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
"함께 일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명한은 더없이 정중한 인사말을 받고 집에 돌아왔다.
소파에 풀썩 주저앉아 천장을 바라봤다.
오랫동안 바라던 소원 하나가 이루어진 기분이었다.
입가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어쩌면 이렇게 될 수도 있었다는 건가."
수많은 원인과 결과로 짜인 세상이라는 그물.
한 가닥의 선택, 한 줄의 꼬임으로도 전부가 바뀔 수 있다.
본래 가졌어야 할 미래라는 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명한은 머릿속에서도 그 생각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환상.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디를 가도 무엇을 봐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세상을 오시하던 무공도 운명을 좌우하던 능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소백으로 살았던 시간이 꿈같았다.
구운몽처럼.
한때, 잠깐 소백으로의 삶을 살다가 잠에서 깬 것만 같았다.
"꿈이라."
눈을 감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노곤하게 밀려오는 수마에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이대로 깨어난다면 다시 소백일까?
알지 못하고 알 수 없는 생각.
희미한 바람만 품은 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어찌 지나가는지 알지도 못할 만큼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계약을 끝낸 작품은 그야말로 폭풍적인 반응으로 성공.
일약 스타덤에 올라서 각종 상을 휩쓸었다.
드라마화와 영화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각종 예능에서도 섭외가 들어왔다.
그야말로 성공가도.
후회 없는 삶의 연속이었다.
"작가님, 작가님. 사인회 시간 다 됐어요."
"아, 벌써 그렇게 됐나? 사람은 많이 왔어요?"
"왔다 뿐이겠어요? 줄이 늘어져서 다들 몇 시간째 기다리고 있어요."
이젠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그를 알아봤다.
한때, 알아보는 이 하나 없어 쓸쓸하게 글을 끄적이던 것과는 대비되는 상황이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성공한 삶.
이제 과거는 잘 떠오르지도 않았다.
"저 진짜 작가님 팬이에요! 여기에 사인해 주세요!"
"고마워요. 항상 좋은 일만 있기를. 자, 다음 분."
"저, 저는 여기에 사인해 주세요."
"맨살에 사인하는 건 좀 곤란해요. 옷은 내리고 오시죠?"
예전 삶이 어떠했는지.
하루가 모자랄 만큼 빡빡한 일상을 살다 보면 더듬는 것조차 쉽지 않다.
가끔은 팬이라고 달라붙는 이들이 귀찮을 정도.
조금은 쉴까.
내뱉지 못한 속마음이 맴돌기도 했다.
"작가님, 얼굴이 많이 상하셨어요.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시나 봐요?"
"……음? 아, 네. 각국을 돌아다니다 보니 이래저래 잠이 부족해지죠."
"제게 좋은 약이 하나 있는데. 드실래요?"
"네? 하하. 죄송하지만, 사양할게요. 약은 가려서 먹는 편이라……"
"그래요? 정말 좋은 약인데. 이걸 먹으면 내공이 늘어날지도 모르는데."
"내공이요?"
"네. 기연이라서."
어느새 손안에 들어와 있는 금색의 단약.
코끝을 휘감는 짙은 약향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이런 약.
언젠가 과거에 먹어본 것 같기도 하다.
오래전에 다 잊었다고 생각한 꿈속의 기억.
귀의, 백약문, 금단……
"작가님!"
"……아?"
"이동하셔야죠."
사인회는 어느새 끝나 있었다.
잠깐 졸기라도 했던 걸까?
"어서요."
어딘가 묘한 느낌이었다.
#
어느새 인생도 2막에 돌입해 있었다.
팬이라고 따라다니던 친구와 결혼해서 애도 낳았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귀여운 딸이었다.
아빠, 아빠 하고 쫄랑쫄랑 따라다니는 모습을 보면 하루가 1분 같았다.
"그럼, 다음 작품은 달이 넘어갈 때 확인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겠네."
일도 여전히 승승장구였다.
작품은 꾸준히 사랑받고 후속으로 낸 것들도 인정을 받았다.
돈은 쌓이고 명성은 끝도 없이 올라갔다.
이제 기성작가 중에서는 어깨를 견줄 사람이 없었다.
