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4화 (234/235)

사필귀정이라

세상의 빛이 바뀌었다.

명한은 천천히 눈을 뜨고 앞을 바라봤다.

어딘가 당황한 표정의 사람들이 시야 곳곳에서 잡혔다.

이들 모두 비슷한 경험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가능했을지 모르는 세계."

인과의 흐름이 뒤틀려서 지금이 아닌 다른 세계가 되는.

일종의 허상세계의 구현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건 다름 아닌 천기자.

그의 집착과 광기가 빚어낸 힘이었다.

"……어째서냐. 어째서 돌아왔지?"

어딘가 많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로 천기자가 물었다.

그의 주변 공간은 희미하게 일렁이고 형태가 계속해서 바뀌고 있었다.

이는 인과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가능했을지도 모를 세계. 그 달콤한 꿈은 깨기 힘든 유혹이었다. 어쩌면 내가 가장 바라던 것이 그런 삶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도 돌아왔다는 건가? 이곳에 뭐가 있다고? 네게는 그곳이 진실이다. 허구뿐인 이 삶에서 뭘 원하는 거냐."

"거짓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수많은 연을 맺었다. 그 관계 자체는 절대로 허구일 수가 없어. 나는 그 한 명 한 명과의 인연을 모두 품고 있다. 하나의 바람을 위해 나머지를 모두 버린 너와는 달라."

"고작 그런 얄팍한 인연 때문에 바람을 버린다고?"

"인연이라는 건 잘 짜인 실타래와 같다. 한 올 가지고 옷을 짤 수는 없는 노릇이야. 네가 바란 꿈도 결국에는 다른 이들과의 인연이 엮여서 만들어진 결과. 허무의 세상 속에서 너와 황제만 남는다고 무엇이 될까?"

허구의 삶은 이가 녹아버릴 정도로 달콤했다.

하지만 이어지지 않은 인연은 그저 겉보기만 그럴듯한 그림.

그 안은 텅텅 비어 공허함만을 자아낼 뿐이다.

명한은 그 사실을 알기에 허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나를 이해해준 건 오직 그분뿐이었어. 모두가 나를 괴물, 벌레, 짐승으로 취급할 때. 오직 그분만이 나의 가치를 알고 쓰임을 주셨다. 어둠 속에 존재한 유일한 빛."

천기자의 몸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것을 포함하여 인과의 끈을 한 번 잘라냈었기 때문에 그의 형태는 지금 이 세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치 옷에 묻은 먼지와 같이.

바람이 그를 씻어낸다면 아무도 그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빛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 선택은 하나뿐이다. 가질 수 없다면 모조리 파괴하겠어. 세상을 잿더미로 만들어 모든 인과를 무로 돌리겠다."

"다 끝났다, 천기자. 너는 곧 세상 밖으로 밀려나게 될 터. 얌전히 운명을 받아들여."

"큭. 크크큭. 웃기는군. 티끌만 한 삶을 살아온 벌레 따위가 내게 충고를 하다니. 너는 내 능력을 모른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갑자기 천기자의 몸 주변 흔들림이 멎었다.

인과의 흐름과는 단절되어 있지만, 존재감은 옅어지지 않았다.

되레 기묘할 정도로 그 크기를 부풀리며 명한을 압박했다.

그리고 이내…….

허공의 한 부분이 유리처럼 깨지더니 낯선 공간을 드러냈다.

"환상루?"

"어째서 환상루인지 아는가? 그 공간이 인과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흐름에서 밀려난 온갖 오물들이 가라앉는 하수구.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해 왔던 공간이지만 이젠 필요 없다."

콰드드득.

공간이 완전히 무너지고 그 너머의 것들이 가루가 되어 흘러들어왔다.

이건 천기자가 말한 대로 본래의 천기에는 포함되지 않은 오물.

끊어진 인과의 단락들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오래전에 죽었어야 할 천기자의 본래 육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흰 수염, 자글자글하게 파인 주름.

거의 수직으로 굽힌 허리.

태생적인 곱사등이의 몸이었다.

"전부. 전부 무너뜨리겠다. 가질 수 없다면 모조리 무로 돌아가라."

드득. 드득.

굽어 있던 허리가 펴지고, 천기자의 눈에서 시커먼 빛이 흘러나왔다.

