치라고 한마디만 적어주세요."

"그래요, 윤아 양. 이번 수능 대박나기를 기원해요."

"감사합니다! 가보로 간직할게요!"

고개를 테이블을 박을 듯 숙이는 윤아를 보며 맞은편 남자가 미소 지었다.

조금은 평범한, 하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가진 사람이었다.

어디서는 소백으로, 이곳에서는 명한으로 불린 남자.

"다음 분 들어오세요."

무림에서 현실로 돌아오고 5년.

그동안 겪었던 일을 그대로 작품으로 엮은 것이 대박을 쳤다.

경험담만큼 생생한 글도 없는 법.

무명작가로 빌빌거리던 명한은 어느덧 유명 작가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작가님."

차례를 이어받아 자리에 앉은 한 남자.

긴 머리카락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만난 적이 있나요, 우리?"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독특한 화법이네요. 성함이?"

"이름은 됐고, 한 가지만 물어보고 싶어요."

독특한 사람.

명한이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삶에서 무언가를 택해야 한다면 작가님은 어떤 걸 고르실 건가요?"

"굉장히 추상적이네요. 보기는 없나요?"

"글쎄요. 마음에서 떠오르는 대로 말씀해 주시면 족합니다."

"마음에서 떠오르는 거라. 그럼, 간단하네요."

책을 넘겨받아 일필휘지로 적어가는 명한.

‘인연을 택하기를.’ 짧게 적힌 한 문장이었다.

이를 본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잊은 줄 알았어."

"설마. 하늘이 답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야."

"하하. 기뻐할 얼굴을 생각하니 나까지 행복하군."

"그걸 위해 이곳까지 온 거야? 쉽지 않았을 텐데."

"해야지. 친구를 위한 일인데."

"친구라. 형제라고 하자."

명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를 가볍게 안았다.

얼굴도, 체취도, 체형도 모두 낯설 뿐인 남자이나, 본질적으로 그가 누구인지 이해했다.

거울의 양면과도 같은.

말하자면 형제인 인물이었다.

"내가 이렇게 가면 이곳은 꽤 난리가 나겠지?"

"아마 대서특필될 거다. 외계인에게 납치당한 거라고 소문이 날지도 몰라."

"하하.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건 아쉽네."

"건너가서 볼 모습을 생각하면 아쉬움은 없을 거다."

"그녀들은…… 괜찮은 거야?"

"가서 직접 봐."

한때, 황제였던 남자.

그가 양손을 들어 세상의 틈을 만들었다.

이건 유일한 편법.

그저 존재할 뿐인 세상의 배려.

이야기의 외전이었다.

"고맙다, 형제."

"나야말로. 행복해라."

유명 작가, 명한의 실종.

한겨울의 괴담 한 줄로 새겨졌다.

#

험한 산길을 한 노인이 힘겹게 올라갔다.

한 짐 가득 등에 얹은 땔감은 겨울을 지내기 위한 필수품.

손발이 꽁꽁 어는 것보다야 지금의 고단함이 나았다.

자식놈과 마누라 얼굴을 떠올리면 이건 힘든 것도 아니었다.

"어, 어이쿠!"

하지만 늙은 몸뚱이는 언제나 말을 듣지 않는다.

비탈길에 다리가 풀려서 그만 휘청이고 말았다.

땔감이 우르르 쏟아져 아래로 굴러떨어지니, 울화통에 발만 동동 굴렀다.

"조심하셔야죠."

"미끄러우니 천천히 가셔요."

그때.

비탈길 아래에서 선녀 둘이 나타나 굴러가던 땔감을 잡아서 올려 주었다.

나풀나풀 거니는 모습이 딱 선계의 선녀였다.

노인이 깜짝 놀라면서도 감읍하여 고개를 팍 숙였다.

오가는 산사람들이 ‘선녀가 산다.’라고 말해도 비웃던 기억에 괜히 뜨끔하기도 했다.