"아빠! 아빠!"
"어이쿠, 우리 딸 왔어요?"
훌쩍 안아서 코끝을 맞대니 방울처럼 웃었다.
눈매며 입까지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쁠까?
소소? 향아?
"여보?"
"……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깜빡 졸기라도 했나?
안고 있던 딸아이는 이미 저만치 떨어져서 놀고 있다.
‘우리 딸 귀엽기도 하지.’ 잘게 웃으며 뛰어가는 아내는 뒷모습만이 보였다.
아내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었지?
조금 머리가 어지러웠다.
"작가님, 피곤하세요?"
그때, 슬그머니 다가와서 묻는 건 가정부 윤 씨.
큰 집을 다 관리하기 어려워서 고용한 여자였다.
항상 말없이 일만 하던 그녀가 오늘은 생각지도 못하게 말을 붙여왔다.
"일도 일이고 육아도 육아고. 이래저래 쉴 틈이 없네요."
"쉽지 않죠. 피곤함은 쌓이는데 풀 시간은 없으니."
"하하. 윤 씨가 뭘 좀 아네요."
"그럼 제가 도움이 될만한 책을 하나 소개해 드릴까요?"
"책이요?"
"네. 가이신공이라는 책인데, 피로 해소에는 최고라네요."
"……이름이 어딘가 좀 낯익군요."
어디선가 들어본. 어디선가 본듯한.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리운 이름.
이 책을 알고 있던 건가?
"아빠! 식사하세요!"
"응?"
"밥 다 됐잖아요. 식사하셔야죠."
어느새 이렇게 큰 걸까?
훌쩍 자란 딸아이가 싱그럽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손에 쥐었다 생각한 책은 없어진 지 오래.
"그래. 밥 먹어야지."
뻐근한 허리를 펴며 식탁으로 향했다.
#
어느새 머리가 희끗희끗해졌다.
튼튼하던 다리도 얇아져 오래 걸으면 무릎이 시큰했다.
오래 앉아서 일한 탓인지 허리도 만성 통증에 틈만 나면 손발이 저렸다.
하지만 그래도 인생은 행복했다.
하나 있던 딸아이는 좋은 집안의 바른 남자와 결혼해서 무탈하게 살고 있다.
작가로 받을 수 있는 상은 대부분 휩쓸고 제자로 양성한 이들의 명성 또한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는 중이다.
이룰 수 있는 건 대부분 이룬 삶.
후회도 안타까움도 찾기 어렵다.
"하부지. 하부지!"
"어이쿠. 욘석아 할아버지 수염 다 늘어나겠다."
"어머, 어머. 하윤이가 아버지를 너무 좋아한다."
"허허. 질투해도 하윤이는 못 넘긴다."
"헤에. 하부지 좋아!"
수염 잡고 맑게 웃는 손녀를 보자면 이게 행복인가 싶다.
이젠 한적한 시골로 터를 옮기고 소소하게 텃밭이나 키우며 노후를 즐길 셈이다.
글을 쓰는 것도 무언가를 구상하는 것도 버거운 일.
재롱이나 보며 말년을 보내면 된다.
그래, 그것뿐이다.
"이거, 하윤이가 또 장인어른 괴롭히고 있나 보군요."
"오. 자네 왔나?"
딸 사위가 코트를 벗으며 들어왔다.
어딘가의 좋은 학교를 나와서 좋은 직장에서 일한다고 들었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딸이 행복하니 그것으로 족했다.
"그간 별고 없으셨지요?"
"자네도 참. 며칠 전에 보지 않았나."
"아, 그랬나요? 저도 기억이 좀 깜빡깜빡하나 봅니다."
"나이도 젊은데 그러면 곤란하지. 일찍일찍 관리하고 그러게나. 필요하면 말하고. 이래 봬도 몸에 좋은 건 많이 가지고 있거든."
"하하. 그래야겠어요. 지난 명절에 받은 대환단도 아주 효과가 좋았어요."
"그래. 대환단……"
그런 물건이 있었나 싶어 의아하지만 대충 넘겼다.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아, 그보다 장인어른. 출판사에서 저한테 연락이 왔던데. 차기작은 이제 없는 건가요?"