이건 이미 한 세계에 담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정과 마. 이득의 논리 따위도 무용지물.

"종말이다."

삶을 위해 저항해야 할 순간이었다.

#

명한이 모든 힘을 동원해서 인과의 띠를 휘둘렀다.

하늘에서 땅으로 거대한 빛이 떨어지며 지면을 녹였다.

이에 천기자는 검은 구체를 사방으로 쏟아내며 모든 법칙을 무위로 돌렸다.

빛과 어둠이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두 힘은 서로 상극이었다.

"소소, 향아! 사람들을 뒤로 물려!"

"하지만 그러면 네가……!"

"날 믿어!"

"아가씨 가요! 도련님이면 할 수 있어요!"

이 싸움에 끼어들 힘은 극히 소수만이 가지고 있다.

사람을 뒤로 물리고 삼부자가 천기자를 협공했다.

거대한 힘의 파동이 천지를 뒤집고 세상을 흔들었다.

압도적인 힘의 향연에 공간 자체가 비명을 토해냈다.

"무의미하다, 버러지들아!"

하지만 그 모든 힘조차 천기자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세상을 이루는 인과 흐름의 밖.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인 온갖 부정을 휘두르고 있었다.

원인을 부정하고 결과를 부정하며 그렇게 완성된 세계를 부정했다.

이 지독한 부정의 향연은 인간 개인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천마와 화무천의 몸에 상처가 늘어났다.

"이 방식으로는 이길 수 없다."

"이제 와서 방법을 제시하는 건가, 화무천?"

"아비 역할은 제대로 못 했어도, 할아버지의 역할은 제대로 해볼까 하는데. 아직도 묵은 원한이 남아 있는 거냐?"

"흥. 네가 사라지고 신교를 바로잡은 건 나다. 천마의 이름을 짊어진다면 그건 내가 돼야 옳다. 비켜라."

"고집은 여전하군."

"누굴 닮아서."

앞으로 한 걸음 나서는 천마.

그가 사용하는 외경의 방식은 군림의 법.

화무천과 같은 방식이기에 힘의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

한계를 초월한 천기자와 군림의 법으로 맞서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리였다.

가능성이 있다면 초대 천마부터 이어진 하나의 연결고리.

"소백. 그 몸은 분명 천마의 혈통을 잇고 있다. 그 아이가 네게 뒤를 맡겼다면, 마지막 책임도 질 수 있겠지?"

"그러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거니까."

"좋다. 우리가 길을 열지. 너는 네 천마신공을 이곳에서 완성해라."

"……천마신공을?"

"마는 마로 잡는다. 우리의 방식은 언제나 하나였다."

명한이 답 대신 웃음을 그렸다.

이야기의 마침표로 이보다 적당한 것도 없었다.

이것은 명한의 이야기이자, 소백의 이야기.

아버지 천마와 할아버지 화무천을 잇는 소백의 마침표.

"잊지 마라. 너는 천마의 혈통이다!"

"그 어떤 마(魔)도 우리 앞에 존재할 수는 없다!"

신호 따위는 필요 없었다.

천마와 화무천이 동시에 앞으로 달려나가 천기자의 기운에 맞섰다.

부정의 힘과 군림의 힘이 이치 밖에서 충돌하기 시작했다.

물 위로 기름이 번지듯……

주변 공간이 기묘한 형태로 일그러졌다.

‘이 너머로 닿는 힘.’

명한이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팡――!

거친 소리를 내며 튕겨 나오는 몸.

부정은 명한이 움직이는 인과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천마와 화무천이 그것을 군림의 법으로 누르고 있어도 마찬가지.

천기자의 집요함과 집착이 압도적이었다.

천 년에 걸쳐서 쌓아 올린 뒤틀린 감정.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하지만 보였어."

소매로 피를 닦아내며 명한이 다시 자세를 취했다.

바닥부터 하늘까지 천지간의 기운이 그를 통해서 호흡하기 시작했다.

작은 미물부터 눈앞에서 싸우고 있는 천마와 화무천.

사람들을 대피시키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은소소와 향아.

함께 싸워온 수많은 이들의 기운이 그 호흡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건 세상을 통한 호흡이었다.

"그래. 이게 내 천마신공."

애초에 파괴에 능한 성격조차 아니다.

인연과 인연을 엮어서 삶을 그리는 것이 업이었다.