"후후. 고개 드셔요. 그냥 지나가는 길에 거들었을 뿐이에요."

"서, 선녀님 아니신지요?"

"제가 하늘에서 온 선녀 같아요? 그냥 보통 사람이랍니다."

"……"

아무리 봐도 선녀인데.

노인은 눈을 끔벅이며 생각했지만, 감히 아니라고는 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차곡차곡 쌓여 있는 땔감에 그저 감사하다며 고개만 숙였다.

재수가 좋으려니 이렇게 선녀도 만나나 보다.

그저 그렇게 넘겼다.

"그럼 무리하지 마시고 천천히 가셔요."

"네, 네. 선녀님들은 하늘로 올라가시나요?"

"쿡. 선녀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저흰 산 위에 있는 정자에 볼일이 있어요. 누굴 만나야 하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네요."

"어이쿠. 누가 감히 선녀님들을 기다리게 한데요. 큰일 날 일인데."

"후후, 그러니까요. 오늘은 꼭 오셨으면 좋겠어요."

대체 누가 선녀님들을 기다리게 하는 걸까.

노인은 의아함을 품고 선녀를 먼저 보냈다.

짐은 전부 되찾았지만, 다리가 아파서 잠깐 쉴 요량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앉아 숨 돌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저 멀리서 한 청년이 걸어 올라오는 걸 봤다.

앳된 기색이 남아 있는 잘생긴 청년이었다.

"저기, 노인장. 혹시 이 산에 기념할 만한 장소가 있습니까?"

슥, 다가와 묻는 청년에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찾을만한 명물이 있는 산은 아니었던 탓이다.

"무얼 찾으려고 이리 오셨소?"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데, 장소를 찾기 어렵지 뭡니까. 혹시 이 근처에서 눈에 확 띄게 아름다운 여인 둘을 본 적 없습니까?"

"아름다운 여인 둘이라……"

문뜩, 선녀가 떠오른 노인이었으나 고개를 흔들었다.

어딜 감히 뭇사람이 선녀를 탐할 수 있단 말인가.

언어도단이었다.

"이거 참. 분명 이곳이라 생각했는데."

"만나야 할 사람이 중한 이요?"

"네. 전부를 다 버리고 올 만큼 중요한 인연이지요."

"허허. 젊은이가 꽤 강단이 있구먼. 그럼, 이렇게 해보시구려. 저 산 위에 선녀 두 분이 기거하시는데, 가서 치성을 한번 드려보시게나. 정성이 닿으면 하늘이 복을 내릴지 누가 알겠나."

"선녀 둘이 정상에 기거한다…… 이건가요?"

"어이쿠. 어디 가서 내가 말했다고는 하지 말게나. 두 분은 청정을 깨뜨린 벌을 받고 싶지는 않네."

"하하.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청년은 그리 말하더니 큰 걸음으로 산을 타기 시작했다.

혹시 실수한 걸까.

노인은 자신이 두 선녀의 청정을 방해한 것 같아 황급히 뒤를 쫓았다.

가파른 경사와 두어 번 건너 도착한 정상.

하지만 그곳에서 본 건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도련님!!"

"소백!"

하늘을 날아 청년에게 안기는 두 선녀.

마치 천년은 못 본 듯 그리움 가득한 얼굴로 부둥켜안았다.

그제야 노인은 자신이 크게 착각했음을 깨우쳤다.

"산신님이셨어. 산신께서 선녀님을 만나러 온 거였어."

그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는 운무에 휘감겨 승천하는 세 사람을 바라봤다.

오랜 전승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이었다.

이건 그림으로 남겨야겠구나.

노인이 바닥에 조악한 솜씨로 끄적이다 그만두었다.

"……허허. 저리 행복한 모습이라니. 내 솜씨로는 담을 수 없겠구나."

그저 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그림을 손으로 지우고는 소리 없이 물러났다.

이 뒤는…….

‘오래오래 행복했습니다.’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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