"허어. 그 친구들도 참. 이제 좀 쉬면서 노후나 즐길까 했는데, 기어이 자네한테까지 연락한 건가?"
"그냥 전화 한 통이었을 뿐이에요. 글은 아예 놓으시는 건가요?"
"오래 썼지. 이제 좀 쉬어도 될 거 같아."
"그러시군요. 그럼 이 책은 필요 없겠네요. 차기작 준비하시면 도움이 될까 싶어서 사 왔거든요."
"책? 무슨 책?"
"요즘 잘 나가는 소설이라고 하던데."
사위가 포장도 안 된 책을 건넸다.
화려한 표지에 제목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기연을 독점하겠습니다? 무슨 제목이 이런가?"
"하하. 요즘은 다 그런 식이라네요. 읽어보실 건가요?"
"뭐, 심심풀이로 나쁘지는 않겠지."
첫 장을 잡고 천천히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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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잡은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책의 주인공은 소백이라는 남자.
천마의 아들로 태어나 천마궁이라는 곳에서 모진 고생 끝에 성공하는 이야기였다.
전형적인 성장 스토리로 몇 가지 반전을 제외하면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너무 눈에 익었다.
언젠가 한 번은 본듯한.
아니, 경험한 것 같은 착각에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천기자? 이 사람이 최종 보스인가?"
글은 어느새 종반부.
위기를 넘기며 힘을 키운 소백이 흑막과 싸우는 부분이었다.
수많은 동료들의 힘을 빌려서 천기자라는 악당과 맞서 싸우지만, 쉽지 않았다.
적은 천 년을 넘게 살아온 괴물.
하나둘 소중한 사람을 잃기 시작했다.
[……그동안 곁에서 모셔서 영광이었어요, 도련님]
평생을 함께해 온 시녀, 향아.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 다음에도 너와 함께하기를]
검을 맞대며 마음을 확인한 은소소.
[못난 사부를 용서해 다오]
[힘이 모자라서 미안해]
[젠장! 내 도는 여기까진가 보다!]
[그래도 너와 형제여서 기뻤다]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사부부터 형제들.
주변의 사람들이 한 명씩 쓰러져갔다.
그때마다 소백은 분노하고 슬퍼하고 좌절했다.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눈앞에서 스러져가고 있었기 때문.
"……눈물?"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명한이 흠칫했다.
다 늙어 감정이 퇴색되어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이 내용이 그렇게나 감동적이었을까?
아니면 죽어간 이들에게 이입을 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하부지! 책 그만 보고 하윤이랑 놀아요!"
"응? 하윤아, 할아버지 잠깐만 보고."
"하부지! 하부지! 하윤이랑 놀아요!"
책을 당기며 재촉하는 손녀.
몇 장 남지 않은 책을 끝까지 보고 싶지만, 손녀의 재촉을 뿌리치기도 힘들었다.
이대로 덮고 손녀의 재롱이나 볼까.
갈등이 파문처럼 가슴에서 번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백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 책의 한 문장이 눈길을 끌었다.
수많은 동료들이 죽어갔음에도 포기하지 않은 주인공 소백이었다.
온갖 고통과 좌절에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감에도 결국 일어섰다.
그건 삶에 대한 책임이었다.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에 대한 책임.
"……책임."
그 말이 무겁게 심장에 내려앉았다.
이건 행복한 일생을 살면서도 내려놓지 못한 무게였다.
다 잊고 모든 걸 떠나보냈음에도 결국에도 지고 간 짐.
가슴에 남은 삶에 대한 멍울이었다.
무엇으로도 이건 없앨 수 없다.
명한이 펜을 쥐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열었다.
[ ]
공란으로 남아 있는 그의 마지막.
무너진 댐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듯 일필휘지로 글을 써 내려 갔다.
손녀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딸의 얼굴이 희미해지고 아내의 체취가 점차 지워져 갔다.
하지만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건 책임이었으니까.
살아온 삶에 대한 책임.
마무리 짓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 되어야 한다.
[……이를 본 황제가 말하기를 이러했다]
"옳다. 네가 삶의 주인이구나."
[이에 명한은 환하게 웃었다]
그래.
이제 마침표였다.