쌓고 쌓아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군림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사필귀정(事必歸正)."

가장 단순하고 가장 정직한 방식.

세상이 몸 안으로 들어왔다.

감히 인간으로 견딜 수 없는 힘.

하지만 그건 가두려 하니까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흐름 속에 뛰어들어 그 방향을 옳게 이끄는 것에는 작은 조타 하나면 충분하다.

노도가 몸을 통로로 흘러갔다.

"또다시 날 부정하려는 것이냐!!"

천기자의 외마디 비명이 노도의 저편에서 들려왔다.

아무리 천 년간 쌓인 부정이 많다고 한들 세상 전체의 흐름과 비교하면 티끌에 불과하다.

작은 거품 따위, 쉼 없이 쏟아지는 물결에 쓸려나갈 뿐.

거인의 그림자가 차차 작아져 갔다.

"나는 널 지배했다! 내가 주인이었다! 헌데, 넌 어째서 나를 밀어내는 것이냐! 내 바람을 왜 거부하는 것이냐!! 세상이여, 이유를 말해라!!"

그 발악은 처절하고 비참했다.

애초에 지배한 적도 주인이었던 적도 없으니까.

그저 그렇게 느낀 초라한 남자 한 명의 발버둥이었을 뿐이다.

자신을 세상에서 유일하게 빛나게 만들어 주었던 한 사람에 대한 집착.

어리석음의 말로였다.

"대체 왜 나는 가질 수 없는 거지? 다른 자들은 숱하게 손에 넣는 건데. 그 작은 바람 하나조차 내게는 허락되지 않는 건가?"

모든 힘이 씻겨나간 뒤.

그곳에 남은 건 허리 굽은 꼽추 한 명뿐이었다.

세월을 감추지 못한 주름과 하얗게 새어버린 백발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천기자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뒤편에 군림하던 존재의 진짜 모습.

"답해라! 어째서 나는 가질 수 없는 것이냐!?"

발악과 같은 질문.

굳이 답을 하지 않아도 세상에 씻겨나갈 몸이었다.

하지만 끝을 맺었다면 마지막까지 응해주는 것이 저자의 역할.

명한은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유를 알지 못한 건가?"

"……너. 너는 아는 거냐? 왜 나는 안 되지? 어째서 나는 얻지 못하는 거냐? 그저 날 인정해준 한 사람을 바랐을 뿐이다."

"네 바람이 그에게는 고통이었다. 너는 그 현실에서 눈 돌리고 그에게 집착했을 뿐, 제대로 마주 보지 않았어."

"거짓말! 거짓말이야. 그는 내게 말했어. 내가 필요하다고. 세상 모든 이들이 내게서 등 돌릴 때 그만은 나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래서 그에게 불사를 주려고 했던 거야. 영원한 삶을 산다면 나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으니까."

쩍쩍 갈리지는 피부.

모래알처럼 무너지는 머리카락.

명한은 잠시 눈을 감고 천기의 흐름 속에서 한 사람을 불러왔다.

"삼(三)아."

"……!! 화, 황상!?"

"그래, 나다."

황제.

아니, 한때 황제였던 사람의 파편이었다.

"저, 저를 기억하십니까? 전 황상을 위해 모든 걸 다했습니다! 황상께서 불사의 육체를 얻어 만고토록 세상에 군림하도록……"

"내가 그걸 바란다고 말하였던가?"

"네?"

"네가 우리 모두를 속이지 않았더냐. 우리 중 누구도 불사의 법 따위는 바라지 않았어. 우리가 일군 땅이 대대손손 이어지기를 바랐을 뿐."

"그,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황상께서는 저게 말씀하셨습니다! 불사의 육체를 얻어서 너를 중이 쓰겠다고!"

"아니."

투두둑.

육체는 한계를 넘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최후의 동정이 잠시 스쳐 갔으나, 그건 죽어간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명한의 입이 차갑게 열렸다.

"나는 널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

모든 집착과 광기가 허무하게 무너졌다.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를 지탱하던 근간이 사라진 격.

세상 모두를 부정하고 단 한 명만 바라보던 천기자에게 이 말은 그 무엇보다 치명적이었다.

간신히 버티던 육체가 순식간에 먼지로 변해 가라앉았다.

바닥에 쌓인 한 줌의 먼지.

"사필귀정이라."

옳게 된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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